대만의 여름 안에서, 전쟁과 인터아시아를 생각하다 (이지행)
- 칼럼
- 2025. 8. 25.
이 글은 지난 7월 14일부터 21일까지 타이완 국립정치대학에서 열린 IACS 써머스쿨에 강연자로 초대받아, 짧은 일정 동안 타이베이에서 느낀 개인적 소회를 정리한 것이다.
IACS(Inter-Asia Cultural Studies)는 타이완대학시스템(UST)에 속한 4개 대학, 즉 국립양명교통대학, 국립칭화대학, 국립중앙대학, 국립정치대학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인터내셔널 문화연구 석사프로그램을 말한다. 학생 모집은 이들 4개 대학이 각각 독립적으로 수행하지만, 일단 IACS에 입학한 뒤에 학생들은 통합된 대학 간 커리큘럼을 이수하게 된다. 써머스쿨은 1, 2학기에 더해 추가적으로 운영되는 정규 커리큘럼 과정 중 하나이며, 올해는 나와 호주 플린더스 대학의 교원 한 분이 해외 강연자로 초빙되었다.
나는 이번 써머 스쿨 주제 중 하나인 <인터아시아 대중문화> 세션에서 “트랜스내셔널 한류 팬덤”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지금이야 ‘신한류’ 또는 ‘K-컬처’로 명명되며 글로벌한 파급력을 보이고 있지만, 초창기 한류는 중국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에서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한국 드라마는 동남아시아, 중동, 남미 등지에서 열렬한 시청자를 확보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K-팝의 인기가 가세하면서 오늘날에는 서구로까지 확산되는 수순을 밟았다. 말 그대로 아시아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 붐이 세계로 흘러들어간 현상, 즉 한류(韓流)인 것이다.
“트랜스내셔널 한류 팬덤”의 ‘트랜스내셔널’은 일반적으로 국경을 넘는 다양한 현상과 행위 수행의 차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종종 글로벌과 동의어로 사용되고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트랜스내셔널 개념은 자본과 노동의 이동이 시작된 세계화(globalization)에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와 옹(Aihwa Ong)과 같은 학자들은 유의미한 트랜스내셔널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트랜스’를 횡단과 번역, 전유와 과정, 위반의 의미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한가지 중요한 것은, 트랜스내셔널의 ‘내셔널’ 역시 충분히 문제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트랜스내셔널이 일상화된 세계에서도 국가-민족에 근거한 오래된 정치적 상상은 여전히 굳건하며,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핵심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류 팬덤의 트랜스내셔널한 성격을 설명하는 강의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비록 트랜스내셔널 개념이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영향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일국적인 국가-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실천을 통해 포착되는 비본질적이고 구성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정 중에 일어나는 다양한 종류의 횡단적 실천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이러한 실천 과정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내셔널’의 문제들, 즉 한류의 문화제국주의적 측면과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아시아에서의 백래시, 그리고 동북아에서 역사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팬덤의 민족주의적 충돌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했다. 강연이 끝나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판다 익스프레스(미국식 중국요리 체인)를 문화적 혼종성의 사례로 볼 수 있는지에서부터, 아카-팬(Aca-fan, 팬이자 연구자)인 나의 케이팝 입문기를 궁금해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학생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만의 여름은 피부가 익을 듯 뜨겁고 또 습했다. 호텔에서 나와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는 잠깐 사이 살이 익을 듯한 햇빛 공격에 꺼내 쓰던 양산은, 불과 몇 분 후 쏟아지는 장대비를 막아주는 우산이 되기도 했다. 강연을 마치고 해가 잦아든 저녁 무렵 찾아 간 곳은, 중산에 있는 SPOT이라는 시네마테크 체인이었다. 이 곳에서 본 다큐멘터리 영화 <보이지 않는 나라 Invisible Nation>는 대만의 첫 여성 총통인 독립 성향의 차이잉원 을 밀착 취재한 작품이다. 중국의 압박 때문에 (한국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나라들과 강제로 국교가 끊겨가고 있는 나라. 국제 스포츠 대회에는 ‘대만’이나 ‘중화민국’ 대신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하며, 메달을 따 단상에 올라도 국가 대신 IOC 노래가 연주되는 나라. 언제라도 중국이 무력 침공할 수 있음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나라.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대만의 국가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을 법제화해 인권과 다양성에 있어 글로벌 스탠더드를 준수하는 나라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신남향정책’(아세안 등 동남아 국가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정책)을 통해 우방을 늘리는 등, 영화는 자국이 처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주권을 잃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대만의 노력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차이잉원 총통이 2016년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가 한국 방송에서 대만 국기를 흔들었다는 이유로 중국 내 여론과 시장의 압박 속에 공개 사과 영상을 올려야 했던 일을 회고하며 “마치 인질 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그 몇 초의 화면은 글로벌 문화산업의 공급망과 중국 시장의 정치경제가 한 개인의 시민적 정체성과 표현을 어떻게 규율하는지, 그리고 ‘대만’이라는 이름을 말하는 행위 자체가 어떤 정동적 비용을 수반하는지 압축해 보여준다. 나는 영화 속 그 장면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고, 이번 써머스쿨 강연에서 이 사건을 충분히 다루지 않았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기업의 리스크 관리, 광고주와 시장의 이해관계가 팬덤의 감정을 매개해 외교 및 안보의 변수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더 세밀하게 분석했어야 했고, 대만과 한국의 인터아시아적 관계에 대해 성찰했어야 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대만 청년층에게 굴욕과 분노의 감정을 촉발시키며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일상적 소비문화의 장에서 다시 쓰게 만들었다.

이 장면과 더불어 영화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2010년대에 탈중국 세력이 대만 정치의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게 한 전환기적 사건이었던 해바라기 운동에서도 알 수 있듯, 역대 최고라는 대만 젊은 세대들의 독립 성향과 그들의 정치 참여였다. 내가 대만을 방문한 7월에는 친중 성향의 국민당 의원 24명에 대한 국민소환 투표를 앞두고, ‘대(大)파면(great recall)’ 캠페인이 한창이었다. 국민당은 민진당 출신 총통 라이칭더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정부 예산안 반대, 예산 삭감 등을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이에 민진당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는 국민당 의원들이 중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며 '대파면' 캠페인을 시작했다. 일견 집권 여당과 야당의 힘겨루기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이 파면 캠페인은 독립 vs 친중을 둘러싼 체제 정당성 경쟁에 가까웠다. 젊은 세대들은 대파면 캠페인의 중요한 핵심 세력이었다. 체감온도가 37도를 넘어가는 한낮의 거리에서, 캠페인 거리 선전전에 나선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대만의 여름을 몇일 지내며 깨달은 것은, 젊은 세대의 독립 성향과 반중 정서, 높아진 정치참여가 단지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 몸으로 학습된 위기감이라는 점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지하철을 타려고 나갈 때, 마침 공습 경보 대비훈련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잠시 우왕좌왕하던 나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 종업원들은 조용하지만 신속하게 창을 내리고 조명을 껐다. 어두워진 카페에서 손님들은 당황하지 않고 말소리를 줄였다. 그 순간 ‘전쟁의 가능성’은 현재형으로 호출되었고, 나는 한국의 민방위와는 다른, 예외를 일상으로 훈련하는 사회의 정동을 배웠다. 그래서 이곳의 정치는 주권의 선택 이전에 두려움과 존엄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로 다가온다. 대만의 평온은 우연이 아니라 준비의 다른 이름이며, 바로 그 준비의 감각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민주주의의 정동적 토대임을, 햇빛이 쏟아지는 한낮의 어둡고 조용한 카페에서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이지행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기술 변화에 따른 동시대 대중문화 콘텐츠와 수용자 속성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 영화, 팬덤, 파국 감정 연구를 진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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