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없는 ‘음’과 ‘파’의 자리 바꿈

임계(臨界)와 음계(音階)

 

“우리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유머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소설가가 가장 좋아한다던 로베르토 볼라뇨(Roberto Bolaño)의 이 문장은, 한동안 그리고 여전히 미치기 직전마다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이 문장을 떠올렸고, 이제는 이 문장이 떠오릅니다. 유머 비슷한 것을 주워 삼키거나 내뱉을 때, 내가 지금 미치기 직전인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볼라뇨의 문장으로 인해 괜히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되었고, 이제는 볼라뇨의 문장과 함께 떠오르는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도’를 지나쳐 ‘미’치기 직전, 나(너)는 ‘레’”라는 너스레입니다. 여기에서 계이름 ‘레’는 ‘도’에서 ‘미’를 향하는 정동적 전이의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로서 도입되어 있고, 이 상태는 사실상 동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볼라뇨가 이러한 ‘레’의 유머를 알았을 리는 없습니다. 이런 식의 유머가 볼라뇨를 미치지 않게 하는 그것이었을지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다들 ‘레’의 동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 동태를 정태 안에 가두기 위해, ‘미’치고 ‘파’의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 미치도록 애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레’는 외부의 자극과 스스로의 억압이라는 힘-관계가 생산한 가상이라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도’, ‘레’, ‘미’, ‘파’는 누구나 알고 있는 계이름입니다. 이 계이름을 익히기 위한 노래로서 이른바 ‘도레미 송’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에서 주인공 마리아가 폰 트랩 대령의 일곱 남매들과 함께 불러 유명해졌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이들을 어울림의 세계로 불러내기 위한 계기로서 주어져 있었고, ‘도레미 송’은 이들을 불러내는 신호음이었던 셈입니다. 이 신호음과 함께 일곱 남매들은 커튼으로 표상되는 가부장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이를 옷으로 바꾸어 입게 되는데요, 이는 이들이 비로소 순종적 주체로서 ‘도’의 자리를 벗어나, ‘레’의 상태를, 아니 동태를 몸에 입게 된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음계(音階)와 음파(音波)

 

그런데 왜 하필 ‘일곱’ 남매였을까요. 이들은 음악 그 자체로서 잠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일곱 남매는 음악을 생성하기 위한 ‘칠음계’로서 주어져 있습니다.

 

‘음계(音階)’의 음악적 질서는 수리적 질서에 다름 아닙니다.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음악과 수학–헬라스–아프로디테]에서 호메로스의 문학,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배후에 놓인 정연한 수리적 질서로서의 수학을 포착해내고 있습니다.[각주:1] 이 포착과 함께 키틀러는 또한 음계의 고안자로서 수학자 피타고라스를 주목합니다. 피타고라스는 음악과 수의 비례 관계를 발견하여 음정의 개념을 확립했습니다. 음정의 개념으로부터 음향학이 출발합니다. 피타고라스의 이후에도 여러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진동과 음향에 대해 연구하고, 소리의 높낮이와 진동수의 관계 등을 밝힘으로써 음악과 음향 이론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질서정연한 음계가 만들어집니다. 음계를 이루는 각각의 음에는 고유한 이름이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도, 레, 미, 파, 솔, 라, 시’라는 계이름은, 1035년경, 귀도 다렛쪼(Guido d’Arezzo)에 의해 창안되었습니다. 다렛쪼는 <성 요한 찬미가(Ut queant laxis)>의 멜로디에 나타나는 헥사코드의 각 음을, 바로 그 음에 해당하는 가사의 음절로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 곡의 가사는 라틴어로 쓰여 있는데요, 1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Ut Queant laxis (웃 꿰안뜨 락시스 : 당신의 종들이)
Resonare fibris (레소나레 피브리스 : 자유로이 찬양할 수 있도록)
Mira gestorum (미라 제스또룸 : 기적을 행하시는)
Famuli tuorum (파물리 뚜오룸 : 당신의 역사로써)
Solve polluti (솔베 뽈루띠 : 정결케 하소서 모든 흠을)
Labii reatum’ (라비이 레아뚬 : 그들의 더러운 입술로부터)
Sancte Joannes. (상떼 요안네스 : 성 요한이여)

 

이 노래의 가사는 “주님, 당신의 종들이 당신이 행하신 기적을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도록 그들의 더럽혀진 입술로부터 모든 죄악의 더러움을 씻어 주소서.”라는 말로 정리됩니다. 이 가사로부터 연원한 ‘우트(Ut),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로 이어지는 음계에서 ‘우트(Ut)’는 16세기경부터 ‘도(Do)’로 바뀌게 됩니다. 모든 음의 첫 음을 주님(Dominus)의 첫 글자를 따서 불렀기 때문입니다. 17세기경에는 제7음의 계이름으로 ‘S+J’가 도입되고, 이것이 다시 ‘S+I’로 바뀌면서 음계에 ‘시(Si)’가 추가되어 오늘날과 같은 칠음계의 이름이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계이름은 기수적(kardinal)이며 서수적(ordinal)입니다. 할당된 이름과 더불어, 값과 자리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음이 값과 자리, 그리고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값도, 자리도, 이름도 갖고 있지 못한 음, 그것은 어떻게 인지될 수 있을까요. 이름 없는 그것은 ‘음(音)’이 아니라 ‘음(吟)’이라 부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읊음’ 또는 ‘끙끙 앓음’의 뜻을 지닌 ‘음(吟)’은 신체화한 비기호적 인지입니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다양한 ‘음(吟)’을 내고 있습니다만, 삼켜지지도, 뱉어지지도 못한 이러한 ‘음(吟)’은 입에도, 목에도 그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누구에게도 쉽게 포착되지 않습니다. 수리적 질서 안에도 배치되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수량화하거나,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음(吟)-파(波)의 세계, ‘음계(吟界)’

 

수학은 나라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통용되는 보편의 언어입니다. 수학에 대한 흥미로운 인문학적 통찰을 보여준 모리타 마사오(森田眞生)의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사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1995년 MIT에서는 다랑어 로봇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다랑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서 흑다랑어는 최대 시속이 80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다랑어의 놀랄 만한 영법(泳法)의 비밀을 해명함으로써 잠수함과 배를 설계하고자 할 때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였고,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가설이 부상했다.

다랑어는 자신의 꼬리 주위에 크고 작은 소용돌이와 수압차를 만들어내어 물 흐름의 변화를 활용해서 추진력을 얻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이었다. 일반적으로 배와 잠수함에서 해수는 어디까지나 극복해야 할 장애물일 터인데, 다랑어는 주위의 물을 헤엄치는 행위를 실현하기 위한 자원으로 적극 활용한다는 것이다. (…) 다랑어에게 주위의 물 흐름은 운동을 위한 자원이지 장애가 아니다.”[각주:2]

 

모리타 마사오가 주목한 ‘물 흐름’은 인지의 조건이자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지는 신체와 환경 사이를 오가는 프로세스입니다. 이 프로세스는 다랑어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이 프로세스, 즉 (물) 흐름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파(波)’입니다. ‘파(波)’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입니다. 객관화하기보다 신체화하는 것, 즉 대상화하기보다 그것과 하나가 되는 방향 속에서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나고(부딪히고), 섞이고(뒤얽히고), 서로가 서로를 엮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생성의 과정 그 자체가 바로 ‘파(波)’입니다. 파가 생성하는 것은 ‘흐름’과 일체화될 때의 감각으로서, 이 감각은 현재 진행 중인 상호 연결 속에서 완전한 몰입과 체득으로 이끕니다. 일찍이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소나무에 대해서는 소나무에게 배우라”하고, “배운다는 것은 사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랩의 일곱 남매들이 각각 하나의 음표로서 음악과 일체화된 채로 음악을 배웠다는 사실은 바쇼의 통찰에 대한 영화적 증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러한 성장서사에는 ‘파(波)’의 프로세스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목소리로 표현했던 ‘음-악’은 전쟁과 망명 체험을 온몸으로 끙끙 앓는 ‘신-음’이기도 했습니다. 폰 트랩과 그의 자녀들은 가정에 고립되어 있었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격리는 단절된 몸의 문제, 몸과 연결된 마음의 문제입니다. 격리의 문제는 ‘나(ego)’에 나의 마음을 가둬둔다는 데 있습니다. 좁은 곳에 갇혀 있던 마음을 훨씬 넓은 장소에 풀어놓으려는 시도, 이 시도를 통해 비로서 ‘파(波)’가 생성됩니다.

 

폰 트랩 대령의 가족이 부른 <에델바이스>는 물질적 자연으로서의 흙 위에, 그리고 나치 독일의 점령을 앞둔 오스트리아라는 사회적 조건 위에서 피어오른 꽃입니다. 이 꽃은 ‘음(吟)’에서 ‘음(音)’으로, 다시 ‘음(音)’에서 ‘음(吟)’으로의 자리 바꿈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지는 ‘파(波)’의 멜로디와 함께 피어납니다. ‘파’의 멜로디가 흐르는 곳, 그러니까 마음을 풀어놓은 넓은 장소를 우리는 ‘환경’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흙과 꽃이 있는,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이의 풀밭을 ‘환경’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올려 봅니다. 환경은 자연이고, 또한 사회입니다. 자연이자 사회로서의 환경은 배경과 다릅니다. 환경은 신체에 연결된 또 하나의 신체입니다. 환경이라는 “핏기 없는” “차가운” 단어로부터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신체성을 되살려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각주:3] 환경은 어디까지나 살된 존재(fleshy beings)로서의 세계입니다.

 

신체는 환경을 체내로 들입니다. 흙과 꽃이 보여주듯, 환경은 신체를 구성하는 또 다른 신체입니다. 신체는 환경이 투과 가능한 장소인 것입니다.[각주:4] 신체와 환경은 긴 세월에 걸쳐서 서로 사귀고 겨루어서 균형을 이루어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투과가 가져온 가능성과 위험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진단을 내놓고 있습니다. 몸이 사회적으로, 또한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익숙한 주장을 비웃듯, 몸의 생물학적 소여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 소여로부터 ‘음(吟)’이 나타납니다. ‘음(吟)’은 특수한 개개의 신체가 타자의 신체에 동기화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음(吟)’은 존재로부터의 발생된 존재에 대한 전율입니다. 그 정동적 떨림이 ‘파(波)’를 이룹니다. 그 떨림은 신체들을 넘나들며 감싸 안는 거대한 힘으로 회오리치듯 격화됩니다.

 

웹진 <젠더·어펙트>의 물갈래

‘파(Fa)’가 ‘음계(音階)’의 부분이라면, ‘파(波)’는 상호 의존하는 ‘음(吟)’의 네트워크, 이른바 ‘음(吟)’의 생태계’로서의 ‘음계(吟界)’라는 총체입니다. 총체로서의 물결(波)은 다시 물갈래(派)로 분기됩니다. 웹진 <젠더·어펙트>는 다섯 물갈래를 마련했습니다. [기획]은 젠더·어펙트연구소가 독자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하는 주제를 통해 깊이 있게 접근해 가는 섹션입니다. 창간호의 주제 ‘코로나 바이러스와 지역-정동’은 그리 어렵지 않게 결정되었습니다.

 

사실, 이 웹진이 가동되기 시작한 것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었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접촉의 제한을 접속으로 돌파해보려는 의지가 이 웹진을 가동시켰던 것입니다. 웹진을 가동하면서 근현대 한국 잡지들의 창간사를 일별해보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웹진 <젠더·어펙트>가 각종 창간사들에 담긴 원대한 포부와 이로부터 말미암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반딧불이의 빛만큼이나 작은 소리들, 그러니까 ‘음(吟)’에 귀기울이는 데 주력하고자 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음(吟)’은 오늘날 지역에서 조금 더 뚜렷하게 발신되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서의 지역이란 중심의 상대 개념이기도 하며, 또한 특정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의 극장, 병원, 그리고 강의실에서는 한 시기를 획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따라서 그러한 변화의 성격을 해명하는 문제와 그동안 산적한 채 해소되지 않았던 문제를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급박한 과제로 제기되었습니다. 이 과제에 따라 코로나 시대의 문제적 상황을 검토하고 ‘돌봄 관계’가 회복된 코로나 이후의 미래를 모색하기 위해 좌담과 원고들을 준비하였습니다.

 

[리뷰]는 공모전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콜로키움’을 지상 게재합니다. 젠더·어펙트연구소는 열린 학교로서 젠더·어펙트 스쿨을 통해 콜로키움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리뷰 공모전은 젠더·어펙트 스쿨의 참가자들과 함께 하며, 또한 시민들에게도 열려 있는 ‘글 나눔’의 자리입니다. 이번에는 정희진 선생님과 그 나눔을 함께 했습니다. 제출된 리뷰와 정희진 선생님의 화답 곳곳에서 절절한 ‘음(吟)’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칼럼>은 이 모든 진담들에 덧붙여진 농담입니다. <번역>과 <이슈> 섹션은 여전히 준비 중에 있습니다. 창간호이자 사실상 창간 준비호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첫 시도는 아주 매끈한 흐름으로 귀결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웹진 <젠더·어펙트>는 불편함을 동반하는 걸리적거림으로써 ‘파(波/派)’를 드러내보이고자 합니다. 우리는 앎의 언어 대신 온몸의 실감이 담긴 앓음의 (비)언어들과 뒤얽혀 함께 앓고자 합니다.

 

 


권 두 현

웹진 <젠더·어펙트> 편집위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미디어와 한국 현대문학/문화의 관계, 특히 한국과 일본의 드라마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테크놀로지와 정동의 문제틀을 적용시킨 연구들을 주로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접속사와 같은 존재-되기를 모색하고 있다.

 


  1. 프리드리히 키틀러, 박언영 역, [음악과 수학 - 제1부 헬라스 제1권 아프로디테], 매미, 2019. [본문으로]
  2. 모리타 마사오, 박동섭 역, [수학하는 신체], 에듀니티, 2020, 50쪽. [본문으로]

  3. 그리고 환경이라는 단어. 이 핏기 없는 단어. 졸아든 가슴으로 발을 질질 끌며 걷는 단어. 자연 세계와 맺는 관계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고 있는 단어. 도시 계획가, 산업가, 경제학자, 개발자가 사용하는 이 단어. 이것은 진정 상실된 단어다. 기계론적이고, 자연에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차가움에 기이하게 잘 어울리는 차가운 단어.” Joy Williams, Ill Nature, New York: Vintage, 2002; 스테이시 앨러이모, [, , :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김종갑 역, 그린비, 2018. 16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 이제 우리가 이해하듯이 환경은 끝이 없는 파동으로 우리를 직접 관통하고 있다. 만일 우리 자신을 완벽한 저속촬영 마이크로 비디오로 관찰한다면, 우리는 대사물질들을 몸 바깥으로 흘려보내고, 배설하고, 내뱉는 과정만큼이나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수분, 공기, 영양물, 미생물들, 그리고 독성물질들을 보게 될 것이다.” Harold Fromm, “The ‘Environment’ Is Us”, Electronic Book Review, January 1, 1997, p.2.; 스테이시 앨러이모, 위의 책. 41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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