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해한 세계에 덧붙이는 개성적 주석: 정동적 읽기-쓰기의 양상들

불가해한 세계에 덧붙이는 개성적 주석

: 정동적 읽기-쓰기의 양상들

 

 

 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의 영화가 어느덧 ‘옛날’ 영화라고 통칭되는 오늘이지만, 그 명명이 주는 섭섭함과 애틋함, 이상스런 마음들은 저마다 다른 질감으로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그때의 멋지고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던 영화들은 누군가에게는 세월을 무화시키는 수작으로, 누군가에게는 낯 뜨거운 촌스러움으로, 또 다른 이들에게는 계속해서 비평을 덧붙일 수 있는 의미심장한 텍스트로 남겨져 있을 듯하다. 내게는 〈제리 맥과이어〉(1996)가 이 세 가지 느낌들이 어우러진 영화로 떠오른다. 물질적 가치와 관계의 소중함을 대립시키고 주인공 제리의 ‘인간다움’으로부터 우리 삶을 재정립하게 하는 영화의 내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시창’의 쓰라림을 다소간 잊을 수 있게 하는 풍부하고 역동적인 감정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제는 중년에 접어든 탐 크루즈와 르네 젤위거의 풋풋함이 더해져 이 영화는 시간이 흐르는 대로 새로이 덧대어지는 매력을 얼마간 갖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이러한 서사를 가능케 하는 젠더화의 역학에서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우리의 냉소적인 위치를 분명히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남성/여성 인물의 이분법적 역할이나 거기 연동된 스토리라인의 문제보다는 이 영화가 세월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는’ 특정한 관계의 형식을 상정하고 환기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성공과 비즈니스, 야망과 우정, 사랑 따위의 곡절을 돌고 돌아 제리가 연인 도로시에게 최종적으로 전하는 말인 “you complete me”는 애정의 강도를 수사하는 많은 표현들 중에서도 새롭고 독특하며 압도적이다.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별도 달도 따줄 수 있다는 언약,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려보게 하고 그것을 뺀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식의 온 우주를 바치는 어떤 메시지들보다도, ‘나’를 채워주고 ‘나’를 완전하게 해주는 ‘너’를 호명하고 있는 이 대사는 끝 간 데 없는 달달함 이면에 자리한 폭력의 징후를 노출하고 있다.

 

 연인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표명하는 남성 인물의 이 손색없는 말은 사실상 듣는 이의 타자성에 철저히 기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너’의 자율적 사랑을 간절히 갈구하는 ‘나’의 호소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존재 가치가 ‘너’의 의사와 무관하게, ‘너’ 없이도 ‘너’에게 의존해있음을 확언하는 이 강력한 언술은 이러한 관계의 완전함이 정향되어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어디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이러한 기술은 〈다크 나이트〉(2008)에서 오마주되기도 했다. 희대의 악당 조커가 배트맨에게 꼭 같이 전하는 이 말은 양자의 정체성이 기대고 있는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를 전면화하는 동시에 배트맨 자신 또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아이러니를 성찰하게 하는 화두이다. 그런 점에서 조커의 프로포즈는 제리의 그것과 비교해 관계의 규정력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놓을 수 있게 하는 다소간의 거리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조커와 제리의 공통 속성인 무구함과 달달함, 그리고 ‘완전함’의 욕망은 계속해서 문제적 대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제리의 마음을 받아들인 도로시의 정동은 물론, 제리의 ‘완전함’에 대한 인식을 다시 보게 만드는 두 가지 참조가 있다.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후마니타스, 2021)은 퀴어의 ‘불행’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공인된 ‘행복’의 의미와 그것이 관계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정동 공동체를 비판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나는 단지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라는 말은 ‘나’의 행복이 곧 ‘너’의 행복에 달려 있으며, ‘너’의 ‘행복하지 않음’의 상태는 ‘나’에게 귀속되는 것이므로, 결국 ‘너’의 행불행의 ‘고유함’은 ‘나’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아메드의 분석대로, 우리는 “I just want you to be happy”라는 표현 뒤에 언제나 ‘but’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 말은 “그것이 무관심하다고 상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행복의 약속』, 171쪽.)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처럼 대상이 ‘나’를 향한 원인이 되어 있는 관계의 구조에는 언제나 애정을 가장한 위력이 존재한다. 타자화의 폭력뿐만 아니라 대상을 ‘결여’한 주체의 불완전함으로 유지되는 이러한 인식체계는 상실감과 우울의 지속 속에서도 빼도 박도 못하는 결속을 생산한다. 제리의 간절한 고백은 ‘나’의 완성과 행복을 보장하는 ‘너’의 존재 명명으로부터 결코 ‘손상되지 않는’ (완전한) 관계의 가치를 상정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양쪽 모두의 잠재적 역능이 외면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여기서 레비 브라이언트의 『객체들의 민주주의』(갈무리, 2021)를 관계에 대한 고찰의 또 다른 참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객체들의 민주주의』는 주체에 ‘대하여’ 존재해온 객체, 타자성 논의들을 현대 철학의 계보와 특질을 바탕으로 점검하고 ‘객체지향 철학과 존재자론’을 주창한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귀결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마주침의 고유한 속성과 이미 모든 객체들에 주어져 있는 ‘완전함’에 대한 것이다. 객체들 간의 관계는 스스로를 ‘차이기관’으로 만드는 국소적 표현을 생성하며, 그러한 국소적 표현(들)은 객체의 고유한 역능을 현시하는 것이거나 그 역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마주침이라는 ‘교란’, ‘소통적 사건’에 열려있고, 차이를 차이로 연결하는 이러한 역동 속에서 관계란 ‘번역’의 다른 말이다. 따라서 타자의 자리는 상정되지 않으며, 객체의 ‘존재함’ 자체로 ‘완전함’이 입증되는, “기묘한 낯선 존재들의 민주주의”(『객체들의 민주주의』, 380쪽.)의 원리가 도출된다.

 

 제리의 애정어린 말은 누군가를, 무언가를 주체 안에 접어 넣는 방식이 아닌, 불완전함이나 위협의 지평에서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아닌, 다른 내용과 형식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아메드가 역설하는 ‘불행의 아카이브’와 브라이언트가 의미화하는 ‘다른 것’이 되는 ‘번역’ 행위는 이미 존재에 주어져 있는 화산성의 역능과 완전함을 대상-원인 없이도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비평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인 마주침을 교란과 사건으로 다시 보는 이러한 ‘정동적 읽기-쓰기’의 실천은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개성적인 주석이자 매번 새로운 연결의 원리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연인 간의 사랑을 확인케 하는 최상의 표현으로 명대사의 반열에 올라있는 “you complete me”라는 말은 총체성을 향해 폭주하는 주체의 자리를 촉구하고 있을 뿐이다.

 

 정동적 읽기-쓰기의 관점과 비평 행위가 텍스트 해석이나 생산의 층위에 국한되지 않는 이유는 그 궁극적 목적이 이미 결집되어 있고 정향되어 있는 정동을 느슨하게 펼치고 다시 교차하게 하는 운동성을 드러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하나의 영화, 한 마디의 말에서 출발했지만 그로부터 새로이 연결될 수 있는 다른 이야기들, 다양하게 뻗어 나가는 행위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과거에 긍정된 텍스트를 ‘클래식’이 아닌 ‘구식’으로 단순 비판하는 것보다 어려운 작업임이 분명하다. 정동적 읽기-쓰기에 기반한 기록들로 채워져 있는 웹진 〈젠더·어펙트〉 3호를 에두르면서 이러한 정동적 읽기-쓰기의 운동성을 조금이라도 드러낼 수 있다면 독자를 향한 관계 맺기의 방식이 어느 정도 성공하는 셈이다.

 

 

조해진 작가와의 대담 〈‘연결’의 행복〉  

 

 작년 9월, 부산 원도심 문화회복프로젝트 〈OPEN THE DOOR, OPEN THE ARTS〉의 기획 행사에 젠더·어펙트연구소가 초대되는 뜻 깊은 일이 있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고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이 주최한 이 프로젝트는 무엇보다 〈회복하는 글쓰기〉, 〈생활예술모임 곳간〉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동적 읽기-쓰기를 지속해온 모임 공간을 지원받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글쓰기를 지속해온 작가 조해진과 웹진 〈젠더·어펙트〉 편집위원들이 함께 한 이 대담은 “‘연결’의 행복”이라는 주제를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는 자리였다. 웹진 〈젠더·어펙트〉 3호의 〈기획〉란에는 조해진의 소설을 읽고 쓰고 만났던 그때의 경험에 말들과 느낌들이 덧대어진 원고들이 수록되었다. 새로이 붙여진 살은 작가와 시민들, 젠더·어펙트연구소가 함께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부산 중앙동의 정동적 공간을 웹진 공간에 다시금 불러들인다. 글을 읽을 많은 독자들도 저마다의 ‘회복’의 시공간에 재차, 새롭게 접속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정동적 읽기-쓰기의 실천은 〈리뷰〉란에도 이어진다. 젠더·어펙트연구소는 교육부·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연결신체 이론과 젠더·어펙트 연구”를 주제로 한 다년간의 연구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얼마 전 1차년도 연구 성과를 집약한 학술총서 『약속과 예측: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산지니, 2020)가 발간되었다. 지난 3월에는 전문 서평단의 서평을 토대로 한 온라인 서평회가 개최되어 저자와 서평자는 물론 많은 학생·연구자들이 접속해 인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정동적 관점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3호의 〈리뷰〉란에 이 서평들이 게재되었다. 서평자 김예란, 박현선, 오혜진, 채효정은 한국이라는 정치체에 내재된 윤리적-미학적 담론을 견인해온 연구자들로 『약속과 예측』에 담긴 다양한 논의들과 그 다종한 위치들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부산이라는 현장과 온라인을 통해 매개된 말들의 자리는 읽기와 쓰기를 교차하면서 생성하는 새로운 몸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몸들의 ‘되기’의 문제는 김은주의 연재글에서 구체화되어 있다. 들뢰즈 철학과 여성주의 윤리를 논구해온 김은주에 따라 일련의 SF 작품을 젠더·어펙트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이번 연재 기획은 “‘되기’로 다시 보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쇼리』, 김초엽의 「로라」는 환원불가능한 몸들의 역능을 타진하면서 실재하는 수많은 ‘쇼리’들, ‘로라’들과의 만남을 촉구하고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몸은 김비의 연재소설 『강철과 이슬의 집』에 등장하는 ‘성애’의 몸이기도 하다. 〈기획〉란에 수록된 3회차 연재분에는 성애의 불안과 ‘움켜쥠’의 감각이 읽는 이를 바짝 조여온다.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이행하고 변용되는 존재로, 그리고 불안과 위기가 투과되는 몸들로 언제나 연결 (불)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부여잡고 고민할 수밖에 없으며, 김비의 소설은 바로 그것을 겨냥하고 있다.

 

 정동적 읽기-쓰기는 비단 사전적 의미의 ‘읽기’와 ‘쓰기’에 대응하는 행위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3호의 〈이슈〉란에는 ‘쓰지 않음’으로써 다시 쓰는 작가적 실천 행위가 다루어졌다. 최근 몇 년간 역동적으로 전개되어 온, 한국문학/문단 시스템과 기존 문학공동체의 속성을 재고하려는 비판적 ‘쓰기’들과 견주어 윤이형의 ‘절필’은 ‘하지 않는 몸’으로 ‘하는 몸’을 만들어낸 행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근작 『붕대 감기』에서도 드러나는 이러한 몸적 실천은 강희정 문학평론가의 예리한 시선을 통해 망라된다. 갓 등단한 젊은 평론가의 에너지 넘치는 행보를 많은 독자들이 함께 지켜봐주기를 청한다.

 

 ‘읽기’와 ‘쓰기’를 새롭게 하는 행위의 최전선에 번역가의 자리가 놓인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3호의 〈번역〉란에는 얀 슬라비와 라이너 뮐호프가 함께 쓰고 편집한 『Affective Societies』 가운데 2장 「Affect」의 후반부가 수록되었다. 이 시대의 정동 분석을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이 글은 은혜 번역가의 사려깊은 읽기-쓰기를 통해 빛을 발하고 있다. 세계와 관계의 구조를 다시 짜기 위한 동력은 번역이라는 사회적 지식 창출 행위에 의해 확보된다는 점에서, 다시 새롭게 찾아올 웹진 〈젠더·어펙트〉의 번역 작업을 기대해주기 바란다.

 

 한편 3호에 신설된 〈아카이브〉는 정동의 흔적과 누적으로 열리는 다양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을 담는 곳이다. 문학잡지 〈비릿 be:lit〉은 지역의 이름으로도, 청년의 위치성으로도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열망과 애씀의 집합체이다. 〈비릿〉을 〈아카이브〉란의 첫 번째 필자로 소개한 것은 이들의 고군분투가 얼마나 많은 몸들을 ‘정동하고 정동되게’ 만드는지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향후 〈아카이브〉에서 모이고 축적될 많은 말들의 기록에 독자들의 격려와 관심을 부탁드린다.

 

 웹진 〈젠더·어펙트〉 3호에 펼쳐져 있는 정동적 읽기-쓰기의 양상들, 그 실천의 기록들은 여전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여정 가운데 있다. 읽기와 쓰기의 동시발생적 교직과 그 축적 속에서만 길어지는 이 말들은 〈젠더·어펙트〉에서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일으키는 파동은 근본적으로 불가해한 이 세계를 타자화된 자리 없이, 배제되는 공간 없이 매 순간 창발하려는 운동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정동적 읽기-쓰기를 독려하고 실천하는 우리의 삶이 절로 정치적인 것이자 미학적인 것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권영빈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동아대학교에서 강의합니다. 정동과 공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주로 한국 현대소설을 읽고 분석하면서 젠더화된 신체와 여성의 공간 경험을 젠더지리학의 방법으로 연구합니다. 더 재미있고 따뜻한 문학, 글쓰기를 위해 읽기-쓰기가 가진 수행적 힘을 다잡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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