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쩌면 이론은 늘 보편 이론이지만 이론이 단지 학술장에서의 글쓰기 도구임을 넘어서, (근대 이래) 사유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재배치하고 세계를 다시 조망할 수 있게 하는 매개여야함을 강력히 환기시킨 개념의 하나가 오늘날 어펙트일 것이다. 주지하듯, 2000년대 중반 한국에서 스피노자-들뢰즈를 매개로 소개되기 시작한 어펙트 개념은 그 맥락상 일종의 열쇠 개념 역할을 기대받은 측면이 강했다. 2024년 현재는 다른 질문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도구로, 그리고 이론의 보편 지향 자체를 질문할 전제를 풍부히 품고 있는 개념으로 폭넓게 이해·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적으로는 ‘어펙트 이론’이라는 말보다 ‘어펙트의 개념, 문제의식’ 같은 말을 더 사용하는 편이기는 하다. 정합적이고 정통적인 계보가..
이 글은 젠더·어펙트연구소가 출간한 4번째 총서, 『연결신체학을 향하여』의 4부 ‘정동적 정의와 존재론적 전회’를 중심으로 책의 골자 및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한국에서 정동 연구를 확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연구소의 꾸준한 작업을 지지하며, 전공·학제 간 교류와 협업의 결과를 접할 기회를 주신 데 감사드린다. 주로 질적 방법으로 경험 연구를 하는 페미니스트 사회학자인 필자에게 정동 논의가 제기하는 학술적 자극과 고민의 맥락을 함께 풀어내는 방식으로 리뷰를 시도한다. 1. 정동 논의와의 조우 먼저, 필자는 전문가적 식견에서 젠더 인식론과 정동 연구의 조우를 체계적으로 일별하거나 평가할 자격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2010년대부터 문학과 문화 연구, 인류학,..
우리는 장르문학에서 어렵지 않게, 카르밀라나 드라큘라 같은 흡혈귀,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나 지킬 박사와 같은 사이보그 등 이질적인 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19세기 초중반 영미문학을 통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공포스럽거나 역겹고, 정상성이나 젠더 규범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이들의 퀴어한 모습은 대중적인 미디어에서 뿐만 아니라 ‘본격 문학’ 장르에서도 반복적으로 재활성화되거나 변용되곤 합니다. 이들의 신체는 정상 범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증오와 같은 정동을 촉발시키고 감정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이질적인 몸들을 둘러싼 이 같은 감정의 인과관계를 전치하여 설명합니다. 문학 속 괴물들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 소수자들의 인상을 두고 ..
전세계에서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고전하는 곳은 어디일까? 현대 대중문화의 문화적 보편이자 우세종인 할리우드 영화가 못 뚫고 들어가는 곳은 없다가 정답에 가깝겠지만, 그나마 가장 강력한 대안 영상문화를 보유한 국가는 한국과 인도라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다. 특히 인도는 매해 1천편 이상의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나라로, 스크린 쿼터 없이도 자국영화 점유율 80%가 넘는 어마어마한 자국영화 충성도를 보여주는 ‘발리우드’의 본고장이다. 이러한 인도의 자국 문화 중심성과 인도내 영어권 문화의 막대한 영향력 때문에 2000년대 초반 무렵부터 한류가 아시아 대륙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도, 인도는 좀처럼 한류 진입이 어려운 곳으로 여겨졌다. 그런 인도에서 지난 팬데믹 이후 한류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커졌다는 분석이 ..
순환하며 강화되고 축적되는 감정 『감정의 문화정치』는 감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기보다 감정이 무엇을 하는지의 문제를 치밀하게 붙잡는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정동경제를 논한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이 개인의 내면에 실존하는 것으로 여겨온 통념과 반대로 감정의 '밖에서 안으로' 작동하는 방향성을 주장한다. 이는 기존의 사회학적 감정 모델과 유사해보이지만, 감정을 개인 외부에 실존하고 동시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본 전제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메드는 감정이 개인의 안 또는 밖 어디에 존재하느냐에 대한 논쟁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녀에게 보다 의미 있는 작업은 감정이 애초에 '안과 밖'을 결정짓던 표면과 경계를 형성하는 역학에 주목하는 것이다. 감정은 대상과의 접촉의 간극과 강도, 형태..
전임연구원인 이지행 선생님이 프레시안에 연재 중인 K팝 칼럼을 소개합니다. 팬 행동주의(fan activism)의 현장을 살피며 “쓸데없는 짓”으로 폄훼되곤 하는 이들의 실천에서 새로운 정동 경제의 양상과 대항담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글입니다. 올해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네 번째 강좌였던 과도 이어지는 논의이니 웹진에 발표된 리뷰글(움직이고 접속하고 주장하며 변하는, ‘팬덤’이라는 몸들)과 함께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102009552504597 BTS 알리려 가사 번역하면 쓸데없는 짓? '그들'은 모른다 가수 이승윤의 팬들이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영화 (감독 권하정, 김아현)가 지난 9월 개봉해 현재까지 ..
남초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길고양이 혐오 담론과 문화는 최근 조직적이고 전방위적인 형태로 퍼져 새로운 인터넷 놀이 문화의 하나가 되었고, 혐오는 어느새 인터넷상의 지배적 정동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동물 혐오가 특정 집단에 국한된 문제적 정동이 아니라, 배제의 논리를 작동시키는 폭력적 문화로서 다수에게 확산되는 정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면에 존재하는 혐오 정동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이러한 동물 학대는 고양이 뿐 아니라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에 대한 혐오를 수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고양이와 캣맘에게 물리적 정신적 위해를 가하면서 캣맘을 향한 성적 조롱과 폭언, 폭행 등의 성차별적 행위로 혐오적 정동을 확산시켜 나갑니다. 강연자인..
현대 사회에서 여러 매체를 통한 흥미롭고 또 자극적인 정보가 홍수처럼 넘치는 가운데, 나는 얼마나 진실과 오정보를 구별하고, 또 비판적으로 사고하여 분별하고 있을까? 오정보 문제는 인류 역사상 꾸준히 있어왔던 문제이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한 여러 사회관계망이 출현하면서 오정보에 의한 폐해는 갈수록 심각해져 가고만 있다. 정보의 생태계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래거시 미디어 대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유튜브 같은 SNS 등이 정보 습득의 유용한 수단이 되었고, 때로 그 영향력은 래거시 미디어를 넘어서고 있는 듯 보인다. 그 가운데 오정보로 인해서 분열, 갈등 전쟁 양극화 환경 문제 등의 문제가 더 심각한 결과를 야기시키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음을 모두가 목도하고 있다. 이진하 선생님은..
이화진과 소현숙은 장애를 중심으로, 김이진은 해외입양인의 표상을 중심으로 ‘정상적’인 신체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러한 담론들 안에서 어떤 균열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귀, 눈, 피는 모두 신체의 일부일 뿐이지만, 그것은 특정한 담론과 표상 안에서 신체의 전체, 혹은 한 인간의 정체성 전체를 규정하고 대표하게 된다. 이 세 편의 글이 그러한 담론과 표상의 작동에 대응하는 방식은 각각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귀는 어떻게 전체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부분으로 (뜻밖에) 돌아오는가? 전체를 대표하게 된 눈은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역이용하여 저항하는가? 당사자는 자신의 피에 관한 해석을 통해 어떻게 주류적인 표상에 도전하는가? 이 글은 세 글의 문제의식을 분석하고, 논의해 볼..
『アフェクトゥス 아펙투스-생명의 바깥을 만나다』(西井 涼子 니시이 료코 외, >(교토대학학술출판협회, 2020)는 일본에서의 정동 연구 지형을 살필 수 있는 책이다. 책의 필진은 9명의 인류학자와 미술, 영장류학, 인지심리학, 철학, 생명이론 등 5명의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젠더・어펙트 세미나'의 한 축은 비서구 정동 연구 동향을 점검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이번 세미나에선 『アフェクトゥス』의 11장 과 종장 를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다. 들뢰즈와 스피노자 읽기로부터 출발한 정동연구는 여러 논자들을 통해, 각기 다른 분과에서 제안되었다. 다윈의 감정표현에 관한 연구에서부터 실번 톰킨스와 마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자들이 감정과 정동에 대해 고심해왔다. 톰킨스가 심리학..
지금 흘러내리고 있는 이것, 지금 들러붙은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눈물은 흘러내리지만 곧장 얼굴에 들러붙어버리고, 분노는 위로 솟구칠 뿐 바깥으로 나가질 못하고 안에서 들끓기만 한다. 하지만 눈물은 누군가를 울리고 분노는 어느새 들불처럼 번진다. 바람을 타고 번지는 것들, 몸을 통해 전해지는 것들은 너무나 명료하고 자명하지만 ‘정동하고 정동되는’ 그 몸들을 부를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다는 건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이다. 머물 곳이 없기에 모일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이름 없는 그것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져버린다. 웹진 에선 이 이름 없는 것들이 잠시나마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아직 부르지 않은 이름, 아직 쓰이지 않은 글이 머물 수 있는 대합실을 ‘아직 아닌 것들의 아카이브..
파도(wave)와 파동(affect) ⏤영화배급협동조합 와의 대화 (2부) 일시 : 2020. 09. 15.(화) 장소 : 부산 중앙동 ‘좋은차’ 참석자 : 성송이(씨네소파 대표) 최예지(씨네소파 이사) 김대성(웹진 편집위원 / 문학평론가) ‘운동’이 아니라 ‘직장’입니다 김대성 : 독립영화배급이라는 좁고 험난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동력을 씨네소파의 ‘마음’에서만이 아니라 ‘노동환경’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마음이 없다면 길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만 요구한다면 금세 소진되고 고갈될 것이 뻔하겠죠. 씨네소파는 ‘청년’이라는 세대성을 부각하거나 ‘운동’이라는 대의를 내세운 적이 없는데요, 중앙과 지방의 ‘불균형’을 문제 삼아 슬로건으로 삼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청년과 지역이라는 프레임으로 씨네소파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