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전체는 다시 부분이 되는가 (안희제)
- 리뷰/젠더어펙트_단행본 리뷰
- 2023. 8. 22.
이화진과 소현숙은 장애를 중심으로, 김이진은 해외입양인의 표상을 중심으로 ‘정상적’인 신체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러한 담론들 안에서 어떤 균열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귀, 눈, 피는 모두 신체의 일부일 뿐이지만, 그것은 특정한 담론과 표상 안에서 신체의 전체, 혹은 한 인간의 정체성 전체를 규정하고 대표하게 된다. 이 세 편의 글이 그러한 담론과 표상의 작동에 대응하는 방식은 각각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귀는 어떻게 전체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부분으로 (뜻밖에) 돌아오는가? 전체를 대표하게 된 눈은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역이용하여 저항하는가? 당사자는 자신의 피에 관한 해석을 통해 어떻게 주류적인 표상에 도전하는가? 이 글은 세 글의 문제의식을 분석하고, 논의해 볼 만한 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귀: 누락된 장애는 뜻밖에 출현한다
무언가를 장애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화진의 「‘데프(Deaf)의 영화’를 찾아서」의 경우 이는 장애가 비장애인의 문화예술에 의해 이용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장애를 전면화할 가능성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지금 한국에서 ‘장애’와 ‘영화’가 연결되는 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다. ‘배리어프리’가 콘텐츠의 성격과 전혀 무관하게 시·청각장애인이 관람할 수 있도록 접근성이 보장된다는 의미임에도, 배리어프리로 제작되는 시청각 콘텐츠들 중 다수는 ‘장애인식 개선’을 위한 ‘따뜻한’ 콘텐츠일 때가 많다. 어떤 콘텐츠가 장애인식 개선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콘텐츠가 장애인보다는 비장애인을 소비자로 상정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장애인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형식과 장애인식 개선이라는 내용 혹은 목표 사이에 불일치가 생기는 것이다. 비장애인을 위해 만든 배리어프리 영화라니, 기괴하지 않은가?
나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영화를 비장애인이 보기 위한 것으로 상정하고, 여기에 배리어프리를 부가적으로 덧붙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이해한다. 50년도 더 지난 영화에서 ‘데프 시네마’를 전유할 가능성을 발견하는 이화진의 글은 그런 점에서 시의적절하고 흥미롭다. <만종>을 포함하여 이곳에서 분석하고 있는 영화들의 내용은 분명 비장애인 중심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시대적으로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화진은 시대적 한계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장애의 렌즈로 <만종>을 새롭게 조명한다. “이 영화가 평이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국어 사용자에게나 한국수어 사용자에게나 모두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라는 바로 그 사실”(213)은 뜻밖에 접근성을 실현함으로써 장애를 전면에 출현시킨다.
수어와 한국어가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사용되면서도 수어와 데프 보이스에 한국어 자막이 달려 있지 않고, 수어를 어설프게 배운 청인 배우들의 연기 때문에 농인조차 이해할 수 없는 수어. 이 황당한 연출 안에서 ‘들리는 세계’와 ‘들리지 않는 세계’는 교차되면서 겹쳐진다. 두 세계의 의도치 않은 중첩은 특정한 연출과의 만남 안에서 비장애인 관객과 장애인 관객이 모두 ‘장애 관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는 비장애인의 문화예술에 장애인 접근성을 보완하여 만든 양(positive)의 배리어프리 영화와 정반대 방향으로, 그 누구의 접근성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음(negative)의 접근성이 실현된 영화인 것이다. 여기서 귀의 부재가 접근성의 부재로 전환되면서 귀는 한 사람의 전체를 대표하는 지위를 잃고,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시청각매체와 상호작용하는 부분이 된다.
접근성의 개념이 완전히 부재하여 비장애인의 접근성조차 훼손된 극단적인 비장애인 문화예술의 사례에서 뜻밖에 출현하는 장애를 포착하고, 이를 통해 특정한 영화의 내러티브와 연출을 넘어 그 영화가 만들어진 산업과 이에 대한 연구라는 물질적이고 담론적인 맥락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지는 이화진의 글은 ‘데프 시네마’를 통해 ‘장애예술’이라는 더 넓고 논쟁적인 개념에 개입할 여지를 열어젖히고 있다.
2. 눈: 감춰질 수 없는 장애는 돌출된다
소현숙의 「신체에 각인된 전쟁」은 한국전쟁에 관한 담론이 군인들의 피해와 민간인 학살 실태 규명에 집중되어 전쟁 이후 생존자의 삶과 몸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부상과 장애가 상이군인의 문제로 축소되었기에, 소현숙은 손상과 장애, 그리고 젠더를 연결하여 노근리 사건 생존피해자의 경험을 다시 이해하고자 한다.
구술에 참여한 생존피해자들의 서사는 개별적인 죽음과 폭력, 신체의 손상과 장애에 좀 더 집중한다. 이들은 대부분 제때 의료 처치를 받지 못해서 그로 인해 장기적인 손상 혹은 장애를 얻게 되었다. 특히 여성 피해자들의 경우 사망한 어머니 대신 가사나 육아 노동을 부담하거나, 교육의 기회를 더욱 박탈당하거나, 가정폭력에 노출되기도 했다. 전쟁이 젠더화되어 있다는 것은 전쟁이 남성 군인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것,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여성 민간인에 대한 성폭력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넘어, 전쟁 이후의 경험까지도 젠더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소현숙은 전쟁 당시의 부상으로 영구적인 신체적 장애를 겪게 된 생존피해자 ‘양진희’의 생애사를 통해 전쟁, 장애, 젠더의 교차 지점을 본다. 양진희는 노근리 사건 당시 좌측 안구가 빠지는 부상을 당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머슴아들”을 살려야 한다고 아들들만 품에 안은 것과도 관련된다. 어머니의 뒤에서 고개를 묻고 있다가 고모부의 비명에 고개를 든 순간 파편을 맞아 눈이 빠진 그는 결국 자기 손으로 자신의 눈을 잡아떼야 했다. 그는 이후에도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하고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이어갔고, 그의 눈은 두 달 정도 이후부터야 간신히 아물기 시작했다. 상처가 아문 뒤에 그가 마주한 건 시각장애인에 대한 낙인이었고, 이로 인한 교육으로부터의 소외였다. 겨우 구해서 착용하기 시작한 의안은 여전히 보기에 어색해서 생기는 미용상의 문제로 그가 시각장애인임을 완전히 감추어주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눈의 부재는 그의 몸 전체를 대표했다.
양진희의 삶에서 한국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얻은 장애는 반공주의 안에서 자신이 알아서 감내해야 할 문제가 되었지만, 노근리의 피해자들이 벌인 진상 규명 운동 안에서 양진희의 의안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양진희는 피해생존자들의 증언 중 자신의 의안을 빼서 바닥에 “패대기”(251)를 쳤다. 여기서 “전후 삶을 옥죄어 온 약점으로서 의안은 전쟁의 피해를 증언하는 가장 강력한 저항의 무기”가 된다(251). ‘배우지 못해 말을 조리 있게 못하는’ 양진희의 언어는 의안과 패대기였다. 국가주의, 반공주의, 성차별, 비장애인 중심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장애여성의 의안은 언어로 전환되고, 그를 과잉 대표하던 눈은 바로 그 대표성을 활용해 무대에 출현하고 시선에 저항한다. 이러한 전환의 장면에서 전쟁과 여성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소현숙의 글은 손상과 장애가 낭만화되지 않으면서 가능성으로 돌출될 수 있는 관계의 조건을 탐색할 수 있게끔 한다.
3. 피: 당사자의 피는 다르게 흐른다
나는 이전에 한 대학에 재학 중인 재외국민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연구참여자들은 한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오게 된 이유에 대해 다양한 이유를 언급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뿌리 찾기’였다. 어쨌든 자신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자신의 일부를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부모가 있다는 사실과 한국에 가야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인종적 소수자로서의 해외입양인에게 놓인 선택지들이 무엇이기에 ‘나를 이해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한국에 가서 핏줄을 찾고 싶다’로 굴절되는가? 어떤 배치가 그러한 굴절을 가능하게 하는가?
김이진의 「해외입양인의 가족 찾기 표상」은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전쟁고아나 ‘혼혈아’의 구제를 목적으로 시작된 해외입양제도가 (미혼모의 자녀처럼) 한국의 이상적인 가족상에 부합하지 않는 아동들을 국외로 내보내는 데 사용된 역사를 짚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해외로 보내진 한국계 해외입양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표상을 분석한다. 그리고 이를 해외입양인 당사자들이 제작한 작품과 비교함으로써 한국의 가족 관념에 비판적으로 개입한다.
이를 위해 김이진은 우선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을 분석한다. 원작 다큐멘터리가 실존인물인 수잔 브링크의 삶을 선입견을 가지고 그려냈다면, 영화는 그의 삶을 더 비극적으로 그리고자 했다. 다큐멘터리의 경우 ‘혼혈’이나 ‘미혼모’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그의 인생을 ‘당연히 불행’한 것으로 그렸다. 그 이유는 그가 “한국 국적과 말과 이름을 잃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수잔이 양모의 학대에 자살기도를 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등, 영화에서 그의 삶은 더욱 비극적으로 그려졌다(264).
하지만 감독이 해외입양인과 아는 사이이거나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는 경우, 혹은 감독 자신이 해외입양인 당사자인 경우에 해외입양은 조금 다르게 그려진다. 가족 찾기 서사를 축으로 삼더라도 비극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거나, ‘핏줄’과 무관하게 자신을 돌보고 사랑한 이들의 존재를 부각하기도 한다. 특히 당사자들의 서사에서 그들의 행복은 ‘혈연가족’과 다시 만나는 것 너머로 확장되어 있었다. 김이진은 여전히 이 서사들 안에서도 ‘어머니’만이 가시화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지만, 당사자들이 직접 자신들을 표상하는 것이 담론에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짚는다. 이는 (초)국가적 담론에 당사자들의 삶을 통해 개입할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당사자들을 해외로 보내고, 담론 안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표상하는 빌미가 되었던 그들의 ‘피’가 다시금 그들의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핏줄의 단절은 이제 그들의 삶 전체를 규정하기보다, 그들의 삶의 일부로 통합된다.
4. 나가며: 경험, 정체성과 실천 사이
장애와 핏줄 같은 것들은 부분임에도 전체를 대표한다. 사회적 차별에 대한 논의들은 이처럼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비약의 과정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춰 왔다. 반면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2부의 글들은 그 방향을 거꾸로 틀었다. 부분에서 전체로의 비약이 다시 전체에서 부분으로 돌아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탐구한 것이다. 귀의 부재는 접근성의 부재로 전환되면서 하나의 부분으로 돌아간다. 눈의 부재는 패대기쳐진 의안으로 전환되면서 하나의 부분으로 돌아간다. 핏줄의 단절은 현재의 관계들로 전환되면서 하나의 부분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전체는 다시 부분이 된다.
이러한 세 글의 논의에 몇 가지 논점을 덧붙이고 싶다. 영화와 관객, 생존피해자들, (비)당사자 감독들과 영상매체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매개하는 몸은 이들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 이를테면, <만종>을 본 관객이 영화를 본 이후 다른 이들과 감상과 비평을 나눌 때, 비장애인의 감상과 장애인의 감상은 어떻게 같고 다를 것인가? 장애관객으로서의 공통의 경험은 서로 다른 몸에 어떻게 체화될 것인가? 그리고 누군가를 소외시키던 전체로서의 부분들은 어떻게 이들을 주체화하는 언어로서의 부분으로 전환되는가? 이를테면, 해외입양인이라는 당사자 정체성, 혹은 해외입양인과의 관계가 반드시 더 나은 재현을 만드는 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들이 기존 담론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게 되기까지 어떤 매개들이 이들의 욕망과 실천을 굴절시켰는가? 노근리 사건 생존피해자들의 운동에서 이들은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간담회가 이루어진 현장은 어땠기에 양진희는 자신의 의안을 패대기칠 수 있었는가?
특정한 경험이나 정체성이 또 다른 행위나 실천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어떻게(how)’에 대한 구체적인 추적, 즉 실천으로 나아가는 매개들에 대한 연구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 글들의 실천적 함의는 더욱 배가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단지 세 연구자의 몫만이 아니다. 이 글들을 통해 우리는 해당 사안들의 배치에 연루된다. 그렇기에 전체와 부분 사이의 진동, 거기서 피어나는 어펙트의 경로를 살피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일 테다.
* 이 글은 젠더·어펙트 총서 03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출간 기념 서평회 <마주치고 부대끼며 변신하는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로>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 일시 : 2023년 8월 9일(수) 저녁 7-9시
◎ 장소 : 온라인 화상회의 줌
안희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가벼운 공감보다는 정확한 통감이 더 나은 관계와 사회를 만드는 길이라고,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이야기를 깊이 느낄 때 비로소 더 나은 ‘우리’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서로의 안팎을 조심스럽게 오가는 일을 잘하고 싶다. 《비마이너》, 《시사IN》, 《홈리스뉴스》, 《기획회의》 등에 글을 썼고, 자신의 아픈 몸과 주변적 위치에서 대중문화를 더 나은 논의로 이어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한다.
책 『망설이는 사랑-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을 썼으며, 함께 쓴 책으로는 『아픈 몸, 무대에 서다』, 『우리는 이어져 있다』, 『몸이 말이 될 때』 등이 있다. 대중문화에 대해 쓴 글로는 〈비장애인의, 비장애인을 위한, 비장애인에 의한 ‘접근성’?: 드라마 〈스타트업〉 속 비장애 중심적 상상력〉, 〈영원한 수수께끼라는 공론장의 가능성: 케이팝 세계관 콘텐츠를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제57회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 후보에 오른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2020)에서 시민배우로 무대에 섰다. 다큐멘터리 〈귀귀퀴퀴〉(2022)에서 기획·번역·접근성을 담당했고, 이를 바탕으로 영상 접근성 작업에 관해 《웹진 이음》에 글을 썼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주최·주관하는 ‘No Limits in Seoul 2022 노리미츠인서울’의 전시 〈이음으로 가는 길〉에 참여했다.
매혹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팬이라는 궤도에서의 경험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질문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서평회 토론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녹취해서 소개합니다.
소현숙 : 안희제 선생님께서 2부에 대해 소개해주셨는데 너무 멋지게 이어주셔서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수록된 글들의 의미가 이렇게 서로 연결되겠구나 하는 걸 새삼스럽게 깨닿게 해주셔서 너무 소중한 말씀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노근리 피해자분들 구술 작업과 이 글을 쓴 거 자체는 정동연구를 많이 알지 못할 때 작업했던 내용들인데요, 오히려 정동연구를 공부하며 이 논문을 다시 보니까 굉장히 정동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는 내용들이구나 하는 걸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질문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미국에 갔을 때 간담회 분위기에서 어떤 분위기였길래 구술자가 양진희 씨가 의안을 패대기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는지 질문을 해주셨는데 이게 1990년도에 있었던 일이에요. 피해자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한 건 굉장히 오래됐지만 실제로 사회에서 공론화된 건 AP통신에서 보도하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거든요. 알려지고 난 직후 미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에서 초청해서 갔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증언을 하는 미군들이 나타나 있지 않고 그리고 그 기자회견장의 분위기 자체가 미국이 사과를 한다든가 그런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거에 대해서 반성한다거나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굉장히 많이 실망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반세기 동안 울분이 터져나오면서 의안을 던지는 그런 행동이 나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들에 대해서는,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신 것처럼, 정말 한 쪽의 안구인데 그것이 이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해버리는, 그래서 시각장애인으로서 굉장히 많은 소외와 차별을 짊어져야 했던 평생의 삶을 살았는데 오히려 안구를 집어던지는 행위를 통해서 그것이 하나의 부분에 불과함에도 굉장한 저항성을 가지고 그 이후 삶에서 그 안구를 굳이 끼지 않아도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하는 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들이 중요하다 판단되었습니다.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이화진 : 저는 장애의 렌즈로 한국영화를 다시 읽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요, 사실 제 연구는 한국영화에서 장애 재현의 역사를 검토하려는 것은 아니거든요. 어떻게 하면 재현 그 너머에 대한 탐구를 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과정, 제 연구가 지향하려는 바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개념인 장애관객이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 안희제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이 연구가 어떻게 방법을 찾아가야 하는지 굉장히 좋은 조언을 들은 느낌입니다. 전반적으로 세 편의 글들이 어떻게 실천적인 경험을 이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주셨거든요. 소현숙 선생님도 역사 작업을 하시기 때문에 고민이 많이 되실 텐데요, 제한되어 있는 역사 사료를 가지고 어떤 것을 구축하려고 했을 때 계속해서 방법에 대한 질문과 현재의 문제 그리고 이 글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실천의 방향성과 같은 것들이 선명하지 않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어요. 그와 관련해서 중요한 질문과 과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할 게 많이 있느니까, 어찌보면 좋은 거죠.
'리뷰 > 젠더어펙트_단행본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것의 익숙한 반복 ⏤『감정의 문화정치』를 매개로 ‘이질적인 몸’을 구하기 (박준훈) (1) | 2024.04.04 |
---|---|
끈적이는 감정: 세계의 표면을 만든 힘이자 재배치의 잠재성을 지닌 힘 (송혜림) (0) | 2024.01.26 |
한국에서의 ‘정동’(affect) 번역의 어려움 (채석진) (0) | 2023.09.06 |
공명하는 연대의, 연대에 의한, 연대를 위한 (김민지) (0) | 2023.09.06 |
세 번의 부대낌이 건네준 약속 (김관욱) (0) | 2023.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