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부대낌이 건네준 약속 (김관욱)

 “그런데, ‘정동’이 무슨 말이야?” 

 

  얼마 전 귀한 발표 자리에서 정동에 대해 짧게 언급할 자리가 있었다. 이후 화장실에 들렸을 때 청중 두 분이 손을 씻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앞의 질문을 상대방에게 던졌다. 순간 시간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했지만, 정동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어렵다. 어펙트(affect)에 대한 번역어에서부터 다양한 해석(정동, 감응 등)이 있지 않던가. 그런 와중 가장 반가웠던 한국말은 바로 ‘부대낌’이었다(권명아 2012). 이 표현만큼 어펙트라는 개념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마주침’과 ‘되기’의 가치가 온전히 드러난 것은 없었다. ‘부대낌’이란 표현 속에는 인간이란 다른 존재와의 끊임없는 마주침 속에 살아가는 “연결신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지 않은가(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 2020). 또한 ‘마주침’이라는 표현으로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뉘앙스, 즉 일종의 ‘마찰력’을 담고 있는 듯했다. 정동이 지닌 ‘끈적한’(sticky) 접착제적 성격 말이다(아메드 2015:57).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1부. 서사의 역사와 아상블라주: 마주침의 어펙트』와의 행복한 부대낌을 통해서도 나에겐 끈적한 마찰력이 생겼다. 권명아의 「<오징어 게임> 어펙트, 마주침의 윤리와 연결성의 에톨로지」, 권두현의 「‘실내 우주’의 SF 에톨로지」, 강성숙의 「연결성의 에톨로지로 본 ‘새끼 서 발’」, 이 세 글 속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매체들(예, OTT 영상, SF 소설, 고전 설화 등)의 서사들이 묘한 이끌림을 주었다. 내 몸이 기존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감각들을 불러일으켰다. 보지 않았던 것들을 보기 시작했고, 보면서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정말로 마수미(2018:155)의 표현처럼 “존재의 강화제”를 섭취한 느낌이었다. 본 서평은 이러한 내 몸의 변용에 대한 설명과 다름없다. 

 

  정동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그 자체로 ‘정동적’이다. 일상 속 마주침의 결과는 또 다른 감각과 관념을 부유하게 만든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최근 나에게 정동은, 혹은 정동적 사실은 마치 ‘반투과성(semi-permeable) 에너지’ 같은 이미지다(Mol and Law 2004:51). ‘나’라는 보이는 경계가 존재하지만, 매 순간 주고받는 에너지의 교류 속에 생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부대끼는 소통이란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이다. 종국엔 나 역시 커다란 투과 통로가 되길 소망하면서 말이다. 최근엔 스스로 리트머스 종이가 되어서 내 몸에 투과된 한국사회의 온갖 정동적 흐름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권명아(2012:16)의 표현처럼 “내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인격적인” 정동적 사실을 포착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부터 내 몸에 남겨진 세 글과의 부대낌의 소회를 짧게나마 소개해보려 한다. 

 

 

첫 번째 부대낌 : 새로운 ‘정동적 각도’로 다가온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 시청은 나에게는 일종의 정동적 시민의 의무와도 같았다. K-콘텐츠에 대한 세간의 찬사 속에 일종의 ‘몰아보기’(Binge Watching) 의례에 참여한 셈이었다. 권명아의 지적처럼 그것이 2020년 넷플릭스 TV 드라마의 전략이었던 ‘도메스틱 느와르’의 여성 서사를 멀리하고 2021년 새롭게 등장한 ‘가부장 남성 히어로 서사’임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숙제와도 같은 시청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그러한 콘텐츠를 클릭하는 순간부터 종료된 순간까지 큰 거부감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 깨닫게 되니 섬뜩했다. 그런데, 나는 2023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K-콘텐츠 <더 글로리>는 1화조차 클릭하지 못했다. 1화 속 학교폭력 장면만 넘기면 특별히 힘든 장면이 없다는 주변의 친절한 안내에도 난 결국 모든 시청자의 정동적 연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오징어 게임>은 훨씬 더 잔혹한 장면들과 폭력적 설정이 난무하는데도 어렵지 않게 나를 투과했을까? 권명아의 글을 마주친 이후 나름의 정동적 흔적들을 찾았다. <더 글로리> 속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여학생의 모습은 마치 나의 현실 속 딸의 일상을 연상시켰고, 그래서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그 분노를 참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 ‘기훈’은 나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비교됐다. 나는 그러한 아빠가, 남편이, 아들이 절대로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완전히 ‘공상’이라는 생각에 가상의 이야기를 보듯 시청한 것 같다. 결국, 내 몸을 편하게 투과한 <오징어 게임>은 중년 남성으로서의 내 삶이 투영된 것일 수 있다. 가부장의 정의로운 복수극 앞에 시종일관 믿을 수 없는 여성들에 대한 서사에 둔감했던 것이다.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권명아의 지적처럼 초국가적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시청자를 “특정한 정치 감각으로 정향”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권명아 2023:88). 그녀의 말대로 이미 텔레-비전(특히, OTT 채널)을 통한 초국가적 ‘취향 공동체’(앞의 책:50)가 형성되고 있지 않은가. 넷플릭스가 사업 초반 소위 ‘도메스틱 느와르’ 장르를 통해 여성과 소수자의 서사를 중심으로 차별적 전략을 취했다가, 이제는 정반대의 콘텐츠로 시선과 이윤을 끌어들이고 있다. <오징어 게임>의 뜻밖의 성공 이후 대대적으로 K-콘텐츠 제작에 투자하겠다는 넷플릭스의 선포가 이윤 이외의 윤리적 목적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기업의 이윤추구 자체를 문제시하는 게 어불성설이라 하겠지만, 콘텐츠 자체가 추동하는 특정한 방향으로의 정동적 조정과 배치는 분명 경계가 필요해 보인다. 권명아의 지적처럼 일명 “젠더화된 신뢰 자본”의 강화와 같은 방향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즉, 시종일관 여성을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재현시키고, 반대로 남성은 자본주의의 혼탁 속 억울한 피해자로서 묘사하며 그가 남성무리의 ‘신뢰’를 중심으로 한 투쟁으로 끝내 승리를 쟁취한 가부장 영웅으로 마무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속에서 은연 중 ‘투기 자본주의’ 현실은 어찌할 수 없는 듯 건너뛰면서, 가족, 친구, 연인 사이에서 발생한 ‘친밀한 폭력’에 대해서는 소재 정도로만 소비하고 넘어가는 지점도 문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권명아(앞의 책:52)의 지적처럼, 그렇게 혼탁한 세상 속 가부장 영웅의 서사들로 우리네 인식의 영토가 “정동적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두 번째 부대낌: 디지털 텔레-공화국 너머 ‘실내의 우주’와의 마주침

 

  권두현의 「‘실내 우주’의 SF 에톨로지」 글은 권명아의 텔레-비전 중심의 정동적 조정에 대한 나름의 실천적 대안으로 읽힌다. 그가 지적한 ‘실내’는 친밀한 공간에 대한 재발견을 넘어 그 속에서 끝없는 일상적 마주침의 결과로 생성되는 ‘우주’를 목격하게 해준다. 나에게는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우주와의 영접이었고, 그 어떤 OTT 드라마보다 4D의 효과를 자아냈다. 지금 이 글 역시 내 연구실 안팎의 우주가 만들어낸 종합선물 세트다. 

 

  덕성여자대학교는 여러 K-콘텐츠 드라마(<도깨비> 등)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학교 옆 장터가 <오징어 게임>의 촬영지(생선가게, 편의점 장면 등)라는 것도 신기하다. 오랜 벽돌 건물과 평지 위 넓은 녹지대, 북한산 고도 제한으로 주변 경관마저 으뜸이다. 학교 유치원생들이 뛰어노는 스머프 동산부터, 멋스러운 벚꽃 나무와 소나무, 북한산과 도봉산의 절경, 그리고 넓은 잔디밭을 활보하는 고양이들과 너구리들 가족들까지 여느 공원 부럽지 않다. 권두현(2023:127)이 소개한 애나 칭의 “잡초 경관(weedy landscape)”의 대학교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 경관 속에 내가 머무는 벽돌 안 실내가 있다. 그 안에 북한산과 도봉산 풍경이 걸친 유리창과 형형색색의 책들과 총 6개의 크고 작은 스크린(3개의 컴퓨터 모니터, 노트북, 스마트폰, 태블릿PC)이 일렬로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한 달째 고장이 난 에어컨 밑에서 지구‘열대화’로부터 나를 지켜준 선풍기 세 대가 놓여 있다. 30도의 실내 온도 속에서 커피와 카페인 음료, 에너지바의 대사 작용에 기대여 집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권두현이 지적한 ‘사회적 숲’에 거주하는 대표적 “실내종”인 셈이다(앞의 책:133). 

 

  권두현의 글에는 식물, 동물, 인간이 함께 관계론적 존재로 거주하는 다종의 실내가 소개되며 풀이된다. ‘비닐 온실’(=비닐하우스 속 식물, 동물, 이주노동자, 도시빈민), ‘유리 온실’(=강화유리 아파트 속 식물, 동물, 인간), ‘온실 우화’(러브룩의 ‘가이아 가설’,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를 차례로 검토하며 결국 실내종으로서 인간이 사회적 숲에서 어떤 생존전략을 상상해야 하는지 탐구한다. 그 모든 해석은 놀랍게도 나의 작은 연구실 안에서 이미 소란스럽게 부대끼며 연출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듣지 못했던 건 나 혼자뿐이었다. 그 중 흥미로웠던 것은 식물의 프록세믹스(proxemics, 근접학)였다.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문화마다 다른 사회적 공간 사용의 상이한 감각을 표현했던 프록세믹스 논의를 식물의 영토권으로 확장시키고, 또 그것을 식물의 행동학적 윤리, 정동체계로 재해석한 것이다(앞의 책:118~119). 나의 일상 속 실뜨기에서 망각하고 있었던(하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꽃병과 꽃들과의 상호돌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세 번째 부대낌: 100년 전 ‘연쇄 누적담’ 설화가 보여주는 연결성의 가치

 

  1부의 마지막 글인 강성숙의 「연결성의 에톨로지로 본 ‘새끼 서 발’」은 SF소설이 아닌 고전 설화의 서사 속에 등장한 연결성을 마주하게 한다. ‘새끼 서 발’은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남자 주인공이 짚으로 만든 보잘것없는 새끼 자락을 가지고 집을 나선 후 발생한 연쇄적인 만남과 사건을 다룬다. 그 속에서 주인공의 새끼가 옹기로, 옹기가 쌀로, 쌀이 죽은 말로, 죽은 말이 산 말로, 산 말이 죽은 처녀로, 죽은 처녀가 산 처녀로(더 나아가 산 처녀가 비지로)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강성숙은 ‘조 이삭 하나’ 설화를 통해 유사한 연쇄적 사건 속 누적 이야기 또한 소개한다. 그녀가 무려 63편의 ‘새끼 서 발’ 설화(최초 자료가 1919년이다!)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과장과 허언, 비현실적 사기담이 아니라 소위 ‘연쇄 누적담’ 형식 자체이다. 설화란 일종의 이야기로 전래되는 공유자산으로서 그것이 지닌 형식은 당대의 에톨로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타자와 끊임없이 연결되는 연쇄적 과정으로서의 삶의 의미를 우화로써 드러낸 것일 테다. 그리고 그 최종 목표는 강성숙이 지적한 “경험을 통한 성취와 성장”이다(강성숙 2023:178).

 

  강성숙의 설화 해석에는 인상적인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억지에 가까운 주인공의 주장(예를 들면, 당신 때문에 OO이 죽었다)에 ‘살아 있는’ 대상을 “기꺼이” 건네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주인공 역시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처녀를 두부장수에 의해 빼앗기고 달랑 비지만을 얻었음에도 이를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만족스럽게” 보였던 장면이다. 오직 이성적인 “판단, 성찰, 인식, 전망”, 그리고 “예측”만을 중요시하는 서구의 인식론(권명아 2020:153)에 비추어 볼 때 터무니없는 전개일 수 있다. 그렇지만, 100년 전 지구 거주민들의 사유 속에는 정동적 마주침이 건네주는 “한 다발의 약속”(앞의 책:154,155)만이 있었을 것이다. 앞서 권두현이 글의 말미에 제안했던 “재야생화(Rewilding)”(권두현 앞의 책:135)에 따른 삶, 인간과 비인간, 자연이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며 상호돌봄의 삶을 따르던 모습이 설화 속 선조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그들에게는 사람과 자연을 계획적으로 착취하는 ‘야만적 축적’(savage accumulation)의 자본주의적 세계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애나 칭이 언급했던 ‘구제 연합’(salvage association)을 통해 서로가 축적한 것에 상호의존하며 돌보는 연대를 실천했을 것이다. 능력만큼만 일하며,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애니미즘적 행동윤리 말이다(히켈 2021). 여기에는 ‘남탓’과 ‘손해’가 없다. 자연이 주는 결실에 자연 ‘탓’을 할 수 없지 않은가. 

 

 

마주침의 어펙트, 그 모호함의 약속

 

  ‘새끼 서 발’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초연함(서로를 탓하지 않고 결과에 수긍하고 요청에 응하는 행동윤리)을 보며 실소하는 현대인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권명아, 권두현, 강성숙의 글을 연쇄적으로 읽으며 내 안에 떠오른 이미지는 그네들의 삶이 마치 식물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이었다. 권두현(앞의 책:119)이 지적했듯 식물의 에톨로지가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음은 물론, 단계적이거나 위계적이지도 않다”라는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예측이 지배하는 삶이란 끊임없는 실패와 좌절의 연속일 테다. 그렇지만, 약속들로 연결되는 삶이란 또 다른 약속과 마주침의 연속일 테다. 좌절보다는 아쉬움과 미련을 떨쳐버릴 또 다른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클지 모른다. 필요 이상으로 착취할 이유가 없는 삶에서 자연과의 공존은 충만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선한 ‘구제’(salvage)의 손길인 양 두 손을 내밀며 부귀영화를 약속했던 것(애나 칭의 표현대로 ‘구제 축적’(salvage accumulation))이 결국 ‘야만’(savage)적 착취(카를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시초 축적’(savage accumulation))이었음을 깨닫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길게는 오백 년에서 짧게는 백 년의 자본주의 역사이다. 당혹스러운 건 그 역사가 초래한 초국가적 팬데믹에 의해 또 다른 텔레-공화국, 즉, 넷플릭스 등을 통한 초국가적 취향의 정동체제가 확산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제 ‘새끼 서 발’의 주인공들은 ‘잡초 경관’이 아닌 ‘미디어 경관’ 속에서만, 그것도 오직 구독자에게만 할당되는 유희 거리로 전락해버린 듯 싶다. 

  앞서 ‘도대체 정동이 무엇인가’라는 나의 경험담을 소개했다. 정동 개념의 모호함은 정동 자체의 ‘모호한’ 특징 때문이다. ‘아직 아님’, ‘다음에 올 것’에 대한 약속이 결국 정동적 사실과 마주침의 특징이다(권명아 2020:152-153). 문제는 그 모호함을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자신들의 철옹성 같은 지위와 이윤을 위한 “정동적 갈고리”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정동적 사실’일 테다(마수미 2018:135~136). 이제 그러한 갈고리가 분자생물학, 생화학, 유전자공학, 뇌신경과학 등을 통해 신체를 철저히 정보화하고 디지털화한 인프라 속에서 그와 같은 정동체제를 확장하고 있는 현실이다. 정녕 권두현이 인용한 폴 B. 프레시아도의 “제약-포르노 체제”(pharmaco-pornographic era)가 우리가 거주하는 ‘실내’일지 모른다(권두현 앞의 책:91). 살과 살로서 서로를 체감하던 시대가 아닌 건물 속 텔레비전이 쏘아주는 디지털화된 시청각 코드에 중독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것도 마냥 행복하면서 말이다. 빗대자면, 일종의 ‘도파민 국민’(Dopamine Nation)이 된 셈이다(렘키 2022). 

 

  삶이란, 생명이란 궁극적으로 환경과의 ‘반응’과 ‘적응’일 테다. 자연에는 긍정도 부정도 없을 테다. 오직 지나침에 대한, 부족에 대한 끝없는 ‘균형’만이 있을지 모른다. 만일 있다면, 그 균형을 통한 안정이 긍정일지 모르겠다. 내가 최근 정동을 ‘반투과성 에너지’처럼 느끼는 것도 그 균형 감각을 체화하고픈 심정 때문일지 모른다. 딱 필요한 만큼만 투과하는 삶에 대한 기대 말이다. 마치 ‘새끼 서 발’ 속 인물들처럼 ‘실패’라는 개념 자체가 부재했던 우발적 사건의 연속과 그에 따른 결과에 충실한 삶과 같을지 모른다. 물론 나 역시 소란스러운 미디어 정보와의 마주침 속에, 작금의 실내종들과의 마주침 속에, 끊이지 않는 사회적 참사의 연쇄 속에 ‘투과’의 통로를 나로 모르게 ‘촘촘히’ 막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치 <더 글로리>를 시청하지 못하는 나의 정동적 상태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권두현(앞의 책:127)의 제안대로 ‘오염’에 대한 불길한 예측에서 벗어나 ‘협업’에 이를 수 있는 마주침에 내 몸을 열어두어야겠다. 

 

 

<참고문헌>

강성숙, 2023, 「연결성의 에톨로지로 본 ‘새끼 서 발’」,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산지니.

권두현, 2023, 「‘실내 우주’의 SF 에톨로지」,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산지니.

권명아, 2012,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갈무리.

권명아, 2020, 「젠더・어펙트 연구에서 연결성의 문제: 데이터 제국의 도래와 ‘인문’의 미래」,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 『약속과 예측: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 산지니.

권명아, 2023, 「<오징어 게임> 어펙트, 마주침의 윤리와 연결성의 에톨로지」,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산지니.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 2020, 『약속과 예측: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 산지니.

렘키, 애나(김두완 역), 2022, 『도파민네이션』, 흐름출판. 

마수미, 브라이언 (조성훈 역), 2018, 『정동정치』, 갈무리.

아메드, 사라, 2015, “행복한 대상” 멜리사 그레그⋅그레고리 시그워스 편(최성희⋅김지영⋅박혜정 역), 『정동이론』, 갈무리. 56-95쪽.

히켈, 제이슨(김현우, 민정희 역), 2021, 『적을수록 풍요롭다: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창비.

Mol, Annemarie, and John Law, 2004, “Embodied Action, Enacted Bodies: The Example of Hypoglycaemia,” Body & Society 10(2–3): 43–62.

 

 


 

* 이 글은 젠더·어펙트 총서 03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출간 기념 서평회 <마주치고 부대끼며 변신하는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로>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 일시 : 2023년 8월 9일(수) 저녁 7-9시
◎ 장소 : 온라인 화상회의 줌

https://genderaffect.net/15/?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5922492&t=board 

 

젠더·어펙트 총서 03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출간 기념 서평회 마주치고 부대끼며  '변신하

8월 9일 수요일, 젠더·어펙트연구소의 세 번째 총서인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가 출간된 것을 기념하는 서평회, '마주치고 부대끼며 변신하는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로'가 진행됩니다.산지니

genderaffect.net

 

김관욱

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자 가정의학과 전문의. 의료인문학 전공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랫동안 흡연과 중독, 감정노동과 건강에 대해 연구해왔으며 최근 몸, 수행성, 정동, 배치, 리미널리티, 의례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과학적 입증 가능성 너무의 피해자들(콜센터 상담사, 이주노동자, 흡연자, 부랑인 시설 입소자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폴 퍼머,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 줘』 『흡연자가 가장 궁금한 것들』 『굿바이 니코틴홀릭』 『아프면 보이는 것들』(공저)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공저) 『의료, 아시아의 근대성을 읽는 창』(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들』(공역) 『보건과 문명』(공역)이 있다. 

 

 


 

* 서평회 토론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녹취해서 소개합니다.

 

 

박준훈 : 김관욱 선생님께서 잠깐 언급하셨지만 서평에서 더깊게 주의해서 설명해주셨던 게 정동을 '반투과성 에너지'로 설명해 주셨는데요. 사실 저는 이 표현 역시도 정동에 대한 하나의 좋은 번역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부와 3부에서도 많이 다뤄지고 있지만 정동이 어떤 신체에 계속 각인되고 누군가는 안 좋은 경험들을 잊어라라고 말할 때 그게 본인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계속 몸에 남아 있게 되는 투과시킬 수 없는 에너지가 정동 되고 기존 인식론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이나 경험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반투과성 에너지는 내가 투과시키고 싶다고 해서 투과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투과시키기 싫다고 하더라도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 지나치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개념에 대해 어떤 것들을 더 주목해 보고 싶으신지 또는 어떤 논의들을 붙이고 싶으신지 설명을 이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관욱 : 서평에서 제시했었던 반투과성 에너지라는 말을 어떻게 알아보시고 이야기를 해주셔서 반가웠습니다. 저는 오늘 서평회 주인공이 아니긴 하지만 질문을 주셨기에 잠깐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저는 의학을 전공했고 노동자들의 건강과 관련된 연구들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몸에 관련된 논의가 가장 중심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연구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고통과 아픔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제 연구의 중심 주제가 되는데 어펙트 이야기는 사실 그러한 과정 안에서 모멸감이라든지 혐오 앞에서 위축되는 여성노동자의 몸에 대한 논의들을 풀어내기 위해서 쓰게 된 이론이고 사실 어펙트의 a자도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하다 보니 거기까지 흘러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반투과성 에너지라고 하는 용어를 쓴 것은 어펙트 개념이 사실 많은 논의들 중에서 마주침과 되기(becomming), 인류학 안에서도 비커밍을 강조하는데, 현장에서 제가 느끼는 불만이라고 하는 건 '되기'와 같은 긍정 에너지, 윤리라고 하는 것이 몸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많이 공부한 저에겐 (노동자의 몸이:편집자 삽입)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무한대가 아니고 결국에는 균형을 찾아야만 하는 형편이고 그 균형을 찾는 것도 사실 부서질 수 있는 한계점이 존재하는데, 제가 최근에 쓴 논문에서도 정동적 접수라고 하는 표현을 썼었는데 무조건적으로 마주침이 긍정을 이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나쁘지는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에너지의 흐름은 무한대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어딘가에서는 맞닿을 수밖에 없는 역치가 존재하는데 그 부서짐과 관련된 역치에 대해서 정동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위축된 상황에서 도망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위축되어지는 것 자체가 그분들에게는 생존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어펙트의 균형일 수 있거든요. 강하면 부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더욱더 강해지기 위해서 마주침을 더 늘려나가기를 요구한다고 해도 사실 그럴 수 없는 몸의 한계라고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들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었고 권명아 선생님이나 권두현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논의에서 생물학과 관련된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런 논의들 속에서 아주 놓치고 있는 지점 중에 하나가 균형이라고 하는 지점이지 않나 싶습니다. 균형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마주침이 되게 중요한 결과일 수도 있는데 그 결과에 대해서 균형이 무한대가 아님을 많이 놓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반투과성이라고 쓰고 사실 더 확장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끝내고 말았는데, 차후 계기가 있으면 그런 논의를 소개할 수 있는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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