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정동’(affect) 번역의 어려움 (채석진)

1. ‘정동’의 번역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의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2023)는 젠더 연구에 정동 이론을 접목시키려고 시도로, 서론과 13편의 연구를 묶었다. 이 글은 4부에 실린 세 편에 관한 서평이다. 2000년대 유럽 인문사회에서 기존의 비판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본격화되었는데, 정동 연구는 이러한 시도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정동’(affect)이라는 용어는 이항대립적인 인식론에 기반한 추상적이고 고정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행위자들의 연결망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을 연구하기 위한 개념적이자 방법론적인 도구로 진화하였다. 지난 이 십년 동안 ‘정동’은 세계적으로 주요한 학술 용어이자 연구 분야로 자리잡으며, 다양한 나라에서 채택 및 번역되어왔다. 한국에서도 2010년대 이후 ‘정동’ 개념이 본격적으로 확산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정동 이론을 채택하여 새로운 연구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의 학술 분야에서 진화해온 개념을 ‘번역’(translation)하여 한국의 학술 분야에 접목시키는 것은 대단히 도전적인 일이다. 여기서 번역은 단순히 외국 단어를 한국 단어로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해당 사회의 연결망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전환되는 과정을 포함한다. 즉, 번역은 특정한 생각/개념/물건 등이 특정한 행위자에 의해 채택하여 특정 사회의 연결망 속에서 다르게 수정 및 변형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유럽 인문사회 분야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affect’이라는 학술 용어를 한국 인문사회분야에서 채택하여 번역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4부의 소제목 “능동인 수동, 수동인 능동: 몸 둘 바와 어펙트”는 ‘능동-수동’의 이분법적 인식틀을 넘어서, 몸으로 마주하는 상황과 관계 속에서 생성하는 에너지로서의 정동 개념을 담고 있다. 4부에 묶인 세 편의 글은 사회학, 사회복지학, 국문학 연구자들의 작업으로, 공통적으로 한국사회의 젠더 권력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첫 번째 글, 최이숙의 「팬데믹 시대, 그녀들은 왜 새벽에 일어났을까?」는 자기계발 강사가 운영하는 새벽 5시 기상 챌린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성들을 인터뷰한 자료를 토대로, ‘새벽 5시 기상 챌린지’ 참여를 2030세대 여성들의 시간 관리 전략과 신자유주의적 주체 실천으로 조명한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매개로 구성되는 멘토-멘티 관계, 새벽 기상 실천을 통한 자존감 구축, 성공 전략 온라인 학습 시장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구성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저자는 유자녀 여성들 새벽 기상을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자, 시간 빈곤에 대응하는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새벽 시간 활용을 통한 “임파워먼트” 감각과 결합된 신자유주의적 실천을 어떠한 이유로 2030 세대의 특성으로 규정한 건지,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시간 실천에 대해 저자의 논의는 기존의 비판적 입장과 논의(저자가 기술한 선행연구들)와 어떠한 차별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두 번째 글, 박언주의 「가정폭력 맥락에서의 빚과 빚짐에 대한 시론」은 가정폭력과 빚에 관한 선행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논하고, 향후 가정폭력 맥락에서의 빚과 빚짐의 대한 논의에서 고려해야할 점은 제시한다. 박언주는 가정폭력과 빚에 관한 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안할 수 있는 관점과 방법으로서 정동 연구를 활용하고자 한다고 밝히며, 정동을 상호연결된 신체의 능력을 변형시키는 힘으로, 정동 연구를 개인적 심적 상태가 아닌 사회적-관계적 과정들에서 펼쳐지는 관계적 정동을 살피는 것으로 밝힌다(435-6쪽). 이후 저자는 가정폭력과 가게 부채(빚)의 관계에 관한 선행 연구를 기술하고, 부채를 젠더 권력 관계에서 가해자 남성이 피해자 여성에게 강요한 빚으로 논의한다. 이후 이러한 빚이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부정적인 정서를 강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글의 후반부에서 박언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빚에 대한 논의에 대안적인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빚짐’ 논의를 접목하고자 하는 듯하다. 저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가정폭력에서의 강요된 빚과 관련된 정동이 어떻게 연대를 구축할 수 있는 ‘빚짐’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일까?”

 

세 번째 글은 이소영의 「페미니즘은 그 이름이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양귀자의 소설에 드러난 시스템과 적대의 문제를 중심으로」는 신당역 역무원 살해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시작으로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가 금지된 것을』에 대한 작품분석에 정동 연구를 접목하려고 시도한다. 앞부분은 양귀자 소설의 『나는 소망한다...』의 특정 정동이 ‘페미니즘 대중화’라는 정치 동원 방식에 영향을 미쳤고, 그러한 정동이 작가의 삶과 1980년대, 1990년대 초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458쪽). 이것을 “동시대성과 작가와 당재의 특정한 연대기적 지점까지 아울려 살피”는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시스템과 인간 사이의 적대적 정동을 양귀자의 이전 작품 속에서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마지막 부분은 ‘성차’의 문제를 지적하며 다시  『나는 소망한다...』로 돌아와서 그 안의 시스템에 대한 적대적 정동의 변화를 기술하는 듯하다. 저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문학에서 텍스트 분석 방식(에컨대, 김근태 수기와 양귀자 작품의 유사성 분석)이 어떻게 정동 연구와 결합할 수 있는 것일까?

 

 

2. ‘젠더’와 ‘정동’의 불편한 만남 

 

세 논문은 각기 다른 분야(미디어/사회학, 사회복지학, 국문학)의 연구로, 젠더 권력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각 분야별로 상이한 연구 방식의 특성이 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서, 이 세 편을 정동 연구의 개념적 틀과 분석틀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많이 들었다. 또한 이 세 편을 묶는 4부의 소제목이 어떠한 이유로 정해졌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세 편의 연구가 어떠한 의미에서 기존의 젠더 연구를 넘어서는 ‘정동적 전환’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파악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듯이, 모든 용어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채택 및 수용되며 또 다른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되어 사용되는 용어에 있어서의 일관성을 구축하는 것이 학술적인 논의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즉, 누가 어떠한 논의에서 사용한 개념을 가져와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세 편의 글은 다양한 의미의 정동을 파편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또한 실제 사례 연구에서 발견한 내용들이 어떻게 정동 연구와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감정’과 관련된 부분에 정동이라는 라벨을 다양하게 붙여놓은 상태로 보인다. 각각의 연구가 어떠한 측면에서 정동 연구의 주요한 특성을 접목시켜서 진행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논의와 기술이 필요해 보인다.

 

2000년대 유럽 인문사회 분야에서의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은 이전의 ‘문화적 및 언어적 전환’에서 추구하였던 인지적 접근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현재 사회(the social)가 구성되고 있는 과정을 이론화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Gregg & J.Seigworth, 2010; Hemmings, 2015; Massumi, 2015; 채석진, 2018). 이는 특정한 고정된 체계로서의 사회(society)가 아닌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상호작용으로서의 사회(the social)에 대한 탐사이다. 헤밍스(Hemmings, 2015)가 지적하듯, ‘문화적 전환’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지 않는 것, 즉 물질적인 것과 정동적인 것을 제외함으로써, 사회적 공간의 체화된 경험인 텍스처(texture)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었다(p. 147). “텍스처”는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끌어당기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비판 이론은 개인성과 공동체의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경험의 결들을 잡아내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권력-저항, 공적-사적 등과 같은 이분법적 구분들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Hemmings, 2015, p. 148). 즉, ‘정동적 전환’은 구조, 실천, 물질, 정동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의 관계가 새롭게 구성되며 형성되는 변화를 연구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로 채택되어 왔다(Hipfl 2018, p.5).

 

서문에서 권두현이 이 책이 ‘다양한 몸들의 마주침’과 ‘되기 과정’을 정동 이론을 적용하여 탐색한다고 밝히고 있다. 정동은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헤밍스(Hemmings, 2015)에 따르면, 정동 개념은 크게 미국 심리학 분야에서 발전한 개인적인 몸의 상태와 감정으로서의 정동 개념과 유럽 철학(스피노자)을 기반으로 발전한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정동 개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접근 모두 개인적인 신체적 상태로서의 정동과 사회적 과정에서 작동하는 힘으로서의 정동은 서로 선명하게 구분되기 어려운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동 연구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분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서문에 권두현이 기술한 “마주침과 되기 과정”으로서의 정동은 유럽에서 발전해온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정동 개념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 인문사회분야에서 정동 연구는 우리의 삶은 수 많은 관계들 속에서 인간적/ 비인간적 대상들과 조우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복잡성과 변동성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시도로 구성되었다. 유럽에서 발달한 정동 연구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주요 이론가들(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보다 최근에는 브라이언 마쑤미)은 스피노자의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능력”(ability to affect and be affected)이라는 정동 개념으로 시작한다. 영향을 주는 능력과 영향을 받는 능력은 일반적으로 주체-대상이라는 항목으로 구분되어 각자 고립되어 논의되는 경향이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둘은 실제 동일한 이벤트의 두 측면으로, 하나의 사건은 이들 사이에는 역동적으로 발생하는 감흥(affection)이 존재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영향을 주고 받는 능력은 전환(transition)을 이끄는데, 이러한 전환 속에서 몸은 하나의 능력(capacitation)의 상태에서 축소 또는 증강된 상태로 넘어간다(Massumi, 2015, p. 48). 이와 관련하여, 힙플(Hipfl, 2018, p. 7)은 정동 개념의 핵심적인 부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정동은 몸의 잠재성으로(Gregg & J.Seigworth, 2010, pp. 2-3)으로, 몸들이 영향을 받고 행동으로 전환하며 영향을 미칠 역량으로 전환하는 것은 마주침의 힘들 속에 있다. 따라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몸의 역량은 몸 자체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맥락 속에서 정해진다. 따라서 “정동은 그 자체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무엇이 아니다. 문제는 정동이 무엇을 하느냐로, 행동하고 연결하는 역량을 향상시키는지 혹은 감소시키는지에 있다” (Hipfl, 2018, p. 7). 몸들은 끊임없는 마주침(encounters) 속에서 영속적으로 변화한다. 이를 통해 정동 연구는 개인적인 신체적 상태로서의 정동과 사회적 과정에서 작동하는 힘으로서의 정동이 서로 선명하게 구분되기 어려운 것임을 강조하며,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분을 넘어서려는 시도한다.

 

4부의 소제목 “능동인 수동, 수동인 능동”은 능동/수동의 이분법을 넘어서, 하나의 성질이 하나의 물질에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주침 속에서 정의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나의 질문은 이러한 능동-수동의 넘나듦과 역동이 세 편의 글에서 어떻게 기술되고 있는지이다. 물론 서문에서 이 책의 초점이 “정동이 무엇인가”보다 “정동이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세 편의 글 모두 ‘정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새롭게 힘을 얻기보다는, 글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분석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또 다른 주요한 질문은 ‘젠더’라는 개념이 어떻게 ‘정동’ 개념과 접목이 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정동 이론은 기존의 문화주의적인 ‘젠더’ 개념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진화하였는데, 이 책은 정동 이론이 비판하였던 젠더 개념을 나란히 병치하고 있다. 이 둘이 어떻게 결합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서문과 4부를 기분으로 질문드립니다). 이러한 젠더 연구와 정동 연구 간의 불협화음은 4부에 실린 세 편에 그대로 드러난다. 세 편 모두 중요하고 흥미로운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정동 연구가 비판하고 있는 ‘주체’ 중심 논의, ‘사회적 요소’의 영향에 관한 논의, 고정된 사회 체제에 대한 전제, 개인이 속하는 단일한 집단에 대한 전제(2030세대) 등 인식론 및 방법론적인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 점에서 세 편의 논문은 ‘젠더 연구’라고 할 수 있지만, ‘정동 연구’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저자들에게 자신의 글이 어떠한 측면에서 ‘정동적 전환’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어떻게 기존의 연구를 변형하셨는지에 관해 묻고 싶다.

 

 

<참고문헌>

채석진 (2018). ‘잔혹한 희망’: 디지털 페미니즘의 정동. <언론정보연구>, 55(3), 87-119.

Gregg, M., & J.Seigworth, G. (Eds.). (2010). Th affect theory reader.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Hemmings, C. (2015). Affect and feminist methodology, Or what does it mean to be moved? In D. Sharam & F. Tygstrup (Eds.), Structures of feeling. Affectivity and the study of culture. Berlin: De Gruyter.

Hipfl, B. (2018). Affect in Media and Communication Studies: Potentials and Assemblages. Media and Communication, 6(3), 5-14. 

Massumi, B. (2015). Politics of affect. Cambridge: Polity Press.

 

 


 

 

* 이 글은 젠더·어펙트 총서 03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출간 기념 서평회 <마주치고 부대끼며 변신하는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로>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 일시 : 2023년 8월 9일(수) 저녁 7-9시
◎ 장소 : 온라인 화상회의 줌

https://genderaffect.net/15/?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5922492&t=board

 

젠더·어펙트 총서 03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출간 기념 서평회 마주치고 부대끼며  '변신하

8월 9일 수요일, 젠더·어펙트연구소의 세 번째 총서인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가 출간된 것을 기념하는 서평회, '마주치고 부대끼며 변신하는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로'가 진행됩니다.산지니

genderaffect.net

 


채석진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유럽 인문사회 전통에서 발전해 온 기술연구, 미디어 인류학, 문화연구, 페미니스트 연구를 결합하여 디지털 미디어와 일상의 관계를 연구해왔다. 최근 연구로는 "스마트폰 딸노릇하기: 북한 초국가적 가족 실천과 이동전화"(2023), "집, 일상, 감시: 팬데믹 시기 집의 재구성과 감시돌봄 실천 연구"(2022), "기다리는 시간 제거하기: 음식 배달앱 이동노동 실천에 관한 연구"(2021) 등이 있다.

 


 

* 서평회 토론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녹취해서 소개합니다.

 

권두현 : 모든 서평들이 귀에 들어왔지만 마지막에 발표해주시기도 했고 채석진 선생님의 서평에 여러 질문들이 강조되어 있어서 그 내용부터 조금 말씀드리면서 전체적으로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목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신자유주의체제에 대한 고려가 있기는 했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체제로 환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적절치 않겠다 싶어서 그런 제목을 회피한 게 있었고요, 젠더어펙트 연구는 이 차이를 가지고 있는 몸들의 경험을 통해서 자유주의나 아니면 글로벌리즘이라고 하는 보편주의적인 맥락에 균열을 가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신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어떻게 보면 그 자체만으로 익숙한 또는 보편적인 정동연구처럼 보이지 않는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연구자 자리에서 청한 정동연구를 요청하고 있고 가능성 이런 것들을 잠재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공동연구를 지금 4년째 수행하고 있는데 이게 어떤 상호 합의된 이론적인 프레임워크를 계속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고 사실 구체적인 사례를 새로운 근거로 삼아서 어펙트 연구가 아니라 젠더・어펙트연구의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보니까 균질하지 않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정동의 정의를 먼제 제시하고 이를 입증하는 그런 방식, 그러니까 이 연구들이 정동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기보다 각자의 연구대상에 정동적으로 접근해가는 궤적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려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자기계발이라고 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종속 상태가 아니라 담론 너머에서 몸을 움직이는 각자가 있고 공동체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잖아요. 그런 힘에 대한 주목이기 때문에 정동연구의 측면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그래서 신용이나 부채라고 하는 자본주의적인 등급화의 논리가 아니라 신뢰감, 부채감이라고 하는 정동적인 관계나 결속의 방식 같은 걸 고려했을 때 분명히 상통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사실 챕터에 배치되어 있는 원고들이 다른 원고들과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 측면이 있고, 3부도 그런 측면을 다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대만, 한국이라고 하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산출된 연구들이지만 각각의 독립성을 갖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산출된 연구와의 맥락 속에서 보다 풍부한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성의 신체를 가소화하려고 하는 그런 다양한 압력들이 존재하고 그 압력에 저항하는 형태로 여성의 신체가 싸움을 통해서 계속해서 재형성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이런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서로 이론적인 프레임워크를 정교하게 가져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싸움의 역사 , 싸움의 질이 이런 것들을 폭넓게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권명아 : 크게 두 가지 정도 말씀드리면 좋을 거 같습니다. 첫 번째로 김관욱 선생님께서 1부 서평해 주시면서 사실 선생님 논문이 이론적으로 어펙트를 방법론 삼아서 다루고 있지는 않는데 사실 논문에 담겨 있는 문제의식이나 방향성이 저나 권두현 선생님의 논문이 어떻게 배치되는가를 너무 잘 읽어주셔서 상당히 반가웠습니다. 그러니까 물론 이게 저희 전체 공동연구 저자의 성격이나 이런 것과도 관련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것뿐만 아니라 젠더어펙트 연구가 어떤 식으로 학계에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과도 관련이 있는데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저희 총서에 있는 원고가 다 이렇게 공동연구의 모든 걸 갖추고 있다는 말씀을 드릴려는 건 아니고, 통상적으로 공동연구라고 하면 해당 주제라든가 관련된 방법론들이 조금 균질하게 서로 추구되면서 나아가는 게 훨씬 이상적일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함께 참여하는 연구자 선생님들이 어떤 부분들에서는 어펙트 연구를 자기 분야 언어로 완전하게 방법론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그런 데서 생기는 문제라고도 생각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한국에서 어펙트 연구가 진행된 지 10년이 훨씬 넘어가고 있잖아요. 거의 2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과도 관련되어 있고 그게 또 문제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엔솔로지 같은 걸 편찬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동연구를 하면서 엔솔로지를 기획할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어펙트 연구에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배치의 맥락에서 사실 어떤 논문이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따라서 그 문제의식들이 다르게 연쇄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 공동연구가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어 봐도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젠더나 어펙트 연구를 먼저 시작한 사람이 아젠다를 펼치면 그걸 받아서 연구하는 식과는 구별되는, 연구를 함께 해나가는 장을 만드는 것도 어펙트 연구에 굉장히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저희가 이 총서 말고도 여러 개의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세미나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계속 조금 나누고 계속 시도해 보고 하기 위해서 굉장히 긴 시간을 일종의 실험을 해보고 있는데요, 거기에서도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게 필요하겠다라는 응답 같은 것들을 받게 되는 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많은 분들께서 질문해주신 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최근 여러 논문으로 논의하고 있는 이른바 정동적 전환 이후 정동연구를, 사실은 저희는 초창기부터 젠더어펙트연구라고 하는 이름으로 새로운 네이밍을 만든 것인데요. 그러니까 초기부터도 앞에서 선생님들이 도대체 정동이 뭐냐 이런 질문들, 반복되는 질문이나 번역어에 대한 논란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얘기해주셨지만 사실은 번역어 논란 자체도 정동연구에 대한 여러 가지 정치적인 해석과 그런 걸로 환원되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이미 정동에 대한 번역 논쟁, 길고 긴 번역 논쟁 자체가 굉장히 배타적이고 이론의 원천에서 소수자 연구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발휘했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비판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번역되어서 잘 알고 잇는 것들도 사실 어펙트 연구는 젠더이론을 거치지 않으면 쓸 수 없다고 명확하게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거의 그런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아주 초기 번역어 논쟁부터 한국에서의 반페미니즘적인 태도에 대해 계속 비판을 해왔는데요, 기존 다른 지역, 유럽과 또 영어권이나 비영어권에서의 어펙트 연구를 보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이제 몇 년에 걸쳐서 어펙트 논의가 진행되면서 비슷한 문제제기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특히 거의 비슷하게 이런 정동적 전환이라는 게 마치 스피노자-들뢰즈 이론에 의해서 주체가 사라진 이후 몸들의 유니버스가 우리 앞에 펼쳐진 것처럼 마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거기서 말하고 있는 몸들의 유니버스 안에서 오랫동안 소수자들은 몸으로도 간주되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유니버스 바깥의 존재 사물이거나 구멍이거나 자연이거나 그런 존재로 배척되었고 사실은 그 몸들의 유니버스를 비판적으로 재구축해온 논의들이 사실은 어펙트 이전에 이미 어펙트 연구의 계보들을 만들어 왔었는데 어펙트 연구 턴이라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몸을 보편적인 신체로 다시 환원했다. 그래서 저희는 그것을 보편적 어펙트 연구라고 비판적인 의미로 규정하고 조금 더 자극적으로 젠더어펙트 연구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말하자면 어펙트 연구를 젠더화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제 젠더 연구를 어펙트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전자의 관점도 아직 잘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어펙트 관점으로 볼 때 젠더는 어떻게 재구성되는가, 사실 페미니즘과 젠더 연구하는 분들도 크게 관심 없는 부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는 오히려 다양한 분야에서 그런 문제의식들을 가진 연구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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