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장르문학에서 어렵지 않게, 카르밀라나 드라큘라 같은 흡혈귀,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나 지킬 박사와 같은 사이보그 등 이질적인 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19세기 초중반 영미문학을 통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공포스럽거나 역겹고, 정상성이나 젠더 규범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이들의 퀴어한 모습은 대중적인 미디어에서 뿐만 아니라 ‘본격 문학’ 장르에서도 반복적으로 재활성화되거나 변용되곤 합니다. 이들의 신체는 정상 범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증오와 같은 정동을 촉발시키고 감정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이질적인 몸들을 둘러싼 이 같은 감정의 인과관계를 전치하여 설명합니다. 문학 속 괴물들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 소수자들의 인상을 두고 아메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공포스럽고, 역겹고, 증오스러운 누군가의 몸은 몸 자체가 이질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부정적 정동이 들러붙어 있기 때문에 이질적인 신체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라 아메드는 증오의 작동 방식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특정한 타자가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는 과정은 과잉결정된다. 즉 단순히 누구나 증오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연상작용을 구조화하는 과거 역사는 마주침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마다 다시 작동하며, 이에 어떤 몸과 마주치는 경험은 이미 더욱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126쪽)
증오는 대상의 신체로부터 근거를 발굴하고, 그 근거가 사실이라 믿게 만들며, 그 근거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순환합니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이나 『카르밀라』 같은 작품들 속 괴물의 형상을 여성, 이주민, 비백인 인종, 성소수자의 은유로 읽어낸 독해들은 이미 소수자들의 몸을 향하던 부정적 인상들이 소수자들의 몸을 괴물로 간주하게 만든 역사를 인식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메드는 감정과 기표의 순환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특정한 역사, 사건으로부터 부정적 정동들의 작동을 추적합니다. 이는 앞서 예로 든 증오에 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색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아메드는 이 책에서 감정, 정동, 사랑, 상처 못지 않게 역사를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끈적임을 역사성과 연관시키는 일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이 현재 시점에는 ‘끈적이지’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끈적임이 효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200쪽)
즐거움은 접촉을 둘러싼 과거 역사에 의해 이미 형성된 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접촉에 관한 것이다.(355쪽.)
나는 경이가 세계의 표면이 만들어진 흔적을 알아차리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즉 경이는 역사성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을 드러나도록 한다.(384쪽.)
아메드가 역사를 언급할 때 주의를 기울이는 지점은 바로 그 역사(성)가 은폐되거나 망각된 채 감정이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아메드가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는 바로 정동이 대상을 순환하며 작동시켜온 ‘감정의 역사’입니다. 과거로부터 지속되고 반복되어 온 대상에 대한 감정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새롭게 등장한 기호인 것처럼 여겨질 때, 감정이 작동해온 역사는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각 장의 첫머리에서 특정한 시기, 사건을 둘러싸고 발생한 텍스트들을 제시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각 텍스트들이 표출하는 감정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실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아메드가 지속해서 언급하는 “상처의 문화”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책의 1장에서부터 등장하는 상처의 문화는, 고통이 주는 상처를 물신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고통은 곧 상처로, 상처는 “특권을 보장하는 자격”이자 “정체성”으로 변형됩니다. 그러나 이는 “‘상처를 입고’ 피해를 겪은 역사”로부터 그 고통을 단절시킵니다.(82쪽.) 따라서 아메드는 “상처를 입게 된 [역사적] 과정을 잊어버림으로써 물신화를 되풀이하는 일이야말로 더 커다란 부정의”라고 주장합니다.(135쪽.)
아메드가 지속해서 우려를 표하는 위험은, 과거와 단절된 것으로서 현재의 감정들을 이해할 때 미래가 오랜 기간에 걸쳐 저항해온 과거의 폭력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위험입니다. 감정이 역사와 단절될 때 재생산되는 미래는 고통의 역사를 되새기는 대신 상처를 보상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하는 미래, 과거로부터 지속된 증오를 망각한 채 우리를 보호하기 급급한 미래입니다.
공포를 불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특정한 이들만 공간을 활용하도록 만드는 일은 공간을 영토로 바꿔낸다. 이렇게 영토로 바뀐 공간에 대한 권리는 특정한 이들만이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공간의 이성애화heterosexualisation 과정과 공간의 인종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유와 공포를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정치적 수사가 점점 늘어나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는 새로운 자유new freedom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동의 자유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161쪽)
인용한 부분에서 아메드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동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자유’가 실제로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몸의 자유를 박탈하던 기존의 체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허황된 구호 뒤에 은폐되어 있는 사실은 기존의 자유가 이미 특정한 몸들에게만 용인된 자유였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공포라는 감정이 순환하며 갖는 효과는 기존하는 자유를 새로운 것으로 제시하는 것, 즉 기존의 이동 체계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이 역사화되기도 하지만, 이는 주로 특정한 주체가 피해를 입은 서사로서 역사화입니다. 예컨대 수치심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생성하거나, 국가에 대한 사랑을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피해의 서사가 작동할 때 상처는 국가적인 것으로 역사화됩니다. 상처가 발생하게 된 역사와 그 고통을 파편화시켜서 부분적으로만 유통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동일시를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비백인 인종, 이민자, 퀴어는 다시금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활용해 이상적 삶을 지향하도록 포섭하려는 시도는 퀴어에게 강요되는 규범적 이성애와 젠더 규범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9·11 기록물에서 퀴어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퀴어의 존재 자체가 국가 차원의 역사에서 남겨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을 확인시켜줍니다. 이처럼 과거의 기록들에서 퀴어 존재를 확인하기 어려운 이유는 퀴어의 상실이 가치 있는 것의 상실로서 기록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퀴어의 삶과 퀴어 느낌은 역사화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퀴어는 생물학적 재생산의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문화적으로도 재생산될만한 가치가 있는 삶으로 존중받지 못합니다. 이상적 삶의 각본에 따르지 않고, 이를 지향하지 않는 퀴어한 삶은 ‘재생산’을 중심으로 구성된 위계에서 주변부에 놓입니다. 이와 반대로 반복될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행동’만이 미래에 주어질 보상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이상으로 추구됩니다. 따라서 미래의 보상이 허락되지 않은 퀴어 즐거움은 반복될만한 가치가 없는, 일시적인 유희로서만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퀴어 상실이 과거에 발생한 상실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대신 상실을 나누고 지속해가는 삶인 것처럼, 퀴어한 삶과 퀴어 정치가 약속하는 희망은 이상적 삶인 각본과 불편한 관계를 살아낸 과거의 기록으로서 몸과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가는 삶의 가능성에 있습니다.
감정의 탈역사화에 대한 아메드의 비판은 이를 작동시키는 구조적 맥락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갑니다.
나는 감정을 문화정치로 살펴보는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감정을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다루는 방식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이 강화되는 지점을 무시한 채 사회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을 비판하려고 한다. 사회구조는 강화된 감정 없이 존재 양식으로 물화될 수 없다.(46쪽)
예컨대 아메드는 다른 논자들과 유사하게 증오범죄에 대한 처벌이 증오가 작동하는 구조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채, 특정한 존재·행위에 책임을 묻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합니다. 증오범죄에 대한 우려는 증오의 탈역사화가 실은 구조적 차원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한정짓는다는 측면에서, 구조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가로막히는 것에 대한 우려로 확장됩니다. 개별 존재에게 증오범죄의 책임을 묻는 대신, 우리는 사법 체계를 비롯한 사회구조가 이미 증오를 하는 몸에 연루되어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주장은 증오범죄를 수행한 몸의 관점을 확산하지 말라는 주장으로 읽힙니다. 구조적으로 가해자의 서사가 반복되고 확산될 때, 증오 받는 몸이 겪어낸 “부정의의 정동적 삶”(131쪽)은 가려져 버립니다.
이 책에서 아메드가 주로 비판하고 있는 구조는 국가를 둘러싸고 작동하는 정동경제입니다. 이는 아메드가 오드리 로드나 프란츠 파농의 사례를 제외하곤 지속해서 국가 단위의 사건과 그에 연관된 텍스트들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아메드가 이야기하는 “감정의 문화정치”란, 특정한 고통과 피해만을 역사화한 채 이상적이지 않은 신체들이 겪어온 고통, 피해, 상실의 역사를 지워버리는 투자들을 뜻합니다. 이런 사례는 이주민의 급증이나 9·11테러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재활성화되는 익숙한 미래로 나타납니다.
책의 결론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그로 인한 피해에는 개인적 차원의 피해도 포함됩니다. 다만 아메드는 상처를 보상하는 것을 주장하는 대신 개인적 차원의 피해를 드러내고 이를 가해자가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보다 정의를 회복re-cover하는 길이라 주장합니다. 이런 경우에 개인적 차원, 국가적 차원을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을 오로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개인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관한 개별 인격체의 문제로 이해할 때, 감정의 효과가 지닌 구조적 특성은 감춰진다.(423쪽)
위의 인용문은 감정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감정의 효과 역시 개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감정은 구조적인 효과를 가집니다. 이 구조적 효과는 감정을 개인적인 것이라 간주하지 않을 때 그 특성을 드러냅니다. 특수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구조에 의해 국가적인 것으로 재활성화된 이 감정은 국가적인 것, 보호해야 할 ‘우리’, 이상적 삶의 각본과 동시에 이들의 ‘외부’를 재생산합니다. 이를 호명하는 구조는 다시 감정을 개인에 한정된 것이라 설명함으로써 그 사회적 순환의 효과와 역사성을 감추어버립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남았습니다. 아메드가 감정이 몸과 기호 사이 순환을 분석하기 위해 주로 프로이트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이나 상품과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메드가 지속해서 각각의 감정이 그 대상에 동일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고 분명히 차이가 발생한다고 서술하고 있긴 하지만, 개별 사례의 특수성보다 보편화된 설명을 지향하는 이러한 이론들을 분석에 접목시키는 탓에 이 책은 감정의 역할과 효과에 대해 보편적 설명을 제공하려는 책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덕분에 보다 효과적으로 구조와 역사를 은폐하는 감정의 작동 원리를 비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같은 감정의 순환 구조를 일반화하여 적용할 위험이 뒤따릅니다.
당장 현재 시점의 지배적 감정 규범이자 이상적 감정이라 할만한 ‘행복’조차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화제가 된 감정이라고 『해피크라시』(에바 일루즈・에드가르 카나바스, 이세진 옮김, 청미, 2021)는 지적합니다. 그러나 감정의 기원을 발굴하고 그 감정의 변화 추이를 기록하려는 작업 이상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감정이 불러일으키는 효과입니다. 예를 들어 아메드는 ‘행복’이라는 동일한 감정을 두고 『행복의 약속』(사라 아메드, 성정혜・이경란, 후마니타스, 2021)에서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이주민의 정동이 행복의 각본으로부터 배제됨에 따라 그들이 정동 이방인으로서 남겨진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는 ‘행복’이 감정이자 삶의 각본으로서 그로부터 배제된 몸들을 생산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각본으로부터 배제된 삶 또는 몸들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산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메드의 이 같은 설명 방식은 서두에서 언급한 장르문학 속 이질적인 몸들에 대해서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문학계에서는 사이보그나 흡혈귀에 대한 상상력은 미디어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간주하곤 합니다. 많은 논자들은 기존 문단 체계에 대한 비판이 가시화되면서 이런 상상력이 급증한 것으로 파악합니다. 미디어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는 주장에는 미디어 속 이질적인 몸들은 과연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쳤는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조금씩 이들이 여성, 이방인, 노동자, 성소수자의 은유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이 재현의 역사와 재현을 둘러싼 감정의 순환을 보다 면밀히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박준훈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젠더·어펙트 연구소> 연구보조원.
한국 현대문학과 문화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소수자의 정동과 대안적 글쓰기, 리터러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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