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이는 감정: 세계의 표면을 만든 힘이자 재배치의 잠재성을 지닌 힘 (송혜림)

사라 아메드, 시우 옮김, 『감정의 문화정치』, 오월의봄, 2023

순환하며 강화되고 축적되는 감정 


『감정의 문화정치』는 감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기보다 감정이 무엇을 하는지의 문제를 치밀하게 붙잡는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정동경제를 논한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이 개인의 내면에 실존하는 것으로 여겨온 통념과 반대로 감정의 '밖에서 안으로' 작동하는 방향성을 주장한다. 이는 기존의 사회학적 감정 모델과 유사해보이지만, 감정을 개인 외부에 실존하고 동시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본 전제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메드는 감정이 개인의 안 또는 밖 어디에 존재하느냐에 대한 논쟁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녀에게 보다 의미 있는 작업은 감정이 애초에 '안과 밖'을 결정짓던 표면과 경계를 형성하는 역학에 주목하는 것이다. 감정은 대상과의 접촉의 간극과 강도, 형태를 설정하며, 대상들 간의 물리적 간극을 좌우하고 세계의 공간을 구획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감정은 기호와 대상, 몸들 사이를 순환하며 강화되고 고유한 가치를 축적한다. 감정의 이러한 역학을 아메드는 '정동경제'라 칭한다. 이때 아메드가 예리하게 주시하는 것은 이렇게 순환되는 감정이 '물신화'될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감정의 생산되고 순환되는 데에는 주체와 대상에 선행하는 역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감정의 역사성이 지워질 때 감정은 물신이 되며 대상 '안'에 내재하는 속성으로 인식되기 쉽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특정 주체로 인해 기인한다고 여기는 증오와 혐오의 논리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이 어떤 대상에 의해 창출된 '결과'로 보거나 교환 가능한 '재화'로 취급된다면 감정의 현재적 의미를 형성한 역사성은 탈맥락화된다. 아메드의 분석이 갖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감정을 통해 자연화된 세계의 표면을 누적된 역사의 흔적으로 읽어낼 수 있게 하며, 감정을 사회문화정치의 계보적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관점이자 방법론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성공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감정의 문화정치』는 호주의 '빼앗긴 세대'에 관해 그들의 '고통'이 몸으로 표면화되는 세계를 형성하는 양상(1장)과 이들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화해의 제스츄어 속 양가적으로 작동하는 '수치심'의 효과(5장)를 보여준다. 난민을 '침범하고' '범람하는' 기호들로 수식하면서 이들의 몸을 '증오'의 형상으로 잇는 순환의 효과(2장)는, 테러의 '공포'를 테러리스트 '일 수 있는' 몸에 귀속시키는 정동경제(3장)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권리'와 '안전'을 담보로 감시와 규제, 구속을 정당화하는 정치의 토대가 된다. 원주민, 난민, 이주민 등 타자의 몸은 '역겨움'의 끈적거리는 기호가 들러붙어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리는 대상으로 변모한다(4장). 국가가 주창하는 다문화주의적 '사랑'에는 국가적 이상의 실현이란 조건이 전제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상을 훼손하는 타자들은 애초에 이 논의에서 배제된다(6장). 축적된 정동의 전이를 통해 특정한 몸의 표면이 형성되는 양상을 분석하는 아메드의 논의에서 핵심은 경계의 구성이다. 이는 권리를 가진 '우리', 지켜야 할 '사회', 이상적인 '국가'와 아닌 것의 구획이다. 부정적 정동이 누적된 특정 몸들은 자유롭게 출현하고 점유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이 협소해진다. 부정적인 시선과 움직임, 공격적인 발화에 노출될수록 그들의 몸은 위축되고 취약해지며 일상에서부터 제도적, 법적 차원에 이르는 전 영역에서 이들에 대한 차별은 정당화된다. 즉 "우리가 세계로 경험하는 표면과 경계를 물질화"하는 감정은 권력이 되기도 하고 규범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의 순환을 통해 아메드는 궁극적으로 감정이 국가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체계적 방식의 토대가 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는 왜 이다지도 어려운가'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감정의 순환은 텍스트 분석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아메드는 담화문, 정부의 공식 보고서, 온라인상의 기고문과 단체 소개 글 등을 재료 삼아 환유와 비유를 통해 서로 다른 '형상'이 달라붙고, 이러한 연합이 창출하는 감정적 효과를 선명히 한다. 감정이 수행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감정의 효과가 선행하는 오랜 역사와 '접촉'하기 때문이다. 아메드가 분석하는 감정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성별화된 역사와 깊은 관련"(363)이 있다. 또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차별과 억압, 폭력의 역사는 기호에 의해 연상되고 이 기호를 순환하면 할수록 감정의 강도는 더해진다. 그렇기에 아메드의 한탄처럼('변화는 왜 이다지도 어려운가') 감정이 형성한 세계의 표면은 변화되기 어렵다. 

한국이란 '국가'의 형성도 마찬가지이다. 국내에도 부정적 기호와 특정 몸들 사이의 끈끈한 관계의 역사를 연구한 계보학적 작업이 존재한다. 일제 시기 풍속 통제에서 출발해 근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풍기문란자'는 선량하고 모범적인 시민과 반대되는 통제되어야 할 비국민의 몸을 형성해왔다(권명아, 『음란과 혁명』, 2013). '빨갱이'는 반공 체제의 '국민'과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전면화된 지칭이었으며, 강력한 혐오와 비하와 결합하여 박멸해야 할 '적'을 규정하는 기호로 순환되어 왔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2009). 그 외에도 다양한 연구들이 존재한다: '넝마주이'나 '문둥이', '불구'는 더럽고 역겨운 몸으로, '탈북자'나 '이주노동자', '난민'은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몸으로 공동체에서 쫓겨났다. '위안부'와 기지촌의 '양공주'는 수치스럽기 때문에, '성소수자'나 '트렌스젠더'는 비정상적이고 공포스럽기 때문에 거부되었다. 빈곤, 질병, 장애, 젠더, 섹슈얼리티 등의 다종한 벡터 속에서 주변화된 '소수자'에 가해지는 혐오의 역사성을 살핀 연구들은 '정상성'을 규정하고 시민과 국민의 자격을 배타적으로 형성하는 국가를 최종적으로 문제 삼아왔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개발 담론 등의 연결 관계 속에서 역사 속에서 반복되거나 잠재되어 있었던 감정의 계보 속에서 오늘날의 문제를 짚어내고자 했다. 

한국의 연구를 고려할 때, 아메드가 강조하는 감정의 역사성은 다분히 '지리적'이고 '지역적'이다. 『감정의 문화정치』에서도 아메드의 시선은 유년기 이주해서 살았던 호주와 교수로 재직하고 사직 이후에도 살고 있는 영국[각주:1], 그리고 9.11 테러가 발생한 미국에 놓여 있다. 자신의 삶이 놓인 사회 안에서 순환하는 감정을 체화하는 위치성에서 감정의 정동경제를 논했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메드는 책에서 다양한 종류의 감정을 다루면서도 보편적 원리로의 감정의 역학을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각기 다른 감정들이 원리 일반으로 서술되는 순간 의도치 않게 감정이 탈맥락화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감정과 이것이 끈적이며 들러붙는 다종한 몸들의 차이를 보려 할 때 아메드의 논의가 헐거운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보편적 감정론 일반을 구축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서구와 달리 동아시아의 감정론은 지역과 역사의 산물로서 차이화된 감정론이 두드러진 듯 보인다. ‘감정 기억’을 논한 다케우치 요시미나 쑨거의 논의나[각주:2]‘반일 감정’이란 기표가 한국, 일본, 중국, 대만에서 각기 다르게 구축되었고 상이하게 작동 중임을 분석한 리오 칭의 작업(리오 T.S.칭, 유정완 역, 『안티-재팬』, 2023) 또한 ‘보편-특권’의 위치를 자임할 수 없는 동아시아의 맥락을 반영한 연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메드의 '감정은 무엇을 하는가'의 테제를 동시대 동아시아, 그리고 한국으로 의미 있게 가져오기 위해서는 아메드의 분석에서 부재하는 층위-여전히 지속 중인 냉전, 식민의 역사에서 지배/피지배의 이항으로 나눌 수 없는 주체의 다종한 위치성과 그로 인해 복잡하게 얽힌 양가적 감정, 서구보다 ‘인종’의 문제에서 자유롭다고 여기는 둔감함 등-를 정교하게 더해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Sara Ahmed 홈페이지 대문

 

 '그럼에도 변화는 왜 가능한가'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아메드는 정동과 감정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 책의 개정판(2014) 후기에서 아메드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자신의 연구와 '정동적 전환an affective turn'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아메드는 대다수의 정동 연구가 감정과의 개념적 구별을 통해 마치 정동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을 설정하거나 가정하는 것을 경계한다. 정동과 비교항으로 놓일 때, 감정은 보다 개인적이고 지향적이며 매개된 상태로 의미화된 것으로 논의된다. 그러나 감정을 '안과 밖' 중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안과 밖'을 만드는 '효과'로 보려 한 관점처럼, 아메드는 정동경제로서의 감정의 새로운 이론화 작업을 시도하려 했다. 이는 몸과 감정의 문제를 통해 주체와 사회의 복잡한 관계성을 사유해왔던 페미니즘, 퀴어 이론, 소수자 연구를 계승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정동적 전환이 정동으로의 전환이 될 때" 선행해왔던 연구들의 지적 역사를 오늘날의 정동 연구와 단절시킬 위험이 있다(437). 아메드는 개념 정의와 구획의 논쟁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담대함을 보여준다. 정동 연구는 독점적인 분야를 구축하려는 패권적 학술장이 아니라 과거 연구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며 열린 지식체계로 구성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행보에서 학자이면서 액티비스트인 아메드의 면모를 읽어낼 수 있다. 책의 후반부도 마찬가지다.

끈적이는 감정들―고통, 증오, 공포, 역겨움, 수치심, 사랑에 이르기까지―이 어떻게 국가의 몸체를 구성하는지 살핀 후, 『감정의 문화정치』는 다른 도약을 시도한다. 퀴어 정치와 페미니즘 정치를 논하는 7, 8장은 사회적 각본으로의 감정에 대항할 수 있는 정동적 잠재성을 보여준다. 강제적 이성애와 정상 가족, 재생산 등 규범에 불편함을 느끼며 다르게 살아내는 가능성을 여는 ‘퀴어한 느낌queer feelings’은 강제적 이성애와 정상 가족, 재생산 등의 규범에 불편함을 느끼며 다르게 살아내는 가능성을 연다(7장). 또한 아메드 자신이 페미니스트 주체로 되는 감정적 여정을 설명하며 분노와 애착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재평가한다(8장). 이 두 장에서 펼쳐지는 논의는 이후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은 『Queer Phenomenology: Orientations, Objects, Others』 (2006)과 번역서 『행복의 약속: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2022) (원서:『The Promise of Happiness』(2010)), 『페미니스트 킬조이: 쉽게 웃어넘기지 않는 이들을 위한 서바이벌 가이드』(2023),(원서: 『The Feminist Killjoy Handbook』(2023))에서 더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아메드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상실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즐거움과 애착, 경이와 희망에 주목한다. 이전까지는 감정의 끈적거림이 부정적인 기호를 특정 몸에 들러붙게 하고 역사와 공동체로부터 몸을 단절시키는 기제로 분석됐다면, 퀴어와 페미니즘 정치에서는 이 끈적거림이 애착을 느끼는 대상에 다가서고 꿈꾸는 미래로 몸을 정향시키며 다른 몸들과 연대를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그다지도 어려운’ 변화지만 규범에 어긋나 불편함을 느끼는 개별적 몸들이 서서히 대안적 세계의 표면을 형성해나간다면, 아메드는  ‘그럼에도 변화는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정은 ‘시간의 살flesh’, 즉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식민지배, 노예제, 폭력의 역사가 어떻게 현재 시점에서 삶과 세계를 형성하는지”를 알려준다(431). 그렇기에 감정은 비선형적인 시간성 속에서 몸과 세계의 내밀한 역사로 우리를 안내할 수 있다. 부/정의의 문제에서 감정이 ‘감정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마무리하는 결론은 다소 아쉽지만, 그럼에도 아메드가 믿는 감정의 잠재성을 나 또한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그녀의 책을 읽는다면, 서서히 그녀가 보여주는 세계로 몸이 기울어 이후에는 그 각도를 바꾸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나란한 지향성이 동일한 희망과 믿음을 품게 만든다.     

 

 


 

송혜림

 

실패를 무릅쓰며 감행하는 용기있는 증언에 귀 기울이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주변화된 목소리를 젠더, 계급, 세대, 장애 등의 교차하는 축 속에서 두텁게 읽어내려 한다. 실증의 언어로 강요받으며 구획된 증언의 한계를 정동 연구로 돌파해보려 노력중이다. 근현대 한국사의 국가폭력 사건과 관련된 증언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피해자 증언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국가와 법제도, 문화적 재현과 대중의 정동을 비판적으로 사유한다. 개인의 총체적인 삶을 훼손하거나 배반하지 않는 증언의 듣기와 말하기를 꿈꾼다. 숲을 좋아하고 초록의 생명에서 힘을 얻는, 연세대학교 비교문학 협동과정 박사 과정생. 

 

 

 

  1. 사라 아메드는 런던의 Goldsmiths 대학에서 Race and Cultural Studies의 교수였으나 2016년 학내 성희롱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대학에 항의의 의미로 교수직을 사직하였다. 사라 아메드가 운영하는 ‘feministkilljoys’ 블로그의 ‘Resignation’ 글 (2016.5.30.게재/https://feministkilljoys.com/2016/05/30/resignation/) 참고. [본문으로]
  2. 신지영. (2022). 동아시아론과 마이너리티: ‘감정기억’의 재정의를 통한 다중 쟁점 정치의 모색. 동방학지, 200,121-16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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