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쩌면 이론은 늘 보편 이론이지만 이론이 단지 학술장에서의 글쓰기 도구임을 넘어서, (근대 이래) 사유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재배치하고 세계를 다시 조망할 수 있게 하는 매개여야함을 강력히 환기시킨 개념의 하나가 오늘날 어펙트일 것이다. 주지하듯, 2000년대 중반 한국에서 스피노자-들뢰즈를 매개로 소개되기 시작한 어펙트 개념은 그 맥락상 일종의 열쇠 개념 역할을 기대받은 측면이 강했다. 2024년 현재는 다른 질문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도구로, 그리고 이론의 보편 지향 자체를 질문할 전제를 풍부히 품고 있는 개념으로 폭넓게 이해·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적으로는 ‘어펙트 이론’이라는 말보다 ‘어펙트의 개념, 문제의식’ 같은 말을 더 사용하는 편이기는 하다. 정합적이고 정통적인 계보가..
1. ‘직(職)’이라는 자리, ‘업(業)’이라는 행위 ‘4차 산업혁명’이 삶과 기술의 짜임관계를 바꾸어가고 있다. 그 관계 사이에서 촉발되는 것이 정동이라면, ‘4차 산업혁명’은 동시대 정동 정치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고, 개입해야 하는 중요한 입각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이 국가의 ‘명운’과 ‘사활’을 좌우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면, 이는 생명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구’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활은 기술을 통해 매개되고, 그 기술은 생체매개를 통해 정동을 촉발하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에 의해 보장되는 미래를 향한 정동 정치의 약속이 역사적 제 국면마다 그 유효함을 꾸준히 발휘해왔음을 상기한다면, 오늘날의 ‘혁명적’ 정동이 전례가 없는 현상만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이전에는 ..
1. ‘정동’의 번역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의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2023)는 젠더 연구에 정동 이론을 접목시키려고 시도로, 서론과 13편의 연구를 묶었다. 이 글은 4부에 실린 세 편에 관한 서평이다. 2000년대 유럽 인문사회에서 기존의 비판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본격화되었는데, 정동 연구는 이러한 시도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정동’(affect)이라는 용어는 이항대립적인 인식론에 기반한 추상적이고 고정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행위자들의 연결망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을 연구하기 위한 개념적이자 방법론적인 도구로 진화하였다. 지난 이 십년 동안 ‘정동’은 세계적으로 주요한 학술 용어이자 연구 분야로 자리잡으며, 다양한 나라에서 채택 및 번역되어왔다. ..
“그런데, ‘정동’이 무슨 말이야?” 얼마 전 귀한 발표 자리에서 정동에 대해 짧게 언급할 자리가 있었다. 이후 화장실에 들렸을 때 청중 두 분이 손을 씻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앞의 질문을 상대방에게 던졌다. 순간 시간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했지만, 정동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어렵다. 어펙트(affect)에 대한 번역어에서부터 다양한 해석(정동, 감응 등)이 있지 않던가. 그런 와중 가장 반가웠던 한국말은 바로 ‘부대낌’이었다(권명아 2012). 이 표현만큼 어펙트라는 개념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마주침’과 ‘되기’의 가치가 온전히 드러난 것은 없었다. ‘부대낌’이란 표현 속에는 인간이란 다른 존재와의 끊임없는 마주침 속에 살아가는 “연결신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지 않은가(동아대학..
1. 게임의 혐오와 게임에 대한 혐오의 뒤얽힘 1편이 혐오스러운 세상에서 사랑을 찾는 과정이었다면, 2편은 반대로 사랑을 잃음으로써 혐오를 탐색하는 과정 시리즈에 대해 김성윤은 이 시리즈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소 거친 대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1편’과 ‘2편’의 연속과 단절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진술입니다. 인터랙티브 무비(interactive movie)로도 볼 수 있는 어드벤처 액션 게임 는 그 자체로도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지만, 게임 그 자체에 대한 평가도 드라마틱했습니다. 2013년에 발표된 ‘1편’의 호평과 흥행에 이어, 2020년에 발표된 ‘2편’에는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 GOTY)’으로 상징되는 극찬과 동시에 ‘혐오’의 정동이 들러붙었습니다..
1. ‘누빔점’을 만드는 문학의 수행성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브뤼쎌에 와서 로의 자술서와 일기를 읽고 그가 머물거나 스쳐갔던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로기완은 이미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 『로기완을 만났다』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에서 ‘탈북인’ 로기완의 행적을 좇는 화자 ‘나’는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그 삶을 배워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소나무에 대해서는 소나무에게 배우라”하고, “배운다는 것은 사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화자가 로기완의 삶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 온몸이 바쳐진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화자가 자신의 신체와 로기완의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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