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적 읽기-쓰기] 먼지와 녹, 빛과 공기의 존재지도학 : 조해진과의 마주침, 그리고 정동적 말 걸기 (권두현)

 

 

  1. ‘누빔점’을 만드는 문학의 수행성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브뤼쎌에 와서 로의 자술서와 일기를 읽고 그가 머물거나 스쳐갔던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로기완은 이미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 『로기완을 만났다』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에서 ‘탈북인’ 로기완의 행적을 좇는 화자 ‘나’는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그 삶을 배워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소나무에 대해서는 소나무에게 배우라”하고, “배운다는 것은 사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화자가 로기완의 삶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 온몸이 바쳐진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화자가 자신의 신체와 로기완의 신체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는 점에서, 이는 ‘학(學)’이 아니라, ‘습(習)’에 가까운 실천이라 여겨집니다. 이때, ‘습’은 객관화하기보다 신체화하는 것, 즉 대상화하기보다 그것과 하나가 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향성은 결코 명약관화하지 않습니다. “그의 고독과 불안까지도 내 것으로 끌어안은 채 이 도시를 부여하고 있다는 일체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너와 내가 타인인 이상 현재의 시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가질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의식하는 화자의 모습은 ‘로’의 인생을 따라 걷는다는 것이 마치 (정동 연구가 그렇듯) 반딧불이를 뒤쫓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니까요.

 

  저는 『로기완을 만났다』의 곳곳에서 기록과 재현이라는 작가주의적/권위주의적 실천에 대한 진지한 의심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초상은, 표상 행위에 앞서는, 그리고 그 행위에 뒤이은 윤리를 표상 행위 그 자체보다 각별히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집니다. 저는 “로기완을 만났다”라는 현재완료형 시제가 이러한 윤리적 새김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동반해야만 비로소 도달 가능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 또는 흐름을 정동(affect)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감히 이 작품을 만남이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정동적 읽기 혹은 쓰기의 탐색 과정 그 자체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 탐색은 활자로 박제된 텍스트 너머에 펼쳐진 환경을 누비는 행위로부터 실현됩니다. 이는 글과 삶의 ‘누빔점’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서는 누빔점을 비로소 마련하는 작업이라 하겠지요. 소설을 통한 작가와 독자의 만남 역시 글과 삶의 누빔점을 마련하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듯합니다.

 

 

  2. 회집, 구축, 연결 : 조해진 소설 세계의 존재지도학

 

 

  1) ‘소설의 시작’ : ‘문래(文來)’와 ‘대추나무 집’이라는 회집체(assemblage)로부터

 

 

조해진, 『환한 숨』 , 문학과지성사, 2021.

 

 

가끔은, 아무도 몰래 문래(文來)를 떠올리기도 했다.
- 「소설의 시작」

 

  조해진의 글(文)이 온(來) 곳은 ‘문래(文來)’입니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위치한 문래동은 애초에 철재 상가와 철공소가 즐비하던 공장지대입니다. 이곳은 2010년 이후 ‘예술공장’이라는 창작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예술공장’이라는 이름으로 문래가 호명되기 이전, 1990년대에 문래를 방문해본 적이 있는 저는 이곳을 여전히 ‘금속’과 ‘먼지’와 함께 떠올립니다. 금속과 먼지는 문래를 비롯한 공장지대의 필수 성분입니다. 금속은 공장지대의 시간성에 따라 ‘녹(綠)’으로 변화합니다. 녹은 시간성의 공간적 침전물인 셈입니다. 녹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체험의 현상학적 ‘변수’ 및 ‘상수’를 ‘생동하는 물질’과 함께 사유하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녹은 금속의 오염, 훼손, 부식의 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만,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금속과 공기의 만남, 작용, 생성의 국소적 표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문래를 비롯한 공장지대를 부유하는 먼지는 어떤가요? 누군가가 “한곳에 정주하는 일 없이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흩날리며 지금껏 나는 살아왔으니까. 태어나지 않았다면, 하고 가정할 때마다 세상 곳곳을 누비는 먼지를 떠올리던 날들이 있었으니까”(『단순한 진심』, 민음사, 2019)라고 생각할 수 있듯이, 먼지는 존재의 유비이자, 존재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의 상수로서의 먼지는 특정 공간에 투과된 ‘빛’을 통해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예컨대, 직사하는 빛을 차단하는 커튼을 열어젖혔을 때, 비로소 공간을 채우고 있던 먼지는 그 존재와 운동의 상태를 드러내 보입니다. 이때, 먼지의 운동은 금속에 맞닿아 있던 바로 그 공기의 운동이기도 합니다.

 

  공기의 미세한 운동에 따라 낱낱이 부유하는 먼지와, 절삭 및 가공을 수행하는 단단한 무형기계 앞에서 그 단단함과 조밀함을 드러내 보이는 금속은 아주 상반된 성질을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무엇보다도 공기를 통해 운동 또는 생동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유사한 성질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 성질을 존재의 조건으로서의 취약성(vulnerability)이라고 불러보고 싶습니다. 취약성은 연약함(weakness)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마주침, 뒤얽힘, 부대낌을 동반하는 ‘변용’을 통한 ‘되기’의 과정에 열려 있는 상태가 바로 취약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해진 소설의 애독자라면 충분히 알아차리셨을 테지만, 장편소설 『단순한 진심』은 (우주의) 먼지와 (철로의) 녹 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는 이야기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단순한 진심』의 원형에 해당하는 단편소설 「문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의 조건으로서의 취약성이 ‘마주침’과 ‘뒤얽힘’, 그리고 ‘부대낌’의 운동과 함께 확보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면, 먼지와 녹에 관한 이야기는 곧 (먼지를 비로소 가시화하는) 빛과 (산화의 매체로서의) 공기에 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주의 먼지는 빛의 호위를 통해 비로소 그 안녕을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꿰뚫고 들어가는 빛의 ‘투과’가 아니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빛의 ‘호위’라는 뒤얽힘의 형태를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떠올려 봅니다. 빛에 의해 가시화된 먼지는, 거꾸로, 호위하는 빛의 존재를 비로소 가시화합니다. 이 호위를 통해 비로소 보장되는 주관적 안녕(subjective well-beings)은 정동적 연결(affective connections)로 독해 가능합니다. 저는 조해진의 소설을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주관적 안녕 대신 정동적 연결을 사유하고자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객체들의 민주주의적 배치를 시야에 담게 됩니다. 예컨대, 조해진의 글이 비롯된 문래는 먼지와 녹의 공간이면서, 먼지와 녹의 존재를 비로소 가시화하는 빛과 공기의 물질적 세계, 다른 말로 ‘회집체(assemblage)’라 할 수 있습니다. 회집체는 『존재의 지도』(갈무리, 2020)에서 제시된 레비 브라이언트(Levi R. Bryant)의 용어로서 존재지도학(Onto-Cartography)의 핵심적 표현에 해당합니다. 존재지도학은 회집체 또는 네트워크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변동에 관한 지도를 제작하는 것입니다. 객체 지향 존재론으로서의 존재지도학은 ‘회집체’를 이루는 존재들을 물질적 무기 기계와 유기 기계, 사회적 기계, 기술 기계들로서 호명합니다. 이들 기계는 조작적 폐쇄성과 구조적 개방성을 동시에 가진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러한 설명은 다른 기계들에서 비롯되는 입력물과 이로 인해 기계들이 수행하는 조작의 물질적 출력물을, 따라서 기계들 사이에 흐르는 어떤 종류의 흐름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 흐름의 힘-관계들에 대해 존재지도학은 인간 예외주의가 전제된 ‘권력’ 대신, 인간과 사물에 고르게 작용하는 ‘중력’이라는 표현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중력과, 그 중력으로부터의 ‘탈출속도’에 대해 문제제기합니다.

 

  여기에서 조해진 소설을 존재지도학적으로 읽어내기 위한 문제제기가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조해진 소설의 ‘중력’은 무엇인가, ‘탈출속도’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거칠지만, 먼저 답을 내려보자면) 조해진 소설 세계의 중력은 국가 폭력 또는 젠더 폭력으로 드러납니다. ‘타자’를 생산하는 ‘수용소 체제’가 조해진의 소설 세계에 중력을 제공하고 있고, 이러한 수용소 체제에 구속된 존재는 원래의 상처를 간직한 채로 타자를 끌어안으면서, 다시 한 번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면서까지 비로소 탈출속도를 확보합니다. 이러한 탈출속도는 다름 아닌 ‘공감(sympathy)’ 또는 ‘동정(compassion)’에 내포된 ‘sym-’과 ‘com-’, 즉 ‘함께함’의 정동을 보장합니다. 이를 존재지도학적 관점에서 ‘회집’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일찍이 신형철이 ‘타자’라고 명명한 존재들을 우리는 다시 존재지도학적 관점과 함께 배치시켜 보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자’에게 길을 물으며(「여자에게 길을 묻다」) 시작된실제로는 묻지 못했던-소설적 여정은 ‘단순한 진심’(『단순한 진심』)에 이르는 지도를 그리며 나아갑니다. 지금 말씀드린 존재지도학은 바로 이와 같은 지도제작(mapping)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신체들의 마주침과 뒤얽힘에 주목하는 정동 이론은 세계를 물질적으로, 관계적으로, 생태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따라서 정동 이론은 자연스럽게 지리학과 연결됩니다. 레비 브라이언트의 존재지도학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지리철학’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지도학은 지리학 또는 지리철학을 “세계와 사회적 관계를 최소로 탈물질화하면서 사회적 생태를 담론성으로 전환하기를 기피하는 사회 이론의 갈래”라고 설명합니다. ‘물질’, ‘관계’, ‘생태’가 우리의 삶을 사유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조해진의 삶은 물론, 조해진의 소설 안팎에서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삶들도 바로 이러한 키워드들과 함께 정동체계를 구축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이 체계는 녹과 먼지 너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먼지와 녹, 빛과 공기(물질)의 회집체(관계)로서의 문래에는 조해진이라는 존재의 뿌리에 해당하는 집이 있었습니다(생태). 그 집은 조해진 자신의 글을 통해 “배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있는 집”으로 묘사된 바 있습니다. 조해진의 등단작 「여자에게 길을 묻다」(『문예중앙』 2004년 겨울호)에는 이와 유사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끕니다. ‘나’와 ‘그’가, 거인증의 여자와 함께 머물렀던 소설 속의 집은 ‘번지는 녹으로 뒤덮여 있던 철제문’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이 집은 ‘대추나무집’입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그곳에 사는 동안, 그 집의 진짜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대추나무였다는 것을 나는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마당에 심은 지 “다섯 해가 지나면서부터” “생명을 상실”한 줄로만 알았던 대추나무는 잘려나갈 운명에 처해지고, 그 순간, 비로소 그 은폐되어 있던 생명을 수액(樹液)과 함께 격렬히 뿜어냅니다. 여기서, (대추)나무의 생명은 수액으로 증명되며, 이는 흙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단순히 흙과의 분리, 나무의 절단으로 박탈되지 않습니다. 나무는 ‘책상’으로 변신하며, 책상으로 변신한 나무는 다시 ‘작가’와 ‘소설’을 함께 생성하며, ‘생동하는 물질’의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가구가 거의 없는 방에 놓인 튼튼하고 나무 냄새 나는 책상이 내 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중략) 내 차기작을 읽고 싶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마음의 크기와 일상의 테두리는 점점 더 작아져갔다. 그래도 나는 늘 책상을 소유한 사람이긴 했다, 그건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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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작」

 

  나무는 책상을, 책상은 작가를 탄생시킵니다. 작가는 다시 소설을, 소설은 다시 인물을 탄생시킵니다. 이 흐름은 마치 책상이라는 존재의 활기성을 예증하는 듯합니다. “이보나는 나와 함께 대학 시절을 보냈던 내 자취방의 고독한 책상에서 태어났다. 그 책상이 그녀의 모태였고 그녀는 그곳에서 성장해갔다. 여기저기 끊어져 있던 몸의 실루엣이 완성된 곳도, 제멋대로 존재하던 이목구비가 제자리를 찾은 곳도, 물냄새 나던 몇 가닥의 젖은 머리카락이 윤기 흐르는 검은색의 풍성한 머릿결로 변해가던 곳도 그 책상이었다.” 저는 작가 조해진이 태어난 책상이 태초의 여자 엠블라(Embla)가 태어난 바로 그 ‘느릅나무’ 재질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배나무, 무화과나무, 대추나무, 느릅나무… 조해진의 여러 글들을 통해 확인되는 이 나무들의 존재와 변신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존재지도학의 틀 안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컨대, 조해진의 소설 세계는 이들 나무의 숲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문장은 조금 더 정확하게 다시 쓰여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시 쓰여질 문장에서 주체와 대상의 위치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습니다. 조해진이 나무들의 숲을 만들어 보인 것일까요, 나무들의 숲이 조해진의 소설을 만들어 보인 것일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 철학이 떠받들어온 ‘주체’가 관계로서의 세계에서 주어진 일시적 기능일 뿐이라는 존재지도학의 명제가 되새겨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숲은 (주체가 아니라) 물질적 또는 물리적 행위주체로서의 인간들, 도시들, 우주들이 서로에게 다양한 정도의 역능을 생산하며, 공-거 혹은 공-산하는 생태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혼자 쓰는 게 아니다”라는 작가의 말은 더 없이 적확합니다.

 

 

  2) ‘번역의 시작’ : 회집체들의 플루리버스(pluriverse)를 구축하기

 

문이 닫히는 소리, 찰칵….
아이가 있다고 해서 마냥 집에서 놀 수 없었던 어머니가 일을 하러나가기 위해 나를 방안에 남겨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내게 각인된 최초의 감각이었다.
- 「소설의 시작」

 

  이쯤에서, 문래에서 마련된 작가의 원체험이 어떻게 소설로 ‘번역’되었는지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최초의 감각’은, 조해진의 소설에서 빈번하게 묘사되는 ‘기차의 감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마침 기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물도, 식량도 없는 비참한 기차라고 누군가 악을 쓰며 알려주었지만 나는 주저 없이 그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 안은 비좁았고 탑승객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둡고 슬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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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나와 춤을 추었다」

 

  아우슈비츠행 열차의 이미지는 「이보나와 춤을 추었다」(『문학사상』 2011년 1월호), 「영원의 달리기」(『현대문학』 2011년 7월호), 「빛의 호위」(『한국문학』 2013년 여름호) 등의 작품에서 반복됩니다. 이에 앞서, 「인터뷰」(『21세기문학』 2007년 여름호)에서는 ‘고려인’들의 몸이 짐처럼 실려 있던 화물열차의 이미지가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화자(이자 청자)의 입을 빌어, 목적지가 없는 화물열차는 지금도 달리고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조해진의 소설 세계에서 기차는 먼지와 (빛), 녹(과 공기)의 회집체로서, 먼지와 녹의 세계를 지금도 여전히 달리고 있습니다. ‘검은 상자’라는 우울한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러한 회집체는 여기에 실려 있는 신체에게 ‘암순응’ 또는 ‘명순응’을 요청합니다. 암순응 또는 명순응하는 눈(몸)을 우리는 암흑 또는 빛과 연결된, ‘연결신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아마도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라면 이를 ‘횡단신체’라 불렀을 것 같습니다. ‘횡단신체’는 ‘다공성의 신체’로서 환경을 호흡하는 (구조적 개방성의) 신체를 의미합니다. 이 호흡은 물리적으로, 비유적으로 동시에 이해 가능합니다. 회집체로서의 기차 역시 또 하나의 횡단신체임은 물론입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비롯한 기차는 대지 위의 철로를 일견 무심하게 가로지릅니다. ‘파노라마’ 체험을 가능케 했던 모더니스트들의 기차와는 달리, 조해진이 자주 상상하는 기차는 서로 다른 존재자들의 움직임과 경로를 조절할 수 있는 존재자로서 그것들을 저 방향이 아니라 이 방향으로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하고, 저 존재자가 아니라 이 존재자와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게 합니다. 멀리 떨어져 흐름을 구성하고 있지 못한 기계들 사이의 의존성을 비로소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차는 근본적으로 어떤 영토를 구성하는 의존성과 장애물에 개입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움직임과 국소적 표현, 되기에의 경로를 개척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단절합니다. 요컨대, 조해진의 소설에서 기차는 탈출속도로 대지 위를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탈출속도라는 표현과 함께 ‘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또한 존재지도학의 핵심적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대지의 기원 또는 세계의 구축에 대한, 다시 말해 ‘대지형성’에 관한 조해진의 상상 역시 신체적이고 물질적입니다.

 

신화의 시대, 북유럽에선 인간 이전에 거인들이 있었다 했다. 신에 의해 거인들이 모두 죽자 그들의 뼈는 산이 됐고 피는 강과 바다가 됐으며 머리카락은 꽃과 풀로, 몸은 그대로 대지로 화했다. 신은 거인들이 사라진 세상을 살아갈 인간을 물푸레나무와 느릅나무에서 탄생시켰다. 물푸레나무에서는 태초의 남자 아스크(Ask)를, 느릅나무에서는 태초의 여자 엠블라(Embla)를.
- 「이보나와 춤을 추었다」

 

  조해진의 소설 세계는 거인들의 피와 뼈와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듯 대지형성은 회집체의 해체와 어우러지면서,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렇게 조해진으로부터 ‘거인’이 ‘개인’으로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조해진은 「동쪽 伯의 숲」(『현대문학』 2013년 1월호)에서 “개인이 세계에 앞선다”고 다소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이는 이기적 개인주의자의 선언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개인도, 세계도 모두 물질적 존재자에 해당합니다. 물질적 존재자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체에서 먼지, 나무, 지구와 우주 같은 존재자들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규모의 층위에서 현존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과 세계는 구별되고 대립하는 범주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이 세계에 앞선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개인이 관계로서의 세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좀 더 신중히 읽어내야 하는 듯합니다. “나는 우주와 세계를 이어 주는 매개이자 그 존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게 될 전령이며, 동시에 우주가 자라나는 과정을 증언해야 하는 증인”이라는 『단순한 진심』의 문장은 바로 이러한 독해에 타당성을 더합니다. 여기서의 우주(woo-joo)는 임신 중인 화자와 ‘내부-작용(intra-action)’하는 태아이자, ‘외부 환경’에 해당하는 우주(宇宙) 양쪽 모두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주로서의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주어진 윤리는 근대 철학이 존중했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와 다릅니다. 보편주의(universality) 또한 아닙니다. 보편주의적 유니버스(universe)는 일원화된 우주를 의미합니다. “유리로만 이루어진 도시”(「유리」)의 형상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우주는 약하고, 깨지기 쉽습니다. 반면, 다원화된 우주가 있으며, 이는 플루리버스(pluriverse)라 일컫습니다. 이 우주는 취약성을 지니지만, 깨지면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와 뒤얽히면서 번번이 새로운 ‘되기’의 과정에 열려 있습니다.

 

  비유컨대, 플루리버스로서 배나무, 무화과나무, 대추나무, 느릅나무의 숲을 차례로 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조해진의 기차는 그의 지리(철)학이 원근법이 아니라 위상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조해진의 소설에는 종종 스크린이라는 프레임 바깥을 상상하는 인물들과, 모서리가 구겨진 사진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근법적 질서로부터의 탈각이라는 점에서 자못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타자를 규정하는 특권적인 위치, 다시 말해 원근법적 위치가 아니라, 위상학적 배치에 따라 자아와 타자의 분할선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지도라는 평면 위에서 경계를 드러내면서 일정하게 배치된 공간들은 ‘구겨짐’으로써 비로소 맞닿을 수 있습니다. 공간은 물론, 시간, 더 나아가 인간도 그럴 것입니다. 역시나 조해진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엽서는 기차를 통한 공간적 연결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연결을 통해 인간적 소통의 가능성을 향상시킵니다. ‘진심’은 바로 이 가능성을 전제로 초개체적으로 존재합니다.

 

  흥미롭게도,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은 이러한 진심에 물성을 부여합니다. 플루리버스를 떠다니던 기차는 『단순한 진심』에 이르러 또 다른 물질계에 도착합니다. 청량리의 녹슨 철로가 바로 그곳입니다. 녹슨 철로 역시, 금속과 공기의 회집체입니다. 문래를 이루던 성분들이 다른 식으로 재조합(transformation)되면 바로 청량리의 녹슨 철로가 만들어집니다. 같은 성분들의 다른 연결/조합/회집을 통해 문래는 기차가 되고, 기차는 다시 철로가, 청량리가 되는 셈입니다. 회집체가 왜 그런 형태를 취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려면, 유형 기계와 무형 기계, 인간과 비인간, 무기 기계와 유기 기계, 그리고 사회적 기계가 어떻게 교차하고 상호작용하는지 탐구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문래와 기차, 청량리와 철로는 먼지와 빛, 금속과 공기 이상의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회집체들은 무엇보다도 상이한 실천과 다양한 관계들을 포함하면서 ‘회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들의 회집, 다른 말로 ‘연결’은 우연성과 역사성, 창조성에 따릅니다. 이러한 뒤얽힘(회집)을 풀고 또 새롭게 뒤얽는 행위를 저는 소설적 ‘번역’과 나란히 놓고 싶습니다. 문래를 기차로, 기차를 철로로, 철로를 다시 청량리로 회집하는 일, “느릅나무, 책상, 태초의 여자, 엠블라, 거인들……”과 같은 단어들을 모아 시 또는 소설 한 편을 쓰는 일, 이것이 바로 ‘번역의 시작’입니다. 이 번역은 단순히 의미론적 동일성을 유지하는 행위가 아니라, 낯선 사람, 더 나아가 낯선 사물을 특유의 정동체계 안으로 불러들이는(배치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또는 내가 낯선 사람과 사물에게 다가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 『로기완을 만났다』

 

  다시 한 번 회집체들 사이의 입력과 출력을 상상해봅니다. 회집체의 입력물이자 출력물, 그 가운데 바로 정동이 있습니다. 여행책자를 통해 가상의 여행을 하고, 여행책자를 읽는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따라 읽으며, 그 부피만큼 그를 이해하는 일, 아픈 몸의 소년을 통해 비로소 아픈 너와 나를 함께 이해하는 일, 다시 말해 “PASSWORD”를 공유하는 일은, 로기완을 좇는 화자 ‘나’의 일과 같습니다. 조해진이 알려준 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의 소설을 좇아 ‘지금, 여기’에서 또 한 번 ‘번역의 시작’을 도모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차학경의 여동생 차학은의 편지가 「잘 가, 언니」(『한밤의 산행』, 한겨레출판, 2014)로 ‘번역’되듯이 말입니다. 이는 부산과 미국을 겹쳐 보이는 조해진의 정동적 상상의 체계에 개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겹침을, 개입을, 시간과 공간의 구겨짐을 통한 맞닿음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3) ‘부산’에서 조해진(의 소설)을 만난다는 것 : ‘러스트 빌리지’들을 연결하기

 

  구겨진 시공간에서 맞닿은 존재들로서 「이보나와 춤을 추었다」에 등장하는 미하우와 요안나는 ‘들판의 나라’ 폴란드에서 서울로 이주해 온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어디를 가나 해초 냄새가 나는’ 서울에서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하는 인물들입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바다가 나올 것 같다고 기대하게 되는’ 서울에 대한 묘사를 접하며, 제 머릿속에서는 서울의 이름에 부산의 풍경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러스트 빌리지’에 대한 묘사를 접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즈네는 안젤라의 집 주소도 알려줬다. 주소에 적힌 거리 이름은 도시의 북쪽으로, 한때는 공장단지였지만 제조업 쇠락으로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으면서 이제는 우범지역으로 전락한 곳이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며 무작정 북쪽을 향해 걸었다. 두시간여를 쉬지 않고 걸으니 녹슨 건물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러스트 빌리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옛 공장단지가 비로소 시작된 듯했다. 버려진 건물이 흔하고 행인이나 차량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아서인지 녹(綠)의 동네에는 음산한 기운마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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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시작」

 

  저 또한 부산의 토박이는 아닙니다만, 부산 사람이 되어 살고 있는 현재,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녹의 동네’로서 부산의 모습을 의도치 않게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부산 출신자만이 이곳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오래된 산업도시로서 부산의 정동이 ‘러스트 빌리지’를 출발지이자 경유지로 삼는 조해진의 소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산에는 1984년에 신평·장림일반산업단지, 1988년에 정관논공단지, 1990년에 신평·장림협업산업단지가 조성되었습니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부산공업의 주 업종은 화학업종의 경공업에서 탈피하여 조립금속 및 기계·장비업종의 중화학공업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변신은 산업도시의 성장서사로 매끈히 귀결되지 않습니다. 사실, 1970년대 이후부터 부산의 공업은 성장이 둔화되었고, 전국적인 비중이 점차 감소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는 부산과 그 외부의 관계를 조망했을 때만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사실입니다.

 

  산업도시로서 부산은 공업도시이자, 수산업도시이기도 합니다. 기계들의 기계로서 공업과 수산업은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을 나누어 가집니다. 부산의 연근해어업은 경제개발로 인한 공업의 발달, 공업의 발달로 인한 공장폐수와 생활오수 등의 유입이라는 ‘흐름’의 직접적인 개입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어장의 오염은 물론, 공동어장 등 연안수역의 매립으로 인해 부산의 연안어장과 양식어장은 축소되고 있고, 어업질서 혼란으로 인한 남획과 어업기술 증강 및 어획강도가 높은 어업장비의 발달 등으로 인해 부산의 수산자원은 날로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산업의 흐름이 부산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임은 굳이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부산의 해녀들은 바로 이러한 정동체계와 함께 있는 물질적 신체, 신체적 물질입니다.) 지역에서의 삶은 이전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조해진은 “성대가 아니라 여자의 외로운 생애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은 그 절규에 나는 귀가 아프다”고 소설(「여자에게 길을 묻다」) 속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말한 바 있습니다. 아마, 부산 사람들과 우리 모두가 ‘음(音)’이 되지 못한 ‘음(吟)’, 그러니까 신음을 내뱉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름도 없고, 자리도 없는 이 ‘음(吟)’을 ‘음(音)’으로 ‘번역’하는 일이 우리에겐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조해진의 소설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은 어쩌면 이 음계 위에서 다시 펼쳐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음계(音階)와 음계(吟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가운데 어느 한 쪽에 부산을 위치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된 산업도시의 구조적 변화 과정이 도시의 산업에 따라 상당히 다른 맥락으로 전개될 수 있고, 이는 도시의 사회적 관계들 역시 상이한 형태로 달라질 수 있음을 되짚어보자는 것입니다. 고립된 지역에서의 외로운 삶을 주관적이고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처리해서는 곤란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이고, 관계적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관심은 산업도시들에 대한 연구의 정동적 전환을 통해, 또한 오늘의 이러한 (두서없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촉발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존재지도학과 조해진의 소설이 함께 그려내는 지도는 자본 침탈의 다른 이름인 ‘도시 (재)개발’의 청사진과 반드시 달라야 하고,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오래된 산업도시의 정동은 일원화된 중력으로부터의 탈출속도를 확보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그 정동에 어떠한 이름을 붙여볼 수 있을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3. ‘진심’과 ‘행복’, 그리고 ‘행운’과 ‘우연’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성경혜·이경란 역, 후마니타스, 2021.

 

 

  조해진은 정동 이론을 받아쓰기 하는 작가가 결코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동이라는 체계를 사유하게 하는 좋은 문장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그 무엇으로도 치환되지 못한 감정은 이렇게 때때로 단 한 번도 조우한 적 없는 타인의 삶에서 재현되기도 한다.”(『로기완을 만났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외부화되고 확장된 ‘진심’은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타인, 즉 우리가 말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기입되어 세계의 저쪽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진심은 지리학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입니다.

 

  조해진 소설의 애독자인 우리는 그가 꾸준히 ‘진심’과 ‘행복’에 관해 말해왔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행복을 대단히 행복하지 않게 읽어 보인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논의는 조해진의 소설에서 이야기된 ‘행복’을 재론하는 과정의 중요한 참조대상으로 삼아질 수 있을 듯합니다. 사라 아메드는 페미니즘의 역사를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순응과 행복의 의무에 불만을 토로하며, 때로는 결혼과 가족이라는 재생산 제도를 벗어난 여성들이 일으킨 소란의 역사라고 규정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유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투쟁의 역사들을 물려받았다. 필연성으로서의 행복에 맞선 투쟁은 가능성으로서의 행복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행복 운동이 아닌 우연발생 운동으로서의 정치 운동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그것은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 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결코 아니다. 혁명적 형태의 정치의식은 우리가 불행을 느낄 대상이 정말로 얼마나 많은가에 대한 의식화를 포함한다. 행복에 대한 욕망이 행복 없음을 나타내는 기호들을 덮을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혁명적 정치학은 불행에 계속 근접해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연발생의 정치학이 단순히 불행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정치적 명분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비참한 사람들의 정의 중 하나가 “불쌍한, 즉 불운한 존재”임을 상기해보자. 어쩌면 우리는 비참한 자들에게서 불운한 자들을 분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비참한 자들에게는 우연발생이 가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복의 경로에서 이탈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간극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발생으로 가득하다는 말은 뭔가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연발생의 정치학이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가능성, 어쩌면(perhaps)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만약 가능성을 여는 것이 불행을 야기한다면, 우연발생의 정치학은 불행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연발생의 정치학은 발생하는 일을 포용하는 동시에, 대안적 방식으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한다. 우연발생을 만드는 것은 곧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 『행복의 약속(The Promise of Happiness)

 

  사라 아메드는 행복이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시민권과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억압의 기제임을 규명한 바 있습니다. 행복의 약속에서 아메드는 페미니스트, 퀴어, 이주민 등 사회적 “골칫거리, 반동을 일삼는 이들, 흥을 망치는 사람들”로 생산·지목되는 이들을 중심으로 행복의 계보를 재구성해 보입니다. 불행한 삶을 살도록 강제된 이들의 경험과 욕망, 행복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행복이 사회적 불평등의 구성물이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달리 말하자면, 행복의 향유는 불행을 유발하는 사회적 구조와 요인에 대해 침묵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작가 조해진이 불행을 유발하는 사회적 구조와 요인, 즉 (일원화된) ‘중력’을 의식하는 글을 써왔다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스트 킬조이(feminist killjoy)’로서 사라 아메드의 행복론과, 만인과 만물에게 주어진 공통된 당위로서의 행복이라는 ‘중력’과 함께 ‘탈출속도’를 의식하는 조해진의 소설은 결코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궤적은 조해진의 소설이 단순히 ‘회집’, ‘구축’, ‘연결’의 존재지도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탈’을 통한 ‘재정향’, 좀 더 정확히 말해 ‘방향상실’을 소설 속에 담아 보이고 있다는 사실로 드러납니다. 조해진 소설의 존재지도학은 정태가 아니라 동태로서 현상하는 것입니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이 ‘미래’와 연결되어 있음을 통찰하며, 그 연결의 폐쇄회로적 논리를 해체해보이지만, 행복은 또한 지리 또는 거리와도 밀접한 듯합니다. 조해진의 (또는 산책자의) 행복은 “손만 뻗으면 제 몸에 붙은 연인을 만질 수 있는 사랑의 그 짧은 거리, 단순하고도 감각적인 것”이라고 표현된 바 있습니다. 아내와 딸 대신 가족제도 바깥에서 만난 연인을 선택하는 퀴어의 ‘가장 큰’ 행복은 가족과 연인 사이의 거리, 가족 외부로의 심리적이고 지리적인 정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존재의 지리와 존재들 사이의 거리는 물론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존재는 단지 주변 환경의 수동적인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구성되는 방식에 이바지하는 식으로 환경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이에 대해 조해진은 “이제 나는 로에게도 나를, 그 자신이 개입된 내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로기완이 내 삶으로 걸어들어온 거리만큼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역시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분명히 적어 보인 바 있습니다. 이는 조해진이 전하는 산책(자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케 합니다. 다시 말해, (산책자의) 행복이란, 환경, 자신의 몸, 자신의 움직임, 그리고 지점 A에서 지점 B에 이르는 경로에 관한 지도를 그리는 매우 많은 조작을 통해 비로소 도달 가능한 관념의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의 산책이란 아케이드를 관망하는 댄디들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살된 존재로서의 환경을 호흡하며, 걷고, 뛰고, 울고, 살아 있다는 감각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물질적 생동입니다. 이는 “신체와 세계의 친밀성”을 통해 행복을 다시 이야기하고자 했던 사라 아메드의 사유와 겹쳐지고, 끝내 맞닿는 듯합니다.

 

  사라 아메드가 말하는 ‘친밀성’은 ‘집’에 있지 않습니다. 집은 ‘행복한 사람들’의 세상이 기반한 토대이며, 빈번하게, 사실상 거의 전적으로 이성애적(straight) 환대가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퀴어는 정동 이방인(affect aliens)의 자리를 할당받습니다. 조해진의 가장 큰 행복(언니밖에 없네, 큐큐, 2020)은 시인 김현의 동명의 시 가장 큰 행복(호시절, 창비, 2020)로부터 영감을 얻어, 이를 사라 아메드의 친밀성 쪽으로 ‘재정향’시키는 정동의 힘을 보여줍니다. 가장 큰 행복에서 ‘나’와 ‘그’는 공항 맥도널드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의식하게 됩니다. 이는 만남이 아니라 마주침이며, 이는 마주함과도 다릅니다. 마주침은 (행복의) 약속이 아니라 우연발생입니다. 이들은 약속하지 않습니다. 이별의 약속마저 단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까지라도 나는 그의 거리를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장 큰 행복’은 ‘산책자의 행복’과 다르지 않고, 그 행복은 집 밖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와 ‘그’는 또 한 번 집이라는 행복-원인의 사회적 형식에 귀속되길 거부함으로써 불행하게 ‘행복’하기 대신, 행복하게 ‘불행’하기 쪽을 선택한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이 우연에, 우연의 도착에,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소로서 아메드는 ‘거리’를 주목하며, ‘거리’가 건너는 지점뿐만 아니라 만나는 지점도 제공한다며, 우연한 마주침조차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기반에 달려 있는 셈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조해진의 거리는 거인의 핏줄입니다. 핏줄을 가진 살된 존재는 숨 쉬고 있습니다. 열망(aspiration)의 어원은 “숨을 쉬다”(breathe)입니다. 숨 쉴 공간을 갖는 것,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열망입니다. 조해진이 금속에 닿은 ‘공기’를 다시 한 번 호흡과 열망, 생성과 변화의 과정 속에서 다룬다는 점은 그런 점에서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숨(창작과 비평 2019년 겨울호)이 아마도 그런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공기를 함께 호흡하며 조해진 소설의 거리를 걷는 일은―조해진이 김현의 시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고 고백했듯―그 거리에서의 ‘마주침’을 통해 발생할 ‘어쩌면’의 미래를 열어두는 일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부산 원도심 문화회복프로젝트 <OPEN THE DOOR, OPEN THE ARTS>의 일환으로 진행된 조해진 작가와 젠더·어펙트연구소의 공개 대담 <‘연결’의 행복>에서 발표된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권 두 현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 현대문학/문화와 미디어의 관계, 특히 한국과 일본의 드라마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테크놀로지와 정동의 문제틀을 적용시킨 연구들을 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접속사와 같은 존재-되기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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