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적 읽기-쓰기] 연결의 행복을 전하는 진심 :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민음사, 2019)을 빌려서 전하는 말 (신민희)

조해진, 『단순한 진심』, 민음사, 2019.

 

 

  1. 박복한 자들의 얼어붙은 서사

 

 

  ‘박복(薄福)하다’는 말이 있다. 이때 ‘복이 없다’는 ‘팔자가 사납다’는 의미로 드러나기도 한다. 팔자가 사납다는 말. 한 평생에 걸쳐, 끈덕지게 들러붙는 이 불운은 족쇄에 가깝다. 그저 복이 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삶 전체를 불행한 것으로, 그 불행을 운명이자 숙명처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말이다. ‘팔자가 사납다’는 말은 주술처럼 말해지고, 옮겨지고, 들러붙어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 된다. “정면이 아니라 바닥을 보며 걷고”, “둥글고 작아지는 절망의 자세”를 가졌으며, “아무리 친밀한 사람이 생겨도 미리 관계의 끝을 상정하는 작은 마음”은 ‘팔자 사납다’라는 말이 힘을 가져 만든 몸들이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그늘져 보인다는 것은, 박복한 팔자가 왠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그래서 ‘어쩐지’라는 말을 남기며 늘 신체에 그림자처럼 따라 붙도록 만든다. 그늘진 얼굴과, 움츠러든 어깨, 바닥을 향한 얼굴은 더 이상 다른 곳을 상상하지도 떠나지도 못하도록 만든다.

 

  『단순한 진심』은 박복한 자들, 팔자 사나운 자들의 이야기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암흑에서 왔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어둠 속에 있다. 자신의 기원으로 상상하는 이 암흑의 공간에는 자신이 기억할, 자신을 기억해줄 이가 없으며, 암흑의 공간은 허가서, 수수료, 영수증이라는 교환의 기록으로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게 한다. 『단순한 진심』을 불운이라는 운명의 서사로 읽는다면, 한 아이가 부모에게 버려졌고, 그 버려진 아이는 해외로 입양되었고, 입양아로 자란 아이는 미혼모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시간적 인과성 속에 있다. 그래서 마치 이 이야기는 암흑에서 온 아이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운의 서사로 향하지 않고, 왜 불운하다고 생각하게 되는지, 불운한 자들이 겪는 경로는 왜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인지 질문하고 있다.

 

  불운은 ‘피’로 인해 불거진 것이다. 정상적이고 순수한(혼혈이 아님) 혈연 공동체로서의 가족을 떠올릴 때, 불순한 자들은 불운한 자들이며, ‘타고난’이라는 고정화된 정체성을 가리키게 된다. 버려진 아이는 가족이 없는 아이고, 입양된 아이는 또다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자신의 양분으로, 자신의 버려진 기억을 혈액의 성분으로 삼아 살아가도록 한다. 박복한 자들의 ‘얼어붙은 서사’란 그런 점에서 단단한 결속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서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단단한 결속이란, 혈연 공동체의 서사이기도 하고, 혈연 공동체의 결속 안에서 불거진 불운의 서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단단한 결속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단단해지고, 불행함을 숙명으로 만들도록 한다. 얼어붙었다는 것은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하는 굴레이며, 그 굴레 안에서만 존재하도록 하는 세계의 구조이다.

 

  이 불운한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젠더화되어 있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다, 팔자 좋은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말은 ‘팔자’가 왜 이토록 여성들의 역사를 설명하는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불운의 경로로서의 혼혈, 이주, 입양, 기지촌의 구조는 가족과 국가체제의 결속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 구조가 젠더화된 형태로 이루어져있음을 보여준다. 『단순한 진심』은 이렇게 구조화된 불운의 경로를 문제 삼도록 한다. 문주가 철로 위에서 발견된 것은 어떤 의미인가. 기관사는 “자신이 운전하던 기차를 급정거하여 그 기차에 치일 뻔한 나를 구했다.” 철로는 출발지, 도착지 그리고 상행, 하행이라는 방향과 거리의 측량을 통해 움직인다. 철로에서 발견된 아이의 불운함이란 실상 이러한 경로의 이탈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경로의 이탈이 불운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경로의 이탈이 비로소 사람을 살리는 일의 시작이었음을 보여준다.

 

 

  2. 발신으로써의 이름과 겹침의 세계

 

 

  서사가 ‘암흑’으로부터 시작하고, 얼어붙은 서사로부터 시작하지만 이는 끝이 아닌, 문을 돌리려는 순간에 놓여있다. 안도 바깥도 아닌 문 앞에 서 있는, 그래서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에 있는 서사이다.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은 ‘손’과 ‘문고리’가 접속하는 공간이며, 문 뒤에 절벽이 있을지 계단이 있을지 가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문 앞에서 손잡이를 돌릴 수밖에 없음을 가리킨다.  박복하다고 불운하다고, 문 밖에 붙박였던 이들은 문 앞에서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에서 만난다. 바로 문주가 자신의 기억을 찾아 기록하겠다는 서영의 제안을 받고 수락하게 된 순간이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집이 없다고 믿었고, 자신을 암흑 속에서 상상해왔지만, “이름은 집이니까요”라는 서영의 말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끈다.

 

  한국에 오면서 프랑스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데 그때 중요한 것이 이름을 대하는 방식이다. ‘서영, 소율, 이태원, 아현…’ 자신이 만나는 사람과 공간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의 의미를 헤아리려 애쓴다. 이 소설에서 사람과 공간은 이름을 통해 세계를 열고 있으며, 그래서 이때 이름은 공간적이다. 그 안에 머무는 기억들, 존재들을 위한 세계인 것이다. 이미 있는 것으로 본래 그러한 것으로 불려온 이름의 기억들을 다시금 풀어낸다.

 

“이태원의 유래는 두 가지네요. 하나는 이곳에 이태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그때의 이름이 지금까지 쭉 내려왔다는 거예요. 역원 이름이 이태(李泰)인 이유는 여기에 큰 배밭이 있어서였고요. 다른 하나는 조선이 전쟁을 겪을 때마다 겁탈당한 여자들이 이 동네에서 아이를 낳고 모여 살았는데, 사람들이 그들을 이타인(異他人)으로 불렀다네요. 그 이타인에서 이태원이 유래됐다는 거죠.”

 

  이태원이라는 지명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리고 이태원이 익숙한 이름이라고 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을 모두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태원에서 이타인의 역사는 이름을 풀어내는 일들을 통해서 비로소 가시화된다. 문자의 기록이 아닌 ‘설(說)’이라는 기억의 방식을 통해서 적층되어 온 것이며, 문주는 이 두 번째 설을 신체에 “각인”시킨다. 그렇기에 이름은 불리어온 역사인 동시에, 발신하는 자들의 역사이다.

 

  이름의 세계는 겹침의 세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속에서 만난 것은 겹침의 세계이다. “문주와 문경, 그리고 휘경, 한 글자씩 맞물려 겹쳐지”며, “복희, 연희, 복순 한글자씩 겹쳐”진다. 겹침의 세계는 남아있는 이름을 통해 사라진 자들을 드러나게 하며,  말끔히 떼어지지 않는 자리의 흔적을 보여주기도 하다.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의 세계가 ‘전복’되는 것이 아니라, 겹침의 세계로 제시된다.  

 

  ‘복희식당’이라는 이름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복희’라는 이름은 얼어붙은 세계에서 “이름을 새긴 행위”이자 “살아 있다는 발신의 의미”라 할 수 있다. 복희라는 이름은 연희라는 이름, 주어로서의 이름을 버리고 단단하게 얼어붙은 세계에서 “살아 있다는 발신의 의미”로 내걸은 이름이다. 소유하기 위한 이름이 아니라, 서로를 부르기 위한, 서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이름인 것이다.

 

  그렇기에 복희라는 이름은 ‘비-주체적’이다. 집에 정전이 들어 문주가 촛불이 켜진 복희식당으로 이끌린 것은 순전히 그 이름 때문이다. 비-주체적인 이름은 ‘생명’의 과정을 품고 있다. 특히 ‘생명’이 삶/죽음이라는 이분법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이 살리는 일과 연관되는 일이기에 발산하는 생동의 에너지들이 느껴진다. 복희뿐만 아니라 복희식당의 ‘식당’은 “살리는 역할을 한다”. 살아있는 것으로서의 생명은, 살리는 것으로서의 에너지를 통해서 생명을 개인의 소유로 만들지 않게 한다. 식당은 이 먹여 살리는 일을 한다. “복희 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부터” 문주에게 노파는 복희라는 존재가 되고, 복희의 얼굴 속에서 기관사의 어머니, 어린 시절 자신을 먹여 살린 이의 얼굴을 겹쳐보게 된다.

 

다시 복희 곁으로 걸어가 흐트러졌던 침대 시트를 정리하는데 백순두부탕과 동치미 국수, 그리고 수수부꾸미가 차례로 떠올랐다. 혀와 소화기관과 내 마음의 어떤 부위를 자극하기도 했고 감싸기도 했던 그 맛……. 돌이켜보니, 복희는 내게 늘 음식을 해 주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녀만큼 내 입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가져 준 사람은 없었다. 복희의 음식은 하나같이 맛있었고 이곳이 나의 고향이자 친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기적처럼 복희가 깨어나 내게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음식들을 나열할 생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을 지키게 된 충분한 이유가 되었노라고, 왜냐하면 너를 자라게 했으니까, 그 음식이 너의 피와 뼈를 구성하는 성분이 되었으니까.

 

  복희라는 이름은 “하나의 생명을 온전히 지키겠다는 두 사람의 소망이 결합된 이름”으로, 생명성을 지칭하는 비인칭적인 이름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전환 속에서 음식 또한 “능동적이고 활기 넘치는 존재”[각주:1]가 된다. 음식은 혀와 소화기관을 거치고, 소화의 물리적 작용은 마음의 어떤 부위를 자극한다. 그렇게 피와 뼈를 구성하는 성분이 되어, 나를 그리고 너를 살리고 자라게 한다. 음식을 먹는 일, ‘맛’의 감각은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문주가 자신의 정체성을 허가서, 수수료, 영수증이라는 교환의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과 혀끝에 남은 맛의 감각들을 따라가는 것은 ‘한국인의 입맛’, ‘한국의 맛’ 혹은 ‘고향의 맛’이라는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다. 혀끝에 남은 기억을 통해 음식의 이름을 외우며,  한국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맛의 감각을 통해 닿은 이름이자 공간이다. 음식은 혀와 소화기관을 거쳐 화학적 반응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입맛이라는 이름으로 몸에 남아 있다.

 

 

  3. 행복한 연결과 연결의 행복

 

 

“‘복’도, ‘희’도, 모두 복이 있다는 뜻이야. 럭키라고 알지?”

 

  얼어붙은 서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존재와 존재가 서로 겹쳐지는 곳에 있다. 그래서 연결은 두 존재 사이에서 선분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결은 겹침의 곳에서 발생한다. 이 겹침은 선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서로의 것을 내어주며 겹쳐지는 곳이다. 비-주체로부터 연결되고, 그래서 이미 자신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단순한 진심』이 ‘생모찾기’에 집중하지 않고, 생모를 찾는 과정 안에서 만나는 수많은 증언자들, 혹은 겹쳐지는 존재들과의 만남에 집중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문주가 생모를 찾는 지점에서 엔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이 철로에서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결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주는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과 자신의 기억을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이미 그 안에 존재했던 서사인지도 모른다. 기관사가 경로를 이탈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로 위에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기 위한 힘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복희의 이름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복된 이름이었다는 것, 문주가 철로에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불운한 이들이 행복한 이들로 자리바꿈되는 것은 아니다. 박복한 자들의 불운의 서사가 ‘행복’의 서사가 아닌, 연결의 행복이라는 겹침의 세계이며 이는 행복한 자들의 연결이 아니라, 연결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복한 자들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얼어붙었던 이들이 어떻게 연결과 겹침이라는 관계에 다다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생모’는 도착점이 아니라 겹침의 지점에 놓이게 된다.

 

먼 미래의 어느 날, 아마도 여느 때보다 깊은 외로움이 밀려 오는 날, 내 외로움은 노파의 오래된 하루를 빌려 그렇게 완성되어 갈 것이다. 내 것인지 노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저쪽으로 전가되었다가 다시 이쪽으로 전가되는 실타래 같은 외로움이. 인생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쏜살같이 지나가고 그 밑바닥에 정제되어 남는 건 외롭고 쓰라린 것…….
미안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인생이야, 나의 아가.

 

  ‘노파’를 ‘노파’로 남겨둔 것은 연결의 행복이 해피엔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래서 행복은 결말로 다가오는 것이라, 연결의 순간에 있음을, 그래서 외롭고 쓰라린 것의 날들을 상상하게 한다. 그 외롭고 쓰라림의 순간은 ‘노파’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며, 엔딩이 될 수 없는 존재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새드엔딩도, 해피엔딩도 아니며, “내 것인지 노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저쪽으로 전가되었다가 다시 이쪽으로 전가되는 실타래 같은 외로움”이다. 누구의 것으로 소유되지도 ‘엔딩’되지도 않는 그곳에 행복한 연결이 아닌 연결의 행복이 있다.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부산 원도심 문화회복프로젝트 <OPEN THE DOOR, OPEN THE ARTS>의 일환으로 진행된 조해진 작가와 젠더·어펙트연구소의 공개 대담 <‘연결’의 행복>에서 발표된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신 민 희

 

젠더·어펙트연구소 특별연구원. 대체로 문란하고, 저급하다고 하는 것들에 이끌려, 이를 삶이자 공부의 주제로 삼고자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지역의 문제를 젠더적 관점, 정동적 관점에서 독해하고자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1. “나는 음식을 ‘삶이 계속된다면 소유할 수 있는’ 도구로 바라보는 관점에 반대하며, 음식 그 자체를 배치의 구성요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신진대사, 인지, 도덕적 감수성을 포함하는 행위적 배치내의 행위소로서 해석한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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