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적 읽기-쓰기] 정동적 연결, 다른 자리 만들기에 대한 소고(小考) : 조해진 소설집 『빛의 호위』(창비, 2017) 읽기 (권영빈)

조해진, 『빛의 호위』, 창비, 2017.

 

 

  1. 마주침과 연결의 흔적을 좇는 이야기들

 

 

  누구든지, 어디에나 꼭 맞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매일같이 오가는 일터나 학교에서, 우리가 친숙하다고 느끼는 공간에서, 자주 만나는 친한 사람들과 가족에게서, 그리고 우리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은 우리의 신체로부터 종종 낯설고 어렵고 감당하기 힘든 타자로서의 자기를 발견한다. 이러한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 온전히 인정받거나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은 우리에게 누구와도,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근원적인 소외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지치지도 않고 누군가와, 무언가와 연결되려 한다.

 

  타자에 대한 이해, 글쓰기를 자신의 소설세계로 정립해온 작가 조해진에게 이러한 ‘연결’의 문제는 이야기의 요체가 될 수밖에 없다. 대표작 『로기완을 만났다』(2011)를 포함해 그의 많은 소설들은 이주민, 망명자, 여성, 퀴어, 고아 등 젠더-계급-공간의 교차로에서 정상성의 범주 바깥을 배회하는 주변인, 소수자들을 조명한다. 이미 전제되어 있는 사회, 공동체의 특질과 ‘맞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조해진의 소설이 말해온 것은 연대를 앎의 문제로 환원하는 폭력적인 이해의 방식이 아니라 ‘공동거주공간’[각주:1]을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타자에 대한 이해는 타자와의 완전한 연결이 아닌, 자기 안에 타자를 살게 하는 방법, 미세한 이어짐의 순간에서 오는 자기 변용으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지는 자리에 대한 것이 된다.

 

  『빛의 호위』[각주:2]에 수록된 소설들 또한 이러한 마주침과 연결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방향도, 목적지도 특정되지 않은 철로 한복판과 같은 삶이 어디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 「문주」,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던 삶이 낯선 이의 순간적 몸짓에 의해 변화되는 이들을 그린 「시간의 거절」, 어디서 무얼 하든 ‘손님’처럼 부유하는 존재와 그가 인식하는 두려운 연결에 대한 「작은 사람들의 노래」를 포함해 후술할 소설들까지, 『빛의 호위 속 인물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존재를 그리워하고 그와 이어지(려 하)며 시공간의 분절을 무화해 그러한 마주침의 찰나를 향한다.

 

  이러한 연결은 한 데 묶이고 지속되고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한없는 맴돎 속에서 일시적으로 교차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조해진의 소설은 완전한 이어짐이나 분리로 확정되지 않는 (단절적) 연결의 순간들에 주목하면서, 연결의 일시성과 덧없음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거나 잔존하는 정동(情動, affect)이 인물들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다른 방식으로 정립하게 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빛의 호위의 연결은 ‘자리’에 대한 인과나 기원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결의 흔적 속에서 새로운 관계맺음을 일으키는 강도(強度)로서 포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빛의 호위를 정동적 연결과 그로부터 생성되는 다른 자리의 관점에서 읽어내기 위한 시도이다.

 

 

  2. 번역의 자리

 

  「번역의 시작」은 조해진이 그리는 순간적이고 선회적인 연결의 형식을 살피기에 적절하다.

  이 소설에서 타자와의 연결은 다음과 같이 상상된다.

 

마침 뒷마당에선 기차 한 대가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다. 창가로 다가갈수록 기차는 크고 선명해진다. 철로도 없는 뒷마당을 반복해서 돌고 있는 그 기차에는 기관사도, 검표원도, 화장실을 이용하는 승객도 없다. 탑승객은 오로지 영수씨와 안젤라, 두 사람뿐이다. (중략) 잠결에도 나는, 그 소리가 꿈속의 질서를 헝클이지 않기 위해 그 테두리만을 부드럽게 에두르며 지나간다는 걸 느끼곤 했다.
영수씨와 안젤라를 태운 그 기차가 늘 반원 모양의 뒷마당을 도는 건 아니었다. 기차는 내가 헤매고 다녔던 러스트 빌리지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끝내 가보지 못한 뉴욕 플러싱의 허름한 뒷골목과 가족이 없는 자들이 묻힌 음산한 공동묘지를 통과하기도 했다. 총성이 울리는 삼엄한 국경지대를 지나간 적도 있었고, 비가 내리고 새들이 우는 검은 대지를 가로지른 적도 있었다.
그래도 기차 소리는 한결같았다.
철컹철컹, 철컹철컹.
- 「번역의 시작」(『빛의 호위, 35쪽)

 

  ‘나’는 적금을 들고 도망친 애인 ‘태호’를 찾아 무작정 미국에 들어와 그의 아파트에 눌러앉았지만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없이 여행비자의 만료일을 앞두고 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집에만 갇혀 우울한 시간만 보내던 나는 우연한 계기로 아파트 청소원인 ‘안젤라’와 언어의 소통 없이도 친구가 된다. 남미 이민자인 안젤라는 국경을 넘던 중 남동생을 잃어버렸는데, 그는 동생의 ‘도착’을 기다리며, 그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러나 안젤라의 동거인이자 애인인 ‘벤지’는 (맞는 역할을 하는) 아마추어 격투기 선수로 안젤라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어느 날 안젤라가 사라지고 나는 짐을 싸 태호의 집을 나와 안젤라를 찾아다니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다. 안젤라가 살던 동네에서 나는 안젤라 대신 ‘철컹철컹, 철컹철컹’ 하는 희미한 기차소리를 듣게 되고, 오래전 식솔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취업이민을 떠나버린 아버지 영수씨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늘 지니고 다니는 영수씨의 유품인, 공책에 그려진 갖가지 사물들의 그림을 보면서 영수씨가 남긴 감정을 번역한다.

 

  소설에서 안젤라와 영수씨는 모두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들이다. 내가 안젤라와 언어 없이 소통하고 친구가 되었던 현재 시점은 마지막 모습조차 기억하는 이 없이 증발해버린 영수씨의 이십여 년 전 시점과 연결된다. 미국이라는 낯설고 외로운 땅에 단 얼마간만 머물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 위에 안젤라와 영수씨가 겹쳐지는 것인데, 이것이 단지 나의 기억이나 공감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 것은 소설 속에 설정된 기차 이미지로부터 온다.

 

  연결의 순간을 알려주는 기차소리는 인용에서처럼 나의 주변을 철로도 없이 선회하면서 그 안에 타고 있는 이들-안젤라, 영수씨와 같은 ‘사라진’ 대상들의 존재를 일깨운다. 이 소설에서 연결은 인물들, 대상들 간의 구체적 만남과 결속이 아닌, 떠나간 기차 뒤에 남겨진 상상된 체온으로, 그들의 존재감을 어렴풋이 느끼는 정도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연결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기차가 내가 헤맸던 장소들, 국경지대, 무연고묘지 등을 지나 끊임없이 떠나가면서, 내게 “망각을 거부하는 것”(58쪽)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차들이 오고갈 때마다 나는 “또 다른 번역”을 시작한다.(59쪽)

 

  「번역의 시작」에서 ‘나’를 일깨우는 기차소리와 선회하는 기차의 이미지는 타자와 마주치고 그에게 매번 새롭게 접속되는 ‘번역’의 과정을 그린다. 타자와의 마주침과 연결의 흔적을 갈망하고 좇는 조해진의 소설에서 이러한 연결-번역은 매번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며, 관계의 확정이나 주체 내부의 기억으로 환원되는 ‘이해’나 ‘공감’이 아닌 번역되는 순간의 고유함에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리고 이 기차는 인물의 머리 위와 주변을 반원형을 그리며 선회하면서, 오고 감을 반복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윤리적인 장에 다다르게 된다. 타자를 번역하는 것은 자기를 (재)번역하는 과정과 다름 아니며, 이는 나의 위치와 자리를 관계적으로 재정립하는 행위의 전조가 되기 때문이다.

 

 

  3. ‘남겨짐’에 대한 사유의 변곡점

 

  한편 「사물과의 작별」과 「동쪽 伯의 숲」은 연결되어 있다. 이들 소설은 억압적 자기증명의 형태로 개별 존재들을 한국(인)이라는 등질적 정체성으로 호명하고 구조화해가던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개인과 세계의 폭력적 관계와 그로부터 희생된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는 것을 서사의 축으로 삼는다. 차별과 상처가 없는 고국을 동경해 유학 온 재일조선인 ‘서군’은 하숙집 친구의 일본어 원고 뭉치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돌연 사라지고(「사물과의 작별」), 그 자신도 이방인이었지만 자기 안에 유폐되어 살아가는 또 다른 이방인에게 따뜻했던 유학생 ‘안수 리’는 독일 유학생,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증발된다(「동쪽 伯의 숲」). 이들은 ‘몰이’의 방식으로, 자기 것이었던 삶의 경로에서 느닷없이 내쫓긴다.

 

   서군이나 안수 리가 경험한 생의 분기점이 그들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고모’(「사물과의 작별」)와 ‘한나’(「동쪽 伯의 숲」)에게, 그리고 ‘나’(「사물과의 작별」)와 ‘발터’를 넘어 ‘희수’(「동쪽 伯의 숲」)에게로 연결되는 것이 두 소설을 관통하는 또 다른 축이다. ‘실종’이 극도로 폭력적인 단절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서군과 안수 리의 행방불명이 고모와 한나의 삶의 경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필연적이다.

 

  청계천변에서 서군과 레코드 상점 딸 고모의 마주침의 장면은 이들의 관계가 “개인이 세계에 앞선다”(100쪽)는 믿음을 토대로, 세계의 억압이 침범해오지 않을 만큼 안심스러운 것으로 상상되도록 한다.(이러한 일상성은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고모와 서군의 단 한 번의 전화통화에서도 그려진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서군은 고모에게 원고 뭉치를 맡기고 고모는 그것을 다시 서군에게 전해주기 위해 애쓰게 된 것인데, 그 결과 서군은 사라지고 고모는 그 시절의 자기에 사로잡힌 채 끝나지 않는 유배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종군 기자로서 심각한 후유증을 지녔던 아버지의 무력한 삶을 지켜보면서 세계와 관계에 대한 환멸을 선택했던 한나에게 안수 리는 “그녀의 유배지로 자진하여 들어가 친구가 되어”(93쪽)준 존재인데, 그의 갑작스러운 실종에 한나는 고통의 실체를 외면하고 그와의 관계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사물과의 작별」에서 알츠하이머를 앓는 고모가 서군과의 관계를 복기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전해주는 것과, 「동쪽 伯의 숲」에서 한나가 자신의 유배지로부터 마침내 걸어 나와 사람들과 관계 맺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결국 발터의 삶을 있게 한 것은, 서군이나 안수 리가 겪었던 역사적 폭력의 경험과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특정한 형식으로, 남은 자들의 삶의 경로와 궤적을 바꾸는 정동으로 잔존하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케 한다.

 

  소설에서 이러한 이어짐은 「사물과의 작별」의 나, 「동쪽 伯의 숲」의 희수가 품게 되는 마음의 한 장면을 통해 제시된다.

 

고모가 유기한 쇼핑백이 이곳에 있는 한, 유실물 센터는 세계의 그 어떤 곳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공간으로 남게 되리란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세계를 구성하는 데 없어도 무방한 덧없는 조각일 뿐이란 것도, 내가 분명하게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슬펐다.
- 「사물과의 작별」 (『빛의 호위, 87쪽)

 

그가 걷는 곳은 언제나 빈 들판이었고, 투명한 계단을 지나 하늘 끝까지 이어진 그 발자취는 자격을 되묻는 것으로 충만했던 내 작은 웅덩이에서 올려다본 한 인간의 별자리처럼 빛났다. 상상보다 더 환하게, 더 고독하게…….
- 「동쪽 伯의 숲」(『빛의 호위, 114쪽)

 

  알츠하이머를 앓으며 멈춰진 생의 순간을 좇는 고모는 나에게 쇼핑백을 유기한다. 거기 담긴 것은 고모가 평생토록 서군에게 주고 싶었던 영치물로, 나는 그것을 내가 일하는 지하철 유실물 센터에 보관하게 된다. 나는 고모와 서군을 “세계로부터 분실된 존재들”(81쪽)로 인식하고 그 ‘최초의 분실자’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지만, 그들이 서로 닿고자 애썼던 역사의 유물로 내게 온 쇼핑백으로부터 ‘대체불가능성’이라는 의미를 찾는다. 희수가 한나와 안수 리의 역사를 통해, 그리고 안수 리를 견디게 한 ‘부끄러움’의 힘으로부터 삶의 자격에 대한 의심과 환멸을 거두게 되는 것 또한 이들의 역사적 정동의 적립이 가 닿은 긍정적이고 윤리적인 자리일 것이다.

 

  이 자리는 덧없고 고독하며 슬픈 것이지만 그 자체로 ‘남겨짐’의 의미를 정동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히게 한다. 환원 불가능한 존재들과의 마주침의 경험, 흔적은 ‘남겨짐’을 더 이상 ‘버려짐’(left)이 아닌 ‘사라지지 않는’, ‘이어지는’(remain)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것이 언제든지 새로운 관계와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가능태로 존재한다는 점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나와 희수의 자리는 애처롭고 연약하지만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정동적 연결을 감각하는 존재들이자 다른 자리 만들기로 자기의 위치를 정향할 수 있는 이들이 된다.

 

 

  4. 여성(들)의 말하기와 ‘이어서 살아가기’

 

  「사물과의 작별」과 「동쪽 伯의 숲」이 삶의 경로와 궤적을 바꾸는 가능성으로서의 연결을 보여준다면, 『빛의 호위』에 수록된 또 다른 소설들은 그러한 정동적 연결을 추동하고 매개하는 여성 인물 혹은 여성 인물들 간의 연결의 양상을 초점화한다. 「사물과의 작별」에서 일본어 원고 뭉치나 쇼핑백과 같은 정동적 사물은 역사와 세대라는 시간의 서사 속에서 관계를 촉발하고, 「동쪽 伯의 숲」에 보이는 ‘서신’의 형식은 주체와 대상의 단절과 연결을 오가는 경계적 측면을 지니는데, 「빛의 호위」와 「산책자의 행복」에서는 연결의 의지적 통로(passage)로 분하는 여성(들)의 존재 양태가 엿보인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어짐은 타자성을 상호 나눠 갖는 것으로서의 다른 삶의 형식을 보여준다.

 

  표제작 「빛의 호위」에서 분쟁지역을 다니며 사진을 찍는 ‘권은’은 ‘알마 마이어’와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통해 그네들의 삶이 교통했던 경험을 ‘나’에게 전한다. 권은이 알마를 알게 된 것은 하나뿐인 아들 ‘노먼’을 팔레스타인에서의 피격으로 잃은 ‘어머니’라는 위치성을 초점화한 다큐멘터리에서였지만, 거기서부터 되짚어지는 알마의 삶은 유대인이자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사랑하는 이가 있었던, 그리고 끝내 생존한 이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것으로 조명된다. 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맹렬했던 시기 수용소행의 위기 앞에서 알마는 연인 ‘장’의 도움으로 창문도, 빛도 없는 지하 창고에 은신한다. 그곳에서 알마는 견딜 수 없는 고독과 고통을 감은 눈 너머의 악기상점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대한 상상과, 가끔 장이 음식과 함께 전하는 악보에 의지해 관객도, 소리도 없는 연주를 하는 것으로 견딘다. 그리고 그 악보들은 알마의 삶을 지속하게 한, 상상이 아닌 실재하는 ‘빛’이 되었다.

 

  권은은 어둡고 추운 방에 버려진 채로, 스노우볼의 닫힌 세계에 갇혀 있다 카메라를 준 나의 호의로부터 다른 삶을 살게 된 이다. 장과 나는 알마와 권은에게 생(명)을 주는 빛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빛이 언제나, 도처에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준 존재이기도 하다. 알마의 아들 노먼은 아버지 장이 남긴 빛을 이어받아 분쟁지역에 뛰어들었고 권은 또한 빛을 발견하려는 삶의 방식을 택한다. 권은이 알마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거기 감응한 것은 둘의 생존의 경험이 닮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권은이 만난 적도 없는 타자의 역사에서 발견한 ‘빛’을 자기와 세계를 향해 동시에 투과하게 된 지점이다.

 

  권은이 세상에 없는 존재인 알마를 향해,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나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는 이들 개별자들의 연결뿐만 아니라 세계의 관계를 조이는 동시에 확장하는 일을 의미한다. 나의 주석에 따르면 권은은 ‘녹슬고 찌그러진 현관문’이나, ‘추운 방’, ‘눈 쌓인 운동장’, ‘약품 냄새가 밴 병실’과 같이 외롭고 쓸쓸한 공간 감각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며, 그러한 세계에 사는 ‘단 한 명’의 주민이다.(9쪽) 그러나 권은이 쓰는 수신자 없는 편지는 ‘빛의 호위’라는 행위를 자신을 통과해 타자를 비추는 행위로 재정립하게 하고, 그로부터 권은은 더 이상 폐쇄된 세계에 사는 단 한명의 주민일 수 없는, 펼쳐짐의 양태를 만들어내는 프리즘으로 변용된다. 이처럼 「빛의 호위」의 연결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향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행위의 문제 또한 환기한다.

 

  한편 「산책자의 행복」에서 ‘메이린’은 ‘죽음’과 ‘위태로움’이라는 공간에 각각 놓인 두 존재 사이에 서서, 이들의 삶을 자기 것으로 겹치고 포개는 방식으로서의 연결을 지향한다. 메이린은 「빛의 호위」의 권은이 그랬던 것처럼 받는 이 없는 편지를 통해 연결된 삶을 좇는데, 시공간을 거슬러 연결을 매개하고 거기에 새로운 정동의 축적을 더하려는 이러한 여성 인물들의 서사는 차분하면서도 의지적이라는 점에서 다시금 눈길을 사로잡는다.

 

  「산책자의 행복」은 철학도이자 연구자, ‘선생’의 삶에서 내쫓겨 편의점 심야 아르바이트로 고된 나날을 보내는 ‘그녀’와, 한때 그녀의 학생이었던 중국인 유학생 메이린이 그녀에게 전하는 특별한 마음에 대한 것이다. 메이린은 그녀가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녀의 삶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메이린이 편지를 통해 그녀를 ‘라오슈(老师)’라 부르고 또 부르는 행위는, 친구 ‘이선’의 죽음과 그녀가 놓인 위태로움 사이에서 두 존재와 자기 자신을 함께 공명하게 하는 타전이다.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구나.
- 「산책자의 행복」(『빛의 호위, 142쪽)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다예요, 라오슈…….
- 「산책자의 행복」(『빛의 호위, 142쪽)

 

  그녀-라오슈가 메이린에게 준 가르침은 ‘살아있음’이라는 감각 자체를 삶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했던 때의 라오슈는 죽음이 “구체적 단절이 아니라 존재를 완성하고 성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130쪽) 것이라며, 죽음과 삶의 관계를 다분히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이 메이린에게 공허한 것으로 남지 않은 것은 죽음의 실체에 가까워지는 라오슈의 감각을 다시 ‘살아있음’으로 뒤돌려 세우려는 현재의 메이린의 부름이 있기 때문이다.

 

  메이린은 친구 이선을 통해 겪었던 절망과 죽음의 표지로 라오슈의 현재를 읽고, 반응하지 않는 라오슈에게 부단한 일깨움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러한 행위는 이선의 삶을 자기 내부에 살게 하고, 그것으로 그녀-라오슈 또한 살게 하는 연결의 행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라오슈의 응답은 수년간 부재하지만 라오슈가 종종 메이린을 향한 답장의 내용을 상상하고 메이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살아있음’이라는 감각 속에 이들이 이미 연결의 흔적을 나누어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빛의 호위」 속 알마 마이어와 권은, 그리고 「산책자의 행복」의 이선, 메이린, 라오슈에게 이어지는 삶은 바톤을 넘겨받는 것이 아닌 타자의 경험과 정동을 겹치고 덧댄 채로 고통을 나누는 형식으로 의미화된다. 이때 수신자 없는 편지로 발화되는 말하기는 살아있는, 개별적 존재들의 연결을 넘어 삶과 죽음, 시공간의 분절을 이어내고 그 안에 새로운 관계를 촉발하는 자리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여성(들)의 말하기와 ‘이어서 살아가기’의 형식은 타자성을 감각하고 그것을 상호 나눠 갖는 여성 주체의 세밀한 의미를 추적하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질리언 로즈는 매릴린 프라이예(Marilyn Frye)와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의 저작으로부터, 억압, 내리누름, 끼임, 축소와 같은 ‘갇히는 것(confinement)’에 대한 인식이 여성의 삶과 경험을 설명한다고 말하는데[각주:3], 이러한 ‘갇힘’, ‘위치지어짐’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여성의 신체적‧공간적 경험을 ‘열린 취약성’으로 인식하게 하고 정동적 연결과 관계를 촉발하는 매개로 기능하게 하기도 한다. 두 소설에서 여성들이 보이는, 주체도 대상도 없는 연결 행위는 삶이라는 덧없는 고유함을 명멸하는 빛 속에 위치시키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행위로도 읽을 수 있게 한다.

 

 

  5. 연결의 흔적을 덧새기는, 소설

 

 

알아챌 수 없는 것들의 극히 미세하고 분자적인 사건들. 소소한 것과 그보다 더 소소한-.
정동은 사이에서 태어나고, 누적되는 곁(besideness)으로서 머문다. (중략)
내밀하면서도 동시에 비인격적인 정동은 관계 맺음과 관계의 단절 모두에 걸쳐 축적되면서, ‘몸들’ 사이에 흐르는 강렬함의 썰물과 밀물을 가로지르는 어떤 힘-마주침들의 양피지가 된다.
- 『정동 이론』, 15-16쪽.

 

  『정동 이론[각주:4]의 저자들은 정동의 과정적·구성주의적 특질로부터 그것이 결국 ‘무엇’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당장 있으면서도 언제나 ‘아직 아님’이라는 현존의 양식을 갖는 정동은 마주치는 주체/대상이 아닌 마주침의 ‘각도’에서 빚어지는 관계성 속에 달라붙는다. 저자들은 이를 정동이 지닌 교육-미학적(pedagogico-aesthetic) 특성이라 말하기도 한다. 정동의 비본질적이고 중립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치적·윤리적 지평 위에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위치한 지리적 조건-자리를 전환시키는 흔적을 항상적으로 남기기 때문이다.

 

  『빛의 호위 속 소설들은 이러한 정동의 잔존과 지속을 둘러싼 타자들의 이야기이며, 마주침의 흔적을 찾아 새로운 관계적 자리를 생성하는 이야기이다.

 

  이 같은 점이 구체적이고 의지적인 발화로 포착되는 대목들도 있다. 

 

당신이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들,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일과 멋진 계획들, 만날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들,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채로. 쓰이지 못한 역사,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 닫혀버린 하나의 미래.
- 「잘 가, 언니」(『빛의 호위』, 164쪽)

 

“나는 생존자고, 생존자는 희생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다.”
- 「빛의 호위」(『빛의 호위』, 16쪽)

 

안수 리가 한나의 죽음을 알고 애도하는 순간에야 한나는 살았고 사랑했고 슬퍼했던 흔적을 가진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 「동쪽 伯의 숲」(『빛의 호위』, 94쪽)

 

  「잘 가, 언니」의 ‘나’는 희생으로만 점철된 삶을 살다 간 언니를 애도하기 위해 그의 흔적을 더듬고 그가 남긴 생을 이어서 살아가게 된다. 이때의 ‘이어서 살아가기’ 또한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언니의 ‘기억’뿐만 아니라 언니의 ‘침묵’까지 모두 안은 채로, 언니의 숨소리를 자기 것으로 지닌 채 나의 몸을 바꿔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빛의 호위」에서 노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한센’이 말하는 기억 또한 남은 자의 시선에서 전유되는 것이 아닌 실재했던 이들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 애도는 누군가를 온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쓰이지 못했거나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더듬고 기억하는 이들의 행위는 소설 속에 갇히지 않고, 소설을 통해, 작가와 독자를 통해 일종의 연결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또한 소설이 가진 관계적 정동의 힘이며, 그런 점에서 조해진의 소설은 삶의 경로와 궤적을 미세하게 바꾸는 정동의 잔존, 정동적 연결, 정동적 순간들을 드러내는 교육-미학적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문주’라는 이름을 붙여준 기관사와의 연결의 흔적을 좇다(「문주」) ‘복희’(들)와 만나게 되는 이야기처럼(『단순한 진심, 민음사, 2019), 소설이 행하는 정동적 연결은 소설들 사이의 연결을, 소설과 독자 사이의 연결을 넘어 세계의 관계를 다시 짜는 공명을 일으킨다. 그 가운데 (재)발견되거나 만들어지는 자리들, 타자를 향해 고쳐 앉는 자리들이 정동적 읽기의 유의미한 결과로서 다시 자리할 것이다.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부산 원도심 문화회복프로젝트 <OPEN THE DOOR, OPEN THE ARTS>의 일환으로 진행된 조해진 작가와 젠더·어펙트연구소의 공개 대담 <‘연결’의 행복>에서 발표된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권 영 빈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동아대학교에서 강의합니다. 정동과 공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주로 한국 현대소설을 읽고 분석하면서 젠더화된 신체와 여성의 공간 경험을 젠더지리학의 방법으로 연구합니다. 더 재미있고 따뜻한 문학, 글쓰기를 위해 읽기-쓰기가 가진 수행적 힘을 다잡고자 노력합니다.

 


 

  1. 함돈균, 「이니셜의 그들, 불행의 공동체 - 조해진의 소설들에 부쳐」, 문학동네 21-1, 2014 참조. [본문으로]
  2. 조해진, 빛의 호위, 창비, 2017. 이하 인용은 면수만 표시함. [본문으로]
  3. 질리언 로즈, 페미니즘과 지리학, 정현주 옮김, 한길사, 2011, 328쪽. [본문으로]
  4. 멜리사 그레그·그레고리 시그워스 편저, 정동 이론,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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