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머들의 매직 서클 또는 젠더스피어―<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의 트러블과 함께하기 (권두현)

 

1. 게임의 혐오와 게임에 대한 혐오의 뒤얽힘

 

1편이 혐오스러운 세상에서 사랑을 찾는 과정이었다면, 2편은 반대로 사랑을 잃음으로써 혐오를 탐색하는 과정[각주:1]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 시리즈에 대해 김성윤은 이 시리즈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소 거친 대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1편’과 ‘2편’의 연속과 단절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진술입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Ⅱ의 애비

인터랙티브 무비(interactive movie)로도 볼 수 있는 어드벤처 액션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그 자체로도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지만, 게임 그 자체에 대한 평가도 드라마틱했습니다. 2013년에 발표된 ‘1편’의 호평과 흥행에 이어, 2020년에 발표된 ‘2편’에는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 GOTY)’으로 상징되는 극찬과 동시에 ‘혐오’의 정동이 들러붙었습니다. 애지중지 살려놓았던 1편의 주인공이 갑자기 살해당하고, 그 살인자로 플레이해야 하는 게임 디자인이 문제였고, 그 살인자가 ‘남자 같은’ 근육질의 여성이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2편’의 게임 타이틀은 급기야 기존 남성중심적 게임 문화에 익숙한 일부 게이머들에 의해 (실제로) 화형식에 처해졌습니다. “2편은 사랑을 잃음으로써 혐오를 탐색한다”고 했을 때, 그 혐오의 드라마는 단순히 게임에 내장된 것만이 아니라, 확장과 함께 전이되면서 게임 바깥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라스트 오브 어스 — 파트 Ⅱ(The Last of Us Part Ⅱ)>에서 논란의 쟁점은 ‘캐릭터 간의 ‘혐오’라는 정동이 게임 플레이를 통해 어떻게 게이머에게까지 흐르는가’에 있는 셈입니다. ‘파트 Ⅱ’는 먼저 프로타고니스트의 시점에서, 다시 한번 안타고니스트의 시점에서 연달아 게임을 진행하도록 디자인된 게임입니다. 다시 말해, ‘파트 Ⅱ’의 논란은 이 혐오를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해체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게임 디자인의 정동적 차원과, 그 혐오를 끝내 캐릭터에 대한 사랑, 캐릭터 간의 사랑을 수호하는 과정이라고 여기는 게임 플레이의 정동적 차원, 이 두 차원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2. ‘여성의 남성성’, ‘부성의 모성성’, 젠더의 수행성

 
앞서 인용한 김성윤의 진술을 조금 더 구체화해보자면, ‘파트 Ⅰ’이 구축한 ‘사랑’은 다른 말로 ‘가족적 친밀성’이라 할 수 있겠고, ‘파트 Ⅱ’에서 파괴된 것 또한 바로 이러한 ‘가족적 친밀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에서 ‘가족적 친밀성’은 어떻게,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에 대한 한 가지 답은 조혜영이 언급한 ‘부성’에 있습니다. 조혜영은 ‘파트 Ⅰ’의 주인공 조엘이 자신의 딸을 잃은 대신,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엘리와의 관계를 ‘유사-부녀적 감정’을 읽어냅니다.[각주:2] 이는 김성윤이 ‘사랑’이라 언표했던 감정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질문을 길어낼 수 있겠습니다. ‘조엘의 ‘부성’은 어떻게,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것은 물론 조엘의 행위자성을 통해 드러날 것이고, ‘파트 Ⅰ’의 플레이어는 바로 이 행위자성을 체현하게 됩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엘리(左)와 조엘(右)

 
그런데 저는 조엘의 행위자성을 그의 젠더에 기반해 ‘부성’이라 부르기보다는, 어쩌면 ‘모성’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라는 관점으로 접근해보고 싶습니다. ‘부성’과 ‘모성’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거나, ‘부성’과 ‘모성’을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응시키면서 ‘모성’을 신화화하는 전제에 기댄 접근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결코 아닙니다. 바로 조혜영의 논의에 이러한 사유의 단초가 담겨 있는데, 예컨대, “애비가 ‘여성의 남성성’을 보여준다”면, 조엘은 ‘부성의 모성성’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조혜영은 ‘엘리는 조엘의 딸 사라를 대체한 존재’임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을 포착합니다. (이는 조혜영의 글이 아니라 말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게이머는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대한 ‘양육자’로서, 모성의 돌봄 정동에 휩싸여 있다는 흥미로운 제안을 들려줍니다.[각주:3] 물론 <더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그 정동은 조엘과 엘리 사이의 관계에 입각한 행위자성의 체현에 의해 보장되는 것입니다.
 
사실, ‘파트 Ⅱ’에서 엘리에게 소위 말하는 ‘기술(테크닉)’을 가르쳐주는 조엘은 다분히 테크놀로지라는 관념과 실천에 깃든 남성적 헤게모니를 별다른 의심 없이 반영하는 듯합니다. ‘파트 1’에서도 사실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트 Ⅰ’에서의 조엘은 후계(?)를 염려하는 지위라기보다도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돌봄 책임’에 철저히 입각해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엘리를 최대한 NPC의 지위에 머물도록 합니다.) 파트 Ⅰ에서의 엘리는 그런 점에서 조엘과 한층 더 ‘친밀’합니다. (‘파트 2’에서도 물론 조엘은 돌봄의 주체입니다.) 이러한 돌봄 책임이 부성과 구분되는 모성에 전적으로 할당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엘과 엘리를 ‘유사 가족’의 프레임으로 볼 수 있다면, ‘유사 가족’이 기대고 있는 가족 모델에서 조엘은 오히려 모성의 형상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애초에 조엘은 엘리라는 면역력을 가진 신인류를 잉태한 형상이거니와, 그런 점에서 둘은 분리불가능한 산모와 태아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조엘의 젠더가 아니라 행위자성을 통해 그의 위치 또는 위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겠습니다. 조혜영이 ‘파트 Ⅱ’의 애비에게서 포착한―좀 더 정확하게는 게이머들이 포착한―‘여성의 남성성’과 마찬가지로,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는 ‘부성의 모성성’, 더 나아가 ‘젠더의 수행성’에 대한 고민을 촉발합니다. 만약 이 고민이 어느 정도 허락되는 가정일 수 있다면, ‘부성의 모성성’은 ‘파트 Ⅰ’에서 ‘파트 Ⅱ’로 이어지며 정동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리즈를 관통하는 정동의 흐름은 결국 그 모성성에 대한 잔혹한 공격자인 애비에 대한 (애비라는 ‘여성의 남성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셈입니다.
 
 

3. ‘매직 서클’의 ‘결계’, 그 결속과 해체

 
조혜영의 논의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매직 서클의 결계’라는 표현입니다.[각주:4] 그 ‘결계’가 깨어지는 것은 조혜영의 분석에서처럼, 게임이 ‘비일상’이라는 둥근 울타리를 벗어나서 현실 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이런 것입니다. 현실과 가상의 (깊은) ‘관계’는, 곧바로 현실과 가상의 ‘중첩’을 가리키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매직 서클의 결계는 깨어지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매직 서클이 비일상이 아니라 일상으로까지 확장된 셈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직 서클의 결계는 현실과 가상이 균열을 일으킬 때, 그때 비로소 깨어지게 됩니다. 예컨대, ‘플레이어인 ‘나’의 현실은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데 (조엘의 ‘기본값’인 세계인데), 왜 ‘라오어’ 시리즈의 세계는 다양체들이 이토록 다양하게 (이렇게까지 과장되게까지) 존재하는가.’ 바로 이런 관점으로 접근할 때, 그때 비로소 매직 서클의 결계가 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매직 서클이 중층적이라는 점을 동시에 감안할 필요도 있습니다. 게임과 플레이어라는 인터페이스 사이의 매직 서클이 1차 매직 서클이라면, 게이머들간의 정동적 연결 또는 결속이라는 2차 매직 서클을 함께 염두에 두었을 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를 향한 혐오는 단순히 특정한 게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게임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혐오 정치, 더 나아가 게임의 정동이 번져있는 사회문화적 혐오 정치와 연결됩니다.
 
게이머들이 형성하고 있는 2차 매직 서클은 오늘날 종종 공정성과 능력주의를 중심에 둔 담론장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즉각적이고 정량적인 보상과 이로 인해 충족되는 감정적인 보상, 그 전제로서 공정한 경쟁의 신화는 게임 밖의 세계를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임 안의 혐오가 게임 밖으로 흘러드는가(inside out), 게임 밖의 혐오가 게임 안으로 흘러드는가(outside in), 이를 굳이 구분하면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의 논의가 그닥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형성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2차’ 매직 서클의 결계는 끝내 깨어지지 않는 셈입니다.
 
 

4. 면책 또는 면역(immunity)과 공동체(community), 그리고 게이머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는 공동체의 정치적 개념과 면역 또는 면책 개념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각주:5] ‘immunity’와 ‘comminity’ 이 두 용어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누군가가 지불해야 하는 의무(빚)인 라틴어 ‘munus’라는 공통 어원으로부터 나타났습니다. 공동체는 빚과 함께 있습니다. (The community is cum (with) munus.) 반면, 면책은 공동체 빚이(빚진 것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로마법에서 면책은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의무에서 누군가를 해방시키는 특권이었습니다. 19세기에 천연두에 대한 최초의 백신이 발견되고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미생물 실험을 시작으로 면역의 개념은 법의 영역을 떠나 의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19세기의 자유주의적이고 가부장적-식민지적 유럽 민주주의는 현대 개인의 이상을 자유로운 경제적 행위자(남성, 백인, 이성애자)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공동체에 빚진 것이 없는 면역화된 신체로 구성했습니다. 에스포지토에게 나치 독일이 자국민의 일부(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를 아리안 공동체의 주권을 위협하는 집단으로 특징지은 방식은 면역학적 생명정치의 위험성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사회에 대한 면역학적 이해는 나치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소수 인종과 이주 인구를 통제하는 정치를 정당화했습니다. 이는 생명정치입니다. 에스포지토는 모든 생명정치가 면역학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생명정치는 면역화된(면책된) 존재가 상단에 있고 면역학적 보호 행위에서 제외될(제외되어야 할) 존재가 하단에 있는 계층 구조라 하겠습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 파트 Ⅱ의 엘리(左)와 애비(右)

 
에스포지토의 사유를 빌려, 거칠게나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를 다시 한번 돌아보자면, 조엘과 엘리는 면역화된 자들이고, 따라서 면책된 자들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동체에 빚진 것이 없는 존재들이고, 이들 둘의 가족적 친밀함의 그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이 면책된 자들의 선택―엘리를 살림으로써 면역학적 책임을 지지 않음―과 공동체의 선택―그러한 조엘을 처단함―을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등가로 두는 ‘파트 Ⅱ’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등가적으로 보이는 이들 가치 사이에는 사적인 친밀성과 공적인 정의감의 관계 또는 위계가 복잡하게 작동합니다. 조혜영은 ‘안타고니스트’ 애비가 공동체의 정의가 부가하는 책임을 수행한 것이라기보다도, 사실상 아버지의 복수를 수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포착하며 ‘프로타고니스트’ 엘리의 ‘거울상’임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머들은 이 설정을 혐오했습니다. 여기서 ‘혐오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하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 답변 가운데 하나는 생명정치적 계층 구조를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애비에 대한 게이머들의 혐오는 ‘여성의 남성성’에 대한 반감 이상으로 훨씬 더 문제적인 현상일 수 있습니다. 면책된 존재들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공동체에 대해 빚진 게 없다는, 바로 그러한 위치를 받아들인 게이머들의 혐오란, 사실은 게임 시리즈의 연속 이상으로 게임과 사회, 가상과 현실이 분리불가능하게 결합된 ‘행위적 현실(agential reality)’의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날 게이머가 게임과 함께, 그리고 ‘정동’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이 글은 2023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의 첫번째 강연(조혜영, 영화적 게임의 젠더 다양성 재현과 동일시의 트러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를 중심으로_2023년 4월 27일)에 대한 리뷰입니다. <젠더스피어> 상반기 프로그램 및 일정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http://genderaffect.net/15/?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4692528&t=board 

 

2023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젠더·어펙트연구소의 2023년 연속 콜로키움"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는온라인에서의 정동을 젠더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담론과 콘텐츠 사례분석을 통해,온

genderaffect.net

 


권두현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미디어와 한국 현대문학/문화의 관계, 특히 드라마 및 각종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언어 너머에서 몸이 하는 다양한 일들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접속사와 같은 존재-되기를 모색하고 있다.
 
 

 

  1. 김성윤, 「게임과 정치적 올바름 문제: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 사례」, 『오늘의 문예비평』 통권 120호, 오늘의 문예비평, 2021. 3, 121쪽. [본문으로]
  2. 조혜영, 「영화적 게임의 젠더 다양성 재현과 동일시의 트러블 :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를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51, 한국여성문학학회, 2020. 12 [본문으로]
  3. 조혜영, 「마더‒컴퓨터‒레즈비언 — ‘걸 파워’ 시대의 디지털게임과 페미니즘 서사」, 오혜진 기획, 『원본 없는 판타지 -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후마니타스, 2020 [본문으로]
  4. “경이로운 기술발전에 의해 현실세계에 근접하게 된 게임 캐릭터의 사실성과 서사적 핍진성은 플레이어의 정체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일찍이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는 현실의 일상 세계와는 다른 자기만의 규칙을 가진 제의적 공간과 유사하며 별개의 행위를 수행하는 데 전념하는 고립된 임시적 세계, 즉 ‘매직 서클’과 같은 놀이터를 구성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위징아가 게임은 ‘매직 서클’이라고 단언한 적은 없지만, 게임문화의 대중적 담론은 비디오게임은 현실세계와 별개의 규칙을 갖고 있는 공간이며 정치적 해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하위징아의 ‘매직 서클’을 근거로 삼아왔다. 그러나 게임의 몰입을 위해 재현과 제작과정의 차원에서 점점 더 현실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는 ‘영화적 게임’은 제4의 벽을 깨고 ‘결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 그리고 그 균열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현실사회의 정치적 변화를 인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한 변화는 대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기존 문화를 유지하려는 일부 대중들에게는 반감을 야기할 수도 있다.” 조혜영, 「영화적 게임의 젠더 다양성 재현과 동일시의 트러블 :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를 중심으로」, 82-83쪽. [본문으로]
  5.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윤병언 , 『코무니타스 : 공동체의 기원과 운명 - 공동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크리티카, 2022;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윤병언 옮김, 『임무니타스 : 생명의 보호와 부정 - 면역 사회의 심층 구조』, 크리티카, 2022 [본문으로]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