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욕망이 마주치는 정동적 공간 (소현숙)

 

여전히 화면보다 종이 위에 쓰인 글이 읽기 편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날로그 세대다. 그런 나에게 웹소설은 너무 낯선 세계이지만, 댓글과 SNS, 커뮤니티에 남긴 짧은 글을 통해 독자들이 직접 개입하며 이야기의 전개를 바꿔놓고 있다는 쌍방향적인 웹소설의 세계는 무척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독자들의 시시콜콜한 비평이 즉각적으로 작가에게 전해지는 세계에서 웹소설은 단지 작가의 욕망만을 담지 않는다. 독자의 취향과 욕구, 수익을 창출하려는 플랫폼의 치밀한 계산과 인기 있는 서사의 구축을 통해 자기 세계를 펼치고자 하는 작가라는 세 주체가 만나는 장으로서 웹소설의 세계는 서로의 욕망이 만나 충돌하고 타협하는 정동적 공간이다. 

 

이런 서로 다른 주체들의 마주침에 주목하면서 안상원 선생님은 웹소설의 ‘여성적 장르’로서의 가능성과 클리셰와 패턴화된 서사 구조를 벗어난 대안적인 서사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에 따르면 웹소설 내에서 특히 로맨스 판타지는 여성 작가 및 여성 독자의 취향과 관심사, 독서 욕망을 반영한 장르로 언급된다. 여성 주인공의 모험과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로서 로맨스 판타지는 흥미로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여성 주인공들은 신분, 성별 등의 제약을 뛰어넘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존재로 그려지며, 소위 ‘여성적’ 영역뿐만 아니라 마법, 의학, 무술, 경영, 예술, 게임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채로운 역할을 수행하고, 신분이나 빈부, 성별에 따른 차별을 깨뜨리고 싸우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가족, 연애, 친구관계 등 주인공을 얽매고 있던 부정적 관계들은 특정한 계기(죽음, 회귀, 환생 등)를 거치며 새로운 관계로 재편된다. 주로 연애 관계에서의 주도성과 적극성을 보여 주는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최근에는 연애가 부차적이거나 비-연애서사가 늘어나 등장인물들은 사랑을 선택할 권리뿐 아니라 선택하지 않을 권리도 누린다. 이러한 경향성을 지적하면서 안상원 선생님은 ‘사랑’이 주인공의 존재 의미를 좌우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처럼 로맨스 판타지가 보여주는 다양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점도 있다. 우선은 주인공이 알파걸-엘리트 귀족 여성들인 경우가 많다. 이는 주인공이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하는 독자들의 바람이 투영된 것으로 주인공은 성공하기에 최적화된 환경에 놓이고 어려운 문제를 수습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가난과 장애, 차별을 극복한 인물을 조명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지 못한 인물에 대한 혐오가 그 밑바탕에는 깔려 있다는 안상원 선생님의 지적은 매우 예리하다. 또, 관계의 재구조를 위해 주인공의 상황이 필요 이상으로 가학적인 상황에 놓인다. 가정폭력, 노동력 착취, 기아, 살해 등 가학적인 에피소드의 결합 속에서 여성 주인공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남성 주인공은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재현된다. 평범한 남성이 극적으로 좋은 남성으로 재현된다는 점에서 이는 남성 중심적 시각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문피아, <사이코 여왕의 대영제국>(왼쪽)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오른쪽)

 

로맨스 판타지가 갖는 이러한 한계지점에 대한 고민 속에서 안상원 선생님은 로맨스 판타지 장르 밖에서 여성 작가와 독자들의 관심과 취향을 담을 수 있는 대안적인 서사로 대체역사물과 아이돌물의 서사를 검토한다. 대체역사물 중 스플렌더의 「사이코 여왕의 대영제국」(문피아, 완결), 윤인수의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문피아, 연재 중)은 모두 여성을 개인과 집단을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내면서도 물리적인 여성성과 취약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백덕수, 완결), 「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동울, 연재 중) 등 아이돌물은 외모와 노래, 춤 등의 능력치가 약했던 주인공과 멤버들이 점차 능력치를 회복하며 서로를 깊게 이해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들 작품은 무해한 남성공동체, 순정한 애정공동체에 대한 여성 독자들의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 안상원 선생님은 이러한 아이돌물이 여성 독자들의 취향과 관심사를 충분히 고려한 인물들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대안적 서사로서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권경미 선생님의 토론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여성작가-여성독자의 욕망이 과연 여성 집단의 욕망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그리고 대안적 서사로서 제시한 아이돌물에서 구현되는 젠더 구분 없는 감정노동자의 존재를 과연 대안적 서사의 맥락 속에서 읽어내려가는 게 맞는 것일지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남는다. 다종다양한 웹소설이 출간되고 있고, 많은 젊은 세대들이 이를 소비하고 있는 오늘날, 웹소설은 단지 작가와 독자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웹소설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 갈지 자못 궁금해진다. 젠더·어펙트의 관점에서 웹소설의 가능성과 한계를 되짚어본 안상원 선생님의 강연은 단지 웹소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시의적절한 질문들을 던진다. 고민은 이제 우리 몫이다. 

 

 


 

 

이 글은 2023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의 세 번째 강연(안상원, <웹소설의 '여성적 장르'에 대한 고민과 대안적 서사의 탐색>, 2023년 6월 15일)에 대한 리뷰입니다. <젠더스피어> 상반기 프로그램 및 일정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http://genderaffect.net/15/?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4692528&t=board 

 

2023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젠더·어펙트연구소의 2023년 연속 콜로키움"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는온라인에서의 정동을 젠더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담론과 콘텐츠 사례분석을 통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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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숙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 조교수.

한국근현대사를 젠더와 마이너리티의 시각에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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