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성, 위치성, 지향성: ‘젠더스피어’를 개발하는 힘들에 관한 노트 (권두현)

 

1. ‘직(職)’이라는 자리, ‘업(業)’이라는 행위

 

‘4차 산업혁명’이 삶과 기술의 짜임관계를 바꾸어가고 있다. 그 관계 사이에서 촉발되는 것이 정동이라면, ‘4차 산업혁명’은 동시대 정동 정치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고, 개입해야 하는 중요한 입각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이 국가의 ‘명운’과 ‘사활’을 좌우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면, 이는 생명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구’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활은 기술을 통해 매개되고, 그 기술은 생체매개를 통해 정동을 촉발하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에 의해 보장되는 미래를 향한 정동 정치의 약속이 역사적 제 국면마다 그 유효함을 꾸준히 발휘해왔음을 상기한다면, 오늘날의 ‘혁명적’ 정동이 전례가 없는 현상만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이전에는 ‘기술입국’이 있었다. 전후 한국의 이념적이면서도 물질적인 목표이자 성과로서 ‘기술입국’에 부합하는 가시적 형상은 실험실의 과학자라기보다도 산업현장의 기술자였다. 하루의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애국가’의 배경으로 매일 같이 포착되었던 그 기술자들은 거대한 중화학공업단지의 남성 노동자들이었다. 남성 노동자는 ‘입국’은 물론, 더 나아가 ‘부국’을 가능케 하는 기술자였다.

 

반면, 여성 노동자의 형상은 ‘부국’에 기여하는 ‘애국’의 주체들이 아니라, 때로는 벌거벗은 몸으로, 때로는 똥물을 뒤집어쓴 채, 마치 사회적 오염원처럼 신문지면상에 자리했다. 이들은 ‘여공’ 또는 ‘공순이’이라는 이름을 달고, 과학기술 대신 똥물과 접착된 몸으로, 더 없이 낮은 곳에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여공은 기술적 활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엄연한 기술자임에도, 기술과 함께 공진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술과 함께 도구화되면서 노동자성만을 할당받아 왔다. 노동자성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성에게 할당된 노동자성에 행위자적이고 창발적인 역량이 제거되어 있다는 점이야말로 문제적인 것이다.

 

여성은 남성 노동자와 같은 기술의 관리자가 아니라, 관리되는 기술 그 자체여야 했다. 이러한 젠더화된 위계는 한국의 공장에서도, 미국이 쏘아 올린 가상의 우주선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예컨대, <스타 트렉>(Star Trek)에 등장하는 우주선 엔터프라이즈호의 컴퓨팅 시스템 LCARS(Library Computer Access and Retrieval System)는 남성 함장의 명령에 여성의 목소리로 응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각주:1]LCARS라는 계산 기계에 여성 인격이 부여된 것은 계산을 하도록 고용된 노동자들이 주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컴퓨터’라고 불렸다.[각주:2]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 피카드는 엔터프라이즈가 (자신이 사랑에 빠진) 여성이라고 농담하며, 이 말을 들은 그의 동료는 그 이름이 ‘직업여성’처럼 들린다는 농담을 덧붙인다.[각주:3]남성에게 있어 여성의 직업이란 과연 무엇이라고 여겨지는지부터 따져볼 만하지만, 여성의 직업이 곧 젠더화된 위계와 함께 할당된 기능과 다르지 않다는 전제야말로 문제적인 것이다. 이 웃기지 않은 농담에는 ‘직(職)’이라는 위치성이 할당한 기능으로서의 ‘업(業)’이 행위자적 역량과 무관하게 주어져 있다.

 


2. 현장성: 돌보듯 유지보수하는 개발자들
[각주:4]



판교 테크노밸리의 야경

‘개발자’는 그 명명의 문자 그대로에 따라 직업적 행위자 역량이 극대화된 형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판교의 야경을 만드는 사무실의 꺼지지 않는 불빛이 보여주듯이 ‘과로사회’의 표상이라는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개발자’가 드러내는 이와 같은 명명과 현실의 배리적 관계는 테크놀로지의 약속이 서비스 경제와 결부된 채로 해방적 차원보다 먼저 착취적 차원을 열어버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착취에 대한 주목이 노동을 시간적으로 정량화하면서 노동의 질적 차원 또는 정동적 맥락을 간과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개발자’는 그 직함과 함께 미래와 맞닿은 현재의 최전선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실제의 물리적 위치는 지하나 에스컬레이터 밑 후미진 ‘전산실’에 마련되기 일쑤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보이지 않는 노동은 여기에 뒤얽힌 젠더화된 정동 또한 보이지 않게 만든다. ‘전지적 여성 시점’으로 ‘테크 업계와 서비스 이면’을 들여다보게 되면, 서비스가 만들어지는 개발 과정부터, 사용자들이 서비스를 사용하는 과정까지 여성은 배제되거나 착취당한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이는 테크놀로지가 곧 남성의 영역이라는 보이지 않는 느낌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현상으로서, 엄연히 실재하는 여성 개발자의 존재와 행위자적 역량마저 지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여성 개발자 조경숙은 이렇게 말한다. “개발자들의 페미니즘 실천은 유지보수 작업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사용자의 눈에도 특별히 거슬리는 것 하나 없이 서비스를 무사히 잘 사용하고 있을 때는 이것이 페미니즘 실천의 결과물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SI와 같이 유지 및 보수 등 시스템이 돌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개발자의 노동은 돌봄노동과 다르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돌봄노동처럼 경시되고 낮은 대우를 받는다.

 

시스템의 유지보수가 특히 ‘젠더 편향적’ 차원에 대한 점검일 경우, 여성의 노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다듬어진 시스템은 ‘중립적’ 모양새를 통해 데이터 편향이라는 현상 그 너머에 폭넓게 개입하는 페미니즘의 정치적 실천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라는 제목의 책이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음을 감안했을 때,[각주:5]조경숙의 전언은 편향이 느껴지지 않은 채로 가시화된 데이터에 여성의 노력과 여기에 전제된 책임이 비가시화된 채로 전제되어 있음을 비로소 주목하게 만든다.

 

“현장의 개발진은 가이드라인이 지시하지 않는 공백의 영역을 채우기 위해 매번 노심초사한다”고 조경숙이 이어 전하고 있다시피, ‘직’은 ‘업’을 책무(責務)로서 규정하지만, 노동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업’은 ‘직’이 할당한 노무(勞務)의 범주 너머에서 주어지는 책임(責任)을 그 토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시스템에 데이터를 입력하거나 시스템으로부터 데이터를 추출하는 것은 노무이지만, 그 데이터가 젠더적으로 편향된 것임을 깨닫고 유지보수하는 것은 책임에 따른 것이다. 그 책임은 개발자의 ‘직’이라는 할당되고 제한된 자리가 아니라, 여성의 몸 둘 바로부터 주어진다. 개발자가 현장에서 마주하는 고민은 일견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고민은 이용자들의 구체적인 경험과 정동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지식 내지는 기능적인 해법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 개발자가 느끼는 책임은 ‘인공지능 윤리’, 혹은 ‘기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혹은 다른 형태의 소수자로서 점하고 있는 위치와 겪었던 경험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책임에 따른 업데이트는 ‘직분’이 부과한 기술적 대응을 넘어, 기술과 개발자, 그리고 이용자 각자가 이미 각자가 아님을 전제한 ‘행위적 현실’과 함께 주어지는 정치적 행위라 해야 마땅하다.



3. 위치성: 위치지어진 개발자들의 정동적 리터러시[각주:6]

“위치지어진 지식들”의 사상가 도나 해러웨이

여성 개발자의 현실은 개발자의 자리는 물론, 여성의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 개발자에게 ‘여성’과 ‘개발자’는 분리불가능한 경험의 단위로서 뒤얽혀 있으며, 여성으로서 개발자의 경험이 여성 이용자의 경험과 뒤얽혀 있음은 물론이다. 이 경험은 ‘부분적 관점(partial perspective)’에 따른 것이다. 1988년에 발표한 “위치지어진 지식들: 페미니즘에서 과학의 문제와 부분적 관점의 특권(Situated Knowledges: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and the Privilege of Partial Perspective)”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과학의 객관성에 대해 재고하고자 ‘시각(vision)’의 은유에 대한 물질적 사유를 펼쳐 보인 바 있다.[각주:7]서구 과학에서 ‘시각’이 특정한 표식을 가진 몸을 초월한, 그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지배하는 시선으로 상상되어왔던 것과는 달리, 해러웨이는 감각 시스템으로서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체현된(embodied)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특정한 위치성, 보기의 방식, 더 나아가 삶의 방식과 결부된 것으로서의 부분적 관점을 페미니스트 객관성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부분적 관점’에 대한 해러웨이의 제안은 ‘위치성(situatedness)’에 대한 사유와 함께 이루어진다. 이 사유는 종속된 자들(the subjugated)의 입장 자체를 순수한 진리 생산자의 위치로 특권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주변화된 주체들의 관점이 지식의 자리에 닿기 위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은 그들의 삶, 특정한 방식으로 표지된 몸으로서의 위치성이 서구 과학이 ‘객관성’을 성립시키는 전략이었던, 억압, 망각, 스스로의 흔적을 지우는 등의 행동을 통해 “아무 곳에도 있지 않으면서 광범위하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식”[각주:8]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러웨이의 제안에 따라, 이지은과 임소연은 여성을 포함한 ‘주변적 위치’의 개발자들이 가지고 있는 위치성에 주목한다. 이 위치성은 곧 부분적 관점을 통해 체현된 기술을 상상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며, 이는 페미니즘적 개입으로서의 ‘하기(doing)’를 통해 기술적 구체성을 확보한다. 이지은과 임소연은 과학자 사회에서의 정치적 투쟁이라는 구조적 실천과 과학적 탐구에서의 객관성에 대한 질문 등 지적 실천 어떤 쪽에서든 기존 과학기술에 배태된 편향과 편견을 제거하며 더 나은 과학기술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행위를 헬렌 론지뇨(Helen E. Longino)가 “페미니스트로서 과학 하기(to do science as a feminist)”라고 일컬었음을 환기한다.[각주:9]론지뇨의 ‘과학 하기’는 여성 개발자의 경험과 실천을 통해 ‘인공지능 하기’로 이어지며, 이 연결에는 ‘페미니스트’의 위치성이 전제된다. 젠더나 인종, 계급, 능력, 교육적 배경 등 각각의 사유와 실천에 스며들어 있는 위치성의 문제를 “우리의 작업에 편향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that might have biased our work) 위협이나 영향으로 보는 대신, 그 위치성들을 우리의 작업의 틀을 만들 수 있는 가치 있는 관점들을 제공하는 것”[각주:10]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때, 창의적이면서도 새로운 질문들이 생성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기’란 ‘삐딱하게 보기’이고, 이를 통한 ‘새롭게 묻기’이자, 보기 또는 묻기와 분리불가능한 ‘쓰면서 만들기’이다. 이 모든 행위는 몸과 그 자리에 의해 매개된다. ‘하기’의 프레임은 인식론적 ‘편향’에서 그 편향을 만들어내고 이에 의해 증폭될 수 있는 ‘차별’이라는 정치적 문제로 논점을 옮길 뿐만 아니라, 그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행위까지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안는다. 차별을 정치적인 문제로 보는 것은 “공공성이라는 모호한 윤리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 차별과 부정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다른 방식으로 위치지어진 주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과학의 정동적 리터러시에 대한 요구이며, 그 리터러시는 ‘행위’와 함께 ‘체현’을 통해 기술에 스며든다.



4. 지향성: 몸과 길, 앎과 삶을 함께 만드는 개발자들

 

 

과학의 정동적 리터러시는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과학’, 더 나아가 ‘기술’을 다시 사유하게 한다.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과학기술’인가. 부분적 관점에서의 ‘과학기술’은 궁극적으로 그 범주의 배타적 경계를 뒤흔든다. 과학기술을 과학기술로서 빚어냈던 근대의 ‘보편적’ 지식 체계가 배제한 부분적 관점에서의 경험들, 이 경험들을 과학기술로서 다시금 빚어내는 행위, 그 행위가 바로 여성 개발자의 ‘업’이자 ‘책임’이다. 이지은과 임소연의 과학 ‘하기’로부터 이어지는 인공지능 ‘하기’는 이를 통해 과학기술을 특권화된 앎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되돌린다. 이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다.

 

‘하기’는 소여로서의 객체를 마주한 주체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만들면서 뒤얽혀 있는 행위자의 문제라 할 만하다. 행위자성은 개발자뿐만 아니라 기술에게도, 그 이용자에게도 주어져 있으며, 이는 행위자들 간의 뒤얽힘을 통해 끊임없이 갱신된다. 분리불가능한 행위자성은 과학기술의 지향성(orientation)을 어지럽게 만든다. 방향을 잡는다는 것은 공간과 시간이 소요되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위치를 고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정은 예상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미지의 길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그 방향이 반드시 고정된 채로 유지되는 것만은 아니다. 지향성은 또한 신체들이 서로, 사물 및 주거지와 관련하여 자신을 위치시키는 관계의 방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지향성이 신체가 공간에 어떻게 거주하느냐의 문제라면, 이는 또한 신체가 공간에 ‘누구’ 또는 ‘무엇’과 함께 거주하느냐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코스를 벗어나는 행위가 보상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곧고 좁은 길에서 벗어나는 위험을 감수하면 퀴어가 될 수도 있는 새로운 미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각주:11]아메드의 ‘퀴어 지향성(queer orientation)’ 개념은 현장성과 위치성이 ‘하기’의 반복적인 수행 속에서 번번이 회절(diffraction) 패턴을 만들어 내고, 이 자리가 다시 한번 새로운 출발점으로서 자리매김된다는 사실을 고려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인공지능과 함께 산다는 것은 알고리즘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이고 경쟁적인 앎과 삶이 공존할 수 있고,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여성 개발자’를 추가하는 것이나 ‘전문인력’이 만들어낸 가이드라인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위치성에서 비롯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작업을 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발견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는 여성 개발자의 언급은 알고리즘 설계의 윤리원칙 이상으로 젠더와 인종의 위계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선 관계 만들기와 정동적 짓기가 곧 과학기술 하기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5. 젠더스피어: 재현 체계 너머의 정동적 관계

 

Archive of Our Own(AO3)

남성 함장과 여성 AI의 젠더화된 위계에 입각한 엔터프라이즈호의 여정을 다룬 <스타 트렉>은 예상치 못한 항로를 그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항로는 재현 너머의 정동에 의해 마련되었고, 수많은 ‘트레키’들의 팬픽션과 함께 여러 갈래의 구부러진 길을 그리며 이어졌다. <스타 트렉>의 수용자가 팬픽션의 창작자가 되었을 때, 작가와 독자의 구분은 사라져버린다. 또한 팬덤의 정동과 함께 추동되는 팬픽션 쓰기는 저자가 경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완전한 통제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러한 측면에서도 작가와 독자를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재현된 캐릭터의 행위자성을 발견하고, 이를 전제로 삼아 재현 너머의 영역에 퀴어한 관계를 기입하면서 팬픽션을 창작하는 행위는 캐릭터들의 다양한 위치성은 물론, 자신의 위치성을 꼼꼼하게 대응시키는 관계적 접근을 전제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적 접근에는 부분적 관점이 개입되기 마련이며, 이는 페미니즘적 개입과 다르지 않다.

 

개별 팬픽션의 창작뿐만 아니라, 팬픽션 아카이브 또한 페미니즘 개입을 통해 개발된다. 예컨대, Archive of Our Own(약칭 AO3)은 페미니즘 HCI(Human-Computer Interaction)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AO3은 기존 팬픽션 아카이브의 위치성을 뚜렷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팬덤 커뮤니티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설계 및 구축되었다. 그 설계와 구축을 담당한 것은 ‘우리’, 즉 팬픽션 커뮤니티 구성원들이었다. 아카이브 개발자를 외부에서 영입하는 대신, AO3는 팬픽션 커뮤니티의 회원들에게서 프로그래밍 및 디자인 재능을 찾았고, 이들을 교육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약 75만 명의 사용자와 200만 개 이상의 개별 작품을 보유한 팬픽션 아카이브인 AO3는 주로 여성들이 설계 및 코딩을 담당했다. AO3의 여성 개발자들은 페미니스트 HCI를 고려하면서 접근성(accessibility), 포용성(inclusivity), 정체성(identity) 등의 문제에 대한 온라인 팬덤 커뮤니티의 가치와 규범에 따라 디자인 결정을 내렸다. 그 디자인은 사용자 입력 포크소노미(folksonomy) 원칙에 기반한 태그 랭글링(tag wrangling), 캐릭터 관계 레이블의 다양성, 일종의 ‘별점’에 해당하는 쿠도(Kudos) 시스템 등의 기술 어포던스(affordance)를 통해 아카이브 이용자들의 우발적이면서도 창발적인 행위자성을 지원한다. 이를 전제로 팬픽션은 페미니즘적 아카이브에 등재되고, 팬픽션과 아카이브는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킨다.

 

AO3라는 일례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개발의 ‘업’을 추동하는 것이 여성 개발자의 ‘직’이 아니라,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려는 책임을 전제한 정동이라는 점이다. 이 정동에 의해 구체화된 장을 퀴어 지향성의 퍼블릭 스피어(public sphere), 다른 말로 ‘젠더스피어(gender-sphere)’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젠더스피어’가 퀴어한 느낌의 아카이브로서 공공성을 담보하고 있다면, 그 공공성은 개인의 찰나적(ephemeral) 느낌이 인간과 사물의 다종한 행위자적 관계를 바탕으로 지속되면서도 회절과 함께 창발되는 것, 즉 ‘정동’이라 바꾸어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젠더스피어’는 바로 이러한 정동과 함께 그 구체(具體/球體)를 갖춘 채로 매 순간 새로워지고 있다.

 

 


 

이 글은 2023/4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의 열 번째 강연(임소연, <위치지어진 개발자 – 인공지능 젠더편향에서 페미니스트 인공지능으로>, 2024년 1월 25일)에 대한 리뷰입니다. 
https://genderaffect.net/15/?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6253052&t=board

 

2023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

젠더·어펙트연구소의 2023년 연속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의 하반기 프로그램을 2023년 9월 21일부터 매달 한차례씩 진행합니다.기술 발전으로 인

genderaffect.net

 


권두현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미디어와 한국 현대문학/문화의 관계, 특히 드라마 및 각종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테크놀로지와 아상블라주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정동지리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접속사-되기를 통해 지식 네트워크에 관여하고자 한다.

 

 

  1. <스타 트렉> 연대기 내에서 이 용어는 TNG 시리즈 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LCARS GUI(Graphic User Interface)는 TOS보다 기술이 훨씬 더 발전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디자인되었는데, 시리즈의 예술 감독이자 기술 컨설턴트인 마이클 오쿠다(Michael Okuda)에 의해 설계되었다. 마이클 오쿠다의 디자인 컨셉은 계기판에 많은 활동이 없다는 작가 진 로덴베리의 요청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N. 캐서린 헤일스, 이경란·송은주 역,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디지털 주체와 문학 텍스트』, 아카넷, 2016, 14쪽. [본문으로]
  3. TNG 제11화 <영원한 작별> 참고. [본문으로]
  4. 이하의 내용은 2023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의 10회차 강연 <위치지어진 개발자 – 인공지능 젠더편향에서 페미니스트 인공지능으로>에서 이루어진 조경숙의 토론과 그 기조를 이루는 책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 전지적 여성 시점으로 들여다보는 테크 업계와 서비스의 이면』(조경숙, 휴머니스트, 2023.)에 기반한 것임을 밝혀둔다. [본문으로]
  5.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황가한 역, 『보이지 않는 여자들: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웅진지식하우스, 2020. [본문으로]
  6. 이하의 내용은 2023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의 10회차 강연 <위치지어진 개발자 – 인공지능 젠더편향에서 페미니스트 인공지능으로>에서 이루어진 임소연의 강연록과 그 기조를 이루는 논문 「인공지능 윤리를 넘어: 위치지어진 주체로서의 개발자들과 페미니스트 인공지능의 가능성」(이지은·임소연, ⟪한국여성학⟫ 제38권 3호, 한국여성학회, 2022. 9.)에 기반한 것임을 밝혀둔다. [본문으로]
  7. Donna Haraway, “Situated Knowledges: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and the Privilege of Partial Perspective”, Feminist Studies, Vol.14, No.3, Autumn, 1988, pp.575-599. [본문으로]
  8. Haraway, Donna, “Situated Knowledges: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and the Privilege of Partial Perspective”, Feminist Studies, 14(3), 1988, p.584. [본문으로]
  9. Helen E. Longino, “Can There Be A Feminist Science?”, Hypatia, Vol.2, No.3, Autumn, 1987, pp.51-64. [본문으로]
  10. Catherine D’Ignazio and Lauren F. Klein, Data Feminism, MIT Press, 2020, p.83. [본문으로]
  11. Sara Ahmed, Queer Orientation: Orientations, Objects, Others, Duke University Press, 20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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