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으로 연결된 삶을 젠더의 렌즈로 바라본다면 : 『젠더스피어의 정동지리』 기획자의 말 (이지행)

 

젠더·어펙트총서 제5권 『젠더스피어의 정동지리』는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가 2023년 4월부터 총 10차례에 걸쳐 진행한 연속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를 토대로 탄생한 책이다. 
 
기술 미디어의 발전이 바꿔놓은 일상의 면모는 참으로 다양하다. 정보 소비가 신문, 텔레비전, 영화와 같은 레거시 미디어 중심에서 뉴스 포털, OTT, 스트리밍 등 뉴미디어 중심으로 바뀌었고, 미디어 매개체의 물리적 형태(신문지, 필름)와 특정 장소성(집, 극장)은 스트리밍과 모빌리티에 자리를 내주었다. 대중문화 양식에서는 모빌리티를 전제로 한 숏폼이나 네트워크화된 미디어 환경에 조응하는 콘텐츠라는 용어가 대세로 떠올랐다. 사회의 즉각적인 여론은 (비록 신뢰도와는 무관하나) 포털 뉴스나 유튜브 채널 댓글에서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가브리엘 타르드의 말처럼 근대적 공중이 신문이라는 매스미디어의 출현과 함께 탄생했다면, 오늘날의 공중은 포털과 커뮤니티와 SNS로 이루어진 온라인 플랫폼에서 탄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간에는 기술 미디어의 발전이 민주주의 발전과 평등을 도모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전망도 있다. 뉴미디어의 매체적 속성인 상호작용성으로 인해 지배적 헤게모니를 전복하는 풀뿌리 담론이 확산될 것이라는 희망적 기대. 오늘날 익명의 온라인 공론장은 과거처럼 현실 권력 관계나 계급, 젠더에 따라 자격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기술이 공론장의 젠더 평등에 기여했다는 평가. 심지어, 공적인 것과 사적인 담론이 뒤섞이고 중복되어 둘 간의 경계를 흐리는 온라인 미디어 생태계 특유의 ‘유사-공공’적 속성 때문에 온라인을 여성의 새로운 대안적 공론장으로 바라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페이크 뉴스와 딥페이크 등 기술 악용사례는 더 정교하고 포괄적으로 실행된다. 최근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동급생의 얼굴을 음란물에 합성한 뒤 유포한 딥페이크 성범죄는, 디지털 성범죄 연령이 급기야 초등학생까지 내려갔다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확인시켰다. 또한 온라인 환경에서는 판타지에 가까운 음모론이 판치고 인종과 젠더를 대상으로 한 혐오가 준동하는 등, 지배적 헤게모니를 수호하려는 결집이 초래한 담론적 퇴보도 목격된다. 구성원의 자격을 검증할 수 없는 익명성의 바다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적인 담론을 건져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체념 섞인 평가가 흘러나온다.  
 
『젠더스피어의 정동지리』는 이렇듯 다양하고 규정되지 않은 행위자들의 정동이 요동치는 온라인 공간을 젠더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했다. 페미니즘에 반대하거나 남성들 사이의 긴밀한 소통으로 이루어진 온라인 환경을 ‘매노스피어(manosphere) 또는 남성계 커뮤니티라고 부른다. 여성에 대한 사나운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강간 합법화와 섹스 재분배를 주장하는 '인셀 커뮤니티', 성희롱, 스토킹, 성폭력을 가르치는 '픽업 아티스트 커뮤니티', 반페미니즘을 외치는 '남성권리운동 커뮤니티’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일베’와 같은 남초 커뮤니티를 들 수 있다. 지난해말부터 올해초까지 <젠더・어펙트 연구소>에서 개최한 연속콜로키움의 제목이기도 한 ‘젠더스피어(gendersphere)’는 온라인의 이와 같은 젠더화된 분리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기술 미디어장 전체를 젠더와 연관된 담론 및 정동적 공간이라는 포괄적 관점으로 보고자 한 기획진의 의도를 반영한 조어이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이러하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 문화 생산과 소비의 젠더화된 조건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취향과 신념 때로는 젠더화된 혐오를 근거로 결집한 온라인 커뮤니티는 어떻게 연대하고 또 적대하는가? 젠더·인종·장애로 표지화된 특정 인구들을 겨냥하는 기술 미디어장의 정동 정치는 어떤 모습인가? 
 
이러한 질문에 국내 연구자뿐 아니라 미국, 영국, 중국, 인도, 캐나다 등 다양한 국가의 연구자들이 응답해왔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행위자성을 다룬 1부 <파르마콘의 커뮤니티: 적대와 연대의 길항>에서는 한국의 남성중심 게임 커뮤니티, 초국적 케이팝 팬 커뮤니티, 인도의 한류 팬들의 정동적 색조를 만나볼 수 있다. 온라인 대중문화인 웹소설, 게임, OTT 및 영화 생산과 소비의 지형을 다룬 2부 <젠더화된 테크네의 신체들: 독자, 관객, 노동자>는 글로벌 플랫폼과 초국가적 문화산업에서 정책, 기술, 노동, 장르가 특유의 젠더화된 배치를 반복하거나 이탈하는 역동적 장면들을 다룬다. 3부 <정보와 ‘감염(바이럴)’을 둘러싼 배제와 저항의 실천들: 전파매개적 신체성과 기술사의 재구성>은 ‘바이러스’적인 확산 양태를 가진 정보 기술을 둘러싼 신체화와 탈신체화의 역학을 인공지능, 코로나 팬데믹, 에이즈 공포와 이에 저항했던 농인 에이즈 정보 센터의 돌봄 실천, 바이럴의 역능과 효능을 활용하는 팬덤의 정동 정치를 통해 고찰한다. 
 
이 책에 실린 몇몇 글들은 정동(어펙트) 연구의 방법론 중 하나인 ‘체화된 필드워크’를 경유해 작성되었다. 체화된 필드워크란 단순히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해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넘어, 연구자가 연구 현장에 체화되어 감정적이고 정동적인 실천을 조사하는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중국 정부의 전시(戰時)적 팬데믹 대응을 다룬 자오 펑 첸지의 “체현된, 감정적인, 그리고 임파워링하는”은 시차와 네트워크를 넘어 머나먼 고국(중국)에서 일어나는 검열과 억압의 현장에 정동적으로 전염된 중국 출신 캐나다 연구자의 땀에 젖은 기록이다. 
 
미디어, 즉 매개의 기술적 조건은 매체의 형식과 내용을 조정하고 나아가 정치사회적 권력 지형의 구축에 관여한다. 이 글들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의식적인 관여로 때로는 지각이나 인지 너머의 하위지각적 경험으로, 해당 환경 속에 매개되어 분투하는 존재들을 목격할 수 있다. 또한 연구자들 역시 서로 다른 각자의 삶 속에서 연구 대상에 매개되어, 대상에 대한 비판적 탐색과 함께 때로는 연구자 스스로 정동적으로 연루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리하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동시대 기술 미디어장을 젠더화된 권력관계가 현행화되어 드러나는 공간이자 그 관계를 넘어설 수 있는 정동들이 유통되는 ‘젠더스피어’로 탐사하려는 시도이다. 이 책이 기술과 연관된 젠더적 담론과 사례를 초국적으로 구축한 ‘젠더스피어의 정동지리’라면, 이제 책을 통해 자신의 온라인적 삶 속에서 관찰되는 현상들이 젠더와 정동이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중첩되고 연결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이지행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기술 변화에 따른 동시대 대중문화 콘텐츠와 수용자 속성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 영화, 팬덤, 파국 감정 연구를 진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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