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적인 것’으로서의 한류의 가능성 (이지행)

자료 출처 : https://kcult.in

 

전세계에서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고전하는 곳은 어디일까? 현대 대중문화의 문화적 보편이자 우세종인 할리우드 영화가 못 뚫고 들어가는 곳은 없다가 정답에 가깝겠지만, 그나마 가장 강력한 대안 영상문화를 보유한 국가는 한국과 인도라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다. 특히 인도는 매해 1천편 이상의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나라로, 스크린 쿼터 없이도 자국영화 점유율 80%가 넘는 어마어마한 자국영화 충성도를 보여주는 ‘발리우드’의 본고장이다. 

 

이러한 인도의 자국 문화 중심성과 인도내 영어권 문화의 막대한 영향력 때문에 2000년대 초반 무렵부터 한류가 아시아 대륙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도, 인도는 좀처럼 한류 진입이 어려운 곳으로 여겨졌다. 그런 인도에서 지난 팬데믹 이후 한류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커졌다는 분석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2020년에는 한국드라마 소비가 370%나 증가했으며, 같은 시기 인도의 대표적인 이커머스 플랫폼인 플립카트(Flipkart)에서의 한식주문량이 150% 증가했다는 통계가 있다. 현재 인도에는 약 1500만명 이상의 한류 팬들이 있으며, 이들은 주로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한국 대중문화를 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속콜로키움 <젠더스피어>에서는 디지털을 통해 경험된 한류가 인도 Z세대 젊은이들의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강연이 이루어졌다. 공동발표자인 인도 푸네 대학의 프리야 고하드 박사와 네하 갓판데는 인도 서부 지역인 마하라슈트라 주의 대도시 푸네 지역의 15세-25세 사이 청년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한류가 이들 인도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세계 최대 영자 일간지 더타임스오브인디아(The Times of India)에 등록된 kpop 기사 숫자

 

인도는 현재 중국을 제치고 약 14억명의 세계 1위 인구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용 중인 언어만 200여개가 넘고,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다양한 민족 집단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이런 인도에서 한류가 가장 강세인 곳은 다름 아닌 동북부 지역이다. 이 지역은 방글라데시, 미얀마, 네팔 등과 국경을 인접하고 있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인도 중심지와 동떨어져 있다. 경제적 수준도 타 지역에 비해 낮으며 이 때문에 가장 반인도 정서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강연자들은 이 지역에서의 한류의 유행은 모국인 인도에서 경험하는 단절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강연자들이 조사 대상으로 삼은 지역은 인도 경제 중심지인 뭄바이가 위치한 마하라슈트라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푸네 지역으로, 이 곳 젊은이들은 높은 교육 수준과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토대 위에서 자라나 동시대 아시아 대중문화를 디지털을 통해 접한 세대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역 젊은이들이 한류 소비와 이를 통한 커뮤니티 구축을 통해 기존의 유럽 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강연자들의 고찰이다. 

 

“저희는 조사를 수행하는 동안 도시의 청년들이 서로 다른 문화 간 영향을 동시에 경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가를 뛰어넘은 청년 문화의 연결과 새롭게 부상하는 아시아의 정체성은 인도 청년들에게 기존에 존재했던 서구 문화의 지배적인 영향이라는 정의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과 같은 다른 아시아 문화와 강한 유대감을 느낍니다” 

 

강연자들은 한류를 필두로 한 동시대 아시아 대중문화가, 인도에서 서구 문화에 대한 일종의 대항문화로서 인도 젊은이들의 사회화와 정체성 형성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하고 있었다. 여기서 궁금해진 것은, 같은 피식민 경험을 가진 국가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한국과 인도의 탈식민적 상황이었다. 해방 이후 미국의 정치·군사·문화적 헤게모니 질서 안에 위치해 온 한국과 달리, 인도에서 식민 통치의 유산인 ‘유럽적인 것’의 위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 ‘유럽적인 것’이 인도 젊은이들의 사회화 과정에 끼치는 영향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강연자들의 서술을 통해 그 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글로벌 미디어가 주도한 청년 문화의 출현은 새로운 사회화 지형의 구축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 문화와 연결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대 기술에 정통하고 이 청년들의 문화에 대한 생각은 주로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을 통해 매개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매체는 청년들에게 더 큰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지역에서 글로벌 수준까지 다양한 정체성에 노출시켰습니다. 루코스(R. A Lukose)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젊은 도시 인도인들은 식민주의와 서구의 영향이 아니라 글로벌 및 지역 문화 노출에 기반하여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강연자들은 디지털로 연결된 글로벌 미디어 경험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유럽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아시아적 지역 문화에 노출될 수 있게 하고, 이 과정에서 아시아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디지털 시대의 문화적 소통이 기존의 ‘유럽적인 것’에 대한 대안적 정체성으로서의 ‘아시아적인 것’을 창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뷰 대상자들은 서구 문화에 비해 정신적 가치를 중요시하며, 가족 및 공동체 문화를 앞에 두는 점 등 아시아 문화에서 발견한 문화적 근접성에 토대를 두고 ‘아시아적인 것’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토론자인 김성윤 박사(동아대)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적 소통이 동일화의 흐름을 강화한다는 맥락에서, 한류 수용에 동반되어 나타나고 있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트랜스내셔널한 동일화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동일화의 흐름이 매우 내셔널한 방식으로 극단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트랜스내셔널한 사회변동은 그에 준하는 반작용 운동까지도 포함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부터 한류를 받아들였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찌부터 반한류 내지 혐한류라는 문제가 동반되기도 했습니다.”

 

김성윤 박사도 지적했다시피, 디지털 소통이 야기하는 동일화의 흐름, 한류로 인한 아시아 지역에서의 중심과 주변의 문화제국주의적 재구축, 민족주의적 편향의 장이 되곤 하는 한류 담론장 등 한류 수용의 부정적 흐름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한류를 통해 우리가 꿈꿔볼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하고 희망적인 형태가 있다면 동시대 아시안 커넥트의 형성, 서구 문화에 대한 대안문화로서의 한류, 한류가 추동한 ‘아시아적인 것’을 통한 아시아 청년들의 사회화일 것이다. 장차 한류가 아시아 유대를 구축하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분기할 수 있다면, 김성윤 박사의 다음의 말에서 그 희망과 행보 사이의 어느 지점으로서의 ‘아시아적인 것’의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아시아적인 것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전략적 발화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결과는 동일성 자체라기보다는 문화적 경험들에 동반되는 끝없는 동일화의 시도에 가까울 것입니다. 두 분이 아시아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셨던 것은 일종의 새로운 전략적 발화의 지점이 나타났다는 것과 관련한 의중이 아니었을지 감히 짐작해봅니다.”


 

이 글은 2023/4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의 아홉 번째 강연(프리야 고하드 & 네하 갓판데, <인도 젊은이들의 한류 수용과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디지털 미디어의 영향>, 2023년 12월 21일)에 대한 리뷰입니다. <젠더스피어> 하반기 프로그램 및 일정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https://genderaffect.net/15/?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6253052&t=board

 

2023년 젠더·어펙트연구소 연속 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

젠더·어펙트연구소의 2023년 연속콜로키움 <젠더스피어: 젠더적 정동장으로서의 온라인 문화를 탐색하다>의 하반기 프로그램을 2023년 9월 21일부터 매달 한차례씩 진행합니다.기술 발전으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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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행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기술 변화에 따른 동시대 대중문화 콘텐츠와 수용자 속성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 영화, 팬덤, 파국 감정 연구를 진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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