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신체학과 역사적 정동 (조은애)


취약성의 배치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낸 ‘젠더・어펙트 총서’의 네 번째 타이틀은 ‘연결신체학을 향하여: 정동적 존재론과 정의’이다. 2020년 첫 번째 책 『약속과 예측: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에서 출발하여, <연결신체 이론과 젠더・어펙트 연구>라는 공동 연구의 성과로 나온 네 권의 책에 지금까지 50편에 달하는 논문들이 담겼다. 첫 번째 책이 나온 시점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며 기존의 연결들은 차단되고 새로운 연결들이 발생하고 있던 때였다. ‘약속과 예측’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부제에 쓰인 ‘연결성’이라는 어휘가 당시의 시대적 혼란과 고립이라는 공유된 감각 속에서 적실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이후, 젠더・어펙트 총서는 하나로 쉽게 묶이지 않는 다양한 주제들 안에서도 팬데믹으로 인한 뉴노멀의 일상세계를 인식론적・존재론적 지각변동과 함께 고찰하려는 작업들을 담아냈다. 

모든 이론이 그렇지만, 정동 연구를 ‘젠더・어펙트 연구’로 재명명하고 결합하려는 이론적 시도 또한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지금-여기’의 무수한 경험들에 대한 탐색을 통해서만 그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그 경험들은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들의 광활하고 복잡한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거기에는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것, 혹은 변함없어 보이지만 아주 느린 속도로 변하고 있는 것들도 포함된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권두현, 「크래프트의 실천지리 또는 ‘해녀’와 ‘아마’의 정동지리」), “유행병과 기후 위기와 같은 현상에 의해 야기된”,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제거 과정”이라고 로렌 벌렌트가 말한 ‘느린 죽음(slow death)’이 그러하다. 비슷하게도, 자본과 인구의 초국적 이동과 기술 진보가 글로벌 사우스에 초래한 빈곤과 생태계 파괴, “장기적 비상사태”라고 롭 닉슨이 말한 ‘느린 폭력’(slow violence) 또한 가시화되기 어려운 변화에 대한 재현의 곤혹, 이를 초월하기 위한 상상력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각주:1] 이 비/가시적 변화들을 포괄하는 스펙트럼에는 과거와 현재를 순환하는 경험들 또한 존재한다. 이를테면, 최근 한국에서 난데없이 불거진 석유 탐사 논란은 이미 아미타브 고시가 “포르노에 가까울 만큼 당혹감을 안겨주는 문제”라고 말한 석유의 역사 및 석유 발견 이야기의 당혹스러운 재연이기도 하다. 젠더・어펙트 연구가 비판적・대안적 연구이자 이론적 실천을 표방한다면, 그것은 우선 이러한 경험・재현・진보의 불가능성 앞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곤혹에 대해 기술할 수 있는 사고의 운동이어야 함을 느끼게 된다.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 재연과 도래가 뒤얽힌 시간을 한마디로 비선형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선형적 시간성의 언어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의 대상도, 그 연구가 발딛고 있는 학제도, 참조하는 주요 방법론도, 이론적 개념도 상이한 저자들이 독립적이고 완결된 논문을 통해 저마다의 젠더・어펙트 연구에 대한 개입을 시도해 왔다. 뿐만 아니라 이 독립된 연구들은 네 권의 독립된 책 속에 나름의 논리로 배치되었고, 그 책들은 ‘약속과 예측’, ‘연결(불)가능한 신체’,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 그리고 ‘연결신체학’이라는 키워드를 타이틀로 내세우며 일정한 흐름 속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 배치의 논리와 흐름을 일별해 보면, 지금-여기의 고유하고도 복잡한 경험으로부터 ‘보편적 어펙트 연구’의 대안/대항으로서 ‘젠더・어펙트 연구’의 이론과 실천을 이끌어내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젠더・어펙트 연구가 피상성(被傷性, 손상 가능성)과 의존성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취약성을 바탕으로 기존의 이분법적(남성-여성, 서구-비서구, 정신-물질, 문명-야만, 문화-자연, 비장애-장애, 인간-비인간 등의) 신체 분할을 재배치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면, 이 취약성은 책에 실린 복수의 작업들 간의 ‘논리’ 이면의 관계성(연결성, 의존성, 피상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유효한 통로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정동적 아카이브와 역사적 정동

 

『연결신체학을 향하여: 정동적 존재론과 정의』는 젠더・어펙트 연구라는 이름으로뿐만 아니라 그것이 관계해온 기존의 정동 연구와 인종・젠더 연구의 축적을 바탕으로, “기존 분과학문을 갱신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분과학문의 모델”이 될 “이론과 실천의 대안 제도”를 기대하며 ‘연결신체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책의 각 파트 구성은 연결신체학을 이루는 존재들의 시공간, 즉 ‘정동적 존재론’의 지리적, 기술・행위적, 역사적 모델을 제시하고 이로부터 나아가 정동적 정의를 모색하는 논의들로 나뉜다. 각 파트의 구성을 좀 더 톺아보면, 1부 ‘트랜지셔널 아시아의 정동 지리: 트랜스 퍼시픽에서 트랜스 아시아까지’는 보편적 어펙트 연구 비판의 실제를 통해 “비서구 정동 지리 이론화의 가능성”을 한국-일본-타이완의 교차적 맥락에서 시험한다. 2부 ‘손수 장인들의 테크놀로지와 대안 정동: 해녀, K-팝, 맘카페’의 논의들은 현재 한국사회의 지역적・초국적・집단적 정동 지리가 체현된 테크놀로지의 실천 사례들로 제시된다. 3부 ‘연결된 ‘과거’와 역사적 정동: 이야기, 종교, 미학의 정동 정치’에서는 ‘지금-여기’의 정동 정치를 묻기 위한 역사화 작업, 즉 역사적 경험으로서의 신체에 관한 서사적 전승, 통치술, 재현 체계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을 전개한다. 

서문에서는 이 3부까지의 작업이, ‘정동적 전회’ 이후 비서구 지역의 정동 연구가 어떻게 ‘존재론적 전환’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예시하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서문에 이은 첫 번째 글(「젠더・어펙트 연구 방법론과 역사성: 역사적 파시즘 연구에서 원격통제 권력 비판까지」)에서 권명아는 알리 라라를 경유하여 “어펙트 이론의 존재론적 전환”을 촉구하며, 비서구의 역사적 구체성에 기반한 젠더・어펙트 연구의 이론 및 방법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같은 ‘정동적 존재론’의 토대 위에, 4부 ‘정동적 정의와 존재론적 전회: 부정의에 맞서는 대안 이론과 실제’에서는 돌봄, 노화와 장애, 가정폭력과 반려동물 학대라는 주제를 신체들의 연결성으로 논의하는 연구들이 “젠더・어펙트의 연구방법에 의한 연결신체학의 구체적 모델”로서 제시된다. 

서문의 가이드라인과 책의 배치 전략을 통해, 결국 연결신체학은 정동 이론이 어떻게 생명정치 비판, 보편적 어펙트 비판, 정동적 부정의 비판을 넘어 ‘정동적 정의’를 발굴하고 제안할 수 있는가를 묻는 학문이자 실천이어야 한다는 지향점을 읽어낼 수 있다. 책에 수록된 각각의 논의들이 그 지향점을 향해 (독립적이든 상호의존적이든) 나아가고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점검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일 터이다. 다만 이 서평의 나머지 지면은 ‘역사적 정동’에 관한 연구들로 묶인 3부를 중심으로 정동 정치의 역사화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는 데 할애하고자 한다. 세 편의 글 각각에 대한 논평으로 들어가기 전에, 앞서 언급한 아미타브 고시의 ‘석유 이야기’로 잠시 우회해 보자.

얼마 전 진행된 국정 브리핑에서 대통령이 동해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이례적으로 언급한 직후, 예측에 불과한 석유 매장량을 곧바로 산업적・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언설들이 유포되었다. 물론 관련부처 간의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은 갑작스러운 당국의 발표와 뒤이어 입국한 해외 컨설팅기업 대표의 기자회견에서 새롭게 드러난 의혹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산유국의 꿈’에 들뜨기보다는 우려와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석유의 유망성을 확인하기 위해 “남은 마지막 방법은 시추”라는 컨설팅기업 대표의 평가가 실제 개발 사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해프닝에 가까울 만큼 급박하고 성기게 돌아가는 이 상황을 좀더 들여다보면, 국정 브리핑이 있기 얼마 전에 정부가 현 정권 수립 직후부터 추진해온 탈원전 정책의 폐기를 기정사실화한 일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부는 탈원전 정책 폐기의 결과로 온실가스가 감소했다고 홍보했지만 그것이 원전 복원의 효과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단계적으로 원전을 폐쇄하는 추세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볼 때 재생에너지 비중의 유의미한 증가는 확인되지 않는다.[각주:2] 오히려 이러한 ‘원전 복원’과 ‘석유 탐사’가 기후 위기에 무관심한 국가와 기업의 축재 정책이라는 점에서 완벽히 호응한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다. 

이 시점에서 ‘석유 이야기’에 대한 아미타브 고시의 언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통찰 중 하나는, 석유가 역사적으로 “무력화 도구”로서의 효과, 즉 대중을 권력과 유리시키는 효과에 동원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고시는 영국 식민지화 직전의 버마를 무대로 한 소설 『유리 궁전』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끈끈한 질감과 고약한 냄새를 가진 석유와 처음 만나는 과정과 함께, 채굴 작업에 뛰어든 사람들의 몸에 관한 묘사를 인상적으로 제시한다.[각주:3] 『대혼란의 시대』에서 그는 자신의 소설을 인용하면서, 영국 식민지화 이전까지 버마에서 석유가 얼마나 다양한 용도로 쓰였는지를 역사적으로 보충한다. 관련 사료들을 검토한 끝에, 그는 석유 국유화로 왕권강화를 꾀한 19세기 중반 버마의 시도는 현대 석유 산업의 창출을 (뒤집으면 유전의 착취를) 스스로 가능케 할 수도 있었지만, 1885년 영국 식민지화 이후 버마의 유전이 영국의 거대 기업에 편입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다. 이처럼 수 세기 전 비서구 지역의 테크놀로지와 지배자, 관료 조직, 기업가가 얽힌 복합적 과정이 결코 ‘근대’라 불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서구 근대성이 그것의 유일성을 강조해온 지성계의 헌신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과 짝패를 이룬다.  

석유가 국가 권력과 인간의 자연 착취, 그리고 식민지와 서구 근대성과 맺어온 관계를 검토한 뒤에 지금의 ‘산유국’ 스캔들로 돌아와 보면, 현 정권이 화석연료의 생산・소비에 의존하는 국가적 부와 권력이라는 신화에 얼마나 매달리는 정권인지 확인할 수 있다. 고시가 티머시 미첼을 경유해 논의한 바에 따르면, 여러 요충지, 물질의 이동, 노동자와 기업과 국가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석탄과 달리, 석유는 그러한 복잡한 이동이 비교적 얽혀 있지 않다는 이유로 영미 정치엘리트들로부터 장려되었다. 그것의 정치적 성공은 석유가 “무력화 도구”로서의 효과, 즉 대중을 권력과 유리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있었다.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 행위와 소셜 미디어의 다양한 자기표현이 구분되지 않는 교착 상태에서, 실제적인 권력행사는 “서로 맞물린 기업과 통치 기관의 복합체―딥 스테이트(deep state)”로 이관된다. 고시는 서구 국가들이 그렇게 ‘탈정치의 공간’으로 변함에 따라 상실감을 안은 수많은 사람들의 ‘회복’에 대한 갈망이 극단적인 허무주의 또는 집단 폭력이라는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지적한다.[각주:4]

 

서구 국가의 공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탈정치화’ 현상은 한국의 공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정치 현상과는 다소 다르지만, 문제는 ‘원전 복구’와 ‘석유 개발’이라는 에너지 정책이 1차대전 이후의 영미 정치엘리트들의 에너지 정치뿐만 아니라 그 효과까지도 시대착오적으로 모방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좀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아미타브 고시가 현재의 공적 영역에서 보이는 정동 정치를 석유 발굴과 소유권에 얽힌 정동의 내러티브와 역사화를 통해 분석한다는 점이다. 이때의 역사화란 바로 특정 시대와 맥락에서 있었던 고유한 경험들을 기억하는 한편으로, 그 기억을 배제하려는 힘들과 길항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일정한 규칙과 규범, 재현의 체계에 ‘미달’하거나 ‘초과’한 것으로 간주되는 말과 기억을 그 규칙, 규범, 체계로 회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비재현적이고, 비경험적이며, 비체계적인 것들의 모임과 소근거림을 정동적 아카이브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가령 ‘전승된 이야기’, ‘종교적 교화와 통치가 이루어지는 공간’, ‘정교한 미학적 재현의 장’들 속에서 어떻게 그것들과 대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의 3부에 실린 세 편의 글들은 한국의 구비설화, 식민지 조선의 사회사업, 일본문화 속 멸망의 미학이라는 상이한 학문 분야와 연구 대상을 다루지만, 공통적으로 취약한 신체(어머니의 신체, 구해지는 자의 신체, 파멸에 이끌리는 신체)를 구성하고 분할하는 정동 정치가 이야기, 통치술, 재현 체계라는 테크놀로지의 역사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강성숙의 「어머니의 신체와 연결성: 구비설화에 나타난 ‘어머니’의 용인과 배제 양상을 중심으로」는 한국 전통사회의 가부장제와 효 사상에 바탕을 둔 가족주의에 기반하여 이에 유익한 어머니의 신체만을 용인하는 설화의 정동 정치를 비판적으로 살피고 있다. 출산하는 성으로 자연화된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을 투영하고 있는 구비설화가 어머니의 몸을 용인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은, 여성을 생식기관으로 고착시키거나 장애를 가진 몸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의 몸’에 대한 서사적 지배를 비판하면서도, 이 설화들이 그러한 폭력의 구조를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메타적 기능을 때로 병행한다는 데 주목한다. 아마도 이것은 설화가 내부에서는 자식과 어머니의 연결 (불)가능한 신체를 다루는 한편으로, 외부에서는 구연자 및 청중의 신체와도 연결 (불)가능한 관계를 가진다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비설화는 그것이 상연되는 시공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장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야기하기라는 행위, 이야기와 관계 맺기를 통해 자기 성찰을 넘어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문제 제기가 가능해지며, 무엇보다 신체와 신체의 마주침을 통한 ‘되기’가 상연되는 공간. 어머니와 자식의 연결을 넘어 이야기 안팎으로 구연자・청중・채록자가 맺는 복잡한 신체들의 연결망과 변화(이를테면 저자가 발견하는 것처럼 “연결을 끊어냄으로써 연결되는” “공유지”로서의 대안 신체)를 좀더 확장된 시야에서 그려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소현숙의 「일제하 일본인 사회사업과 조선인: 일본 불교 정토종(淨土宗)의 화광교원(和光敎園)을 중심으로」는 재조일본인 종교단체의 사회사업을 통해 그것이 조선총독부 및 조선인들과 맺었던 관계를 탐색한다. 최근 정착민 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재조일본인 연구의 재검토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국면을 상기할 때, 식민통치 정책과 그 대상자로서의 피식민자 사이에 존재한 재조일본인 사회사업의 성격을 분석하는 이 논문의 의미는 더욱 도드라진다. 문화통치로의 전환 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빈곤 구제나 실업 대책, 사회교육 같은 사회사업 정책이 부재한 가운데, 식민지 포교를 목표로 한 종교단체가 그 역할을 대체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사회사업이 시작되었다. 문화통치로의 전환 후 총독부의 사회통합 일환으로 사회사업 정책이 도입되었는데, 이때 총독부의 지원에 힘입어 정토종은 1920년 화광교원을 설립했다. 저자는 화광교원 운영비의 과반을 점하는 재조일본인 기업가의 기부 활동에 주목하며, 이것이 어떻게 재조일본인의 사회적 지위 과시에 활용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식민 단체에서 작성된 인물평과 조선어 민간 신문에 보도된 사회사업의 모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식민지배-피지배 관계라는 차별구조 속에서 ‘구하는 자’와 ‘구해지는 자’의 위계가 발생하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실무자들 간에도 민족적 위계가 형성되면서 화광교원이 차별의 중층 구조를 드러내는 장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화광교원이 이처럼 식민 권력의 규율을 통해 피식민 하층계급의 신체를 생산하고 통치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면, 그 장치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성들을 위한 숙박 공간이 만들어지는 사례이다. 이 또한 역사적 ‘되기’의 중요한 사례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그러한 ‘되기’의 과정이 진보적 관점과 동일시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지현의 「일본 내셔널리즘과 미와 멸망의 정동(情動)」은 현대 일본 대중문화에서 특정한 미적 충동을 통해 재현되는 내셔널리즘이, 일본 고전문학에서부터 국가적 위기 국면마다 활성화된 ‘멸망의 정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가 ‘완벽한 전투기’ 제작에 몰두하는 주인공의 미적 충동과 시한부 여성에 대한 순애보를 겹쳐놓는 설정은, 지브리 영화들의 향수를 공유해 온 관객들을 미묘한 위치에 둔다. 저자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는 영화 속 인물의 감성에서 일본 낭만파의 ‘이로니(ironie, イロニー)’ 담론의 영향을 발견하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 가마쿠라 시대의 고전 서사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도 마찬가지로 멸망의 정동과 이를 통한 영웅주의가 작동하고 있음을 밝힌다. 저자는 전전에 쓰인 소설이나 가마쿠라 시대의 고전 서사가 영화나 TV 애니메이션으로 재창작되면서 시각적, 청각적으로 극대화된 감상성의 정동이 내셔널리즘을 뒷받침한다고 지적한다. ‘은밀한 감상주의’라는 표현과도 함께 쓰이는 이 감상성의 정동을, 이 책의 다른 글들에서 언급되는 감상주의(감성주의)와 겹쳐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권명아의 글에 등장하는 ‘백인 감상주의’란 『디스어펙티드』의 저자 신 야오가 미국의 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고 소수자 운동을 억압해온 미국의 인종적・성적 정치학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와 같은 차별과 폭력의 역사는 소수자의 무감정(unfeeling)을 부정적으로 단죄해온 역사와 함께한다. 권두현의 글에 등장하는 ‘감성주의’는 정상성과 비정상성, 정상적인 몸과 비정상적인 몸을 분할하는 생명정치와 연관된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말하는 감상성 또는 감상주의란 무엇인지 묻는 것은, 멸망의 정동을 드러내는 일본 대중문화 속의 감상성이 무엇을 은폐하거나 무엇을 분할하는 정동 정치인지를 묻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답할 수 있다면, 독자(관객)의 과제로 남겨진 저항적 독해의 실천, 그리고 대안 정동의 방향 또한 구체화될 수 있지 않을까.

 

 

다르게 쓰기와 다르게 읽기가 마주칠 때

이번에 새로 출판된 『연결신체학을 향하여: 정동적 존재론과 정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2020년부터 매해 다양한 분야에서 제출된 젠더・어펙트 연구의 진지하고도 도전적인 성과들을 묶어낸 연구팀의 역량과 성실함이 존경스럽다. 학문 분과로도, 연구 주제로도, 다루고 있는 시공간적 특성으로도 한데 모으기 어려운 개성 강한 연구들을 독립된 한 권의 책으로 접하게 되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배치는 어찌 보면 쉽게 설득되기 어려울 수도, 어떤 독자들에게는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책에 묶인 각각의 글들이 각각의 파트 내에서, 그리고 파트 간의 배치를 넘어서 어떻게 대화하고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해 묻는 것이 독자들만의 몫이 아닌 것처럼, 이에 답하는 것 또한 저자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어펙트 연구에 대한 방법론적 사유가 글쓰기 그 자체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권명아의 글에는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으로서의 설명과 분석을 넘어선 학문적 글쓰기의 시도를 어펙트 연구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알리 라라의 관점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사건(events), 관계(relation), 하기(doings: practice and performances), 정동적 반향(affective resonance), 백그라운드(background)”를 주요 주제로 하는 “비재현적 연구”를 다룰 때, 그 글쓰기는 “비경험적인 것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가늠의 체계(system of speculation)”에 기초하여 “기술과 가늠의 중간쯤”에 머무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새로운 글쓰기가 현행 학술제도 속에서 얼마나 어려운 시도인지도 안다. 새로운 글쓰기는 그것을 배치하는 장의 변동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르게 쓰기라는 어펙트 연구의 방법론은 다르게 읽기, 다시 말해 그것을 알아채는(noticing) 기술과의 만남 또한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애나 칭이 『세계 끝의 버섯』에서 말한 것과 같은 “패치성을 갖는 풍경, 복수의 시간성,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가변적인 배치, 즉 협력적 생존이라는 문제”가 떠나지 않았다. 애나 칭은 그것들이 야기하는 골치아픈 불협화음을 자율적인 멜로디가 뒤얽힌 다성음악 폴리포니(polyphony)에 비유한 바 있다. “배치가 갖는 복수의 시간적 리듬과 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낯선 배치 속에서 귀에 익은 멜로디를 골라내고, 다시 그것들이 내는 낯선 화음에 귀를 기울이는 식의 알아차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각주:5] 젠더・어펙트 연구가 새로운 글쓰기의 실험과 그것이 배치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주의를 드러낸다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골치아픈 불협화음’을 알아차리는 읽기의 기술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연결신체학은 이와 같은 젠더・어펙트 연구 안팎의―다르게 쓰기와 다르게 읽기, 그리고 그것이 배치되는 장을 다르게 하기라는―상호작용(inter-action)/내부작용(intra-action)에 의해서만, 서문에서 강조된 “조우, 활성, 갱신”의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지난 2024년 6월 12일(수) 19-21시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된 젠더·어펙트 총서 04 『연결신체학을 향하여 - 정동적 존재론과 정의』 출간 기념 서평회에서 발표한 원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은애

 

 

문학연구자. 동국대학교 서사문화연구소 연구초빙교수. 「남북일 냉전 구조와 재일조선인의 문화적 월경: 자기민족지적 글쓰기의 계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냉전 시대 이후의 마이너리티 서사 및 담론을 교차성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또한 전쟁, 이주, 망명을 키워드로 경계 횡단의 역사적 실천들을 조명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위도라는 책을 쓰고 ‘잿더미’ 전후공간론, 재일코리안 스포츠 영웅 열전, 문학 ‘읽기’의 방법들 등의 책을 함께 옮겼다. fromeunae@gmail.com

 

 

  1. 롭 닉슨, 김홍옥 옮김,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에코리브르, 2020. [본문으로]
  2. 「사설-탈원전 폐기로 온실가스 줄였다고 홍보하는 환경부」, ⟪한겨례⟫, 2024. 4. 9.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135758.html) [본문으로]
  3. 아미타브 고시, 이종인 옮김, 『유리 궁전』, 올, 2011. [본문으로]
  4. 아미타브 고시, 김홍옥 옮김, 『대혼란의 시대』, 에코리브르, 2021. [본문으로]
  5. 애나 칭, 노고운 옮김,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현실문화연구, 20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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