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몸이 부딪히는 현장에 정동 연구가 개입할 때 (유현미)

 

  이 글은 젠더·어펙트연구소가 출간한 4번째 총서, 『연결신체학을 향하여』의 4부 ‘정동적 정의와 존재론적 전회’를 중심으로 책의 골자 및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한국에서 정동 연구를 확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연구소의 꾸준한 작업을 지지하며, 전공·학제 간 교류와 협업의 결과를 접할 기회를 주신 데 감사드린다. 주로 질적 방법으로 경험 연구를 하는 페미니스트 사회학자인 필자에게 정동 논의가 제기하는 학술적 자극과 고민의 맥락을 함께 풀어내는 방식으로 리뷰를 시도한다.

 

 

1. 정동 논의와의 조우

 

  먼저, 필자는 전문가적 식견에서 젠더 인식론과 정동 연구의 조우를 체계적으로 일별하거나 평가할 자격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2010년대부터 문학과 문화 연구, 인류학,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중심으로 소수자 경험과 재현을 분석하는 주요 렌즈로 정동 논의가 활용되는 양상을 점차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사회학 분야에서도 감정사회학적 관심에서 집합행동 분석, 비가시화된 노동과 활동에 주목하는 사례연구에서 정동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나도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면서 정동 논의를 참조했다. 맥락을 좀 더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2018년 미투 운동을 전후로 학계에서 폭로된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조직이론과 범죄사회학 논의로 분석하는 논문을 썼다. 핵심은 성폭력을 지속시키는 조직 요인을 서술하는 것이었기에 머튼, 부르디외 등 고전적 사회학자들의 다소 ‘딱딱한’ 개념과 설명을 활용했다. 하지만 심층면접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들이 주요 자료였기에, 자료 중에서도 대학 미투 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한 피해자와 조력자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좀 더 새롭고 동시대적인 개념과 논의가 필요했다. 이 때 미투를 여성들의 집합적 운동력의 표상이자 “정동적 공중”을 만들어낸 실천으로 해석한 김예란의 논의, ‘~계’로 통칭·분화되는 무수한 사회영역을 지배하던 남성 권력의 붕괴와 새로운 미래의 도래를 알리는 정동적 실천으로 포착한 권명아의 논의를 인상깊게 읽었다.   

 

  그래서 나는 여성, 학생, 페미니스트 중 하나 이상의 주체 위치에 놓인 피해자, 조력자들이 만든 대응모임과 그들의 대항 행동을 ‘정동적 연대의 페미니즘 체험’으로 분석했다. 수개월에서 1-2년 정도 활발히 진행된 활동에서 그들이 경험한 강렬한 감정과 협력적이면서도 갈등이 넘친 관계들, 이후 진로와 일상을 바꾼 체험의 실상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정치적 기회구조, 자원동원과 경로의존성 같은 기존 사회운동론의 설명과는 조금 다른 것이 필요했다. 정동 논의에서 행위자들이 몸으로 만나 부대끼며 발생하는 감정의 결속과 강도에 주목하고, 매체·기술이 행위자들의 느낌과 행위를 촉발하는 매개가 됨을 강조하며, 특정한 시공간에서 응집되어 급등하는 사회적 삶의 에너지를 담아내고자 한다는 측면이 내가 겪고, 만나고, 생성한 일부 자료의 진실에 부합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론적 관심보다는 연루된 현장과 질적 자료를 귀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정동 논의의 유용성을 접했다. 새로우면서도 익숙했는데, 그건 아마 집합행동과 집합감정, 그것이 낳는 사회변동, 상호작용의 복잡성과 역동이 사회학의 고전적 주제이자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미 여러 정동 연구(자)가 이러한 고전적 주제의식과 개념, 접근법의 한계를 비판하고, 갱신하고, 전환시켰을 테다. 하지만 오히려 내게는 그 친연성을 돌아보는 것이 정동 논의의 중요성을 새길 수 있는 통로였다. 고전은 대개 고루하지만,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 그래서 때때로 급진적인 것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불평등과 부정의(injustice) 이슈가 대표적인데, 4부가 바로 정동적 정의 문제를 전면화하고 있어 반가웠다.

 

2. 돌봄 노동자를 존중하기

 

  4부는 돌봄 노동, 노년의 시간성과 서사화의 문제, 반려동물 학대 이슈를 다루는 세 편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글의 소재와 연구 방법, 서술 전략이 상이하기에 각기 분리해서 글의 문제의식과 핵심을 요약하고, 의의와 한계를 논평하겠다. 


  4부 첫 글인 정종민의 「비접촉시대에 돌봄노동자의 삶과 노동의 위태로운 기술로서 정동적 부정의」는 인지증 노인을 돌보는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간호조무사의 돌봄 경험과 서사를 분석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촉발한 돌봄 대란 속에 미디어에서 영웅으로 재현됐지만, 실상 그들이 경험한 분노, 무기력, 소진감, 배신감 등 부정적 감정과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한 주목은 부족했다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주지하듯 한국은 돌봄과 가사노동을 가족 내 여성에게 전담시키거나 여성 세대 간 전이(할머니들의 독박육아)로 돌려막거나, 낮은 사회적 대우와 보상으로 외부노동시장 인력에게 싸게 맡겨온 사회다. 이 3가지 조건과 경험을 중첩해 보유한 존재가 정종민이 만난, 사회서비스 분야의 중장년층 여성이라 할 수 있겠다. 


  글은 비접촉을 권장하는 팬데믹에도 인지증 노인을 돌보기 위해 접촉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돌봄노동자들이 노출된 물리적, 관계적 위험과 어려움을 드러내고, 그럼에도 어떻게 상황을 견디고 주체적으로 대응해 나갔는지를 서술한다. 『정동적 평등』을 집필한 캐슬린 린치의 ‘돌봄 대화’ 방법을 차용한 면접 결과, 참여자들의 노동이 “코로나로 죽으나, 굶어서 죽으나” 마찬가지인 생계유지 압박 속에 수행되었으나 “내 부모 같은” 돌봄수요자의 “빤히 보이는 현실”에 대한 공감, 자신도 다를 바 없이 취약한 “사정”을 함께 “짠하게” 감각하는 마음가짐 속에서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정종민의 글은 지원과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필수노동자라는 명목으로 중단 없는 노동을 요구받으며 이 사회를 지탱해온 돌봄노동자들을 정확히 “존중”하고 기억하기 위한 인류학적 작업을 펼쳤다. 다루는 소재와 주장이 적실하며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내게 인상적인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돌봄노동자의 노동을 쥐어짜는 돌봄 부정의 상황에서 이들이 느끼는 부정적 감정을 병리화하지 않으려는 문제의식이다. 부정의에 대한 구조적 분석과 개입을 중시하다, 구체적 개인의 상태를 구조적 모순의 발현이자 증상으로 병리화하는 경우를 왕왕 본다. 병리화는 증상을 개인의 책임이나 특성 탓으로 돌리거나 그것을 치료·관리하는 권력의 남용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정종민은 병리화를 경계하며 오히려 이렇게 부정적 감정을 겪으면서도 계속 이들이 해내갈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는 돌보는 사람의 상황에 “맞추”며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웃는 행위성, 노동자들의 반응 역량을 제시한다. 타자에게 응답하고 그들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관계 윤리의 의의를 지적한 페미니스트 심리학자 캐롤 길리건의 성찰(『다른 목소리로』)을 상기시킨다.   


  둘째, 돌봄부정의가 팬데믹으로 심화됐지만, 사회와 가정 내에서 이미 불평등하게 분배되던 구조로 존재해 왔음을 당사자들이 잘 알고, 느끼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체화된 지식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돌봄부정의를 팬데믹 시기 특수한 문제로 협소화하지 않고, 지금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보편적 여성노동의 이슈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글이 정동적 부정의를 언급하는 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종민은 정동적 부정의를 “돌봄노동자들이 부정의한 상황을 몸으로 부대끼며 상응하면서 촉발하는 얽히고 설킨 삶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생생한 힘, 에너지, 생명력(393-4)”으로 정리했는데 이것이 적합한 규정인지 모르겠다. 그도 주되게 참고한 캐슬린 린치는 정동적 부정의를 “협조적인 정동적 관계를 형성할 능력을 박탈당하거나 능력은 있더라도 그런 관계에 참여하는 경험을 갖지 못한다면, 인간성을 심각하게 박탈당하는 정의롭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정리했다. 직관적으로 파악해도 부정의는 정의롭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정동적 부정의를 서술하는 방식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이것이 글의 주된 논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정종민은 “정동적 부정의가 역설적으로 위태로운 삶과 노동의 가능성이 되며”, “부정적이라고 해서 주변화되고 배제되었던 정동적 부정의를 포용, 인정, 존중해야 할 정치적 대상임(395)”을 주장한다. 부정의는 정의로 나아가기 위해 지양되어야 하는 상태이지, 포용하고 존중할 대상은 아니지 않을까? 노동자들이 겪는 부정적 정동을 부인하지 말자는 주장에는 적극 동의하지만 정동적 부정의가 정치적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회적 현상과 감정의 ‘부정성(negativity)’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것과 ‘부정의’를 존중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질적 연구자에게 자료를 어떻게 이론과 개념의 지도와 잘 결합해 분석하고 제시할지는 늘 고민거리다. 면접참여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부족하지만, 이론을 적용하는 하나의 사례로 활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는 글에서 팬데믹 시기 돌봄노동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팬데믹을 넘어 노동자들의 생애과정 전체와 과거 직업 경험이 지속적으로 소환되었다는 언급이 흥미로웠다. 질적 접근은 전제된 의도나 범위를 초과하는 발견적 내용을 생성한다. 따라서 일부 다루고 있지만 면접참여자들의 생애사적 맥락과 특징이 좀 더 상세히, 그들이 처한 시공간적 배경(예를 들어 광주, 담양 지역에서의 돌봄노동 수행과 수도권에서의 차이 등) 분석과 결합해 제시되었다면, 또한 정동 논의와 불화하는 면접 내용도 제시되었다면 논지가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싶다.

 

3. 대안적 질병 서사 만들기

 

  다음으로 이화진의 글 「나이 듦과 장애」는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문화 비평 대상으로 삼아, 나이 듦의 의미와 고령화 시대 기억 서사의 특징을 고찰한다. 나는 분석 대상인 드라마를 시청하지 못했고, 문화 비평 및 서사 분석과 관련된 문예이론, 문학 방법론에 문외한이다. 그래서 글의 의의나 한계를 적는 것이 조심스럽다. 다만 질병 경험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시련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문제이며, 아픈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가 자아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적, 윤리적 효과가 있다는 아서 프랭크의 논의를 떠올리며, 이 글이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드라마를 나이듦과 자아정체성, 사회적 관계맺기에 관한 새로운 질병 서사로 분석하고 있다고 읽었다. 


 

글은 ‘성공적 노화’ 담론을 비판하며 시작한다. 성공적 노화 담론은 나이 듦을 무능과 실패, 자아 상실로 파악하며 공포와 극복의 대상으로 위치 짓는다. 흔히 ‘치매’로 불리는 알츠하이머 질병은 성공적 노화의 실패로,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 불안을 증폭시키며 정동 정치를 환기하는 소재였다. 하지만 최근 알츠하이머 경험을 한국 현대사의 폭력성을 제유하는 장치로, 주변화된 세대(청년과 노년)간 연대라는 주제 의식을 담는 서사 전략으로 활용하는 재현물이 증가했다. 이화진도 <눈이 부시게>를 주변화된 집단이자 시기(노년 여성)를 거치는 주인공의 인생 서사 다시 쓰기로 바라보며, 동시에 다른 문화적 재현물과 구별되는 드라마의 장점과 한계를 추출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알츠하이머 질병은 동일 인물 내 청년과 노년 상태의 공존을 낳는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를 매력적으로 오가게 하는 서사 장치로 기능한다. 이화진은 드라마가 자신의 몸이지만 낯선 몸이기도 한 새로운 몸으로 다른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의 일상을 설득력 있게 그려냄으로써,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서 노년에 대한 대중적 이해의 폭을 넓혔다고 평가한다. 드라마는 기억 상실과 신체 손상을 트라우마적 과거 및 역사의 결과이자 유비로 활용하는 최근 대중 서사의 경향을 계승한다. 하지만 기억의 문제를 공적 배상과 기념 실천으로 추상화하기보다는 삶에 대한 긍정과 가족의 화해로 구체화하면서, 서로의 취약성을 살피는 대안적 관계의 가능성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화진은 후천적 장애를 가지게 된 아들을 돌봐야 했던 ‘어머니’라는 젠더 위치와 돌봄 경험, 관계적 자아가 이러한 내러티브 특징에 기여했다고 보며,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시선이 알츠하이머로 인한 인지 오류, 착종으로 밝혀지고 해석되도록 이끄는 후반부 전개가 주인공의 서사적 주체성보다 그것의 일관성을 평가하는 시청자의 능동성을 전면화하면서 ‘취약한 주체’를 지우는 데 공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드라마 결론이 보수적 현상 유지나 정상성을 강화할 수 있는 측면도 한계로 언급한다.


  글의 분석은 드라마를 못 본 내게도 무리 없이 읽히며 설득력 있었다. 몸된 존재로 노화가 일탈이 아니라 일상이며, 일상에서 몸 체험이 더욱더 풍부하게 말해지고 들려야 한다는 논지는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wounded storyteller)와 회복사회(remission society) 개념을 제안한 아서 프랭크를 다시금 소환한다. 


 

아서 프랭크는 질병 이야기를 복원, 혼돈, 탐구의 서사로 유형화하며 이러한 서사 양식이 시공간 인식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음을 시사했다. 건강한 나로 되돌아갈 수 있다 믿는 복원 서사가 선형적, 진보적 시간성에 기반해 있다면, 일관성과 연속성을 이탈한 혼돈의 서사는 난파선처럼 부서진 공간과 길잃은 마음에 터해 있다. 탐구 서사는 좌충우돌하지만 길을 나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여행길의 시공간을 닮았다. 탐구 서사에서 질병은 극복되기보다는 안고 살아가는 것으로, 완치와 투병 ‘사이’에서 체득한 성찰을 증언하는 목격자의 것이 된다. 목격자로서 환자는 말하고 들음으로써, 만성질환과 고령화 시대 소통하는 몸들, 회복 사회를 만든다. 이화진의 분석은 알츠하이머 질병 경험과 노년기를 탐구 서사의 측면에서 조명하며, 비가시화 되어온 여성 노인들의 입장과 마음, 말을 섬세히 읽는 작업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요약하면 첫 글과 함께 이 글은 나이 든 여성의 노동과 몸, 생애, 관계를 읽어내는 접근이  윤리적 공동체 만들기, 정동적 정의 실현에 중요함을 환기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식과 함의의 빛나는 통찰력과 별개로, 경험 자료가 아니라 미디어 재현물만으로 정동을 탐구하는 것이 과연 어느 수준에서 어떻게 분석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 여전히 내게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정동을 탐구하는 것과 정동의 재현을 탐구하는 것은 얼마나 같고 다른가? 

 

4. 폭력의 중층 구조 분석

 

  마지막 글 「가정폭력과 반려동물 학대의 문제 및 개입」은 친밀한 관계 내 폭력(Intimate Partner Violence)의 인식틀에서 반려동물 학대 문제를 다룰 필요를 제기하며, 관련 법적 개념과 대응체계 실태, 해외 정책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친밀한 관계 내 폭력과 동물 학대의 중첩, 연속성이 다수 보고되고 있으며, 특히 여성 파트너에 대한 통제와 협박, 권력 확인의 수단으로 반려동물을 괴롭히고 유기, 방임하는 상황을 빈번히 관찰할 수 있다. 체계적 조사·연구가 필요하고, 법·정책적 개입도 시급한 사안이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사회적 관심과 논의가 부족해 실태 자체가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못하며, 관련 법·정책도 미비하거나 검토 수준에서 시작된 단계다. 그래서 이 글은 해외 연구를 중심으로 가정폭력의 맥락에서 반려동물 학대 현황과 이론을 정리하고 있다. 


  젠더폭력 분야를 공부했고, 반성폭력 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기에 이 주제가 여성들의 삶과 절실히 맞닿아 있는 이슈임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여성들이 자신이 돌보는 아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염려, 애착으로 가해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착을 활용해 가해자가 폭력을 반복하거나 정당화하는 양상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개인 간 분쟁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얽힌 구조적 사회문제임을 확언한다. 친밀성, 섹슈얼리티와 젠더 권력관계, 동물과의 애착이 얽힌 현상이기에 젠더·어펙트 관점이 어느 때보다 요청된다. 


  다만 이 글은 해당 주제를 시론 차원에서 다루고 있고, 가정폭력과 동물학대에 관한 현행 법규와 제도를 개정 사항과 해외 정책 사례 검토 수준에서 제안하고 있어서, 통상적으로 내가 접하거나 예상한 정동 연구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과학 정책연구로 읽히는데, 소재적 차원을 넘어선 젠더·어펙트 관점과의 연결성이 좀 더 정교하게 제시되었다면 더 뜻깊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아쉬움이 있다. 이 글은 가정폭력이나 동물학대 개념을 법적 규정에서 찾고 있고, 관련 이론과 정책 대안을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가정폭력 개념은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1980년대 아내구타, 아내폭력 문제를 제기하며 논의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 가정폭력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여성운동의 노력과 논쟁, 제도화의 한계에 관한 논의들이 이미 축적되어 있다. 또한 당대 운동계 담론과 이후 여성학 연구들에서 여성의 생애과정에서 폭력의 연속선을 다루는 이론적 개념틀(대표적으로 Kelly의 성폭력 연속체 개념)과 가정폭력의 중층적 피해 구조 및 경험에 대한 고찰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선행논의 검토가 좀 더 제시되었다면, 법적 개념이나 규정으로 한정되지 않는 담론과 인식의 지평 속에 이 문제를 사유할 기회가 더 열렸을 것 같다. 또한 젠더폭력이나 여타 학대 문제에 있어 미국 법규나 논의, 정책을 대안으로 참조하는 것은 사실 나도 자유롭지 않은, 통상적인 한국 학계와 정책연구 분야의 관습이라 생각하는데 그만큼 지적 식민주의와 종속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비판 역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짧은 식견이지만 미국의 ‘친밀한 관계 내 폭력’, ‘대인관계 폭력’ 개념을 통한 접근은 주로 당사자 간 소송주의와 분쟁 해결의 법화에 기반해 있거나 이를 촉진해, 젠더폭력 문제의 구조적 측면과 정치성을 탈각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친 비판이지만 새로운 인식론과 방법론을 제안하는 총서의 기획 의도가 더 잘 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의 일환으로 적는다. 

 

5. 맺으며 

 

 돌봄과 폭력은 역사적으로나 개인의 체험 수준에서나 몸과 몸이 격렬히 부딪치는 전장으로, 정동 연구가 깊숙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현장이다. 또한 강고하게 수혜자와 제공자, 가해자와 피해자 집단, 특성, 경험이 성별화되어 있으며 성별화된 효과를 낳아왔다. 페미니즘 운동과 담론의 주요 대상이 된 이유다. 따라서 정동 연구는 페미니즘 지식과 실천의 성과를 계승하고 갱신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리뷰한 글들은 돌봄과 폭력의 현장에 결부된 존재들, 노동, 서사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정의가 경제적 재분배와 정치적 참여의 문제에 더해, 사랑과 인정, 연대를 위한 에너지를 결집하고 그것의 고통과 기쁨을 평등하게 나누는 정동적 문제임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내게 남는 고민은 정동을 포착해서 분석하는 방법의 실제가 아직 희미하다는 것이고, 다소 개념에 현실을 끼워맞추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하는 회의다. 지속적으로 연구를 해온 분들의 비판, 조언, 가르침, 토론을 기다린다.     

 

 


 

이 글은 지난 2024년 6월 12일(수) 19-21시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된 젠더·어펙트 총서 04 『연결신체학을 향하여 - 정동적 존재론과 정의』 출간 기념 서평회에서 발표한 원고를 바탕으로 합니다. 

 


유현미

 

창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이룸 공부방 활동으로 성매매 이슈를 만났으며 사회학적 관점에서 젠더폭력, 고등교육의 문제를 연구한다. 박사학위논문으로 〈대학 성폭력의 지속과 성별화된 능력주의〉, 함께 쓴 책으로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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