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몸은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가: 이론 실천의 방법들 (김미정)

1. 어쩌면 이론은 늘 보편 이론이지만 

이론이 단지 학술장에서의 글쓰기 도구임을 넘어서, (근대 이래) 사유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재배치하고 세계를 다시 조망할 수 있게 하는 매개여야함을 강력히 환기시킨 개념의 하나가 오늘날 어펙트일 것이다. 주지하듯, 2000년대 중반 한국에서 스피노자-들뢰즈를 매개로 소개되기 시작한 어펙트 개념은 그 맥락상 일종의 열쇠 개념 역할을 기대받은 측면이 강했다. 2024년 현재는 다른 질문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도구로, 그리고 이론의 보편 지향 자체를 질문할 전제를 풍부히 품고 있는 개념으로 폭넓게 이해·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적으로는 ‘어펙트 이론’이라는 말보다 ‘어펙트의 개념, 문제의식’ 같은 말을 더 사용하는 편이기는 하다. 정합적이고 정통적인 계보가 중요하다기보다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조망하게 할, 개념의 배후에 놓인 세계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이론’이라는 말에 값할 최근 무수한 논의들과 호환, 연동 가능한 사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어펙트 개념에 내재한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맥락화해온 기존 작업들 덕택에 가능해진 진술이다. 

이 글은 그 최전선에 놓인 작업의 하나를 부분적으로 거칠게나마 읽어보려 한다. 젠더·어펙트 연구소의 세 번째 총서 『연결신체학을 향하여 : 정동적 존재론과 정의』 2부 ‘손수 장인들의 테크놀로지와 대안 정동’에 실린 세 편의 글은 학술장의 서로 다른 분과적 베이스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세 편의 글에는 공히 ‘주체’와 같은 기존 기표로 환원되기 어려운 ‘행위자성’과 그 이합(離合)의 운동성이 두드러진다. 또한 그 운동성을 넘어 ‘대안 정동’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문제의식이 관통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 글들을 ‘이론의 맥락화’ 혹은 ‘이론 실천’ 같은 관점에서 읽으며 떠오른 감상을 조금 적어보려 한다.

   

2. 행위자성, 문턱들, 운동 그리고 대안정동 : 이론 실천의 어떤 방법들 

2.1 권두현의 「크래프트의 실천지리 또는 ‘해녀’와 ‘아마’의 정동지리」


권두현의 「크래프트의 실천지리 또는 ‘해녀’와 ‘아마’의 정동지리」는 일견 간단히 요약되기를 거절하는 글이다. 그럼에도 다소 전통적 방식으로 요약하자면 이 글은 한국의 ‘해녀’와 일본의 ‘아마’의 역사성을 톺아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2010년대 드라마들(일본의 <아마짱>, 한국의 <우리들의 블루스>) 속 “생명권력”이 활용하는 “감성주의” 전략을 비교 분석한다. 하지만 이 글이 이러한 텍스트 비교만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선 짚어둔다. 또한 대상으로 택한 존재의 기표적 정체성(해녀, 아마)만을 중심에 놓고 분석하지도 않는다는 점도 강조해둔다.

 


이 글은 “‘물질’의 수행”을 매개로 “해녀의 신체”가 “해녀 공동체와 이를 중심에 둔 지역 공동체와 두루 뒤얽힌 채 마주침의 복잡성(encountering complexity)을 상연”하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분석한다. 이 글을 좇아 읽으며 감히 말해보자면, 해녀이고 아마여서 물질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이라는 크래프트”가 만드는 “육지와 바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동적 사회”가 해녀와 아마의 신체를 통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해녀와 아마의 단순한 비교연구가 아니다. 이 글은 오히려 주목하는 대상의 그러한 기표의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행위성, 즉 ‘물질’(이를 필자는 ‘크래프트(craft)’ 개념을 통해 분석한다)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이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분석 대상의 현재적 지평과 그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그 현재적 지평과 연동될 역사성, 즉 시간의 지층을 부상시키는 관점이다. 예컨대 필자는 이 글이 “해녀들의 바다를 숭고한 자연이라는 심상지리적 영토로부터 탈영토화”하고 “생명정치적 영토로 재영토화함”으로써 “해녀들의 삶을 포섭하는 생명정치의 전략과 전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도모한다고 밝혀 두기도 했다. 즉, 일종의 운명적, 초월적인 것으로 봉인된 채 꿈쩍하지 않은듯 지속되고 있는 어떤 사건, 존재에 대한 인식을 긍정하면서도, 필자는 그것을 동시에 근대 정치철학의 맥락에서 재배치하고자 한다. 어떤 존재나 현상의 시간성(역사성과 그것의 현재성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을 시야에 두는 이러한 관점은 과거와 현재의 목적론적(linear) 시간에 의존하는 방식의 의미화 방법과 분명 거리가 있다. 동시적일 수 없(어보이)는 시간들이 어떻게 서로 어떻게 중첩되며 얽혀 있는지 살피려는 이러한 방법 앞에서, 시간을 사유하는 관점에 따라 대안이나 실천을 상상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은 어펙트 이론이 현재 한국어 사용자의 학술적 글쓰기 관점이나 스타일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드라마틱하게 확인시키는 사례처럼 놓여 있다고도 생각한다. 재현(물)을 전제로 하는 텍스트를 대상으로 삼아온 기존 문학·문화 연구를 떠올린다면 이 글은 어펙트 연구가 기존 학술적 글쓰기에 어떤 변용이 가능할지 충분히 짐작케 한다. 어쩌면 관측(관찰) 대상은 관측에 사용될 도구나 행위자 등 모든 일련의 행위와 무관치 않다. 그것들은 그저 관찰자 vs 관찰 대상의 관계처럼 구분된다기보다 애초에 서로 얽혀 있고 분별하기 어려운 역동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필자와 연구대상을 포함하여) 정동된 신체들이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서로의 윤곽을 그려가는 방법은 그 자체로 정동적이다. 이것은 어떤 특정 이론을 정통적으로 계보화하는 것 자체에 대한 관심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 글 속에 어펙트의 문제의식과 연동될 인접 이론의 언어도 자주 구사되고 있지만, 그것은 맥락이 지워진 이론적 현란함이라기보다 필자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다루는 대상을 비롯하여 글 속의 세계 자체가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는 생물체처럼 전달되는 이런 방법은 어떤 준안정(metastability) 상태들을 연상시킨다. 즉, 이 글은 어떤 안정된 의미를 전경화하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듯도 하다. 물론 이 글은 ‘생명정치적 테크닉이 정동시키고 정동되는 역량을 결정하고 조건화하는 방법’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정동적 삶이 생명정치적 테크닉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능가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패턴화되고 조직될 수 있는지’ 충분히 암시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전경화/후경화하면서 의미를 확인하는 관성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 의미들의 ‘궁극’ 혹은 의미의 육체성이 더 궁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는 재현=표상=대표 너머의 운동·정동적 상황을 부상시키는 이 글의 방법에 내재된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말은 이 글의 의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재현의 원리와 그것을 늘 휘감아돌고 있을 운동·정동적 상황을 동시에 시야에 둘 때 경험하는 독자의 어떤 관성을 질문하는 것에 가깝다.

 

2.2 이지행, 「팬덤의 초국적 기억정치와 정동 : ‘BTS 원폭티셔츠’ 논란을 중심으로」


앞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성을 동시에 역동적으로 사유하는 장면을 주목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는 단지 무언가의 역사화나 맥락화가 중요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펙트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일 ‘잠재성(virtuality)’에 대한 인식과 그 사유 방법이 여타의 어펙트 이론 수용자들과 현저히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했지만, 정동이 ‘아직-아닌(not-yet)’ 상태를 강조할 때, 그리고 이것을 스피노자-들뢰즈의 계보에서 이해할 때, 경험되지 않고 현행화되지 않은 사건의 시간은 미래로 간주되거나 현행화된 질서의 언어(ex. 정체성)를 거절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세기말 세기초 이른바 사건·생성 철학의 부상과 함께 어펙트 개념이 받아들여진 초기 맥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예컨대 ‘탈주·도주’ 같은 개념이 함축했듯 예컨대 ‘정체성’과 같은 격자들을 강하게 거절하던 논의들. 그리고 이렇듯 ‘잠재성’에 이해의 차이가 예컨대 정동 연구와 젠더 연구가 불화한다는 이미지를 강화했을 것이다.  

 

권두현의 글도 그러했지만 이지행의 「팬덤의 초국적 기억정치와 정동 : ‘BTS 원폭티셔츠’ 논란을 중심으로」 역시 이 잠재성을 과거-현재-미래의 역동적 접속 관계 속에서 사유하고 있고, 사건이나 혁명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글은 ‘디지털 뉴미디어 사회’와 새로운 공론장의 상황이 “기존 매스미디어가 주도한 ‘재현공론장’”에서 소외된 소수자, 취향 공동체 등을 “정치적 담론 주체”로 출현시켰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케이팝 팬덤, 그 중에서도 수년전 불거진 역사수정주의 논란에 대한 대항적 실천 사례(‘BTS 원폭티셔츠’ 논란)를 다룬다. 논란 당시의 미디어 속 타임라인을 꼼꼼히 좇아가면서 “팬덤이라는 대중문화 수용자 집단이 갖는 온라인 담론 행위자로서의 성격”을 고찰하고 “팬덤 특유의 배타성을 넘어 팬덤의 집합적 행위성을 사용해 초국적 기억정치에 대항하는 실천을 하게 된 배경”으로 “공동체 내부의 정동적 작동”에 주목하고 있다. 오늘날 온오프를 막론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산일성(散逸性)이 증폭하거나, 기존의 가치 전선(戰線)이 잘 작동하지 않고 재편되는 장면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직관을 제공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 미디어의 발전은 분명 기존 재현 미디어에서 배제된 이들 혹은 소수자 정치의 가능성의 장이다. 하지만 동시에 필자는 이것이 대중동원의 기술과 연동되는 측면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이 글에서 포착된 새로운 역사수정주의의 움직임이었고, 그것과 팽팽하게 긴장하고 경합한 힘으로서 팬덤의 대항적 실천력이다. 이 팽팽한 힘 관계가 생동감있게 전개되는 와중에 확인하게 되는 것은, 과거 민족주의나 기억의 정치가 지금 온라인에서 다시 재래한 듯 보이는 양상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재래’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모순성을 가시화”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담론의 재생산이나 발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분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지 디지털 뉴미디어의 현상이 아니라 올드-뉴 미디어의 공진(共振)관계 및 보이지 않게 늘 발밑에 놓여 있는 역사적 지층 등이 현행화된 질서를 만들고 움직이는 장면이다. 이는, 한일 과거사, 역사 전쟁, 기억 전쟁 등이 다양하게 분출하는 현재 세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큰 참고가 된다. 그리고 오늘날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현재의 상황들을 조성하고 맥락을 만들어가는지, 또한 지속성이 없는 듯 보이는 온라인 공론장의 장면들이 실은 어떤 보이는/보이지 않는 얽힘 속에서 차이나는 반복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지 환기시킨다. 이때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이것이 “어떤 조건”에서 특정 자아가 촉발-발현되고 활성화하는지 밝히는 작업이라는 대목이다. 즉 이 글은, 복잡성을 가시화하는 것 자체에 한하지 않는다. 또한 정동적 잠재성을 현재를 기준으로 직선으로 놓인 미래를 향해 기대하지 않는다. 어떤 현행화(actualization)의 계기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핌으로써 왜 지금 하필 ‘그것’이 되었는지를 궁극적으로 주목한다. 


즉, 기존의 재현, 표상 연구가 예컨대 좌표(격자)를 미리 설정하고 거기에서 어떤 포지션을 추출하고 분석하는 이미지였다면, 지금 이 글은 전제된 좌표 이전에 복잡성과 그 추이의 운동 자체를 주목하되 그것이 왜 예컨대 A나 B나 C 등이 아니라 하필이면 D일 수 있었을지 보여준다. 이것은 달리 말해 A나 B나 C나 D나 기타 등등일 수 있었을 어떤 잠재성이 D로 현행화되는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현재 시간성을 절대화하거나 그것에 순응하게 만드는 식의 인식 구조를 벗어나 상상하게 할 실마리를 강하게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지점이 바로 가령 과거 진보적 변혁, 비판 이론 등이 전제해온 것(‘바깥’을 상정하는)과 다른 방식의 사건성, 우발성, 혁명 등에 대한 상상의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2.3 최서영·최이숙, 「연결된 엄마들, 확장된 목소리, 새로운 정치주체의 탄생」


앞서 이지행의 글이 정동적 웅성거림 자체와 그 불안정한 경합 양상(그렇기에 기존 방식의 ‘운동’이라는 말로 프레이밍하기는 아직은 주저되는 실천)을 주목했다면 최서영·최이숙, 「연결된 엄마들, 확장된 목소리, 새로운 정치주체의 탄생」은 오늘날 정치적 행위의 한 방법 및 어떤 ‘주체’가 조직화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개인적으로, 과거 ‘운동’이라고 말해지던 정치 실천 방식이 변화하는 와중에 맘충, 맘까페 식의 낙인의 기호에 갇힌 유자녀, 기혼(경험) 여성의 다른 벡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앎이었다. 연대, 운동, 집합 행동 등이 늘 어떤 깃발이나 구호와 같은 단일 대오를 상정하던 것과 달라지는 양상에 대한 논의는 2000년대부터 이어져 왔다. 하지만 특히 뉴미디어를 매개로 한 페미니즘 리부트 및 촛불 등을 경유하며 그 양상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정동 개념을 매개로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 같다. 잠시, ‘촛불’을 한사코 ‘개인의 능동적 윤리’의 발현으로 의미화하고자 했던 어떤 필자들의 논의에서 어펙트 개념은 왜 기피·배제되거나 소극적 비판되었는지 등도 여기에서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들의 집합적 정체성 형성 및 주체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디지털 무대의 앞면과 뒷면(digital frontstage and backstage)을 구분하여, 그 뒷면(공개범위가 제한된, 혹은 비공식적 메시지가 주고받아지는 공간)을 이 글의 분석틀에 포함하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그 앞면/뒷면을 분명하게 구분한다는 것이 다소 임의적이고, 또한 그보다 더 조밀한 구획을 가정한 움직임 관찰(ex. 포스팅의 조밀한 공개 범위에 따른 정보 유통의 방법, 기능, 역할 등등 / 그러한 장치를 조밀하게 세팅시키는 각 플랫폼마다의 전략과 그 효과 등)이 필요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가시적으로 확인되며 쉽게 접근가능한 표현장(앞면)을 넘어 그 이면을 살피는 이 작업은, 자유로운 표현 미디어의 의미를 부여받는 뉴미디어, 온라인 환경이 여전히 표상=대표=재현의 원리와 연동되며 어떤 사건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정동 이론이 비·반재현 이론이라는 측면은 엄밀하게 말할 것이 많은 셈이다. 정동, 재현 관계는 배타적 선택지가 아니라 서로 연동시켜 사유해야 할 측면이 이 글에서도 두드러진다.


또한 이 글에서는 지엽적 언급이었지만, 집합적 정체성이나 주체를 사유할 때의 기본 단위를 다르게 생각할 계기를 주는 대목에서 멈추어 생각해보게 되었다. 존재마다 지니고 있는 부분적 정체성들이 일시적이나마 다양하게 배치되며 만들어내는 특이성의 순간에 관심이 있는 편이어서 그렇기는 할 것이다. 앞서 이지행의 글에는 “개인들이 특정한 조건에 놓였을 때 공중을 형성할 수 있으며, 이러한 조건이란 개인들의 다양한 자아 가운데 특정한 공적 자아가 활성화되고 연결된 상태”라는 관점이 놓여 있었다. 이런 관점은 최서영·최이숙의 글 속에서도 다시 환기되었다. 우선, 대상으로 놓인 ‘정치하는엄마들’ 회원 사이 나이, 직업, 결혼상태, 거주지 등에 대해 오픈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공유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이것은 오늘날 자주 존재의 단위를 다르게 상정하며 현상에 접근해야 할 단서의 하나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어떤 ‘통합된’ 인격의 소유자로서 자아, 주체 등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존재의 기본 단위로서 한 개인(individual)이 상정된다. 집합적 정체성, 집합적 주체 역시 그러한 개인을 기본 단위로 하는 총합의 형식으로 상상할 때가 많다. 식별되는 개성(개인), 주체 등의 의미는 ‘얼굴’의 상징으로 강조되어왔다. 2010년대 중반 익명의 마스크 시위 방식에 대한 항간의 박한 이해의 근간에도, 이런 통합된 인격을 소유한다고 가정되지 않는 존재의 웅성거림을 신뢰할 수 없어하는 심상이 놓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 속의 분석대상(정치하는엄마들)은 통합될 수 없는 여러 자아의 한 면(예컨대 dividual 같은 말로 표현가능할)이 발현되고 어떤 사건을 만들어가는 행위력의 의미심장한 사례 아닐까 한다. 이들의 장면은 마치 어떤 ‘사건’이나 ‘이슈’를 통과하며 ‘주체’가 생성되는 이미지에 가깝다. 또는 기존 범주 정체성(에 들러붙은 항간의 이미지)을 교란시키며 다른 배치를 만드는 양상을 떠오르게 한다. 통합된 인격의 소유자로서의 주체에 대한 관점을 일단 후퇴시키고 감히 말해본다면, 어쩌면 주체는 늘 어떤 사건 이후에 온다. 순간순간의 행위성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이 글에서 다시 확인된다. 그리고 앞서 이지행 글에서처럼 그런 주체(특이성)가 될 수 있던 순간의 ‘조건’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한편 앞서 적었듯, 어떤 낙인의 기표에 갇힌 오늘날 기혼(경험), 유자녀 여성의 표상을 적극적으로 해체하고 그러한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정체성, 주체화 과정을 가시화한 이 글의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앎이었다고 적었는데 조금 구체적으로 덧붙여본다. 이 글에서 언급되는(정치하는엄마들이 공유한) 미디어는 페이스북, 네이버 카페, 텔레그램 등인데, 이 글의 분석대상 시기와 같은 시기 또 다른 미디어(트위터)의 타임라인은 이른바 기혼여성vs.미혼여성 갈등 구도가 두드러지며 예컨대 ‘랫펨’과 고학력 중산층 기혼 유자녀 여성 간 상관관계도 조심스레 추측되던 정황도 있었다. 즉, 기술 미디어의 역할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기보다는 그와 연동될 구체적 ‘행위자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 글의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함에도 한편으로는 여러 정체성의 격자(젠더, 성, 자녀유무, 계급, 교육정도, 기술접근도 등)와 별개로 혹은 연동할, 미디어마다의 ‘장치’적 특징에 대한 궁금함도 조금은 남는데, 이것은 추후 논의를 기다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운동의 ‘조건’들을 주목한다는 것


지금까지 이 책 2부 작업을 읽으며, ‘운동’의 과정으로 재배치하는 관점과 방법을 주목해보았다. 이는 앞서 적었듯, 기존 재현(물)과 역사의 관계를 다루어 온 많은 인문학 주제들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접근할 방법을 풍부하게 시사한다. 특히 이 작업들은 기존 ‘주체’ 등이 언표화될 때 종종 전제했던, 행위력을 독점하는 주체(로 함축된 자율적, 능동적 인간)라는 최종심급을 질문케 한다. 물론 ‘주체’라는 말을 반드시 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양한 행위자성의 임의적 명칭일 수 있다는 점, 또는 행위력의 선험적 원천이 아닌 어떤 과정과 운동을 거치며 산출되는 ‘특이성’으로서의 ‘주체’라는 점을 충분히 암시했다. 이는, 젠더·어펙트 연구소의 작업이 계속 표방해왔듯, 이른바 보편으로 회수되지 않는 이론 및 이 세계의 현행적 역학들에 내내 주목해왔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잠재성, 그리고 그것의 시간에 대한 스펙트럼 자체를 방법화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하게 했다.


특히 2부의 글들은 공히, 정동의 잠재성 개념을 과거-현재-미래의 역동적 얽힘, 그리고 거기에서 현재에 포커싱하며 다른 미래의 ‘가능성’의 ‘방법’을 생각하게 했다. 이는 또한 기존 학술·연구 장뿐 아니라 한국에서의 어떤 시민·사회 운동, 공동체 운동의 장에서의 어펙트 이해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도 있었다. 어펙트 개념 및 문제의식이 한국에 소개되는 것이 세기말 세기초 이른바 생성·사건 철학(들뢰즈, 과타리, 네그리 등으로 상기될) 맥락에 있었다는 점은 앞서 적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와 관련될 어떤 시민·사회 운동, 공동체 운동의 장에서는 이러한 계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어펙트 문제의식의 출발은 그러한 계보에 닿아있었다. 그리고 젠더·어펙트 연구소의 작업들을 접하며 그러한 출발점을 상대화할 관점도 얻어왔다. 그래서일지 이번 서평의 준비 과정에서 그러한 경향과의 비교 맥락에 자연스레 몸이 놓여짐도 피할 수는 없었다. 즉, 젠더·어펙트 연구소의 작업들이 기존 학술·연구 장을 어떻게 갱신하고 있는지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다른 공동체 운동의 장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한편, 어펙트 문제의식의 상이함을 내내 생각했다고 해도, 이 상이함을 공히 가로지르는 무언가도 부정할 수는 없었는데, 예컨대 어펙트 개념과 문제의식에 대한 부상이 하필이면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는 명제가 자연화하기 시작한 세기말 세기초였음도 잠시 생각해본다. 그런 맥락과 관련될텐데 어펙트 이론이 이른바 ‘내재성’(용어는 다르게 쓸지라도)에 대한 문제의식에 놓여왔음도 생각해본다. 즉, 이것은 ‘그럼에도 바깥’을 상정하며 싸웠던 지난 세기 운동, 진보적 지식 담론의 방법과 다른 것을 말해왔다. 또한 새롭게 도래한 ‘바깥은 없다’는 명제에 순응하거나 투신하는 식의 이론도 아니었다. 지금 젠더·어펙트 연구소의 작업 또는 기타 어펙트 연구나 실천들이 각 위치에서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어펙트 문제의식은 ‘바깥 없음’(의 원리와 그 이후)을 ‘전유’하며 다른 벡터의 가능성을 공히, 다르게 상상케 한다.


특히 지금 읽은 글들의 문제의식은, 그것을 내 피부와 발밑의 ‘조건’들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함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어펙트 이론 실천이란 어쩌면 ‘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말하기 이전에,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지’ 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배운다. 이제 거기에서부터 다시 ‘다른 조건’과 현행화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결국 다시 나를 포함한 독자가 이어받은 과제이자 또 다른 생성들의 문턱일 것이다. 

 



이 글은 지난 2024년 6월 12일(수) 19-21시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된 젠더·어펙트 총서 04 『연결신체학을 향하여 - 정동적 존재론과 정의』 출간 기념 서평회에서 발표한 원고를 바탕으로 합니다. 


김미정

 

문학평론가, 연구자. 쓰고 옮긴 책으로 『움직이는 별자리들』, 『전후 동아시아 여성서사는 어떻게 만날까』(공저), 『정동의 힘』(역서) 외 여러 권이 있다. 각 시대의 이야기 양식은 곧 그 시대의 인식·정동 체계라는 점을 새삼 각별히 생각하며 동시대 서사를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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