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된 소수자의 몸을 추적하기: 지금, 여기의 정동 이론 (조선정)


『연결신체학을 향하여: 정동적 존재론과 정의』는 젠더·어펙트 총서를 가로지르는 핵심개념인 ‘연결성’에 대한 네 번째 탐구를 담고 있다. 연결성은 좁게는 개별적이고 단자적인 인간관에 대한 비판을, 넓게는 인문학 패러다임 전환의 전망을 집약한 개념으로 보인다. 이번 책은 영미권 정동 이론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고 대안적 정동 지식을 창출하는 교두보로서 ‘연결신체학’을 제시한다. 연결신체학은 주류 정동 이론의 교착과 한계를 돌파하기 위하여 지구적 공동연구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삶에 밀착한 정동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하려는 실천적 시도의 일환이다. 

이 서평은 책에 실린 열두 편의 논문 가운데 1부로 묶인 세 편의 논문에 집중한다. 논문이 다루는 텍스트를 찾아보고 저자의 주장을 세밀하게 검토하고 구체적인 토론 쟁점을 제시하는 것이 좋은 서평이라면, 이 글은 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논문이 배태된 맥락과 문제의식을 조명하고 소략한 요약과 논평을 공유하는 정도에 머물 것이다. 마지막에 덧붙일 종합적 질문은 세 편을 두루 읽으면서 촉발된 것인데, 세 편에 국한되지 않고 나머지 글들과 (그리고 나머지 서평들과도) 공명하고 또 더 넓은 학술장에서 이어질 후속 토론의 실마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 글이 젠더·어펙트 총서 기획에 ‘정동된’ 서평자의 소수자성의 궤적으로 읽힐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1부는 “트랜지셔널 아시아의 정동 지리: 트랜스퍼시픽에서 트랜스 아시아까지”라는 제목으로 한국, 일본, 대만을 대표하는 정동 연구를 아우른다. 전체 4부 가운데 두드러지게 동아시아 맥락에서 “정동 지리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트랜지셔널” “트랜스퍼시픽” “트랜스 아시아” 등 횡단의 상상력을 강조하는 일련의 개념들이 말끔하게 해설되지 않고 떠다니는 듯한 아쉬움이 없진 않으나, 세 편의 논문은 20세기 동아시아의 삶과 예술에 침투한 전쟁과 폭력의 역사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정동의 연결을 통해 새롭게 의미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히 훌륭하다. 각각의 논문은 특정 텍스트를 다루는 세밀한 분석력과 비평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횡단의 상상력을 구체화한다. 무엇보다 세 편 모두 역사성을 둘러싼 까다로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돌파한다는 점에서 이번 총서의 이론적 무게와 방향성을 담보한다. 

권명아가 쓴 1장 「젠더·어펙트 연구 방법론과 역사성: 역사적 파시즘 연구에서 원격통제 권력 비판까지」는 젠더·어펙트 연구의 진화와 현재성을 큰 틀에서 파악하려는 취지를 깔고 있다. 그렇다고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으로 거슬러 올라가 계보 그리기를 하거나  당장 활용 가능한 연구방법론을 떠먹여주는 종류의 글은 아니다. 오히려 정동적 전환 ‘이후’ 글로벌 어펙트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피면서 ‘지금 여기’에서 지속가능한 어펙트 연구의 잠재태를 탐색한다. 젠더·어펙트 연구란 ‘무엇인가’를 젠더·어펙트 연구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바꿔 물음으로써 연구대상과 연구방법론이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동시에 미리 주어지지 않음 그 자체가 바로 젠더·어펙트 연구의 뿌리인 소수자 연구의 동력이라는 점을 설득한다. 젠더·어펙트 프로젝트는 젠더 이론, 페미니즘, 정동 이론 등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소수자 연구와 교섭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저자는 글로벌 어펙트 연구의 현황을 업데이트하기에 요긴한 가이드로 알리 라라(Ali Lara)의 논문과 신 야오(Xine Yao)의 2021년 저서 Disaffected에 주목한다. 라라의 논문은 어펙트 연구가 초기부터 감당해야 했던 질문, 즉 이 연구에 체계적인 방법론이 있는가에 대한 몇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알리 라라에 따르면, “어펙트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비경험적인 것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가늠의 체계(system of speculation)를 제공하는 철학적 과정에 단단하게 기초를 두고 있다”(37). 여기에 필요한 방법론은 예컨대 “창조적 실험을 발명하기,” “체현된 필드워크,” “정동적 텍스츄얼리티를 수집하는 메타 전략”(34) 등이다. 어펙트 연구가 이렇게 비재현적(non-representational)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건 “분석적 기술(description)과는 반대로 기술과 가늠(speculation)의 중간쯤에 머무는”(36) 새로운 글쓰기 실험이다. 그렇다면, 어펙트 연구자는 연구대상을 “창조”하고 필드워크를 “체현”하고 어펙트의 궤적을 “추적”할 뿐만 아니라 “가늠”하는 글쓰기 솜씨까지 장착하고서 소수자 되기를 실천하는 예술가/철학자/비평가에 가깝다.  

이어서 소개하는 야오의 저서 Disaffected는 정동하고 정동되는 몸이 보편규범으로 포섭되고 거기서 튕겨나가는(脫정동) 몸은 배제되고 망각되는 정동 권력의 작동 방식을 본격 비판한다. 탈정동을 이론화하는 데 영감을 준 중요한 지적 자원으로는 데니스 페레이라 다 실바(Denise Ferreira da Silva)의 인종 이론, 그리고 마틴 마날란산(Martin F Manalansan IV)의 필리핀 여성가사노동자 연구가 꼽힌다. 이들의 연구가 증명하듯이, ‘적절하게’ 정동되지 않거나 ‘올바른’ 정동에서 비껴나 ‘부정적’ 정동에 노출되는 몸은 식민화와 인종화의 통치기제에 저항하는 불복종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듯, 탈정동은 주류 어펙트 연구가 감상주의 통치전략으로 동화되는 흐름에 대항하여 “정치적인 대안 정동 생성 과정”(52)을 떠받치는 논리가 된다.   


어펙트 연구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통치성을 강화하는 보편주의에 포섭될수록 그것을 비판하는 탈식민주의 대안이 긴요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비백인 유색인종 공동체를 상상했던 W.E.B. 두보이스에 대한 재해석 흐름을 관찰하는 한편 1941년 친일색 짙은 국책영화 <반도의 봄>을 일찍이 (협력 또는 저항의 이분법이 아닌) 두보이스의 피식민 주체의 ‘이중 영혼’과 연결하여 조선(지식)인의 분열적인 정동을 미묘하게 포착하는 영화로 해석한 영화학자 김소영의 안목에 공감한다. <반도의 봄>에 나타난 무의지와 무감각에 다시금 주목함으로써 저자는 보편규범이 되고 통치술이 된 어펙트를 탈정동으로 재이론화하여 소수자(성) 연구에 접속할 것을 요청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0MiZnCvb7s

 


나이토 치즈코가 쓴 2장 「아이누의 히로인과 전쟁의 정동」은 2014~2022에 걸친 오랜 연재기간 동안 텔레비전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가 나오고 2019년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노다 사토루의 만화 <골든 카무이>를 비판적으로 독해한다. 대중에게 소수민족 아이누의 문화와 역사가 알려진 계기를 마련한 이 작품은 국가주도의 문화관광 계획에 따라 아이누가 다양성 캠페인의 소재로 전유되는 와중에 온라인에서 아이누 부정론과 결합한 소수민족 혐오가 점점 강화되는 반동적 상황에서 돌출한 흥미로운 문화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러일전쟁 이후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일본인 귀환병사와 아이누 소녀가 함께 항일투쟁에 쓰일 금괴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아이누의 역사를 복원하고 강인하고 주체적인 아이누 여성상을 제시하는 ‘역사 다시 쓰기’ 기획의 일환으로 보인다. 일본인 병사와 아이누 소녀의 관계가 로맨스 플롯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아이누 소녀를 성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런 참신한 매력은 아이누 소녀가 ‘소녀로서’ 소비되는 엄연한 현실에 비껴가는 환상으로만 작동한다고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아이누 소녀가 성역할을 타파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 못지않게 그녀를 차지하려는 남성들의 분투도 중요하게 그려진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이누 출신 어머니보다 폴란드 출신 아버지와 더 끈끈하게 연결되는 것으로 나온다. 한마디로, 명랑소녀 투쟁기를 표방하는 것 같지만 실상 모험, 정복, 소유라는 제국주의 남성성 신화의 자장 안에서 약간의 변주 내지는 업데이트를 보여주고 끝난다.

“겉보기에는 질서나 가치의 서열이 뒤바뀐 것 같아도 원형에 있는 제국적 구조는 그대로인 채 이야기의 정형이 현재의 언어로 갱신된다”(78)는 저자의 지적은 실로 통렬하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여주인공이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풀고 또 토지 권리를 국가에 위임하는 ‘무난한’ 방식으로, 다시 말해 가부장제, 국가,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여주인공을 다시 한 번 폭력이 만연한 현실과 무관한 환상의 “사각지대”에 남겨둔다. “트라우마나 상처를 보지 않도록 권장되고 폭력이 불가시된, 현대적 내셔널리즘으로 통제되는 장소”(85)로서의 사각지대말이다. 표면적으로 아이누의 역사성을 복원하고 주체적 여성상을 내세우고 심층적으로는 남성-아버지-국가(주의)가 유착한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친다면, 애초에 여성을 (토큰으로) 내세운 것은 이 세계에서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치명적인 결론의 알리바이가 아닌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용어를 빌리자면 서사적 “봉쇄”라고 할 이런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구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대중의 열광과 작품의 가치를 쉽게 폄하하지 않으려 고심하는데 여기서 저자의 정동적 사유가 빛을 발한다. 비록 그 근거를 단호하게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저자는 봉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각지대를 배회하며 “떳떳하지 못한 감정”(86)에 끌려 다닌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 찝찝함을 물고 늘어지는 한 우리는 계속 연결되고 그럼으로써 정동도 갱신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3장 「타이완 가자희와 한극 여성국극 속 과도기적 신체와 정동적 주체」를 쓴 첸페이전은 타이완과 한국의 역사에서 공히 중요한 과도기인 1950-1960년대에 유행했던 여성 연극에 나타난 동성 친밀성과 젠더 횡단의 실험이 현재 LGBTQ 담론과 어떻게 조우하는지 분석한다. 타이완 전통 연극 가자희를 소재로 한 1990년 소설 「실성화미」, 정은영의 <여성국극 프로젝트>, 문화기획단 ‘영희야 놀자’가 제작한 2011년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 이 세 개의 텍스트가 과거의 여성 연극에 나타난 몸, 친밀성, 공동체를 기억하고 불러내고 아카이빙하는 방식을 비교한다. 여성 연극의 호황기를 이끌었던 동성 관계와 정동의 궤적을 우리가 우리시대의 인식론에 끼워 맞추지 않은 채 제대로 불러낼 수 있는가? 습관적으로, 단순하게, 비역사적으로, 어쩌면 거의 강제적으로 우리시대의 퀴어 문법에 꿰맞추어 읽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를 아카이빙할 때 우리의 정동은 어떻게 발생하고 조직되는가? 가자희와 여성국극을 다룬 텍스트를 비교분석하면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이는 미국 학계에서 헤더 러브, 잭 할버스탐, 리사 프리먼이 물었던 퀴어 시간성의 질문들과 일맥상통하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퀴어 리딩이 서구의 퀴어 지식을 답습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타당한 의심을 거치면서 한 번 더 굴절된다. 퀴어 리딩은 예컨대 에이드리언 리치가 이성애의 대항개념으로 제출한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연속체”에 빚지곤 하는데, 이런 개념은 단일하고 절대적인 기원으로 여겨지지 않아야 구체적인 역사적 적실성을 가질 수 있다. 퀴어 리딩의 모범답안처럼 쓰여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레즈비언으로 정의할 수 없는 역사적 존재들까지 다 레즈비언으로 호명하는 것은 퀴어 리딩 자체를 물화할 위험이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실성화미」와 <여성국극프로젝트>에 비판적이다. 가령 정은영은 “강력한 서구 이론과 문화, 운동에 의존한 나머지 작품에 나타난 ‘트렌스젠더’와 ‘동성친밀감’이 현대 사회의 젠더 인식론과 매우 가깝다고 판단”(131)했다는 것이다. 여성국극 구성원의 동성 친밀성을 퀴어 역사의 일부로 편입하고자 하는 수정주의적 시도는 “성적 주체를 재명명하려는 경향”(133), 젠더 이론과 퀴어 이론에 의존하는 경향과 맞물려 퀴어 정동 연구를 비역사적으로 만든다. 여성국극의 전성기에 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보다 젠더 횡단을 통한 신체성의 탐험이 훨씬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소구되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비역사적 퀴어 리딩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여성국극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저자는 <왕자가 된 소녀들>에 등장하는 결혼사진에 주목한다. 여성국극 단원들이 여성 팬의 요청으로 찍은 사진에서 저자는 리치가 말하는 ‘레즈비언 연속체’ 대신 로렌스 그로스버그가 말하는 “정동적 연대”를 읽어낸다. 그리고 “재구성되어야 할 것은 공연예술 자체도 아니고 퀴어 담론이 가세한 젠더횡단적 배역도 아니며, 사회의 변화와 함께 지워진 ‘삶의 방식’일 것이다”(143)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넓게 보아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는 동시에, 구체적으로 보면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 담론과 문화연구가 “비역사주의적 방법으로 젠더사와 퀴어사를 재구성하고 페미니즘 실천의 환상/상상을 비규범적 실천으로 만들고자 한다”(145)는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비판의 포석으로 기능한다.   

세 편의 논문을 관통하는 학문적 에토스가 있다면, 그것은 각 저자가 정동 연구자로서 연구대상과 연구방법론에 대한 깊은 고민을 품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다. 권명아는 어펙트 연구의 갱신을 위해서 “소수자 주권성에 대한 이론과 연구 방법을 역사 연구 방법론으로 재구성”(56)할 것을 주창하는데, 이는 연구자가 역사 속에서 소수자가 처한 모순과 딜레마에 접속하면서 정동적 주체 되기를 수행해야 한다는 말로 풀어쓸 수 있다. 나이토 치즈코는 트라우마를 기억하는 주체가 되는 일과 트라우마를 특권화하여 폭력을 반복하는 일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타당하게 지적하고, 후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그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수용자로서의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고 강조함으로써 연구자와 수용자 모두의 정동적 연루를 핵심 기율로 부각한다. 첸페이전 또한 퀴어 정동의 역사를 연구할 때 “끊임없이 질문하고 인식하고 식별하며, 지속적으로 시대와 불화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146)을 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각각 개성 강한 연구를 연결하고 접속시키는 또 하나의 고리가 있다면, 지금 여기의 동시대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한다. 권명아는 <반도의 봄>의 무감정과 한국사회 청년여성의 무감정을 탈정동의 맥락에서 연결한다. 나이토 치즈코는 <골든 카무이>가 제공하는 안전한 “사각지대”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정동의 잔여물을 응시한다. 첸페이전이 여성국극 시절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 (레즈비언을 호명하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지난 시대의 “공동생활감각”(143)을 포착한다. 이러한 동시대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태도를 거부하고, 탈자본, 탈성장, 탈정동, 탈인간의 흐름에 조응한다. 정동의 궤적을 추적하되 정동을 정의하거나 고정하지 말고 정동이 무엇을 하는지를 계속 심문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를 가시화하기 위함이 아닌가. 여기에 소수자 연구로서 젠더·어펙트 연구의 정치성이 있지 않을까.

기존 사회과학과 비평이론을 구축하는 데에 필수적이었던 경험, 해석, 재현, 언어, 서사, 정체성, 구조 등의 요소는 어펙트 연구에 그대로 재활용될 수 없다. ‘정동적 전환’은 경험, 해석, 재현, 언어, 서사, 정체성, 구조로 환원되는 이분법적이고 변증법적인 인식론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기존 체제에서 아직 경험되거나 물질화되지 않은 것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중요한 자산을 남겼다. 정동적 전환 ‘이후’는 정동의 물신화, 규범화, 보편화가 가속하면서 신자유주의 주체를 생산하는 통치전략과 결탁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애초에 정동적 전환이 일어날 때 그런 문제제기와 그런 호기심을 선취한 페미니즘을 위시한 소수자 연구의 계보와 밀접하게 교류했더라면 전환 이후의 궤적이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젠더·어펙트 연구”라는 다소 어색한 이름의 프로젝트가 출범한 것이기도 하려니와, 이번 총서는 그 전환 ‘이후’의 본격적인 대안 모색의 중간결산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대안 ‘이후’를 내다보면서 젠더·어펙트 연구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남기는 것으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소수자 정동으로 연대하고 결속하고 기억하라는 1부의 반복된 메아리는 과거에서 온 것이다. 식민지 조선영화인의 이중의식, 아이누의 항일투쟁기, 여성국극이라는 과거를 지금 여기에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들이 연구대상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으나, 어펙트 연구의 시간성이 과거에 대한 애착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어떤 비평적 특이점이 있지 않을까? 둘째, 정동적 전환을 포함한 ‘비평이론’(critical theory)의 장에서 경험, 해석, 재현, 언어, 서사, 정체성, 구조가 가진 중요성은 ‘포스트 비평’(postcritique)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문제적이다. 정동의 비 재현적 성격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실제로 정동 연구의 많은 부분이 재현된 결과물, 재현의 수준, 재현 기법, 재현의 윤리, 재현의 이데올로기 등을 맴돌며 이루어진다. 앞서 논한 세 편의 논문 또한 예외가 아니다. 정동 연구는 정말이지 얼마나 비 재현적일 수 있을까? 셋째, 정동 연구는 결국 정동 ‘주체’ 연구로 수렴되기 쉽다는 점은 세 편의 논문을 통해서도 거듭 확인된다. 정동 주체 연구는 이전 비평이론의 주체 담론과 어떻게 다른가? 차이가 주체를 개인이 아닌 전 개인적인(pre-individual) 차원에서, 또는 인구 차원에서 보는 데 있다면, 정동 연구와 생명정치의 교차는 거의 필연적이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구 모더니티를 재생산하는 보편적 정동에 대한 ‘대안 정동’이 아니라 정동에 대한 ‘대안’이 아닐까?

 

 



이 글은 지난 2024년 6월 12일(수) 19-21시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된 젠더·어펙트 총서 04 『연결신체학을 향하여 - 정동적 존재론과 정의』 출간 기념 서평회에서 발표한 원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정

 

영문학자.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Texas A&M 대학에서 영국소설과 여성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재직하면서 주로 19세기 영국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저서로 『제인 오스틴의 여성적 글쓰기: 《오만과 편견》 새롭게 읽기』, 역서로 『오만과 편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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