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쓰기(bodily:writing)의 정동(2회)_장옥진

2. 몸에도 번역이 필요하다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의 배우로 선 지 10년이 지나 그 무대를 기록된 영상으로 다시 보았을 때 재기억되고 재구성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당시에 아무리 말해도 내 안에서만 맴도는 말이란 것을 뱉고, 그럼에도 당신이 있기에 비명처럼 내지를 수 있는 말이란 것을 뱉었다. 대본에 쓰인 나의 말은 추후에 납득/변명/투쟁할 말, 나 이전에 독립된 말, 올바르게 틀려야 할 말, 당신/우리/세계의 말이었다. 무엇을 이해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투쟁하듯 대사를 뱉았을까. 극단 새벽의 연습실에서 어떤 몸을 표현하려고 밤새 연습했을까. 아기부터 노인의 몸, 몸의 시간성을 넘어 물고기의 몸을 상상하면서 내 몸에 입혔다. 땅을 딛고 서 있는 발부터 머리까지 몸을 새로이 감각하면서 발, 다리, 엉덩이, 가슴, 머리에 따로 감정을 부여했고 몸을 분절하기도 했다. ‘옥진이의 팔을 선욱이 쪽으로 뻗어 선욱이의 팔인 것처럼. 좀 더 나무같이. 나무이면서 동시에 그것 자체로 하나의 몸이고 사람이듯이.’ 소설을 각색해 대본을 쓴 아프콤 권명아, 총연출 극단 새벽 이성민, 연기 트레이너 극단 새벽 변현주, 배우 아프콤 선욱, 옥진. 서로를 향해 이상하고 낯선 주문을 했지만 그럼에도 모두 이해했다. ‘이해하지 못함’이 바탕이기에 무대 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몸을 쓰는 것은 이해하지 못함으로 다다르기 위해 당연한 듯 여겨졌다. 동시에 당시의 몸은 지금보다 전투적이고 필사적으로 ‘이해’를 외쳤다.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 연습 스케치

 

글을 쓰기 위해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을 본다. 시공간을 넘어 나의 투쟁을 본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몸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위로를 받는다. 이는 ‘무대’에 펼쳐진 문학과 예술이라는 표현장치엔 유통기한이 없으며 공동체를 향한 치유와 위로가 (언제나) 여전히 유효함을 의미한다. 대사 중 ‘꾸룩꾸룩(새의 비명 같은 소리)’도 의도가 있고, 검은 전신 타이즈 차림의 두 몸도 의도가 있다. 무대의 의도가 말과 몸의 형태로 전달되고 감정은 연결된다. 무대에서 행해지는 발화와 대화, 몸짓에는 책임이 따르며,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에서 두 배우의 몸이 모든 이들의 도플갱어이자 온갖 몸, 온갖 것들의 몸인 것처럼 나의 몸(관객)도 무대의 몸과 유관한 몸이 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한다. 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새로이 감각한다. 알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던 어떤 것, 사적으로 수치스러운 것, 처음에는 자신이 어떤 감정인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것들이 방아쇠처럼 무대를 보는 내내 당겨진다. 막이 내리고 어떤 형태로 정리된 과거를 마주하고 마침내 스스로를 이해할지, 그 이상의 성찰과 해결이 과제로 남을지는 개개의 몸들이 다르다.

 

아프콤에서 했던 몸:극 혹은 부대낌을 매개로, 몸을 수행하는 퍼포먼서로서 다양한 활동과 관심을 이어왔다. 예술이 대학에서 사라지는 그런 시대에 대학 밖에서 예술 공연을 찾아 보고 비평하는 몸(개념미디어 바싹・아프콤, <영크리틱스>, LIG 문화재단, 2014), 장애인, 성소수자, 폭력 피해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소설을 쓰고 각색하고 무대에 올리는 몸(소설창작연구회, 몸소설, 2012~2015), 부산성소수자인권모임(QIP) 활동 당시 기획했던 청소년 성소수자 관계 맺기 프로젝트 <퀴즈>(비온뒤무지개재단 지역활동응원기금 지원, 2016), <퀴어영화제>(부산문화재단 지원, 제3회 영화제, 2016) 등 기획자로서의 몸, 차별과 혐오의 거리에서 목소리를 내고 춤추는 몸(부산 서면 / 남포동 일대, 클럽), 몸이 가진 유연성과 힘을 표현하는 도구로 ‘몸’과 ‘폴(pole)’을 활용하면서 예술 작품을 짜고 무대에 올리는 몸(2017~). 이러한 몸:쓰기의 일환에서 관심을 두고 살펴본 작업들이 바로 <몸:쓰기의 정동>으로 모아진다는 걸 발견하였다. 또 그런 <몸:쓰기의 정동>이 단지 특정한 텍스트나 작품을 만드는 일만이 아니라, 예술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다. 앞으로 다룰 작품들을 <몸:쓰기의 정동>이라는 방법으로 살펴보려 한다.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 부대낌에서 몸을 수행하는 퍼포먼서.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스스로 동여맨 몸, 당신과 연결되기 위한 몸

극단 노뜰의 시어터필름 [Your Body]를 본다. 전쟁으로 고통받은 피해자(생존자)를 마주한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이상반응을 보이는 생존자의 몸을 보면서 차마 말하기조차 두려운 공포와 경험으로 인하여 파괴되어 버린 이들의 삶과 관계가 어떻게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생존자들이 서로 뒤얽혀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이들을 억압한 가해자를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피해자들이 서로에게 준 상처와 고통까지 상상하게 한다. 

 

(왼쪽) [Your Body] 학살 생존자2의 몸과 벽 /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 ‘벽 속의 벽’을 연상케 한다.  (오른쪽) [Your Body] 학살 생존자들의 몸이 시대를 넘어 만나고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

 

시대를 달리하는 생존자 모두가 벽과 벽 사이 무대에 있고 과거에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떠돌다 서로 안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는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고 용기 있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 피해자들을 증거한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전쟁 아래에서 경험해야 했던 참혹한 역사를 수용하는 동시에,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서로에게 건넨 사랑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허공을 휘젓고 갈 곳 잃은 두 손을 똑바로 바라보는 장면, 자신의 몸을 감각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가진 감정도 보이기 시작한다. 웃거나 울고 웃는 듯 울고 우는 듯 웃으며 춤을 춘다. 이런 반응은 서로에게 전염되어 감정을 부르고 감정으로 응답한다. 이는 단지 과거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서로 감정을 공유하고 함께 느끼는 경험을 통해 생존자의 몸 그 자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은 물론 타인을 끌어안으며 타인의 심장 박동 또한 느낄 수 있다. 이는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것이 더 이상 전쟁이 아닌 자기 자신이게 되면서 갖게 되는 감각이다. 그동안 경멸 받고 소유하지 못했던 자신의 몸을 사랑해야 한다고 서로를 ‘안은 몸’이 말한다. 전쟁으로 인하여 뒤틀리고 흉해진 자신의 몸을 그대로 사랑하는 것, 즉 몸에 대하여 생존자가 가지게 된 새로운 감각은 분명 치유의 한 모습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생존자 모두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서서 한 손을 들어 올리는 마지막 장면은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동시에, 여전히 과거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전쟁이 기억된 몸임을 증언한다.

 

[Your Body] 학살 생존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어 올리는 마지막 장면

생존자들의 증언은 더 이상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기억의 양상을 만들어낸다. 무대라는 공간에서 과거를 적절한 방식으로 기리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고통은 과거에 속하게 된다. 때문에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단지 과거에 잊힌 이들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과거의 인물이 온전히 과거에 남을 수 있도록 예식을 치러주는 것이다. 

 

무대는 '힘'으로 가득하다. 무대에 오른 말과 몸도 그러하다.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의 경계가 점점 없어진다. 과거의 ‘말’과 ‘몸’을 무대에 올리는 것, 역사 속 잃어버린 말과 몸이 무대에서 재현될 때 무대 밖의 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문학과 예술이라는 표현 장치가 공동체를 향하여 어떤 위로를 건네는지 감각하는 것, 무대의 몸과 유관한 몸이 되는 것에 동의하며 몸이 지닌 다양한 성격들을 번역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3. 언 상태의 몸들 : 트라우마, 몸, 공동체(말과 몸에 대한 트라우마)

 

(내레이션)

우리의 몸은 기억을 담고 있는 텍스트며, 그렇기 때문에 기억해내는 일은 환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억에 접근할 수 없는 한 마음도 기억을 바꾸지 못합니다.

 

(내레이션)

생존자들은 사건 후에 시각적인 기억에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 강렬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편한 신체 감각을 호소하면서도 어떤 감정도 나타내지 않고 당시에 사건을 모두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내레이션)

몸에는 비극적인 경험의 흔적이 남습니다. 트라우마 기억은 가슴을 찢고 속을 뒤틀리게 하는 감정과 내장 감각, 그리고 자가면역 문제와 골격계, 근육계, 건강 이상으로 암호화되어 남습니다. 트라우마 기억은 특정한 자극이 주어지면 갑자기 떠오릅니다. 트라우마가 재현된 말과 행동에는 아무런 기능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은 누구의 것입니까.

 

(내레이션)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또 다른 체험과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자아를 해체하고 존재에 구멍을 만드는 파괴적인 증상입니다. 이는 통제하기 어렵고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면서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내레이션)

당신의 몸은 누구의 것입니까. 

 

(생존자 n)

내 몸은 나의 것입니다. 

 

-2022 극단 노뜰의 씨어터필름 [Your Body] 내레이션

 

 

말과 몸에 새겨진 트라우마와 관련해서는 세 가지 개념, 트리거(triggers), 어찌할 바 모르는 신체 상태(freeze),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티핑 포인트에 영향을 주는 자원에 대한 이야기, 즉 내가 몸담고 있는 <젠더・어펙트 연구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트라우마에서 트리거(triggers)는 개인에게 발현되는 특징적인 무언가이다. 이는 스스로 알거나 모르는(모를 수 있는) 종류의 것으로 다른 인종, 문화, 성별 간에 어떤 악의적인 의도는 없지만 공격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작은 규모의(미미한) 말 혹은 행동으로부터의 상호작용까지를 포함한다. 트라우마는 독립적인 사건에서부터 만성적인 노출 및 폭력, 학대 또는 차별 경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트라우마 희생자는 우울, 불안, 무감각, 무기력 등과 어찌할 바 모르는 신체 상태(freeze)를 경험하는데, [Your Body] 내레이션에서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 후 신체 장애를 겪는 것, <배수아의 새벽의 극장>에서 “당신의 국적은 무엇입니까.” 외부의 반복적인 물음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언 상태’가 된 두 몸이 그 예이다.

 

이렇게 교감 신경이 극대화되고 통제 불능의 상태에 도달하는 정점을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 하는데,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모든 것이 갑자기 바뀔 수 있는 전염의 어느 극적인 순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사람마다 다르며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낮아질/높아질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 티핑 포인트에 영향을 주는 자원의 발굴은 중요하며 그중 하나는 인적 자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배수아의 새벽의 극장>, [Your Body]와 같은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아닐까 싶다. 역사와 과거를 공부하고, 문학과 예술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이거야!” 혹은 “이건 잘못됐어!” 등을 발견하고 가르치며 변화를 이끄는 사람들, 말과 몸에 대한 트라우마에 대해서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이라도 공감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공동체의 언어를 발굴하고 수년간의 연구를 토대로 ‘교육’적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 연구자인 동시에 무대를 의도적으로 꾸미는 제작자들에 대해서 말이다.

 

 

(계속)

 

 


 

이 글은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가 주최한 2023년 한일 국제 컨퍼런스 <현장의 정동, 실천의 자리-젠더적 사유와 체현적 리터러시>(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사노서원, 2023년 1월9일)에서 발표한 원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총 3회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장옥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대안 연구모임 <아프콤(aff-com)>에서 활동하였다.

현재 <젠더・어펙트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본업은 폴댄스 강사다.

글쓰기와 몸쓰기를 좋아하고 몸을 잘 쓰는 것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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