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복기 (김나영)

복기

 

 

 

 

 

   <비릿> 3호를 발간하기까지의 기억을 돌아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누군가 3호 주제 작가 후보로 이랑을 제안했을 때의 당혹스러운 마음이다. ‘이랑이 문학 작가야?’라는 의문이 즉각 머리를 스쳤다. 게다가 <비릿> 1, 2호의 주제 작가 오선영, 박정윤과 3호의 주제 작가 이랑 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연속성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문학 안에서 그동안 주목 받지 못한 작가를 선정하여 조명한다.’는 <비릿>의 기획에서 ‘한국문학’, ‘주목 받지 못한 작가’ 어디에도 이랑은 속하지 않는 것 같았다.

 

    뮤지션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이랑은 인디 음악 씬에서 이미 상당한 인지도와 팬을 보유했으며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만화 작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 중인 아티스트다. 때때로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그의 활동 범주는,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음악과 재치 있는 대사가 주를 이루는 그의 영상 작업들이 만들어낸 가벼운 인상과 합쳐져 예술을 너무 장난처럼 여긴다는 평가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이랑의 폭넓은 활동 범주에는 2019년 <오리 이름 정하기>라는 ‘이야기집’ 출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소설집도 아닌 ‘이야기집’이라는 낯선 명명의 작업을 ‘한국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 살펴보려는 <비릿>의 시도는 ‘한국문학’을 제멋대로 정의한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었다. 더욱이 아직 <비릿>이 조명해야 할 ‘한국문학 안에서 그동안 주목 받지 못한 작가’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문제의식의 시작은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릿>의 출발점이 된 ‘한국문학 안에서 그동안 주목 받지 못한 작가를 선정하여 조명한다.’는 기획이 지닌 가장 큰 난점은 생각보다 현실적인 차원에 있었다. 반년간 잡지를 발간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발굴해서 연구하고 그의 작품 세계에 조응하는 주제를 선정, 또 주제에 맞는 작가들에게 원고를 청탁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은 우리에게 역시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란 의미였으므로 알고 있는 이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이름들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마주친 것은 너무 많은 이름과 또 너무 적은 이름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런데 그들 중 등단을 통해 마침내 ‘공식적인’ 작가로 승인 받고 안정적으로 지면을 확보해 꾸준히 활동하는 경우는 너무 적었다. 이는 한 명의 작가가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이중의 거름망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공모와 심사, 탈락의 고배와 당선의 기쁨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등단 과정은 작가 지망생을 공식적인 작가로 승인해 주는 첫 번째 거름망이고, 후에 이어지는 문예지의 선택과 주목은 작가를 불안정한 임시직과 한 명의 어엿한 예술가로 또 한 번 걸러내는 두 번째 거름망이다.

 

    처음 <비릿>이 의식한 것은 후자, 즉 문단 내부의 거름망이었다. 사실 누군가는 ‘도살장’이라는 고약한 표현을 쓰기도 했던 예술에서의 인정과 사라짐의 과정 자체가 특별할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문학 특유의 시스템이라 할 수 있을 등단 제도로부터 구성되는 문단이라는 거름망은 왜 필요한 것일까. 등단하지 않은 사람들은 작가라고 부를 수 없는 걸까. 문단 밖의 이들이 생산하는 글들을 문학으로 정의할 순 없는 걸까. 주제 작가를 선정하기 위해 논의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너무 많은 이름들 앞에서 우리는 소수의 이름을 다시 추려내는 대신 더 많은 이름들로 나아가 보기로 했다.

 

    우리는 문단 문학만이 곧 한국문학은 아니라는 것까지는 동의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한국문학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한 것은 거꾸로 <비릿>의 처음 기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거창한 질문으로 곧장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질문하게 만드는 한 명의 작가를 조명해보는 것이다.

 

    이랑의 <오리 이름 정하기>가 문학의 외연을 건드리는 지점은 제도적 측면뿐만 아니라 형식적 차원에도 있었다. 가령, <오리 이름 정하기>의 표제작 <오리 이름 정하기>는 소설이라고도, 시나리오라고도 규정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또, 대개의 계간 문예지들이 요구하는 단편소설의 규격에서 벗어나는 애매한 길이의 작품들이 들쑥날쑥 배치되어 있는 것도 <오리 이름 정하기>가 가진 독특한 특성이었다. <오리 이름 정하기>를 소설집이 아니라 ‘이야기집’으로 명명한 것 역시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들이 기존의 소설 형식과 비교해 가진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문단 시스템이 단지 작가를 승인하고 지면을 분배하는 역할을 넘어 지면을 얻고 싶은 작가들에게 특정한 형태의 문학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일정한 수준’에 대한 검증 절차는 작가들로 하여금 특정한 형태의 문학만을 지향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한국문학을 경직시키는 보수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예술에 대한 보수적 시각의 일부는 ‘돈’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랑은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일명 ‘트로피 경매’로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 그는 예술가라는 이유로 자신의 작업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 받지 못한 경험들 때문에 예술 작업 또한 일종의 노동임을 알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랑은 스스로를 예술 노동자로 정의했다. 그렇게 작가 이랑을 조명하는 3호의 주제는 “예술이라는 놀이, 예술이라는 노동”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3호는 지역과 문단 바깥에서 탈-중심을 지향한 <비릿>의 출발점을 연장하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이전의 작업을 확장하는 시도가 되었다. 3호에서의 작업이 확장시킨 문제의식이 독립 문예지들을 한자리에 모아 조망해보는 4호로 이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문학’과 문단이라는 앞선 질문은 해답 대신 더 많은 질문들을 던져주었다.

 

    때마침 문학계 내 여성혐오 해시태그 운동, ‘이상 문학상’ 사태, 원고료 현실화 요구 등 기성 문학계 내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온라인상에서 이어진 일련의 흐름도 <비릿> 4호의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문단 시스템이 문단 문학만을 한국문학으로 협소하게 정의하도록 강제하고 일정한 규격에 맞는 문학만을 생산하도록 만드는 제도적 구태라면 그 권위를 강화하고 폐쇄적인 시스템이 유지되도록 하는 힘은 무엇인지,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4호 역시 3호에서와 마찬가지로 방대한 질문들에 직접 답을 내놓는 대신 문단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 작업들을 조망해보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렇게 4호는 “Independent Makers”라는 주제 아래 <공통점>, <모티프>, <던전>, <베개>, , <토이박스>라는 독립문예지 제작자들을 주제 작가로 선정했다. 이는 <비릿> 스스로를 포함하는, 자기반성적 측면의 작업이기도 했다.

 

    4호에서 독립 문예지 제작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독립 문예지의 출발 모두가 스스로를 주류를 향한 대척점에 위치시킨다거나 자신의 작품을 문학 생태계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작업으로 의식하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스스로가 문단 바깥에서 문학을 생산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곧장 대안의 자리에 세우지 않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개 그들 자신이 작가면서 자신들의 글을 실어낼 지면을 절실히 원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지면을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스스로 지면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발견한 건 쓰기를, 그리고 그것이 읽히기를 원하는 이들의 열망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 작품을 문학 혹은 더 넓은 범주에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과정은 얼마간 시장 논리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문학은 마치 하나의 물건이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인정받을 때 그러한 것처럼 “목숨을 건 도약”을 통해서만 한 편의 문학,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한 편의 글을 문학으로 만드는 독점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 역시 예술적 행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렇다면 독립 문예지를 통한 이들의 활동 역시 그 자체로 문학의 일종 아니겠냐고 반문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취급되는 때에 문학을 상품으로부터 구별해내는 것은 한 편의 글을 문학 작품이게 하는 것에 오직 경제 논리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루한 생각으로 치부했던 돈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기성의 이해에 어쩌면 예술에 대한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떤 고귀한 목적의 예술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토대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비릿>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비릿>은 창간 과정부터 휴간을 결정하기까지 매번 경제적 문제에 부딪혀야 했다. <비릿>은 잡지 제작비용의 대부분을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공적 자금이나 편집진의 사비에 기대어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비릿>뿐만 아니라 다른 독립 문예지들 대다수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었다.

 

    어쩌면 <비릿>이 처음의 기획을 충실하게 반복해나가는 방식으로 발간되었다면 네 번의 출간보다는 조금 더 지속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릿>이 다소 이르게 동력을 잃었던 것에는 사실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까다로운 질문들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내는 일에서 비롯된 부담과 피로에도 그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비릿>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배움이기도 했다. <비릿>을 통해 우리는 문학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기보다 좋은 질문을 제기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은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했지만)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창간호부터 휴간호가 된 4호까지 <비릿>의 서사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부분들은 <비릿>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뒤늦게 그때의 방향과 선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 것들도 있다. 물론 아무리 치열하게 고민해도 그 결과가 반드시 성공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개인적으로는 <비릿>의 다른 일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열의를 다하지 못했던 것도 못내 아쉽다. 하지만 여전히 독립 문예지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가는 이들이 있고, 또 <비릿> 이후에도 누군가는 재미있는 기획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휴간을 결정하게 된 4호에서 이런 작업들을 지속해오고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비릿>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이 역시 <비릿>의 시간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뒤늦게 든 생각이다.

 

 


김나영

2019 ~ 2020 <비릿> 에디터

2012 ~ 2020 <인디크리틱> 기고

2020 ~ 2021 부산독립영화협회 운영위원

부산에서 살며 영화 주변을 맴돌고 있다. 문학잡지 <비릿>에는 2호에 필진으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3호 객원 에디터를 거쳐 4호까지 편집진으로 활동했다.

 


   비릿 be:lit은 한국 문학과 사회에 고착화된 이상한 경계들을 허물고 싶습니다. 우리는 문학장 안에서 그간 주목 받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유의미한 작품 활동을 이어온 작가를 주제작가로 선정합니다. 나아가 그를 중심으로 다른 여러 작가가 공동 작업한 컴필레이션 앨범 형태의 문학잡지를 꿈꿉니다. 주제작가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시선과 문제의식은 개별적인 트랙으로 구성됨으로써 일련의 음악적 흐름을 이룹니다. 한 권의 잡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대화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독자 여러분을 향해 대화의 영토를 넓히고자 합니다.

 

 

비릿 편집부,『비릿 be:lit Vol.1-Vol.4』,물,2019-2020.



이어가는 말 : 젠더·어펙트 코멘터리

 

권두현 : 이른바 ‘뒷방’ 신세인 사전편집부의 일상을 다룬 일본 영화 <배를 엮다(舟を編む)>가 <행복한 사전>이라는 다른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 이 제목을 보고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만약 사라 아메드라면, 이 제목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사전이 약속하는 행복이 배를 엮어내는 듯한 노고를 감내하게 한다면, 이 과정은 사전에 온전히 기입될 수 있을까. <비릿>을 엮어내기 위한 노고가 그 뒤에 예정된 행복의 수단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비릿>이 매만지는 ‘글’은 ‘배’와는 달리,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표류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권영빈 : 쓰기와 읽기 행위는 누군가, 무언가에 대한 담론적/실제적 공간을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비릿>이 비판해온 것처럼 한국문학이 갖고 있는 오랜 폐쇄성과 “문단 내부의 거름망”은 문학을 둘러싼 주체들의 자리배치를 직접적으로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오늘에 이르게 했다. 그렇기에 <비릿>은 쓰기와 읽기 행위를 새롭게 직조하려는 중요한 비평 행위였다. 질문을 멈추지 않았기에 피로했고, 절실히 원했기에 부침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하지 않음’을 기조로 내건 것은 그 자체로 문학에 대한 어떤 기입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중요해 보인다.

 

신민희 : ‘복기’라는 행위는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침의 순간을 기록하는 일임을 느끼게 한다. 알고 있는 이름들을 지우면서 “마주친 것은 너무 많은 이름과 또 너무 적은 이름이었다.”는 문장은 그래서 내 위치에서 더 증폭되어 다가왔다. 알고 있는 이름을 지우다보면, 많은 이름을 만나게 되지만 많다는 것은 다시 너무 적은 이름이 되기 쉽다. 소수의 이름만을 추려 내야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추려 내는 작업이 이미 알려진 이름의 의미화 방식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글이 1호부터가 아니라 3호에서 시작되는 것은 이 글이 염두에 두고 있는 복기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성 : 문예지를 펼치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이름들이다. 어떤 문예지에서나 자주 등장하는 단골 이름들로 빼곡한 지면엔 저마다가 경작한 그 계절의 수확물을 들어올리며 짓는 뿌듯한 미소가 가득하다. 마치 한국 문학의 보람이 여기에 있다는 듯한 그 말끔함이, 건강함이 관공서의 홍보물과 유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 실소를 자아내곤 한다. 언젠가부터 모르는 사람의 이름들이 더 많은 문예지가 늘고 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지만 분명한 것 중 하나는 다른 이름들은 언제나 다른 질문들과 함께 온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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