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씩씩하고 튼튼하게 (곽연주)

씩씩하고 튼튼하게

 

 

 

 

    2020년 한해가 참 고단했다 이야기할 때에 나는, 내게 주어진 몇 가지의 행운을 떠올렸다. 다니던 학원을 그만둔 것이나(나는 학원 국어강사로 근무했다), 새로운 일을 찾아 적응을 시도하는 일을 비롯해 일상의 전반이 이전과 달리 변화했지만 무탈히 잘 살아있으므로 그건 행운이라 생각했다. <비릿>을 만드는 일 또한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성탄절 전에, 갓 인쇄된 <비릿> 4호를 받아들고 배송을 위한 포장을 하느라 <비릿>의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온라인을 통해 소통을 한지가 오래되었던 터라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들이 참 반가웠다. 코로나 시대의 애틋함이랄까. 아무튼 각 후원자들에게 배송과 관련해 약속해둔 일정이 있었기에 인쇄소에서 화물배송으로 잡지를 받아보자마자 <비릿>의 멤버들 전체가 포장 작업에 몰두해야만 했다.(4호 표지는 특히나 영롱했는데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을 만큼 숨 가쁜 배송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송 작업은 며칠 동안 이어졌으나 즐거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물론 마지막 날 배송업무를 모두 마치고 내가 저지른 편집 실수를 발견해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말이다.(편집진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잘 해결되었다ㅠㅠ)

 

    창간호 제작회의 대화방 이름은 ‘비릿은 성공한다’였다. 주문을 외는 것처럼 대화방에 그 이름을 붙이고 나니 정말 우리가 성공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성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어가 그보다 더 산뜻하고 희망찰 수는 없었을 것이다. 4호까지 잡지를 세상에 내보였으니 나름의 성공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비릿>의 창간호가 출간되기 전까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진짜 종이 잡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단언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잡지를 만드는 일련의 일들은 처음이라 낯설고 그래서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나는 처음 실물의 잡지를 만져보는 순간에도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는 느낌보다는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 이게 정말 우리가 만든 잡지가 맞나. 여기에 내 이름이 실려도 되는 게 맞나. 애초에 <비릿>은 창간호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불안 속에서 만들어졌으니, 4호에 이르기까지 (거의)기적적으로 매호가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 잠정적인 휴간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꽤 긴 시간을 버텨낸 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휴간의 근원적인 이유를 따져 묻자면 여러 가지 이유들을 나열해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4호의 경우에는 우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처음으로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야만 했는데 여러 가지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코로나19 탓으로 지원 사업이 예상했던 시기보다 훨씬 늦어지면서 잡지 발간 일정에 맞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웃기고도)슬프게 4호의 주제인 ‘Independent Makers’다운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때에 또 다른 지원사업이 운명처럼 눈에 띄었고 지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역예술가 지원사업이 있었는데 예술작업을 후원하는 목적에서 작업공간을 제공해주고, 기획 된 프로젝트를 운영할 수 있는 자금 또한 지원해주는 꽤 큰 사업이었다. 당시 우리는 제대로 된 작업실이 없어 늘 스터디 카페를 비롯해 대여 공간을 전전했었는데, 코로나19로 카페 이용에도 제한이 생기면서 우리만의 공간이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잡지 제작 명목의 지원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형태로 지원금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첫 지원에서 마감 직전에 신청 서류를 허겁지겁 메일로 보내게 됐는데, 파일 용량 때문인지 하필 메일 전송이 되질 않았다. 당장 접수 마감이 코앞인데 메일은 계속해서 오류 창을 띄우고 있어 나는 사색이 되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의 우는 목소리로, ‘정말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신청 메일을 보냈는데, 계속 전송 오류가 떠서요.’ 담당자는 덤덤하게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서류접수 조차 안 되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하는 생각에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까지 떨었다. 우여곡절 끝에 서류 접수를 마치고 며칠 후에 곧바로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해야만 했다. 그토록 간절하게 뭔가를 바랐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비릿>의 선정을 바랐지만 잘 안됐다. 그땐 발표 준비도 미흡했다, PPT 이미지가 부족했다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다음 기회라는 게 있다면 기필코 선정될 수 있다 자신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번째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지역예술가 지원사업이라 성격 또한 지역색을 띄어야 했었는데 프레젠테이션 심사위원 질의응답 중에 <비릿>의 스펠링 ‘b’가 혹시 부산의 ‘b’냐 물음에 (<비릿>의 ‘b’에는 부산의 ‘b’와 같은 의미는 없었지만 뭐 어떠랴싶어) 나는 네에, 부산의 ‘b’이기도 하다 대답했다. 날 것의 비릿한 것이 어쩌구하면서 말을 이어갔지만 여튼 잘 안 된 거다. 선정 결과를 확인하고 종일 발표하던 순간의 모습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프로젝트 선정만 되면 정말로 잘 할 수 있는데 그럴 자신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머릴 떠나질 않았다.(선정팀 발표가 있던 날 밤엔 꿈까지 꿀 지경이었는데 선정 명단에 <비릿>이 있어서 좋아했고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한동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했다)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결과를 어찌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자본의 문제는 잡지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면서 한계처럼 느껴졌다. 당장 돈이 없으면 잡지를 만들 수가 없으니까, 그것은 <비릿>의 휴간에 결정적인 이유처럼 보였다. 4호에서 독립문학매체들의 인터뷰를 다루면서 공교롭게도 이 자본의 문제가 <비릿>에게만 해당된 문제는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됐고 거기서 알 수 없는 위안을 얻었다. 물론 그 위안은 곧바로 해소 불가능한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때부터 무작정 로또 당첨을 상상한 것 같기도 하다.

 

    4호까지 잡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크게 보자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청탁이나 원고 교정교열과 같은 출판과정에서의 일들은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배움의 연속이었다. 처음 잡지라는 것을 만들 때엔 쉬운 일은 어디에도 없었지만(요령이 없어 고생을 한 건지도) 하나씩 배워나가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었고 그 안에서 느꼈던 분명한 형태의 성취감 또한 있었다. 주제 작가를 가운데에 두고 섬세하게 잡지 전반을 구성하고 직조하는 일, 그리고 기대한 것 이상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일. 하나씩 이야기 하자면 꽤 많은 형태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의도치 않게 들이닥쳤던 문제 상황들과 그걸 해결해나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 같다. 거의 매호 잡지 발간과 함께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던 것 같다. <비릿> 멤버들은 늘 자신 몫의 책임감을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면 잡지를 만들면서 배웠던 의미 있는 일들은 모두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해 내는, 삶을 밀고 나가는 방법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비릿>의 창간호부터 지금의 4호까지의 잡지 제작에 참여한 건 행운인 게 분명하다. 여하간 잡지 휴간의 표면엔 자본과 관련한 문제가 있다면 그 안엔 삶을 살아가는 것과 관련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정답이라는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만의 과제가 있는 것 같다.

 

    지난겨울에 반려 식물들 몇을 떠나보냈다. 냉해를 입은 이파리들은 물에 데친 시금치처럼 축 처져서 볕을 봐도 다시 살아날 기미가 없었다. 그렇게 음, 죽었구나 싶었는데 이상하게 가운데 푸릇한 고갱이에 계속 미련이 남아서 여기저기 식물과 관련해 알아보았더니 추위에 상한 잎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새 잎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관건이란다. 만약 새 이파리가 돋아난다면 그때 죽은 잎들을 정리해주는 게 좋다고. 아직 봄볕이 따스하지 않아서 새 잎이 나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우선을 기다려볼 심산이다. 부디 뿌리까지 추위가 스미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나는 <비릿>의 멤버들이 나이가 든 모습들이 상상이 되질 않는다. 막연하게 다들 앞으로 한 50년 정도는 더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물론 더 많이 오래 살고 싶을 수도 있지만) 그 시간 중에 다시 <비릿>의 다음 이야기를 만들게 될 날이 없을까. 정말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어디도 아프지 않고 썩지 않고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냈으면 좋겠다. 어째서 <비릿>으로부터 생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곽연주

2015 ~ 2021 국어 강사로 활동 중

2019 ~ 2020 <비릿> 에디터

문학잡지 <비릿>의 에디터로 창간호부터 휴간호까지 기획과 편집 작업에 참여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튼튼하고 씩씩하게 코로나 너머의 날들과 마주할 수 있을 지를 생각하는 중

 


비릿 be:lit은 한국 문학과 사회에 고착화된 이상한 경계들을 허물고 싶습니다. 우리는 문학장 안에서 그간 주목 받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유의미한 작품 활동을 이어온 작가를 주제작가로 선정합니다. 나아가 그를 중심으로 다른 여러 작가가 공동 작업한 컴필레이션 앨범 형태의 문학잡지를 꿈꿉니다. 주제작가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시선과 문제의식은 개별적인 트랙으로 구성됨으로써 일련의 음악적 흐름을 이룹니다. 한 권의 잡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대화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독자 여러분을 향해 대화의 영토를 넓히고자 합니다.

 

비릿 편집부,『비릿 be:lit Vol.1-Vol.4』,물,2019-2020.



이어가는 말 : 젠더·어펙트 코멘터리

 

권두현 : <비릿>을 설명하기 위해 ‘부산’을 이야기했다는 말에, 문득 바다의 비릿한 내음이 들숨을 통해 몸 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들숨이 날숨이 되어 퍼질 수 있다면, 그 호흡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 <비릿>이 마주한 휴간은 호흡이다. 호흡은 정신적, 육체적 안과 밖 사이를 가로지르는 에너지의 흐름을 되살리는 것이다. 호흡은 일견 개체적 활동인 것 같지만, 우리는 관계 속에서도 종종 호흡을 말한다. ‘휴’하며 내쉴 수 있는 <비릿>의 호흡이 한국문학이라는 폐쇄적 시스템 너머에서 ‘독립’하고 있는 다종한 주체들과 ‘연립’하기 위한 날숨이 되기를 소망한다.

 

권영빈 : 지나간 날을 우여곡절로 회상할 때는 현재의 ‘좋음’이 어느 정도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비릿>의 휴간은 무수한 애씀들을 흘려보내고 다다른 종착지가 아닌, 배움, 성취, 돌봄이 그러모아진 ‘사랑받음’의 감각을 확인시키는 경유지일 것이다. 언제나 ‘시작’과 ‘마지막’을 동시에 상기해왔던 <비릿>의 정신은 한편으로는 매 순간의 ‘버티기’의 정동 속에서 이어져온 것이지만, 그래서 한없이 씩씩하고 튼튼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비릿>의 정체성이다. <비릿>의 여정은 출간이라는 고정된 형태로 해석하기 어렵고, 그것이 <비릿>이 가진 큰 무기일 것이다.

 

 

신민희 :

“비릿의 스펠링 ‘b’가 혹시 부산의 ‘b’냐 물음에 (비릿의 ‘b’에는 부산의 ‘b’와 같은 의미는 없었지만 뭐 어떠랴싶어) 나는 네에, 부산의 ‘b’이기도 하다 대답했다.”

 

어떻게 살고 싶은 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마다, 새겨놓은 순간이 있다. 학교 화단에 ‘돼지감자’를 심은 적이 있다. 학교 화단은 누구의 공간인지, 무엇은 심을 수 있고 무엇은 심을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돼지감자를 심었다. 어느 날 태풍이 불어, 심어놓은 돼지감자의 줄기가 모두 꺾여 버렸다. 죽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있었다. 그런데 바닥을 향해 꺾어진 줄기는 고개를 다시 들어 자라고 있었다. 그때 느낀 것은 끈질긴 생명력이라거나,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뭐 어떠랴싶”은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그것이 내게 남아있다. 돼지감자는 결국 번식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베어진 것이 아니라, 뿌리가 뽑혀 지금은 화단에 없다. 하지만 가끔 화단을 두리번거리고 있고, 또 싹을 피우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김대성 : 등단을 한 뒤 만났던 지역 평론가들의 상당수는 늘 화가 나 있었다. 한국 문단의 불합리함과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평단에 대한 울분은 고군분투해온 이력과 비례하는 것 같았다. 지역에서 뜻을 품고 고군분투를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정동이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걸 알아차리는 경우는 드물다. 돌아보면 화내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냉소로 가득하다. 화내던 사람에게 문제제기를 하며 그들의 화를 돋우던 사람, 고립감을 감추기 위해 냉소로 자신을 보호하던 사람이 나라는 사람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지역에서 활동해왔던 지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극도로 꺼려왔는데 ‘씩씩하고 튼튼한’ 이들의 목소리 곁에 잠시 머물다보니 이 코멘터리가 너무 좁게 느껴진다. 그 좁음에 대해, 화와 냉소가 아닌 목소리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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