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위계 넘어, 마주하고 함께하기 위한 몸짓 (박준훈)

 

2023년 10월, AAS in Asia 2024(이하, AAS) 개최 소식을 확인하고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는 2개의 패널을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패널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발표자를 물색하면서 동시에 일정과 의사를 여쭙고,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들의 의제를 종합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패널 신청 기간이 길지 않았던 만큼, 여러 연구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의제를 종합해 패널 제안서를 제출할 필요가 있었다.

권명아 선생님은 연구소의 김대성 선생님과 해외 연구자인 송창주, 양인실, 요시다 유타카 선생님과 함께  Affective Geography, Racialized History and Queer Asia 패널을 구성하여 발표를 신청하셨다. 이 패널에서는 권명아 선생님의 Becoming the Tiger of Aisendoni (Indonesia): The Affective Geographies and Cross-Racial Assemblages of “Asia” in Post-Colonial Korea를 비롯해 송창주 선생님께서 Internationalist Goodwill amidst the Shroud of Racialized History: Life Stories of Japanese Wives in Post-Colonial Korea를, 양인실 선생님께서 “Silence” and "Voice" of First-Generation Zainichi Women in the Japanese Moving Image of the 1970s를, 요시다 유타카 선생님께서 The Korean War and the US Occupation of Okinawa in Caribbean Literature를, 김대성 선생님께서 Blinking Footsteps: The traces of the “Ephemeral” and the Archiving of Footsteps를 주제로 발표를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권두현 선생님이 조직한 The Post-Anthropological Asian Cartography: Technologies of Gender Politics and Affective Economy 패널에서 Genderqueer Literacy As an Alternative to Korean Literature and Science and Technology: A Study of Cyborgs in Korean Science Fiction Narratives of the 2010s를 주제로 발표하게 되었다. 패널을 조직한 권두현 선생님께서는 Dispassion and Disaffection: Asian Americans Beyond the Ivory Tower and Affective Technologies을, 발표와 토론을 맡은 김수현 선생님께서는 Seoul As an Affective Space of Abandonment: An Adoptee’s Journey in Return to Seoul을 주제로 발표를 진행하셨다.

짧은 시간 사이에 패널을 구성하기 위해 두 분 선생님은 거의 실시간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각 발표자들의 요지를 종합하여 패널 지원서를 작성하고, 번역을 맡기고 다시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두 분의 노고 덕분에, 올해 3월쯤 두 패널 모두 발표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 패널들의 발표 날짜가 확정되었고,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는 5명이 AAS가 개최되는 욕야카르타로 향했다. 학술대회가 열리는 7월 9일~11일에 맞추어, 8일에는 학술대회 개최지인 가자마다대학교Gadjah Mada University를 사전방문하고 12일과 13일에는 추가적인 자료 조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발표를 신청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학술대회 이후에 이르기까지 익힌 것들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사진 설명: 인도네시아 아카이브 센터를 찾기 위해 함께 이동하는 모습. 좌측에 이지행 선생님과 김대성 선생님이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길을 찾고 있다.

AAS 발표가 확정되었다는 메일을 받고 본격적으로 학술대회 발표 준비를 시작했다. 대학원의 외국인 유학생 선생님들께 부탁드려서 함께 언어 교환 스터디를 진행하고, 영어 읽기와 말하기, 듣기를 연습했다. 전문 번역자이신 맥스 선생님께 번역을 부탁드릴 때 원고와 함께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도 함께 부탁드렸다. 학술대회에 앞서 번역된 원고를 받고, PPT와 발표문을 읽으면서 진행하는 방식으로 발표 준비에 임했다.

영어로 발표하고 들을 준비에는 공을 들였지만, AAS가 개최되는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사전 조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데이터로 설명되는 자료들보다 내가 직접 보고 겪는 것을 통해 알아가겠다는 계획이었다. 숫자로 된 통계나 데이터보다는 몸으로 직접 부대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정작 욕야카르타에 도착하자 숙소 근처에서 식당을 찾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구글 지도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아서, 지도의 거리와 실제 거리가 달라서 길을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 길을 헤매는 과정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지도 앱만 있으면 길 잃을 걱정을 안 해도 되는 부산에서의 생활이야말로 통계와 데이터에 의존한 생활이었다는 게 체감됐다.

 

김대성 선생님 발표_Blinking Footsteps: The traces of the “Ephemeral” and the Archiving of Footsteps

이번 AAS에서 김대성 선생님은 부산의 오솔길들을 걷고, 줍고, 약도를 그리는 작업에 대해 발표를 진행하셨다. 학술대회 현장에서 발표를 들을 때보다, 사전 답사와 학술대회 이후의 자료 조사 기간에 길을 헤매고 곳곳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유사한 일들이 내 안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며칠 돌아다녔을 뿐이지만, 내 안에서 흐릿하게나마 숙소 근처와 가자마다대학교 캠퍼스 내부에 대한 약도가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화된 길들에 관한 약도는 부산에 대해 더 강렬하게 내 안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몸으로 직접 부대끼면서 알아가는 일은 욕야카르타에서 특별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부산에서 내가 일상적으로 이미 하고 있던 일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데이터로 포섭되지 않는 약도는 언제 어디서나 내 안에서 생성중인 것이었다.

 

미리 주변을 둘러본 덕분에 발표 당일에는 어렵지 않게 길을 찾고, 발표가 진행되는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막상 나의 발표가 시작되자 청중과 눈을 맞추고, 발표 화면을 넘기고, 강조할 부분에 힘을 주느라, 몇 번이나 읽던 부분을 놓쳤다. 다행히도 반복해서 연습한 덕분에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수월하게 발표를 마칠 수 있었다. 내 발표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다른 발표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권두현 선생님 발표_Dispassion and Disaffection: Asian Americans Beyond the Ivory Tower and Affective Technologies

내가 속한 패널에서 바로 이어진 발표는 권두현 선생님의 발표였다. 권두현 선생님은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더 체어〉에 재현된 대학 내부의 백인-남성 중심 위계와, 그 위계가 재생산되고 재정착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발표하였다. 학술대회를 준비하며 영어 발표를 연습하느라 고생한만큼, 학문장에서 백인들이 누리는 보편의 지위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통쾌하게 느껴졌다. 이어지는 AAS 기간동안 영어를 듣고,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하기를 반복하면서 권두현 선생님의 발표 내용을 계속 떠올리게 되었다.

모든 AAS 일정이 끝나고, 자료 조사를 위한 며칠 간의 일정이 남았다. 학술대회장을 떠나자, 도착한 직후에 겪었던 것처럼 인도네시아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AAS 기간 동안에는 영어로 소통하지 못해서 문제였다면, 학술대회장 바깥에서는 영어로 밖에 소통하지 못해서 문제였다. 번역기에 다시 의존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나는 권두현 선생님 발표에서 얻었던 통쾌함이 실은 내게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내가 영어를 열심히 준비해온 이유는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학계의 기본이며, 학계의 보편 언어로서 영어가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어에 대해 전혀 준비를 해오지 않은 이유는, 학계의 보편 언어가 아니니까 낯설어도 되는 언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영어-한국어-타언어로 형성된 위계가 전혀 없었다면, 과연 몸으로 직접 부대끼면서 겪어보고 싶다는 호기로 언어를 전혀 준비하지 않고 올 작정을 할 수 있었을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언어 사이의 위계는 부산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한국어문학과 대학원 수업들은 한국어가 주된 언어였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한국어를 보편 언어로 전제한 위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외국인 대학원생 선생님들이 경험한 대학원 한국어 수업들은 내가 경험한 영어 기반의 학술대회와 비슷했을 것이다. 나는 대학원 강의실에서 한국어 원어민인 내가 ‘보편’이라는 특권적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낯선 환경인 욕야카르타에서야 비로소 인정하고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으로 복귀를 앞두고 이런 생각들을 정리하며, 잠깐 쉬는 사이 인도네시아인 투숙객 분께서 내게 인도네시아어로 인사말을 건넸다. 나는 인도네시아어로는 가벼운 인사말조차 준비하지 않았고, 욕야카르타에 도착한 이후 권명아 선생님을 통해 겨우 인사말만 조금 배워 따라 하는 정도였다. 나는 휴대폰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번역기를 활용해 “인도네시아어를 할 줄 모릅니다. 다음에 올 때는 배워서 오고 싶습니다”는 말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심으로 다음에 올 때는 조금이라도 인도네시아어를 배워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 상황 자체는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이미 번역기를 통해 언어적인 의사 소통을 하고 있으면서, 언어를 배워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덧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쉬움은 번역기를 보며 언어적으로만 소통하는 대신, 상대와 직접 마주하며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아쉬움이기도 했다. 이런 몸짓이 전해졌는지, 번역된 내용을 본 사람들의 표정이 환해졌고 곧 우리는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권명아 선생님 발표_Becoming the Tiger of Aisendoni (Indonesia): The Affective Geographies and Cross-Racial Assemblages of “Asia” in Post-Colonial Korea

뒤늦게서야 권명아 선생님이 최인훈의 『태풍』에 관해 이번 AAS에서 발표한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권명아 선생님의 발표는 최인훈의 『태풍』에 나타난 인도네시아, 한국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인도네시아와 동남아를 상상하는 방식, 이에 연루된 한국의 내부 식민화와 인종화에 관한 것이었다. 발표 내용에는 한국에서 인도네시아를 상상해 온 방식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리 언어를 익히고, 한국에 소개된 자료들을 찾고, 한국에서 인도네시아를 상상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발표 준비일 뿐만 아니라, 타문화와 타인을 다른 위치에서 마주하기 위한 몸짓이기도 했다.

 

다른 도시, 언어, 사람과 마주하기 위한 다른 몸짓들은 영어 발표를 위해 부산에서 외국인 유학생 선생님들과 함께 진행한 다국어 스터디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스터디를 위해 모였던 날, 나는 한시간 가량 영어로 대화를 나누곤 “턱에 쥐 날 것 같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후에도 스터디를 진행할 때 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과장된 표정을 짓거나, 함께 대화를 나누기 위해 추천해 준 영화를 보고 가기도 했다. 이런 몸짓들은 스터디에서 나의 위치가 변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의식하진 못했지만 이 스터디는 언어를 배우는 것을 넘어, 각자가 속한 언어와 그에 따른 몸들의 위치를 다르게 조정하고 새롭게 마주하려는 몸짓들을 익히는 장이기도 했다.

.

사진 설명: ARISP jogja 관람을 마친 후 함께 촬영한 사진

이런 몸짓들은 낯선 상대와 마주할 때만이 아니라, 익숙하고 가까운 관계에서도 훨씬 많이 있었다. 내가 발표 준비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욕야카르타를 다녀오는 모든 기간에 걸쳐 이지행 선생님께서 교통, 숙박, 통신, 번역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일들에 발 벗고 나서 주신 덕분이었다. 함께 간 선생님들은 학술대회 전에 미리 주의를 기울여 볼 패널을 찾아서 정리한 자료를 공유해주셨고, 쉬는 시간마다 모여서 방금 들은 내용과 앞으로 들을 내용에 관해서 의견을 주고 받았다. 욕야카르타에 있는 동안 연구소의 선생님들은 매번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씩 일찍 모였고, 길을 찾기 위해 앞서 걷거나 교통편을 찾고, 편성된 예산과 현재 잔액을 다시 세어보곤 했다. 자신의 몸을 조금 더 쓰는 몸짓들 덕분에 서로를 돌보면서 조금씩이나마 부담과 책임을 나누고 덜어낼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나 또한 이런 몸짓들을 익히게 되었다. 사진 설명: ARSIP jogja 관람을 마친 후 함께 촬영한 사진

누군가와 마주하기 위해 발생하는 몸짓, 함께하는 사람들의 부담과 책임을 줄이고 나누기 위한 몸짓들은 언어보다도 더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언어처럼 정해진 규칙이 있지 않고 매 순간 우발적이면 다른 형태로 생성되기 때문에 언어보다 익히기 어려울 수 있다. 당연히 몸짓들은 데이터로 환원되거나 번역기를 통해 번역되지도 않는다. 대신 이런 몸짓들은 언어의 위계를 넘어서, 서로의 위치를 조정하고 상대와 관계를 맺는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박준훈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젠더·어펙트 연구소> 연구보조원.

한국 현대문학과 문화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소수자의 정동과 대안적 글쓰기, 리터러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