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 젠더·어펙트 스쿨 제2회 온라인 콜로키움] 수전 팔루디의 <다크룸>이 데려간 자리 (손희정)

 

2014년 ‘타임’은 미국사회에 “트랜스젠더 티핑 포인트가 도래했다”고 팡파레를 울렸다. 2013년 미국 대법원이 이성애 결혼만을 인정하는 ‘결혼보호법’에 위헌 판결을 내리고 동성결혼 합법화의 길이 열리자 “이제 트랜스젠더 이슈가 시민권 논의의 최첨단”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어서 2015년 7월 케이틀린 제너가 ‘배니티페어’ 표지를 장식했고, 버락 오바마 재선 캠프에선 트랜스젠더 인권을 캠페인의 주요 의제로 삼았다.

 

그래서 상황이 정말 나아졌을까. 2014년 미국에서는 성적지향이나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대한 혐오범죄가 1017건 보고되었고, 2015년에는 어느 해보다 더 많은 트랜스 여성이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었다.[각주:1] 수전 팔루디가 『다크룸』에서 미디어가 트랜스젠더를 다루는 방식을 비판하면서 “이런 팡파레가 복잡하고 평범한 인생들의 일상적인 질감을 전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쓴 이유다.

 

『다크룸』은 지금까지 미디어가 ‘피해자’ 아니면 ‘영웅’이라는 스테레오타입 안에 가둬두었던 트랜스젠더 삶의 “일상적인 질감”을 그리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일상적’이라는 말은 ‘평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사회에 익숙한 트랜스젠더 표상을 넘어서 트랜스젠더의 실존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책은 2004년 팔루디가 30년 가까이 연락을 끊고 살다시피 했던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변화들”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에서 팔루디의 아버지는 태국으로 가 성별 재지정 수술을 받았음을 알린다. 그렇게 ‘헝가리 유대인’ 이슈트반 프리드먼으로 태어나서 10대 후반에 ‘동화된 헝가리인’ 이슈트반 팔루디로 변신했고, 다시 20대에 ‘미국 남자’ 스티븐 팔루디가 되었던 아버지는 76세에 스테파니 팔루디가 되었다. 그 첫 이메일로부터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팔루디는 특유의 집요함을 발휘하며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2020년, 한국에서도 트랜스젠더 담론이 쏟아져 나왔다. 변희수 하사의 커밍아웃과 숙대 트랜스젠더 합격생을 둘러싼 혐오선동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긍정적/부정적’이라는 단편적이고 이분법적인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국사회는 과정 중에 있으며, 이 움직임을 통해 어디에 도달할 지는 여전히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크룸』은 적절한 시기에 한국 사회에 찾아온 책이다.

 

『다크룸』에 대한 여섯 편의 글을 읽으며 놀랐다. 각 글이 집중하고 있는 관심사가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접근하는 형식 역시 다양했다. 그건 책의 힘 덕분일 수도 있고 한국사회의 복잡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젠더어펙트 연구소 구성원들의 관심사가 다양하고 복합적이기 때문일 터다.

 

이미지의 책, 『다크룸』 - 안현의 리뷰

 

험프티 덤프티 담 위에 앉아있었네.
험프티 덤프티 크게 추락했네.
모든 왕의 말로도
그리고 모든 왕의 신하로도.
험프티 덤프티를 원래대로 되돌리지 못했다네.

 

안현의 글은 영국의 민요 ‘험프티 덤프티’로 시작한다. 이는 달걀에 대한 노래다. 그는 “온전한 타원형을 그리는 하나의 존재에서 부서져, 손 쓸 수 없는 존재의 파편으로 파열”된 험프티 덤프티의 “껍질에서 분리된 채 흘러내리는 반투명한-유동성의 점액질”의 형상을 상상하면서, 이를 “인간 정체성에 대한 서사”로 해석해낸다. 이 깨진 달걀의 이미지는 스테파니가 지속해온 정체성 탐구의 역사 속에 내재한 복잡성을 잘 포착한다. 안현은 이어서 ‘다크룸’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헝가리-덴마크-브라질-미국-헝가리로 옮겨 다니며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 방대한 책의 내용을 독자들이 따라갈 수 있는 ‘지도’를 그려준다. 글이 이미지에 기대는 방식이 흥미로웠고, 그 점이 이미지에 대한 책이기도 한 『다크룸』의 특성을 잘 포착해낸다.

 

문자를 다루는 것에 능했던 수전 팔루디는 이미지를 다루는 것에 능했던 스테파니 팔루디의 이야기를 쓰면서, 독자들이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공을 들인다. 덕분에 책은 이미지가 생상할 뿐만 아니라 영화적이다. 그 이미지들이 시간 속에서 흐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 이진선, 조혜윤의 리뷰

이진선의 글은 트랜스젠더 여성이 수행하는 ‘전형적인 여성성’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수전 팔루디가 페미니즘 제 2물결의 영향 아래 있었던 페미니스트로서 이 책에서 가장 비중 있게 탐구하는 주제 중 하나다.

 

이진선은 우선 한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여자 혹은 남자가 되는가를 질문한다. 징집처럼 국가가 남성으로 호명하기 전까지, 남자로 식별되어 남자로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반면 여자들은 끊임없이 남자와의 차이에 대해 질문하면서 스스로의 ‘여성정체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브와르가 남성은 보편으로 존재하되 여성은 ‘남자의 타자’가 된다고 설명한 것은 이에 대한 묘사다.

 

페미니즘이란 가부장제에서 만들어지는 여성의 타자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보편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탐구해 온 운동이다. 그런 이유에서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여성성 수행’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하나의 딜레마가 된다. 도대체 무엇이 여자를 여성으로 만드는가. 가슴? 소극적인 태도? 핑크색을 선호하는 취향? 혹은 전구도 갈아 끼우지 못하는 열등한 신체적 능력? 그 모든 남성에 대한 결핍과 타자성?!

 

이진선은 “스테파니가 꿈꾸던 여자는 ‘노오력’을 통해서 재탄생한 것”임을 포착한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여성’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여자’가 될 수 있었던 과정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의학담론 안에서 자신의 ‘비정상성’을 증명함으로써 ‘정상성’을 획득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젠더 수행” 그 자체 이전에 “이 사회가 정상성에 경계를 긋고, 그 경계를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조혜윤의 글은 ‘젠더 수행성’이라는 개념을 경유해 이 문제의식을 조금 더 밀고 나간다. 그는 스테파니의 삶 자체가 “정체성이 사람에게 내재된 어떤 자연적이고 단일적인 속성이라는 것을 반박”한다고 설명한다. “그녀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사회적인 맥락과 맞물려 있을 때, 그녀의 정체성 또한 유동적으로 변하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존재란 고정적인 being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doing, 즉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조혜윤은 『다크룸』이 스테파니의 여성성 수행을 넘어서 성전환 수술 후 “어떻게 다른 세계를 지어가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음에 주목했다. 스테파니의 삶은 성별 구분, 젠더, 혹은 인종과 같은 이분법적 틀에 기대어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강조한다.

 

“『다크룸』 출판이 한국에서 가지는 의미란 크다. 스테피라는 개인이 살아온 경험들의 복잡성과 모호성을 이야기함으로써 트랜스젠더를 향한 단편적이고 혐오적인 시선에 도전한다. (...) 트랜스젠더 학자인 샌디 스톤이 프랑켄슈타인처럼 기꺼이 괴물이 되겠다라고 말한 것처럼, 스테피의 수술 또한 ‘생물학이 운명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녀의 결정은 여성이라는 범주의 내용을 의심하게 하고, 본질적 정체성을 부인한다. 여성을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우리가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주제임엔 재론의 여지가 없다.

 

2020년 한국사회와 『다크룸』 - 김효빈, 김대한의 리뷰

스테파니의 삶이 우리에게 정체성에 대한 급진적인 이해를 가능하도록 도와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테파니의 행적 자체가 사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명쾌하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김대한은 스테파니의 선택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모순에 대해 질문한다. “흑백의 세상에서 트랜스젠더라는 제3의 길을 선택한 그녀가 가부장제를 깊이 체현하고 있는 동시에 극우정당의 지지자라니!”

 

그러나 트랜스젠더의 존재와 그에 대한 담론을 통해서 성별이분법 및 이성애 중심주의에 기대고 있는 가부장제의 외부를 상상하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것은 이론가와 활동가의 욕망이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욕망이 아니다. 사회의 진보를 위해 존재를 재단하는 것은, 기존 질서의 유지를 위해 존재를 지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트랜스젠더 개인이 필연적으로 ‘진보적’일 이유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스테파니는 제3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나-자신’이기 위해서 그 길을 탐색하고 추구해 왔을 뿐이다.)

 

이는 김효빈이 질문하고 있는 퀴어 정치학에 대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김효빈은 ‘정상성’에 대비되는 ‘비정상성’을 비하하는 말이었던 ‘퀴어(queer)’를 전복의 언어로 전유했던 퀴어 운동이 아이러니하게도 ‘비정상성’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조형하여 “퀴어로서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고민한다.

 

성소수자 운동 안에서도 ‘퀴어 운동’과 ‘LGBT 인권운동’을 구분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제도 안에서 자격과 자질을 증명함으로써 논-퀴어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움직이는 운동과, 정상성을 비틀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위험한 것’으로서 퀴어 운동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LGBT에게 ‘QUEER’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대상화이자 억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에서 김효빈의 문제의식은 다시 한 번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회의 통념-상식이 구성하고 정체화해온 성별 규범에서 어긋나는 존재를 오롯이 존중하는 사회는, 기존 사회에 있어서 낯선 것임에 틀림없다. 낯선 사회로의 이행은, 말하자면 창조된 낯선 신체를 접합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신체(공동체)를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미지의 접합 끝에 그 신체(공동체)의 정체성이 훼손-소실되리라는 공포.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미지의 접합을 경험하지 못해왔는가?”

 

김효빈의 말처럼, 한 공동체에는 이미 ‘미지의 것’들이 공존한다. 그들을 배제함으로써 공동체의 경계가 형성되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 공존의 윤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낯선 것’들을 ‘없는 것’ 취급하며 보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치열하게 대면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 김효빈은 우리의 경계를 “허물어 가자”고 요청함으로써 다시 한 번 퀴어 정치학의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김대한의 관심사는 『다크룸』이 다루고 있는 반동의 시대와 전지구적 우경화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그의 글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의 상징으로 수렴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적절하다. 『다크룸』은 확실히 그런 상징이자 표상으로서의 ‘아버지’의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았던 실존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해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아버지의 법’이라는 신화에 균열을 내는 작품이다.

 

김대한은 이어서 “모든 것이 이분법적 적대로 환원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 한국의 현실 정치 지형을 사유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하나의 프레임, 즉 “빨갱이 vs 토착 왜구”라는 프레임은 일부 정치인을 비롯하여 그들의 정치 팬덤과 그에 기생하는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비판한다. 이들이 “과거로부터 소급하는 싸구려 정체성들의 도매상”이라는 평가는 신랄하고 또 정확하다. 그의 지적처럼 우리에겐 “다른 누구의 이야기로도 환원되지 않는 다종다양의 이야기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되어가는 중 - 하늬의 리뷰

 

“<다크룸>이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즈음, 나는 정치적 갈등으로 아버지와 1년 반 정도 대화를 중단한 상태였고, 그 상태를 바꿔보기 위해 아버지에게 드리는 글을 묶어 책자로 출간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늬의 리뷰는 자신이 아버지와 맺고 있는 관계와 그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글을 쓰는 과정을 수전 팔루디의 『다크룸』과 겹쳐 놓는다. 팔루디가 이 작업을 통해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에 놓여있는 경계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하늬의 글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크룸』이 스테파니 팔루디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만큼이나 수전 팔루디의 자아탐구의 과정이었음을 포착해낸다.

 

“이 지점에서 나는 감히 수전 팔루디도 『다크룸』을 집필하면서 비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새롭게 결합하기를 반복했다고 믿는다.”

 

하늬의 한 문장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 책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내주었다. 나 역시 역자로서 『다크룸』 안에서 몇 번을 부서지고 다시 쌓았는지 모르겠다. 이제야 그 과정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붙들고 울고 웃고 했던 역자로서, 그 누구보다 『다크룸』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여섯 편의 글은 그것이 오만이었음을 가르쳐주었다. 필자들께 감사드린다.

 

 


손  희  정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 문화평론가.

페미니스트 크리틱. 논문 〈21세기 한국영화와 네이션〉으로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페미니즘 리부트》와 《성평등》을 썼고, 《을들의 당나귀 귀》와 《그런 남자는 없다》를 책임 편집했다. 함께 쓴 책으로는 《대한민국 넷페미史》,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럼에도 페미니즘》, 《소녀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등이 있다. 《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사춘기 소년》, 《호러 영화》, 그리고 《다크룸》을 번역했다.

 


 

  1. 미미 마리누치, <페미니즘을 퀴어링!>, 권유경·김은주 옮김, 봄알람, 2018, 1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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