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 젠더·어펙트 스쿨 제1회 온라인 콜로키움] 글을 잘 쓰는 ‘최고의 방법’, 발분(發憤) (정희진)

절실함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우선 이 책의 제목에 대해 ‘해명’하고 싶다. 오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강하고 튀는 이미지는 기본. 낚시성 제목 아니냐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나는 지난 15년간 한 출판사하고만 작업해왔다. 편집자 선생님이 엄격하셔서, 제목을 정하는데 대단히 신중하시다. 나로서는 책 출간 자체에 대한 자책감이 있는데다(“종이 낭비, 나무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까”), ‘책이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허위의식이 있어서, 노골적인 제목은 민망하다.

 

대부분 내 책의 제목은 내가 쓴 문장에서 그대로 가져온다. 책 내용 중에서 고른다. <나쁜 사람…> 이 제목은 앞뒤 문장을 빼고 제목 부분만 가져와서 그렇지, 뜻은 글자 그대로이다. 나는 정말, 단지, 오로지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라는, 약간 슬프고 힘없는 심정에서 나온 말이다. 정치적 주장, 미학적 욕망, 자기 성장...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양하다. 나는 비교적 단순하다. “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글을 쓰는데.”(66쪽)

 

내게도 문학청년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포부’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찬바람 부는 3월에 깨졌다. 최인호의 <바보들의 행진>에 가슴 두근거리던, 낭만적인 나의 10대는 순식간에 날아갔다. 20대는 내 인생에서 편집하고픈 ‘흑역사’이고, 서른 살에 본격적으로 여성주의를 공부한 후 그 때부터는 글이 ‘저절로’ 써졌다.

 

특정한 가치관이 몸을 점령했다(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당시에는 그간의 인생이 하나의 렌즈로 정리되면서 ‘폭발했다’. 기억이 가능한 다섯 살 때부터 그간 내가 살아온 시간의 의미 배열 가능해졌다. 조안 스콧의 유명한 말대로, “경험은 정치적으로 선택된 기억”이다. 겪은 것이 경험이 아니다. 호미 바바는 이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기억(re-member)은 팔다리, 사지(四肢)가 재조합되는 고통스러운 경험, 새로 태어남이다”. 그러니 기억한다는 것은, 죽었다 살아나는 번신(翻身)의 과정. 몸의 변형되는 고통이다.

 

 

여성주의를 접하고 흥분과 감격의 시기. 남들이 보기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내가 쓴 글은 자유로웠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짧았고, 곧바로 ‘여성’과 나의 관계, 다른 사회적 모순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국이라는 현장(local)에서 완전히 다시 쓰는 여성주의였다. 최근에 나는 최악이다.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 부패, 갈등, ‘싸가지 없는 사람들’과 매일 마주치는 것이다. 요즘 내 심정은 자유가 아니라 늘 자기 검열 상태로 심장에 피가 몰려, 몸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내 글은 글자 그대로 횡설수설(橫說竪說), 말이 횡단하지 못하고 가로로 세로로 충돌한다. 이런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인데, 글에 대한 코멘트 중 최고로 무서운 지적이다.

 

불특정 다수, 사회를 향한 발분(發憤)은 표현하기도 지지받기도 ‘쉽다’. 이른바 개탄조나 지당하신 말씀들이 그것이다. 글은 맥락(con/text)에서 출발하고 맥락에서 끝난다. 상황성(situated knowledge). 이것이 앎의 의미에 대한 요약이자 전부이다. 그러니 구체적인 문제제기, 특정 사회의 성역을 다루려는 글, 아주 복잡한 맥락을 알아야만 읽을 수 있는 글, 독자가 글쓴이와 세계관을 공유해야만 가능한 글쓰기는 작자와 독자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다. 특히 한국사회는 성역이 많아서 어떤 시절에는 북한, 미국에 대한 언급이 성역이었다가 최근에는 서울중심주의, 연구자 카르텔,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 사회운동에 대한 문제제기 등이 절대 금기의 영역이 되었다. 군 위안부 운동에 대한 문제제기가 “친일파의 책동”으로 몰리는 식이다.

 

최근 20여 년간 한국사회 전반에 신자유주의 문화가 완벽하게 침윤되면서, 각자도생의 ‘승리자’는 ‘관종, 정신승리, 뻔뻔 당당한’ 사람들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에 적응하지 못한/안한 이들의 우울증과 자살과 급증했다. 한 마디로, 누구나 일상에서 억울한 일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현상이 소송 사회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 역시 대안도, (돈이 없으면) 쉬운 일도 아니다. 항의도, 논쟁도, 투쟁도 불가능할 때가 있다. 누구나 분하고, 스트레스로 ‘암에 걸릴 것’ 같은 상황.

 

이 책 제목은 이러한 나의 급박한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다. 내게는 있되(?) ‘가해자’에게는 없는 것. 글쓰기 외에는 출구가 없었다.

 

억울한 사람 천지다. 억울함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전두환씨의 억울함이라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모든 억울함은 정당하다. 그 판단은 사회적 역량에 달려있다. 다만, 억울함을 표현하는 일은 자신과 타인에게 해(害)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율이 필요하다.

 

글쓰기를 권한다. 일단, 검열 없이 자신의 무의식을 헤집어내자. 이후에 다듬으면 된다. 독자가 글쓴이 한 사람이라면, 교열도 필요 없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말하기 치료(talking cure)다. 간단한 원리다. 말은 물질이다. 몸 안의 자신에게 해로운 물질을 꺼내는 작업이다. 간단한 원리지만, 단순하지 않은 과정이다. 나쁜 물질(dark emotions)이 나올 때, 생살도 같이 끌려나오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프다.

 

분노라는 인식으로부터

인류 역사의 고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과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모두 그들이 20대 중반에 쓴 책이다. 두 책 모두 기존 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시원(始原)으로 평가받는,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꾼 책이다.

 

파이어스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과 인류 문명에 대한 ‘대안’, 파농의 헤겔에 대한 재해석과 지배-피지배 관계에 대한 정신 분석을 읽으며, “어떻게 그 나이에…” 같은 상투어를 남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책들은 천재의 산물이라기보다 ‘혁명가의 분노’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분노는 감정이 아니라 인식이다. 이 두 권의 책은 언제 읽어도 무릎을 치게 한다. 물론 읽을수록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점점 늘어나지만, 저자에 대한 경이로움에는 변함이 없다.

 

파이어스톤은 10대 후반부터 여성운동에 헌신하다가 운동 과정에서의 갈등과 의문을 풀고자(그리고 책으로 운동에 기여하고자), 파농은 피부색과 인간 존재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 고민을 ‘일필휘지’로 썼다. 사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작품을 봐도 ‘요절’이 아닌 경우 작품 목록을 보면, 대부분 10대 후반이나 20대의 작품이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빼어나다.

 

작가는 자신의 태작(怠作)과 싸우는 사람들이다. 생애주의(life circle)는 가설이지만, 현실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젊은 날의 치열함과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는 작가는 드물다. 그런 이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의 몸(social body)은, 365일 24시간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다. 아니면, 평생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청소부, 권투 트레이너, 트럭운전사 등 온갖 직업을 전전했던 미국의 작가 F.X 톨처럼 예순이 넘어 <불타는 로프>(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원작)라는, 단 한 권을 남기고 사망하거나….

 

 

글을 잘 쓰는 방법에 왕도는 없지만, 인식론은 있다. 그것은 글쓴이의 세상, 자아, 타인 등 외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문제의식은 고민에서 나온다. 고통만한 글쓰기의 엔진은 없다. 나는 ‘발분저서(發憤著書)’가 글쓰기의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발분저서. 여기서 당파성, 실천문학, 세태 문학, 순수문학, 미학 등의 언설은 무의미해진다. 모두 설명된다.

 

발분저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과 힘을 다하여 지은 책,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자극되어 명작을 남긴다는 이야기인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대표작이자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거세형)’의 치욕, 분노, 존재의 말살 속에서 사마 천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 ‘삶’을 택했다. <사기>를 쓰기 위해 삶을 택할 만큼, 절실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글이 나온다. 그에게 글쓰기는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였다.

 

댓글과 “좋아요”의 범람과 이 문제로 시비가 서로 싸우는 이 시대. 스피노자의 예를 생각해보자. 1656년, 그는 다음과 같은 파문 선고를 받았다. “… 모두에게 경고하노니 어느 누구도 그와 대화하지 말고 편지를 주고받지 말며, 누구도 그에게 호의를 보여서는 안 되고, 같은 지붕 아래 머물지 말 것이며, 그에게 가까이 가서도 안 되며, 그가 받아 적게 하거나 그가 쓴 글을 읽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회적 매장 속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도 안 읽는 글, 누군가 못 읽게 하는 글을 쓴다는 것. 인생사에 이만한 고통과 외로움이 있겠는가. 한편, 이러한 고통을 극복한 글이라면 어떤 글이겠는가.

 

평생을 팔아먹을 수 있는 상처

그래서 글쓰기는 기술(art)이되 기술이 아니다. 사마 천처럼, 살아야 할 이유다. 스물 일곱에 사망한 가네코 미스즈(金子みすゞ, 1903-1930)의 시 중에, <참새와 어머니>를 보자.

 

어린애가 새끼 참새를 잡았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웃고 있었다.
참새의 어머니가 그걸 보고 있었다.
지붕에서 울음소리를 참으며 그걸 보고 있었다.

 

나는 위 시에서 참새의 어머니와 동일시한다. 너무나 아프다. 글쓰기는 이 고통의 상태가 지속되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2003)에는 명대사가 넘친다. 박해일의 “그 남자랑 자지 마요, 나도 잘 해요”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소설가를 꿈꿨지만 출판인으로 살아가는 문성근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란 말야, 평생을 팔아먹을 수 있는 상처가 있어야 해. 근데, 나는 너무 행복하거든. 그래서 포기했지”

 

여성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니 상처의 영어 자막이 “wound”였다. 이 단어는 자상(刺傷). 베인 곳이 깊어서 뭔가 고여 있다는 느낌이다. 그 공간이 치료되지 않은 채 평생을 사는 것이다. 문학이 아니더라도, 모든 글쓰기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되는 생각’이 계속 샘솟아야 한다. 인간에게 그런 생각은 원한, 분노, 억울함, 한(恨) 등 ‘범(汎) 상처 계열’ 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창작자는 연애와 실연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만한 고통이 없으니까.

 

한편, 나는 여성학 강의를 할 때 글쓰기를 권하는데 자기 객관화, 치유… 이런 차원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활동 중 글쓰기가 공정성의 최후 보루라는 생각에서다. 물론 완전한 평등은 없다. 그러나 첫째, 가장 비용이 적게 든다. 책, 노트북, 펜, 종이. 도서관에서 조달할 수 있다(운동이나 음악 장비를 생각해보라). 둘째, 비교적 나이와 상관없다(50살에 피겨 스케이팅은…). 셋째, 평가가 공정한 편이다(좋은 글은 합의된다). 넷째, 혼자 하는 것이어서 관계의 정치에 덜 신경 써도 된다. 다섯째, 나의 약점, 열등감, 소수자성이 모두 자원이 된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과 먹고 사는 일이 일치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드물다. 글쓰기로 생계를 삼으려면? 갑자기 그 많던 필자가 없어진다. 나는 필자 소개 부탁을 자주 받는데, 아주 지옥이다. 편집자, 당사자 다 불만. 결국 양쪽에서 나만 욕먹는다. 매체의 범람에 비해 막상 훈련된 혹은 전문 분야의 필자는 많지 않다. 또 그런 필자가 되려면, 최소 10년 이상 하루에 8시간 이상 독서와 습작이 필요하다. 최소다. 게다가 “타고 나야 한다”느니 어쩌니, 옵션이 붙는다.

조지프 앤턴은 이렇게 말했다. “책을 쓰는 일은 파우스트의 계약과는 정반대다. 일상생활은 아예 포기하거나 지리멸렬을 각오해야 한다” 조지프 앤턴? 살만 루시디다. <악마의 시>이후 13년간 전 지구적 수배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글을 썼다. 조지프 앤턴은 그가 좋아하는 조지프 콘래드와 안톤 체호프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수배자용 가명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다’. 우선, 그 ‘잘’이 무엇인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써야 할 이유가 있으면, 노력할 뿐이다. 그러니 부러워할 필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힘들다. 메일함으로 도망갔더니 친구의 편지가 와 있다. 이 친구는 대한민국에서 ‘명문가’로 꼽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며, 그의 책이라면 독자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구매하는 작가(쓰는 사람, writer)이다. 나 역시, 그의 문장에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그런 그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저번 글은 너무 힘들어 창문에서 뛰어 내릴 뻔 했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첫 번째 전제(‘조건’이 아니다)는 진부하지 않은 글이다. 개인의 삶은 독특성은 진부할 수 없다. 하지만 자기 삶을 진부하게 만드는(표현)하는 글쓰기는 있다.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다. 우선, 나를 발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목록을 만들어보자.

 

이번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리뷰 선정작은 안채은님이다. 문제의식, 문장 모두 좋다. 안채은님은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에도 응모했다. 두 권을 쓰는 일, 쉽지 않다. 모든 글쓰기의 시작은 성실함이다. 스펙, 금수저 담론이 널뛰지만, 금수저의 위력이 가장 덜 통하는 분야가 글쓰기다. 모두들 노~오력하지만, 수저색을 막론, 막상 성실한 이들은 찾기 힘든 시대다.

 


정  희  진

 

여성학 연구자이며, 융합 글쓰기 강사로 일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비롯, 십여 편의 저서와 편저가 있으며, 50여권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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