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젠더·어펙트 스쿨 제1회 리뷰 공모전 당선작] 진저리를 치며 총명해질 운명 (서한겸)

 

누구보다도 ‘나’를 알고 싶은 사람으로서 허겁지겁 책을 폈다. 64권의 책과 그 저자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읽었다’도 아니고 ‘썼다’도 아니다. ‘쓴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 ‘사람은 죽는다’처럼 늘, 언제나 그럴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계속 써야 하나요. 알게 되나요. 언젠가는…?

 

저자의 탐색과 시도가 나에게도 여러 방향을 보여 준다. 책은 사람마다, 같은 사람도 상황과 시기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읽기는 능동적인 쌍방 활동이다. 읽으면서 저마다 다르게 쓰는 것이다. 때로 힘들고 답답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알고 싶은가?

 

사실 얼마 되지 않는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에는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알기는커녕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에는 정신 차리지 않으면 더 불행하게 되거나 큰일 나게 된다. ‘나’를 가만 두지 않는 힘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n’자만 봐도 충격을 받는다. 정신이 종이 가장자리처럼 위태롭다. 소라. 강남역. 평범한 말들을 얼마나 더 끔찍한 기억으로 덮어야 하는가. 성폭력은 ‘가부장제 사회의 일상적 규범’이고 여성 혐오는 ‘인류 문명의 가장 강력하고 독자적인 문화적 기반’이다. 여자에게 주지 않고 착취까지 해낸 자원이 있어서 남성이 인간이 되고, 그들의 문명을 만들 수 있었던 걸까. 성폭력이나 여성 혐오는 ‘그래도 되니까’ 일어나는 일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 못’하고 ‘분위기 깨’는 사람이 된다.

 

여성임은 마음대로 주어져버리는 특성으로, 자기 기준대로 ‘여자 취급’을 하며 내가 여자라는 걸 신경 쓰도록 한다. 조카, 이웃, 행인, 노동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이고 싶지 않고 ‘여자’로 취급당하는 게 부적절한 상황에서조차. ‘그것도 한때’란다. 여자로(라도) 여겨 주는 걸 고마워해야 하는가. 지나면 뭘로 여길 생각인지? 남자는 ‘남자’로 여겨지는 것이 매력이나 권력이라서 그런지(어느 쪽이든 힘이다) 여자를 여자로 여기는 게 뭐가 잘못됐냐고 되묻는다. ‘그럼 네가 남자야?’ 상대가 이러면 그냥 일어나 집에 가고 싶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그나마의 인권이 침해될 때 화를 내는 여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여자’로 환원되는 게 싫은 사람들이다. 취향과 취미와 계획과 다양한 면면을 가진 사람을 단지 ‘여자’로만 대하는 과정이 대체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조차 예외는 아니다. 애정 어린 포옹 후. 살쪘냐? 살이 빠졌대도 희망은 없다. 밥 잘 안 챙겨 먹냐? ‘행복’한, 규범에 맞는 딸이 되길, 그리고 전 세대보다는 발전이 있는, 그러니까 나보다는 잘 사는 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랑’이다. 사랑할수록 더 고통이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물음은 내 경험과 사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을 때, 타인이 멋대로 나를 규정할 때 솟아난다.’ 이런 규정이나 질문은 다양하다. ‘너 페미야?’ 등등. 그렇다거나 아니라거나 뭐라고 대답해도 불리하거나 불편해지는 이런 질문을 곱씹어볼수록 권력이 어느 쪽에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은지, 자기 자신은 ‘뭐’라고 생각하고 나에 대해 묻는 것인지 조금 알고 싶어진다. ‘너(나) 뭐냐’고 묻는 것은 나(너)를 ‘무엇’으로 분류해 손쉽게 파악하려는 시도인데 한 인간을 간단히 ‘무엇’으로 이름 붙이고 그 ‘무엇’으로만 여기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부도덕하다. 어찌 됐든 그런 질문은 많다. 그런데 둔기 같은 이런 질문이 오히려 자신의 모든 면을 생각하고 돌아보게 한다. 약간 감사한 것 같다.

 

그나마 알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하지만 혼자서 생각하려 해도 언어를 통해야 한다. ‘현실은 말로 구성’되고, ‘강자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하지만 약자의 삶과 언어는 불일치한다.’ 언어 자체가 자신에게 불리한 사람은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믿으면 반박을 많이 당하고, 이게 거듭되면 ‘네가(내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가 체화된다. 오해겠지. 내가 잘못된 건가. ‘지배 언어에서 배제된 타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느낌과 감정을 인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저들의 말’은 자본, 권위, 미디어인 데다 논리적이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내 말’에는 이 모든 자원이 없다.’

 

권력자의 언어를 사용하는 측은 화도 나지 않는다. 소위 ‘이성적’이다. 싸워도 안 싸워도 자신은 손해 볼 것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비이성적, 감성적’인 상대를 상냥히 꾸짖으며 여유롭게 싸울 수 있다. 잃은 것도 잃을 것도 없다. ‘통념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지배적 언어는 이미 공유되어 있다. 소수자의 언어는 전제를 설명하거나 번역해야 한다.’ 자기 언어도 없는데 정서적으로도 좀 힘들고 (사회 경제적으로는 덜 힘든 것도 아니고) 자신에 대한 생각도 해야 하고 번역도 해야 한다. 다 초과 노동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 안 하면 나한테 안 맞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니 ‘페미니스트는 이중의 삶을 살게 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 반대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협상과 자기 검열의 긴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 대신, 이랄까, ‘페미니스트의 일상은 흥미진진하다. ‘저절로’ 총명’해져 버린다. 자신과 자신이 놓인 현실의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 절로 끊임없이 생각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절박한 희망이 있다. ‘이때 약자의 무기는 단 하나. 자신을 신뢰하고 기존 언어를 의심하는 것이다.’ 내 레퍼런스, 말이 통하는 사람,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 찾아 나서는 마음의 시작이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판단당하는 걱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관계는 극히 귀한 것이다. (거의 없다.) ‘힐링이 판치는’ 시대다. 모두가 이미 힘들어 있다. 그래서 뭐가 힘들다거나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면 나도 힘들다, 나눠줄 거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타인에게 기대 봤자 대개는 더 외로워진다.

 

다정하게도 책은 기다려 준다. 퍽 고맙다. 많은 말을 건네고, 내가 의문을 쏟아내고 메모를 적어 넣고 속으로 반박하고 밑줄을 그어도 묵묵히 받아 준다. 나를 판단하지도 않고 내가 털어놓은 비밀을 누설하거나 약점 삼는 일도 없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더 활발하게 하고 다양한 갈래를 보여준다. ‘읽기’가 ‘쓰기’가 되는 과정이다.

 

물론… 공짜는 없다. 이미 받은 상처도 있는데, 치유는 남이 해줄 수 없다. ‘자신에 대한 태도와 인식을 바꾸’고, 그러니까 스스로 해내야 한다. 이상하거나 상처를 주는 책, 괜히 읽었다 후회되는 책도 있지만 앞서 깨닫고 잘 이야기해주는 책, 괴롭지만 자극이 되는 책, 말이 통하는 책을 만나면 기쁘다. 외로움을 채워 주고 나의 자원, 나의 언어가 되어 준다. 내 언어도 내 기준도 아닌 외부의 힘으로 늘 침해받고 왜곡되는 나 자신을 방어하고 길러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흔들림과 외로움, 고뇌와 다짐,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느꼈다. 진저리에 대한 내용이 인상 깊다. ‘진저리는 몸이 해체되기 시작할 때 뼈와 근육 간의 연결이 이탈되기 전 단계의 몸이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진저리의 폭만큼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견딜 수 없어서 떤다. 떨어서 틈이 생기고. 무언가가 그 사이를 채우고. 나는 넓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진저리 쳐서 나는 계속 커지는데 나에게 주어진 공간은 그대로거나 더 좁아진다면…? 무섭다. 아무리 진저리를 쳐도 여전히 나의 말과 나 자신은 초라하게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저리 치지 않으면. 찾아 나서지 않으면. 쓰지 않으면. 가만히 있으면 뭐가 되나. 행복하고 편안해지나. 다른 수는 없다… 는 느낌이다. 진저리 치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주변의 힘들은 사방에서 나를 향해 올 것이다.

 

 


서  한  겸

젠더·어펙트 스쿨 제1회 리뷰 공모전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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