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 젠더·어펙트 스쿨 제1회 온라인 콜로키움] 나를 아는 고단함과 즐거움 (정희진)

좋은 글과 좋은 사람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쓴 글’과 ‘글쓴이의 인간성’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배우들이 종종 하는 언급, “좋은 배우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 역시, 비슷한 논쟁거리다. 김혜수 배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적절한 ‘답’이 아닌가 싶다. “배우(俳優)라는 단어를 보세요. ‘배’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잖아요.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어야 하는 존재가 배우에요. 그래서 배우가 어려운 직업인 것 같아요” 내가 이해한 그녀의 말의 의미는 ‘한 인간의 본질이란 없고, 배우는 여러 사람으로 변신해야 한다’이다.

글쓴이도 마찬가지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배우가 했던 이전에 역할과 다음 작품의 캐릭터가 다르듯이, 좋은 글과 좋은 사람은 ‘무관’하다. 이 말은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한데, 글이나 사람이나 ‘좋은’의 의미는 객관화할 수 없는 그 자체로 경합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인들과 좋은 글과 좋은 사람의 의미를 두고 자주 논쟁을 벌인다. 그래서, 니체의 “선한 자가 되기 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는 말이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도 좋은 사람과 좋은 글에 대한 평소 나의 고민에서 나왔다. 마르크스주의는 훌륭하지만, 성차별주의와 서구중심주의에 기반한 사유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좋은 평을 듣는 글들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내가 아는 ‘좋은 글’들은 잘 안 알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일관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아닐뿐더러 좋은 글은 독자가 만들기도 하고, 작가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텍스트도 컨텍스트도 변한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소결은 “글은 그 사람이다”가 아니라 “그 글은 그 때의 그 사람”이다.

 

모든 지식은 나(의 몸)를 통과하므로, 내가 읽은 글이나 쓴 글 모두, 내 몸이다. 나를 알아야 내가 쓴 글의 의미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재앙’인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이들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은 로마 병정을 향한 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니…” 내가 매우 좋아하는 명언 중 하나다.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기존의 가치관을 문제제기하는 언어를 만나게 되면,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책이 ‘나쁜 사람’들이 썼다는 거야?” 라는 식의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열아홉 살에 김남주를 읽으면서, 그전에 읽었던 ‘서정’ 시집을 모두 버린 적이 있다(지금은 매우 후회한다). 서른 살에는 “남자가 쓴 책은 안 읽을 거야”라고 다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고,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랜 역사 동안 지식 생산을 독점해 온 백인 남성들의 언어라고 해서 배척하는 것은 옳지도 않지만, 일단,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글은 여성과 노예의 노동에 기반한 정치경제학의 산물이지만, 인류의 지성사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주류든 비주류든, 억압자든 피억압자든 인간은 모두 종속적 주체이며,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존 언어 밖에서 사는 사람은 없다. 누가 가장 올바른가를 경쟁하는 PC(political correctness)의 정치는 독선이거나 타인을 공격하기 위한 경우일 때가 많다. 그 유명한 ‘하이브리디티(hybridity, 混種性)’만이 삼라만상의 원리다.

 

 

모든 글에는 주소가 있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식은 무엇일까, 라는 나의 평소 고민에서 나왔다. 쓰기는 글쓴이가 타인, 타자 등 자신의 외부에 대해 쓰는 행위지만(자서전도 마찬가지다), 결국 대상에 대한 나의 관점이므로 대상에 대해 쓰는 것은 곧 나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좋은 글은, 쓰는 도중 자신을 알고 변화시키는 과정의 결과(output)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그 많은 글쓴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누구인가. 누구였던가. 독서의 전제는 글이 쓰여진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유 없는 글은 없다. 당시의 시간과 공간(local)이라는 역사가 있다. 그래서 자기가 읽는 글의 주소를 아는 것은 지식 습득을 넘어 지식을 응용, 배치(mapping)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독서는 취미나 특기가 될 수 없다. 그냥 삶의 일부이다. ‘지식인’이나 학창 시절에만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생각하기 위해서, 창의적인 사람(re-creator)이 되기 위해서, 세상을 깊고 넓게 보기 위해서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글의 주소, 발신지를 알지 못하는 독서는 ‘잘못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로 전락하기 쉽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 중에 지성적이지 않은 이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 있다.

 

영어 ‘address’는 ‘주소, 번지수’의 의미와 더불어 “인사말, 강연, 연설하다. 이야기하다” 등의 뜻이 있는데,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발신지를 공부하는 것, 컨텍스트(con/text)를 고려한 읽기가 독서이다. 발신지에 관한 공부가 바로 인문학이고, 인문학이 언어의 역사인 이유다.

 

글쓰기의 첫 번째 조건은 성실함이다. 나는 논문이든 칼럼이든 서평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내가 쓴 글은 여러 번 윤문하고 다른 이들의 커멘트를 최대한(거의 전적으로) 반영하는 편이다. 그리고 최소한 사흘 후에 다시 보려고 노력한다. 초고 이후에 이러한 작업이 필수적인 이유는, 글쓴이는 자기 글을 객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사고가 완벽하게 표현되는 경우는 없으므로, 결국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글쓴이는 자기 글의 문제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는 건물 안에서 건물 전체를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자기 객관화의 어려움에서 모든 인생 사고가 발생한다. 인간 관계, 소통 문제, 자신에 대한 제반 판단력… 자기 객관화의 노력은 필수적이다. 자신과 사회를 성장시키고 상호 이해를 돕는다. 글쓰기가 치유와 관련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앎의 세계가 확대될수록, 더 많은 세상들과 접할수록, 더 나은 논쟁을 할수록 에고(ego)는 작아진다. 자아가 작아질수록 외부에 대한 수용력이 커지는 선순환이 지속되는 것이다.

 

특히 당대 신자유주의 시대는, 잘못된 사회 구조는 변화하지 않고 개인의 자아만 비대해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윤리적인 사회다. ‘정신승리’, ‘근자감’, ‘관종’ 만큼 위험한 현상은 없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을 넘어 사회악, 공동체를 파괴한다. 이것이 글쓰기가 갖는 중요한 정치학이다. 글을 쓰는 방식의 변화 즉 매체의 변화가 사회를 바꾸고 있다. 매체가 발달할수록 인간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온라인 글쓰기가 대세인 사회에서, 메시지의 균형은 파괴된다. 온라인 글쓰기가 종이 글쓰기보다 쌍방향적이고 나무를 아낀다는 통념만큼 잘 못 알려진 사실도 없다. 댓글이 쌍방향인가? 그렇다면, 악플이 왜 문제인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상호 작용은 온라인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컴퓨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이 가져오는 환경 파괴는 종이의 몇 배이며 썩지 않는다.

 

 

독후감에 책 내용을 요약해야 할까

 

나는 서평(비평, 독후감…)에 대해 기존의 입장과는 다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일단, 분량. 시중의 글쓰기 책들을 보면, 특히 학생이나 ‘글쓰기 입문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을 보면 독후감은 책의 내용 소개와 요약이 분량의 반 그리고 나머지 반은 자기 의견을 쓰라고 한다. 사실, 책 줄거리를 정확히 요약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분명한 자기 입장(‘당파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천착해온 페미니즘,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후기 구조주의(post-constructionism)는 “차이는 인정한다. 그러나 차이가 차별을 낳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차이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인지, 어떤 차이가 특정한 맥락에서 중요한 차이가 되는지를 분석한다.

 

기존의 전문가들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겠지만 초기 국어교육에서 독후감, 일기라는 형식이 중요하고, 비슷한 말이나 반대말 찾기를 가르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인지(認知)의 첫 단계는 대상에 대한 반응이다. 대응, 대립되는 것이 없다면, 의미는 성립하지 않는다. 독자적으로, 다른 의미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언어는 없다. 이성(理性)의 개념은 감정의 개념과 함께 탄생하였다. 동성애는 이성애의 정상성을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이혼이 있어야 결혼 제도의 정상성이 확보된다. 남성은 ‘비남성(非남성)’이라는 범주에 의해서만 가능한 개념이다. 비장애인(‘일반인’)은 장애인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고려한 단어이다.

 

서평이나 독후감, 일기는 모두 창조적 행위다. 비평 역시 예술이요, 창작이다. 때문에 독후감에서 중요한 것은 책에 접한 이후 글쓴이의 생각의 변화 과정을 쓰는 것이다. 변화가 없거나 적다면, 왜 나는 변화가 없었을까를 쓰면 된다. 나는 모든 글은 독후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책이든, 여행이든, 경험이든, 자료든 외부가 나의 일부가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 이물감, 부딪침, 포말(泡沫), 접촉감을 생각하는 것이다.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느낌(독후감)이 없을 순 없다. 이것이 텍스트에 대한 재해석, 즉 새로운 창작이다.

 

우리가 처음 접하는 책 소개는 대개 출판사에서 낸 보도 자료를 신문사에서 그대로 받아쓰는 경우이다. 출판사 입장에서 나쁘게 소개할 리가 없다. 평범한 소개는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 어렵다. “OOO의 여행기가 5년 만에 다시 선 보인다”, “OOO씨가 몇 번째 산문집이다”는 식이다. 나의 경우, 원치 않는 방식의 내 책 소개는 “그간 써 왔던 글을 묶어냈다”, “학위 논문이 출간되었다”인데, 이는 사실이면서도 사실이 아니다. 나는 한 번도 이런 책을 낸 적이 없다. 모든 책은 편집이라는 ‘다시 쓰기(리라이팅)’ 과정을 거쳐, 다른 책이 된다. 한국사회에는 편집과 편집자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고 오해가 많다. 편집자는 제 2의 저자이다. 영화처럼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책 내용도 달라진다. 일반 상영본과 다른, 감독 버전(director’s cut)이 따로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후감에서 책 소개를 전체 글 분량의 반이나 쓸 필요는 없다. 독후감을 읽는 독자로서 나는 독후감이 대상이 되는 책도 궁금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읽었는가가 더 궁금하다. 정확히 말하면, 후자가 해결되면 전자는 저절로 알게 된다. 앞서 말한대로, 책에 대한 요약도 중요한 독후감이다. 요약에도 관점이 들어가야 한다. 자신이 읽은 책이 비교적 많이 알려진 책이라면, 기존과는 다른 해석으로 소개하는 것이 좋고, 생소한 책이라면 쉽게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로 <노인과 바다>를 소개한다고 치자. 헤밍웨이의 생애나 노벨문학상 이야기, 소설의 줄거리 요약보다 “<모비딕>과 <노인과 바다>의 차이는 무엇일까”로 시작하는 것이다. 마리아 미즈나 줄리엣 미첼의 책을 소개한다면, 비유보다는 평이한 소개가 좋을 것이다. 마리아 미즈는 “마르크스주의와 젠더”로, 줄리엣 미첼은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의 ‘융합’으로서 페미니즘” 정도가 어떨까. 나는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en Explain Things To Me)>에 대한 독후감을 쓴 적이 있는데, 초반에 책 내용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남성의 멘스플레인이 불쾌하지 않다. 성별이 어떻든 간에 배울 것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남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칠 내용이 없다는 사실 아닐까?”

 

글 전체 분량의 10~20% 정도를 책 소개로 사용했다면, 나머지는 책을 읽은 자신의 생각을 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글이다. 독창적인, 어떤 입장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자기만의 재해석, 이것이 독후감이다. 논문도 마찬가지인데, 인터뷰든 문헌 자료든 필드워크이든 자신이 경험한 데이터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문은 있었던 사건 혹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편편하게 나열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논문이 논쟁적이지 않은 것이다. 다른 글도 그렇지만, 논쟁적이지 않다면 왜 논문(論文)인가, 새롭지 않다면, 왜 글을 쓰는가.

 

 

성실성이라는 진리

 

마지막으로 ‘독후감 잘 쓰기 팁’을 공유하고자 한다. 독후감 숙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학생에게 나는 이 방법을 권한다. 의외로 쉽고 간단하다. 텍스트를 여러 번 읽는 것이다. 충실히 두 번 만 정독해도, 고민이 뿜을 것이다. 모든 책을 여러 번 읽을 필요는 없지만, 독후감을 대상으로 한 책은 한번 이상 읽는 것이 좋다. 행간의 의미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어느 글이든 두 번 읽고 아무 느낌이 없는 사람은 없다. 독후감의 독자 역시, 독후감의 필자가 해당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금새 안다.

 

이처럼 글을 잘 쓰는 첫 단계는 노동이다. 자기만의 문체도 연습 속에서 형상화, 재창조를 거듭하게 된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부럽다”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타인의 지난한 노동을 자신의 욕망(envy)과 쉽게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편의 리뷰를 읽고, 평소 내가 경계하는 상투적 표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모두의 글이 너무 훌륭하고, 글을 잘 쓰는 ‘젊은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 중에서 한 편의 글을 선택해야 해야 한다니… 다섯 편의 글 모두 진정성, 성찰성, 표현력, 텍스트에 대한 이해, 문장의 흐름이 좋다. 선택을 위해 읽고 또 읽었지만, 분별할 수 없었다. 그 중에서 ‘소박함’이 눈에 띤 서한겸 님의 글을 뽑았지만, 다른 글들의 수월성(秀越性)도 거의 차이가 없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정  희  진

 

여성학 연구자이며, 융합 글쓰기 강사로 일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비롯, 십여 편의 저서와 편저가 있으며, 50여권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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