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 젠더·어펙트 스쿨 제2회 온라인 콜로키움] 다시는 _______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권김현영)

진화하고 갱신하는 페미니즘

 

“나는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표지를 보고 제목의 빈칸에 어느 순간을 채울지 고민해볼 것이다.”(지홍님) 많은 분들이 빈칸을 채워보았다고 했다. 각자의 페미니스트 각성의 순간부터, 견뎌낼 수 있는 임계치가 넘쳐버려 모든 것을 때려치운 순간까지, 그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좋아한다. 이 책의 독자들이 자신이 각성하고 움직인 순간, 말하고 행동한 것을 기록한 걸 읽을 때만큼 즐거운 순간은 없다. 박혜리님은 자신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적어주었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며 그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다가,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니라고 항변하다가, 남성이 규정하는/규정할 수 있는 여성은 없다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설명은 탁월했다. 이것이 바로 인식론적 전환이 아닌가. 페미니즘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려주는 서사. 이런 이야기들은 몇 번을 읽어도 좋다.

 

빈칸을 비롯하여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단호한 의지와 결의가 느껴진다는 분들이 가장 많았는데, 사실 이 문장은 나의 흑역사에 대한 고백에서 나온다. 글쓴이의 심정은 단호함이라기보다는 부끄러움에 더 가까웠다. 나 스스로의 편견을 고백하는 글을 가장 앞에 둔 이유는 출판사의 선택이기도 했고(“그 글이 좋아서”라는 담백한 판단), 페미니즘에 대해서 먼저 알았다고 해서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남을 함부로 재단할 권력이 주어진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린 모두 ‘빻았던’ 시절이 있다. 그리고 아마 10년 후에는 지금 보지 못한 것이 그때서야 보이겠지. 이십년 전에 아무 문제없이 들었던 노래와 드라마는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것처럼.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혐오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아찔한 깨달음은 페미니즘은 선언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늘 갱신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 책의 부제가 ‘진화하는 페미니즘’이 된 이유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해병대에 가입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라 한번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해서 영원히 페미니스트 자격을 획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자동으로 내릴 수 있게 되는 만능 치트키도 아니다. ‘페미니즘=빨간 약’이라는 표현은 직관적이고 강력하지만, 실제로 페미니스트로 살고 생각하고 발언하고 행동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약 한 알을 먹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

 

 

Nowhere to Turn

 

많은 이들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 인상적이었지만 사실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맞다.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넘어온 그곳이 ‘돌아갈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은 (내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곳(nowhere)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전으로 돌아갈 수도 돌아갈 곳도 없다는 생각은 기성세대의 멘탈리티다.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s generation)’는 이미 세계는 망했고, 돌아갈 곳 따위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아만다 멀(Amanda Mull)은 2020년 4월 13일, <애틀랜틱(Atlantic)>에 ‘Generation C Has Nowhere to Turn’ (돌아갈 곳이 없는 C세대)라는 글을 게재했다.[각주:1] 대학 강의실은 텅 비어 있고 인턴십도 시작되지 않았으며, 비행기를 타고 먼 곳의 학교에 진학하는 선택을 해도 될지를 고민하는 상황. 경기 침체 정도가 아니라 ‘빙하기(Ice Age)’가 왔다는 경고등을 스케치하며, 코로나가 일으킨 카타스트로피의 국면, 돌이킬 수 없는 재난 이후의 사회를 경험한 세대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바바라 에렌라이히(Barbara Ehrenreich)의 표현을 빌자면) ‘가부장제의 쇠퇴’ 시기에, 약속한 보상을 지급할 수 없는 파산상태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를 작동하게 하는 동력은 일종의 (사회심리적) ‘사기(다른 말로는 gender decoy)’였다. “없어진 것은 성차별이 아니라 성차별이 있다는 목소리였다”고 책에 쓴 바와 같이 성차별은 여전했지만 성차별이 있다는 목소리를 내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에 대해 지홍님은 교육현장에서 정확하게 그렇게 가르쳤다는 기억을 소환한다. “사회 교과서에서 호주제 폐지 등 당연히 바뀌었어야 하는 제도와 역사를 내세우며 이제 성차별은 완전히 해소되었다는 식으로 교육해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소한 부분들이 쌓여 성차별은 더 이상 한국에 없다는 인식을 만들었”다는 증언에 밑줄을 그었다.) 성차별이 마치 없어진 것처럼 취급되는 동안 여성에 대한 ‘폭력’은 창궐했고, ‘여성혐오’는 산업이 되었다.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과 혐오가 강간문화라는 이름으로 통용될 뿐만 아니라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가 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페미니즘은 ‘철지난 소리’로 오랫동안 묻혀있었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이 성차별주의를 반대하기 위해서 전주처럼 등장해야지만 겨우 발언권을 얻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를 거쳐 일종의 페미니스트 선언으로서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는 것은 다시는 내가 동의한 적이 없는 생각에 동조하거나 침묵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무기력해져있거나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 여자가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보노보님이 서평에서 언급한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인신공격에 계속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은 분들이 많았다.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에서도, 한겨레 이유진 기자의 인터뷰에서도 이 부분이 특별히 언급되었다. 페미니스트로 사는 건 대부분 괜찮았다. 즐거운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힘든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모두 상쇄되고도 남았다. 특히 외모 지적이나, 페미? 정신병이지. 뭐 이런 류의 이중혐오발화 같은 말들은 나에게 거의 타격을 입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평가에 영향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 이런 일을 지속적으로 당하다 보면 마음이 위축되거나 아니면 꼭 필요한 말도 귀에 안 들리는 고집불통 상태가 된다. 또한 더 상처입고 영향을 받은 건 소위 ‘내부’에서였다. 비주류 사회라고 해서 인간들이 선하거나 순하기만 할리 없고, 오히려 각자의 실현되지 못한 욕망들이 더 작은 상자에 갇혀 굴절되는 일이 왜 없으랴. 주변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너무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고, 나를 보호할 수 있고 스스로 통제권을 가진 세계에서 살고 싶었다.

 

최근에 읽은 마거릿 캐번디시(Margaret Cavendish)는 17세기, 400년 전에 활동한 철학자, 자연과학자, 시인, 소설가, 희곡 작가였다. 각종 논쟁에 뛰어들었고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누구보다 강했고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맹렬하게 글로 옮겼다. 최초의 여성 타이틀을 수십 개 가지고 있는 마거릿은 자신은 헨리 5세나 찰스 2세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마거릿 1세는 돼보도록 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나서는데 주저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인데도 스스로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숫기가 없었다”고 묘사한다. 마거릿 캐번디시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호감형으로 인정받는 능력은 없었지만 남다른 용기와 무엇보다 호기심이 있었다. 나도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말과 글은 늘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고 이것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반응이 늘 궁금하다. 무엇이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인지 무엇이 용기이고 무엇이 현명함인지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이 오랜 갈등이 첫 번째 단독 저서를 내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였다. 우연과 필연이 겹쳐서 책이 나오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이미 저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는 언니의 말이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 “남자 저자들이 자신이 저자여도 될까라는 이런 고민을 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 출판사와 계약한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저자라고…” 여성이 스스로의 자격을 매우 엄격하게 묻는 습관을 ‘가면증후군’이라고 하는데, 나 역시 내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충분히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종종 느끼곤 했다. 내가 나로 사는 일도, 여자가 나 자신으로 사는 일도 하나하나가 다 투쟁이다. 제도적 장벽과 오래된 심리적 습관을 하나씩 새롭게 벗고 입는 일을 반복해서 아주 조금씩 여자인 내가 나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Re-view, 타인의 눈으로 다시 보인 글

 

저자가 독자가 쓴 리뷰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은 애초에 온당하지 않지 않나. 자신의 책을 그렇게까지 객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랴. 다만 저자로서 독자의 리뷰를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비평문이라는 부담스러운 형식을 수락하고야 말았다. 지금은 기쁨과 슬픔을 고루 느끼면서 이 글을 쓰는 중이다.

 

페미니즘이 가장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인식의 전환을 안겨주는 순간은 재명명을 하는 순간인 것 같다. 박신영님은 본인 역시 저자로서 그런 재명명을 통한 정의구현을 하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 이 책에서도 그런 정명의 순간들을 짚어주셨던 것이 인상 깊었다. 또한 ‘여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5부 전체의 제목을 두 가지 의미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둘째, (무엇이든지) 여자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여자’는 계속해서 불안정한 범주로 만들어져왔고, 페미니즘에서 특히 ‘여자’는 남성중심사회의 타자로서의 지정된 사람을 통칭하는 명명으로 정의해왔고, 그 대문자 여성의 의미를 규정하는 규범에 맞서 소문자 여성들의 연대를 제시해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연대’란 동일성의 정치가 아니라 차이의 정치라는 점이다. 여성은 여성들이다. 이 여성‘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실존한다. ‘무엇이든’ 그 이상이 있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해야만 대문자 여성으로 타자화된 여성이 여성의 본질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이렇게 정리해주니 다시 한 번 생각을 더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 앞으로 다른 글을 더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리뷰였다.

 

승연님은 “그간의 투쟁이 세상의 지식을 ‘우리’의 지식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첫 걸음이었다면(…) (이제는)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지식을 세상의 것으로 바꿔가는 중”이라고 썼다. 어떤 순간에는 이렇게 단언하고 다짐해야 한다. 세상은 너무 크고 대단하고 움직이지 않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미약하다. 이 사실을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세계와 나와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을 통해서 뿐이다. 마음속에 그런 대결을 만들어두어야 싸우는 삶을, 틀에 맞지 않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런 태도를 배울 수 있게 한 문장이다.

 

보노보님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시민들이 각자 우리가 사는 단일한 생활 세계를 목격하고 주관적 삶으로 세계 한 구석을 메우며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불완전하고 미숙해도 서로가 조심하고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발전한다는(197쪽) 표현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만 저는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저를 그렇게 생각할 동료 남성 시민들이 얼마나 많은지 의문스럽습니다.” 남성동료시민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매우 관용적으로 수용하고 그 상태에서 변화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대다수가 여성이고 페미니스트인 시민들은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좀처럼 수용하기 어려워하고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는 실수하면 안 돼요. 엄마는 잘못할 수 없는 존재예요.”라고 도란스 북토크에서 말씀하신 독자가 있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말처럼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특정 상황에 주어진 것이고 부분적 지식이다. 하지만 여자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리고 짧고 시원한 말을 선호하는 마이크로 소셜 네트워크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언어 역시 ‘사이다’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페미니즘 언어에서 ‘사이다’적인 요소는 매우 일부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또한 스스로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여러모로 관심을 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갈 남성동료시민이 너무 적다고 해도, 그들과 발을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여전히 매우 많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부영님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이냐 못지않게 ‘어떻게’ 할 것인지도 논의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 저자에겐 “결과는 동일하다 해도 과정이 달라지면 공론장의 수준이 변한다(109쪽)”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꼬투리잡기식의 비난은 단호하게 거부하는 의지와 더불어, 대화를 환영하는 자세와 태도를 제안한다. ‘우리끼리’가 구획하는 폐쇄성의 한계는 분명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부영님의 리뷰는 이 책에서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앎과 앎에 대한 태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정확하게’ 짚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전에 한 신문사의 기자가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어떤 책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다. 기사로 나가지 않았던 대답은 이랬다. 나는 이 책을 페미니스트로서의 앎과 앎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눈으로 다시 보인 글을 읽으면서 제3자로서 리뷰 자체를 비평한다면 완전히 다른 기준으로 보겠지만, 저자로서는 이 책에서 ‘알아봐주길’ 기다린 부분을 찾게 된다. 부영님의 리뷰를 선정작으로 고른 이유다.

 

 


권  김  현  영

 

여성학 연구자이자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이다.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 폭력의 시대를 넘는 페미니즘의 응답>(2020, 휴머니스트)을 최근 출간했다.

 


 

  1. 김광기, 「트럼프 왕족과 C세대의 탄생...'아메리칸 나이트메어' 청년을 깨우다」, <프레시안>, 2020.6.13. 기사 안에서 관련 해당 기사 링크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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