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 젠더·어펙트 스쿨 제3회 온라인 콜로키움] 우리의 삶은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희정)

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글 쓰는 사람’이라는 말 대신 ‘기록노동자’라는 명칭을 쓴다. 싸우거나, 버티거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을 ‘노동’이라 본다. 동시에 ‘연대’라 생각한다. 그러니 나의 물음은 이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연대란 무엇인가?

 

그래서 이대희 씨의 서평에서 발견한 이 문장이 반가웠다.

 

“‘연대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언어로 설명하지 못했다.”

 

나 또한 그러하니. 연대에 대해 자주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정확히는 연대라는 행위를 끌어내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모르면서도 나에게 그 힘이 부족하다고 한탄하기도 애를 쓰기도 한다.

 

『여기, 우리, 함께』는 오랫동안 싸우는 이들과 그 옆에서 함께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쓰는 과정은 ‘연대란 무엇인가?’ 또는 ‘왜 함께하는가?’의 답을 찾아가는 행보는 아니었다.

 

왜 이토록 오래 싸우느냐는 질문이 자칫 싸움의 정당성을 입증해내라는 요구로 흐르는 것처럼, 왜 함께하냐는 질문은 연대자의 공과 품을 치하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연대가 싸우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시혜로 비칠 수 있다.

 

연대의 공간에 연민이 없고 시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선 자리가 다르고 그 자리의 높낮이가 달라 마음이 연민이 되고, 행위가 시혜가 되기도 한다. 연대도 일종의 노동이기에 그 안에서 노동의 위계도 드러난다. 연대에는 성별이 있고, 나이(주의)가 있고, 문화자본과 상징자본도 있다. 이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숨겨지지도 않는 사실이다. 그러나 드러낼 방도도 몰랐다. 그저 현실의 힘들 사이에서 연대자가 선택한 자리가 어디인지 살피고, 그 자리에 선 이들의 고민을 담고 싶었다.

 

왜 연대를 하냐고요?

 

싸우는 이들이 “왜 싸우는가”를 생각하기보다 “얼마나 더 잘 싸울 것인가”를 고심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연대자들도 “왜 함께 하는가”보다 당장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래서 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당혹해했다. “왜 연대하냐고요?” 그것은 싸움의 당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들이 왜 우리와 함께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해오던 연대에 ‘왜’를 들이밀었다. 연대의 이유를 물어 얻고자 한 것은 이들이 ‘여기’까지 온 여정만이 아니다. 지금 선 자리에서 들려줄 고민이었다.

 

그래서 밥차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밥 연대가 그저 ‘밥하는 일’로 취급받을 가능성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다 문득 나부터 밥을 짓고 누군가를 먹이는 노동을 하위에 두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만난 활동가는 쉼터 공간을 내내 쓸고 닦았다. 종일 이어지는 노동을 보며 이것이 그가 집에서 하는 ‘집안일’과 무엇이 다른지 의심했다. 그럼에도 그를 쫓으며 투쟁과 연대가 얼마나 많은 돌봄(노동)에 기대고 있는지를 인정해야 했다.

 

예술가들에게선 예술과 연대(운동)의 간극에 대해 들었다. 나는 자신의 예술을 현실을 바꾸는 ‘도구’로 쓰겠다는 음악가의 다짐에 동의하면서도, 자신에게 보내는 사람들의 존중이 “내 (연대) 활동의 가치이지 내 예술에 대한 가치는 아니라”던 미술가의 고민에 공감했다.

 

법률가들의 활동을 지켜보며 전태일과 조영래 변호사가 실제 만났다면 과연 벗이 될 수 있었을지 생각했다. 둘 사이의 차이와 위계를 무엇으로 극복할지 의심하면서도, 친구는 천천히 되어가는 것이라 말하며 답을 나중으로 미뤘다.

 

『여기, 우리, 함께』는 어떤 것 하나 명확히 답하지 않고 지나간다. 이것은 책의 한계이자, 저자인 내가 나를 위해 남겨둔 여지이기도 하다. 나 역시 연대자니까. 그리고 언제든 나를 지키는 싸움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고민은 계속된다.

 

싸우는 사람은, 그리고 연대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상상한다. 그들의 안온한 세계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고 있기에. 나는 책에서 싸우는 사람을 이렇게 상정했다. 무너진 자신의 세계에 서서 ‘우리 이대로 괜찮냐’고 묻는 사람.

 

연대자는 그 물음에 앞서 답하는 사람이라 했다. 하지만 책을 내고 몇 달이 지난 지금, 연대자 또한 자신의 안온한 세계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우리’란 무너진 세계를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를 세우기 위해 벽돌 한 장을 같이 드는 사이이다.

 

그래서 조은별 씨의 글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대로 괜찮은지. 자신의 세계에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우리의 삶은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질문을 던진다. … 그 질문을 곱씹어 본다. 당장 답을 할 순 없지만 평온한 일상이라 믿었던 것들에 균열이 생긴다. 균열 사이로 무엇이 밀려들어올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조심스럽게 그 질문을 다시 여기, 우리, 함께하고 있는 당신에게 건네 본다. 우리의 삶은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라고.” (조은별)

 

비극을 향한 질문이 아닌

 

“처음 이 책을 폈을 땐 알고 있던 이야기를 읽는다 생각했다. 모두 들어봤던 투쟁 현장이었으니까. 책을 덮고 난 지금은 그동안 누구의 시선을 통해 이 투쟁을 바라봤던 것일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조은별)

 

“왜 이리 오래 싸우는가?” 싸우는 노동자들은 이 질문을 받기 위해 곡기를 끊고, 하늘로 오르고, 거리에서 몇 해를 보낸다. 그러나 간신히 질문을 받는다고 해도 답을 들려줄 수 없다. 세상이 이들의 답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던졌던 내 질문들은 어쩌면 투쟁에 향한 것이 아니라 비극에 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은별)

 

‘비극을 향한 질문’은 기록노동을 수년째 해오고 있는 나에게도 너무나 관성적인 유혹이다. 그때마다 떠올리려 애쓰는 사실이 있다. 저들은 비참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그로부터 믿어온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무너지는 세계 앞에서 예전처럼 살기 위해 때론 예전처럼 살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의 시선과 생각을 담지 않는다면 싸우는 사람에게 기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들의 질문을 세상에 되돌리지 않는다면 세상에 기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여러 번 뉴스에 등장했던 투쟁 이야기도 있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이 그것들과 다른 이유는 이들에게 던져지는 물음들, 그러니까 비극을 향해 있는 물음들에 오히려 ‘우리의 삶이 이대로 괜찮은지’ 되묻기 때문이다.” (조은별)

 

하나의 그림 귀퉁이에 존재하는 우리

 

조은별 씨의 글을 비롯해 각각의 서평은 저자인 내가 애쓰고 경계한 것을 짚어주었다.

 

“(이 책은) 의심하고, 회의한다. 그들을 시혜적으로 내려다보지 않고, 평등한 존재로서 대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공감하려 노력하되, 하나가 되는 것을 경계하며 거리를 둔다.” (이대희)

 

“희정이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은 그들의 현장과 투쟁만이 아니다. 희정의 노동은 그들과 같은 곳에서, 우리가 되어 모이며,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기록하는 것이다.” (김효빈)

 

“우리가 좀 더 고민해봐야 할 지점들까지도 이어진다. 투쟁하는 우리들 간의 작은 명칭 하나에도 위계가 내재화되어있다는 지적, 투쟁하는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시선에 대한 비판, 일하면서도 집안의 돌봄 노동에 이중고를 겪었던 여성들이 해고되고 투쟁을 겪고 나서야 가족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까지…” (조은별)

 

그러나 집필 의도가 큰 어긋남 없이 독자에게 가닿았다는 사실보다 나를 더욱 안도하게 한 것이 있다. 서평을 쓴 이들이 ‘연대’의 의미를 자신의 일상에서 불러왔다는 점이다. 세상이 아무리 ‘싸우는 사람’을 특이하고 낯선 존재로 재현할지라도, (자신을 지키는) 싸움은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확신하게 된다. 필자들은 자신의 일상에 불쑥 들어온 갈등과 투쟁의 순간을 떠올리고, 그 싸움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을 돌이켜 연대하는 일을 고민했다.

 

임지홍 씨는 아르바이트를 할 당시 옆에서 지켜본 부당함을 떠올리며 복잡한 심정을 드러냈다(“내가 항의해본다고 해서 변하는 게 있을까, 그래도 한 번쯤은 나서봐야 했지 않나”). 그때를 되짚으며 책 속 문장인 “세상이 하찮게 취급한 누군가의 격변기를 그냥 지나치는 일이 쌓이면, 결국 내 삶에 소리 없는 격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를 인용해 ‘남 일 같지 않은 마음’이 연대의 시작이라 말한다.

 

그 자신이 ‘싸우는 사람’인 김경학 씨의 서평도 인상적이다. 그는 한국지엠 비정규직 해고자다. 기록자인 내가 가서 “왜 이렇게 오래 싸우는가?”를 물어야 하는 사람. 그는 자신보다 더 오랜 시간 싸우는 사람들을 보며 ‘왜 그렇게까지 싸우는지’ 궁금했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연대의 소중함을 몸으로 겪어 아는 사람이다. 당사자이자 연대자인 그는 책을 덮으며 이렇게 말했다.

 

“(연대자와) 투쟁하는 사람들의 연결고리는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대’라는 소중함, 그리고 그 방법은 다채롭고 다양해서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그림 귀퉁이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기뻤다.”

 

이 글귀를 보았을 때, 나 또한 그림 귀퉁이에 아주 작게나마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기록’이라는 노동과 연대가 기쁜 일임을 나에게 온 서평들을 보고 한 번 더 깨닫는다.

 

 


희  정

 

기록노동자.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한다. 저서로는 르포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노동자, 쓰러지다』, 『여기, 우리, 함께』와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열사 평전 『아름다운 한 생이다』가 있다. 『밀양을 살다』, 『섬과 섬을 잇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 『416단원고 약전』, 『재난을 묻다』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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