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 문단의 위기와 새로운 문학을 만드는 움직임 – 윤이형의 『붕대 감기』(작가정신, 2020)를 중심으로 (강희정)

윤이형, 『붕대 감기』, 작가정신, 2020

 

 

1. 거부하고, 쓰지 않는 작가들

 

 

저는 이런 환경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할 수 없습니다. 일하지 않는 것이 제 작품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를 그만둡니다. 

- 윤이형 입장문 중에서

 

    지난 2020년 1월,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과 아쉬움, 그리고 슬픔을 안겨준 글이 온라인에 게시되었다. 바로 작가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겠다는, 이른바 ‘절필 선언’의 내용이 담긴 윤이형 작가의 입장문이다. 이는 그보다 앞선 2020년 1월 4일부터 제44회 이상문학상의 우수상 수상자(김금희, 최은영, 이기호)들이 이상문학상의 수상 계약 조건상의 부당함과 불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수상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장문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가 최종적으로 작가 활동을 영구히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은 비단 이상문학상 사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2005년 등단 이후, 문단에서 오랜 시간 작가 활동을 이어오며 목도한 한국 문단/문학계 내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수많은 문제(작가 개인과 출판사(자본)간의 수익 배분 구조 문제뿐만 아니라 표절, #문단_내_성폭력 이슈 등)와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이 같은 부조리에 “일조”하게 되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기이한 현실이 그로 하여금 “수치심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도록 만든 것이었다. 윤이형이 절필을 선언한 이후, 작가들 사이에서도 그의 뜻을 이어받아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출판사 문학사상사의 청탁을 거부하는 움직임(#문학사상사_업무_거부)이 일어났고, 이는 독자들에게까지도 #문학사상사_독자_보이콧 운동으로 긴밀하게 이어졌다.

 

    사실 그동안 한국의 문단/문학계에서 이 같은 문인들의 수상 거부 또는 청탁/기고/수록 거부 운동이 2020년의 ‘이상문학상 사태’가 처음인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른 2001년, 故최인훈이 인촌상 문학 부문 수상을 거부[각주:1]한 사례가 있었고, 2013년에는 황정은과 신형철이 제59회 현대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이 되었지만 이를 거부[각주:2], 당시 동료 문인 74인 또한 ‘현대문학’ 측의 기고를 일절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2015년과 2017년에는 김사인[각주:3], 송경동 시인[각주:4]이 각각 제30회 만해문학상 수상과 2017 미당문학상의 수상 후보를 거부하였으며, 이외에도 2019년부터 금년 2021년까지 이어지고 있는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의 ‘신춘문예 당선시집’ 작품 게재 거부 운동[각주:5]이 있었다.

 

    물론 각각의 사안들을 완전하게 동등하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거부의 계기, 목적 등 각각에 개입하고 있는 내밀한 사정들의 낙차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나 앞서 일어났던 일련의 거부들이 문단 내부에서 마찬가지로 문단 내부의 문제점을 지적,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윤이형이 선언한 활동 중단, 즉 절필이라는 것은 내부에서 외부로의 움직임이며 내/외부를 구분 짓고 그럼으로써 계속해서 문제가 되는 그 연결고리 자체를 끊어내기 위한 시도에 더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들을 하나의 수직선 상에 위치시키고자 한 것은, 그것들이 모두 작가 한 사람(개인)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된 목소리가 집단성을 가진 움직임(운동)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개인의 목소리가 어떻게 집단적인 움직임(운동)으로 확산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대안 정동으로서의 거부와 절필

 

 

    해시태그(#)를 타고, 모이는 동시에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이 일정치 않으면서 급진적인 움직임은 2015-2016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근래의 온라인/인터넷 페미니즘을 연상시킨다. 온라인/인터넷 페미니즘은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온라인/인터넷을 중심으로 반(反)성폭력 및 반(反)차별(헤이트 스피치)을 지지하는 페미니즘 운동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이전까지의 집회가 전통적 의미로서 주로 오프라인 및 광장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다면, 2015-2016년 이후 여성 혐오 및 권력형 성폭력에 반대하고 피해자에 연대하기 위해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은 미디어를 주요한 자원으로 하여 온라인을 매개로 다양한 사람들이 연결, 접속, 동원[각주:6]되는 특징을 보인다. 미투(Me Too) 운동을 비롯하여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82년생 김지영』(2017) 도서 SNS 인증샷 릴레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그보다 앞선 90년대에 이미 한차례 활발히 이루어졌던 페미니즘 운동/연구가들의 성과와 비교해서 이론적 논점에 무지하다거나 이론과 무관한 방식으로 제기된다는 이유로 반(反)페미니즘 세력은 물론 기성의 페미니즘 집단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단순한 소비자 운동(불매 운동)으로 가치 절하[각주:7]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시태그 혹은 인증샷을 통해 인터넷/온라인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이들은, 이를 통해 그동안 자신들(소수자/타자)을 배제하고 억압하며 유지되어온 사회 구조 및 권력 체계에 균열을 내고 그 세력을 넓혀간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 정치성을 인정받아 마땅하다. 저마다 다양하고 불균질한 목소리를 결집하고 연결하는 해시태그는 이들이 공통된 감각과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반(反)페미니즘 세력에 의해 적대와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을 기꺼이 떠안으면서도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보다 넓은 차원의 요구”[각주:8]를 하므로 그 자체로 집회 현장에 모이고 부대끼는 신체(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윤이형의 절필 선언으로 인해 공교롭게도 그의 마지막 단독 저서가 된 『붕대 감기』(2020)는, 바로 이러한 차별/억압을 재생산하는 구조에 반대하고 소수자/약자들 간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힘으로서 근래의 페미니즘 운동의 함의를 담고 있다. 소설에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는 있으나 어떤 ‘특정한 여성’으로 환원되거나 정의될 수 없는, 세대, 연령, 직업, 계층 등이 모두 다른 다수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여성 혐오 및 페미니즘 이슈라는 공통의 계기적 사건에 대해 저마다 각기 다른 위치와 입장에서 어느 한 사람의 시선을 경유하거나 여과되지 않고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이처럼 중심인물 또는 화자를 상정할 수 없는 소설의 인물 관계도는 그 자체로 하나로 통일/환원될 수 없는 불균질하고 다양한 목소리와 신체(몸)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때로 갈등과 분열,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부당함에 대항하여 약자/소수자들이 연결되고 연대하는 일이 너와 나의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는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한 정치적·윤리적 의무의 문제임을 드러내 보여준다.

 

    다만, ‘여성’이라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대, 연령, 직업, 계층 등에 따라 서로 너무도 다른 다수의 목소리와 신체(몸)들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현하고, 결집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들이 동일하게 발 딛고 서 있는, 그들에게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 구조이다.

 

휴학을 하고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미진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가, 지현은 어느 순간 연락을 그만둬버렸다. 친구가 감당하고 있는 정신적 무게를 같이 짊어지기가 버거워서 손을 놓아버렸다. (…) 지현은 순전히 그 친구 때문에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과거의 자신이 조금이라도 용서될 것 같았다.

- 『붕대 감기』, 34-35쪽.

 

이제 막 시작된 이 흐름을 따라잡아 거기 동참하지 못하면 자신은 또다시 왕따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생활을 해왔을 뿐 세상에 기여한 바가 별로 없다는 부채감,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과격함을 지니고 세상과 싸우겠다고 나선 어린 여성들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는 생각, 저 사람들이 더 나은 곳으로 아주 멀리까지 가게 응원해주고 싶다는 마음, 그런 것들도 있을 것이다.

 - 『붕대 감기』, 139쪽.

   

    예컨대 ‘지현’이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까닭은, 불법촬영 피해자인 자신의 대학 친구 ‘미진’과 끝까지 연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범죄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고 불법촬영을 근절함으로써 더 이상 미진과 같은 존재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세연’이 2030 세대들을 주축으로 하여 새롭게 구축된 페미니즘에 동참하고자 했던 이유는 ‘여성주의’라는 흐름에 무리를 해서라도 따라잡고 편입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가장 컸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사회적 미(美)의 기준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과 달리 이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나선 다음 세대의 어린 여성들을 응원해주고 싶은 두 마음이 양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채이’는 성추행 피해자에 연대하고 지지하기 위해 가해자인 대학교수를 고발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써서 붙임으로써 직접적으로 행동하였고, ‘경혜’는 그로 인해 반(反)페미니즘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되어버린 채이와 연대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가해자에 대한 격문을 써서 학생회관 벽에 붙였다.

 

    이들에게는 모두 저마다 움직이도록 만드는 계기적 사건들이 있었다. 지현의 경우는 친구인 미진이 불법촬영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일일 것이다. 세연의 경우에는 고등학생 시절 나쁜 피부를 감추기 위해 화장을 했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반대로 성인이 된 이후 화장을 하지 않자 왜 꾸미지 않느냐며 지적받은 경험을 통해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적 이중성을 확인하게 되는 일이었다. 각 인물들마다 상이하게 다른 이 계기적 사건들은 이들로 하여금 죄책감, 불안감, 부채감, 슬픔, 분노 등의 여러 가지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특정한 계기적 사건을 통해 그들이 함께 놓여 있으며, 근본적으로 그들을 불안정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를 인식하고, 이에 감화된 것이다. 이는 개개인이 자신의 독립성 및 차이를 잃거나 침해당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모두가 상호 관계하에 서로 무관하지 않고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이것이 신체적 반응/행위로 나타나는 동시에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증폭된다는 점에서 정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2020년의 이상문학상 사태 이외에도 그동안 한국의 문단/문학계 곳곳에서 오랜 시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작가들의 ‘거부/절필’ 선언 또한 정동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문단/문학계의 오랜 적폐를 비판하고 이에 대한 자성을 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단지 한 사람의 독백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다종, 다양한 이들의 참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윤이형이 입장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가 이상문학상 사태를 비롯하여 “지뢰처럼 깔려 있는”, “수많은 문제와 부패와 부조리들”로 인해 느낀 괴로움, 수치심, 자괴감 등의 감정 역시도 『붕대 감기』 속 인물들이 느낀 죄책감, 불안함, 부채감 등의 감정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비록 작가 개개인이 대하는 사건과 문제의식은 모두 다르다고 할지라도 문단/문학계 내의 작가들의 거부/절필 선언을 각각의 분절적인 사건이 아닌, 문단/문학계 내에 존재하는 각종 부정부패와 부조리에 저항하는 연속적인 흐름/움직임으로 바라보아야 마땅하다.

 

 

3. 절필: 체제의 고리를 단절하는 비제도적 쓰기로의 전환

 

 

    2015-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페미니즘 집단을 중심으로 한 정동이 집회에 참여하고, 증언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말‘하는’ 무수한 몸(신체)들을 만들어냈다면, 거부/절필 운동이 양산해낸 것은 ‘하지 않는 몸들’이다. 실제,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불평등과 폭력에 저항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등 다양한 신체 행위를 통해 새롭고 주체적인 삶을 도모하고자 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쓰기’였다. 저항과 연대로서의 ‘쓰기’는 제도권 내에 안착할 수 없었던,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존재를 길어 올리고 기존의 근대적 주체화의 도식에서 탈피한 새로운 주체성을 발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작가가 아닌 이들도 다양한 형태의 ‘쓰기’(증언, 기록, 일지 등)를 통해 공론장에 이름을 기입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본래 ‘쓰기’가 공인되지 않은 공간에도 포스트잇 또는 해시태그를 부착함으로써 지면(地面)을 지면(紙面)으로 기능하게끔 만들고 그곳에서 ‘쓰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쓰기’라는 행위가 용인되는 구역은 더욱 확장되었고, 그 확장된 저변 위에서 보다 무수한 양태의 존재들과의 만남 혹은 관계를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현은 화가 나서 폭발할 것 같은 상태일 때 주로 트위터를 했고 자신이 쓴 말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유충, 재기해, 죽어, 유병장수, 분명 그런 말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때 지현은 그런 말들을 연습하고 있었다.

- 『붕대 감기』, 41쪽.

   

    소설 속에서 SNS(트위터)를 통해 일종의 자기진술을 하고 있는 지현의 예는, 온라인/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운동의 특성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현은 일상에서 분노를 유발하도록 하는 부당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의 SNS에 그에 대한 비판의 말을 쓰고, 그러한 “말들을 연습”한다. 이른바 ‘미러링’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말’들은, 소설 속에서 지현이 고민하고 있듯, 지배자/권력자의 언어를 거울처럼 반사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에 어딘지 과격하고 “심한 말”(43쪽)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하지만 그 언어 전략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약자/소수자들이 차별과 억압에 맞서 대항하는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이로써 입장 자체가 불가능했던 온라인/인터넷상에 여성들의 목소리, 말이 기입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분명 의의가 있는 것이다.

 

저자로서 세연이 쓰기로 한 첫 번째 책은 ‘여성들의 우정’을 테마로 한, 에세이와 인문학의 중간쯤 되는 성격을 한 책이었다. (…)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의 여성들을 인터뷰이로 해서 취재를 한 다음 세연의 코멘트를 덧붙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였다. 

 - 『붕대 감기』, 80쪽.

   

    프리랜서 출판 기획자로 일하는 세연이 15년 만에 처음 단독 저자로서 기획하게 된 책은 ‘여성들의 우정’을 테마로 한 책이었다. 물론 소설의 말미에서 세연은 자신에게 “다른 사람들의 우정을 해석하고 그들의 경험에 코멘트를 붙일 능력이 없”(151쪽)다는 이유로 프로젝트를 중간에 하차하고, 책은 “타인의 해석을 통하지 않고 직접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150쪽)는 방식으로 기획의 방향이 변경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그 자체로 다양한 연령, 직업, 계층 등을 아우르는 여성들의 삶과 그들의 이야기들이 온전하게 기록, 보존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간 비가시화된 영역으로 배제되어 있던 여성들의 존재를 활자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처럼 정동되어 행동하는 몸들은 이전까지 제도 내에 개입/기록될 수 없었던 존재들을 활자 및 텍스트를 생성함으로써 이들의 삶을 가시화해낸다.

 

    반면, 작가들의 잇따른 거부와 절필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 몸(신체)’을 의미한다. 사실 이들은 본래 무언가를 ‘하는 몸(신체)’들 이었을 것이다. 앞서 논의되었던, 제도 내에 개입하거나 기록될 수 없었던 이들이 쓰거나 말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쓰기와 말하기를 수행하는 몸으로 변용된 것이라면, 이들은 그와는 반대로 무언가를 쓰거나 말하던 상태에서 ‘하지 않는 몸’으로 변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하지 않는 몸’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단절과 공백이라는 비워진 자리이다. 2020년 제44회 이상문학상은 우수상 수상자(김금희, 최은영, 이기호)들뿐만 아니라 대상 수상자인 윤이형 마저 수상을 거부하며 과반수의 작품을 작품집에 수록할 수 없게 되면서 결국 시상과 작품집 출간을 포기, 중단하게 되었다. 2019, 2020, 2021년에 발간된 ‘신춘문예 당선시집’ 역시도 매해 꾸준히 이어진 몇몇 당선자들의 수록 및 게재 거부에 의해 완전히 메워졌어야 할 작품집에 여백이 생겨난 것이다.

 

    이 공백/여백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음에도 그 자체로 출판업계의 불공정한 관행 및 자본(출판사/문단)-노동(작가/개인)의 착취 구조와 한국 문단계의 뿌리 깊은 성폭력 실태 문제를 보여주는 동시에 공론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니까 하지 않는 몸들이 모여 그동안 당연하게 되풀이되고 재생산되어 온 불공정과 부조리,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는 작용을 하게 된 셈이다. 다시, 윤이형의 입장문으로 돌아가 보면 이러한 작가들의 거부와 절필이라는 행위에 내재한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활동 중단을 결심하고 제게 있던 청탁들과 계약들을 취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치심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고, 이제 더 이상 문학계에서 어떤 곳을 믿고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우수상 작가들의 권리 침해가 일어났는데 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거기에 일조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 지금까지 일을 해 오면서 저는 문학계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이와 같은 수많은 문제와 부패와 부조리들을 한 명의 작가가 제대로 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인데 계속 부조리에 얽히게 됩니다. (…) 저는 이런 환경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할 수 없습니다. 일하지 않는 것이 제 작품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를 그만둡니다.

- 윤이형의 입장문 중에서

   

    윤이형이 입장문에서도 말하고 있는 한국 문단/문학계의 문제점들은 사실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미 수차례 지적되어 온 것이다. 그동안 많은 페미니즘 연구/비평가들에 의해 한국 문학이 철저히 젠더화된 한국 사회 구조 아래에서 차별과 증오, 혐오를 선동하고 재생산하는 담론의 원천이라는 사실과 문단 권력이 실은 국가 기구 및 교육 제도와 결합하여 자본을 독점하는 형식으로 유지되어왔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문제 제기되었다. 그러니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한국 문단/문학 제도는 언제나 소수의 남성 지식인에 의해 주도되어 온 근대의 시스템과도 그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문단 권력은 오히려 한국의 문단/문학의 위기를 자초하는 원인이 바로 이를 지적하는 세력들이라며 번번이 책임을 회피하거나, 이러한 문제를 하위 항목으로 분류하여 관리함으로써 한국 문단/문학계에 제기되는 비판 담론과 세력을 통제하고 처리하는 힘을 잃지 않고 보유해왔다.[각주:9]

 

    그러니 이를 비판하는 세력들이(이 글에서는 거부와 절필을 선언한 작가들을 대표적으로 가리킨다.) 필시, 한국 사회의 젠더화된 체제와 근대 시스템을 그대로 답습하여 닮아 있는 문단 세력/제도에 저항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제도권 안이 아닌 바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본디 제도 내에 자리한다는 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도 “모른 채 일조”하게 되거나 “계속해서 부조리에 얽히게 되는” 체제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거부와 절필로 인해 비워진 공백/여백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 및 문단/문학계에 내재하고 있던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제도적 ‘쓰기’를 비제도적 ‘쓰기’로 전환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쓰이게 된 공백/여백이라는 무형의 텍스트들이 그동안 문단 세력에 의해 문학장으로의 개입과 기록 자체가 불가능했던 존재 및 논의들을 되살리는 기능을 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쓰는 것을 중단하는 행위로서 절필은 단순히 비유적 차원에서 작가에게 ‘쓰기’가 생계(생업) 또는 밥벌이의 수단이기에 죽음까지 감수해야 하는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다. 이는 문단이라는 제도를 구성하고 있는 출판 자본, 교육 체제, 인적-협력-네트워크에 순응하는 체제의 일원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이탈하는 힘으로써의 상징적 죽음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위기 속에 잠재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

 

 

    윤이형의 절필 선언 이후, 어김없이 한국 문단/문학계와 그 권위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문단/문학계의 권위가 애초부터 타자 및 소수자의 존재와 이들의 목소리가 개입/기록될 수 있는 자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라면, 그 위기는 기실 그러한 권력과 자본을 독점하고 있던 문단 세력들이 자초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해시태그를 타고 확산되고 있는 거부의 물결 속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은 위기를 공포로 실감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절필과 거부로 비워진 공백/여백은 그저 단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다른 새로운 문학, 예술, 문화의 정치성을 구축해나가는 일의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문단의 위기가 아닌, 이미 예고되어 있던 위기를 지연시키기 위해 억누르고 제압해두었던 목소리들의 분출일 것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수행하는 비제도적 ‘쓰기’의 전환으로서의 거부와 절필은 그동안 제도적 영역 아래 기록되거나 쓰일 수 없었던 이들의 존재와 삶의 방식을 문학으로 견인하여 작성될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재고시킨다. 문학이란 것이 본디 다양한 삶과 존재와 그에 따른 가치를 아우르는 것이었다면, 오히려 그동안 소수의 문단 세력이 지키고자 했던 권위는 그러한 문학의 역할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오늘날 어떤 공포나 위협인 양 엄습하고 있는 문단/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타개하는 일은, 이 목소리들을 다시금 강압적으로 통치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닌, 그 목소리를 제대로 귀담아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강 희 정

 

문학평론가. <백신이 되는 증언과 이야기 유물론: 김숨론>으로 2021 부산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등단.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졸업 이후 계속해서 문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해나가고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어린 시절부터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글을 써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다가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지금은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몸소 익혀나가고 있으며, 늘 처음 공부를 시작하던 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자 한다.

 



이어가는 말 : 젠더·어펙트 코멘터리

 

  • 권두현 : 절필은 침묵이다. 침묵은 ‘식물’의 언어다. 식물은 의지와 주체성을 지니지 못한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빛과, 물과, 공기에 열려 있는 채로 변화하고 생성하는 존재다. 침묵의 언어로서 윤이형의 절필이 변화시킨 것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비단 문단의 공기 또는 분위기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공기는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 달라진 공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공기를 느낄 수 있는 리터러시가 필요하다. 침묵은 의미론적 독해가 아니라 정동적 독해를 우선적으로 요청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 권영빈 : 훌륭한 작가는 대개 고발의 주체이기도 하다. 현실 문제에 대한 핍진한 묘사라는 서술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쓰지 않음’이라는 행위로 고발하는 것은 ‘쓰기’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쓰는 존재’로서의 작가의 주체성이 맺는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많은 작가들이 겪어온 필화(筆禍)는 이제 필(筆)의 부재로 이루어진다. 윤이형의 『붕대 감기』는  “하는 몸”과 “하지 않는 몸”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많은 주체들을 조명함으로써, ‘쓰기’와 ‘쓰지 않음’의 단계에서 더 나아간 미래적 고민을 밝히고 있다.
  • 김대성 : 글을 쓰는 사람이 더 이상 책 뒤편에 있지 않고 책을 들고 나와 목소리를 내는 게 이상하지 않다뒤편에 있던 이들이 앞으로 나오고글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여러 상황은 그 자체로 문학의 자리가 달라졌음을 알리는 분명한 표지다언젠가부터 윤이형의 소설을 읽기 위해선 낭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소리 내어 읽지 않는다면 이 소설에 흐르고 있는 정동을 감각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붕대감기는 여럿이서 둘러 앉아 돌아가며 낭독하고 싶고 『작은마음동호회의 표제작 작은마음동호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읽어야만 소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쓰지 않기로 결단을 내린 작가로부터 다른 쓰기의 정동을 감지하려는 이 글이 서 있고자 하는 자리를 살피게 된다아무도 없는 황량한 들판은 아닐 것이다그곳엔 무엇보다 멀리서부터 불어온 탓에 조금은 가볍고 선선해진 바람이 함께 할 것 같고들판 곳곳에 저마다가 제멋대로 누워 자유롭게 그 바람을 쐬고 있을 것만 같다.
  • 신민희 : 자신이 쓴 글을 지키기 위해, 쓰는 것을 멈추는 것. 이 멈춤은 목소리를 공백으로 공간화한다. 그리고 이 멈춤은 움직임 속에 있다. 무언가로부터 건네받았으며 또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운동 속에 있다. ‘릴레이’, ‘해시태그’는 그래서 텍스트 안과 밖을 넘나든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무엇을 건네받았고, 이를 어떻게 다시 건네주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떠난 동료들의 이름을 떠올린다.
  1. 최인훈 작가는 인촌상 수상을 거부한 것에 대해 어디까지나 공적인 이유’ 때문이라고만 설명하였을 뿐 직접적으로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인촌상이 주최사 동아일보의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를 기려하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 한다면 그의 거부 사유가 인촌의 친일 행적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풍요로운 문단의 가을걷이웹진 대산문화』 5, 2000. 참조http://daesan.or.kr/webzine_read.html?uid=37&ho=2) [본문으로]
  2. 같은 해(2013년) ‘현대문학’이 <현대문학> 9월호에 박근혜 전(前)대통령이 90년대에 저술한 수필 4편과 이를 노골적으로 찬미한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당시)의 평론을 실은 것이 원인이었다. [본문으로]
  3. 김사인 시인은 출판사 ‘창비’가 주관하는 제30회 만해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이 되었으나, 자신이 “비록 비상임이라 하나 계간 ‘창작과 비평’의 편집위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고, (…) 시집 간행 업무에 참여하고 있어 상 주관사와의 업무관련성이 낮다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이유로 수상 거부 의사를 표했다. (「만해문학상 수상자 김사인 수상 거절」, 『한국일보』, 2015.09.02. 참조,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509022264562817) [본문으로]
  4. 송경동 시인은 “친일 부역과 5·18 광주학살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그 군부정권에 부역했던” 미당 서정주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의 상을 수상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해방을 위해 싸우다 수없이 죽어 가고 끌려 가고 짓밟힌 무수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 그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상을 받을 수 없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송경동 시인, “미당문학상 거부한다”」, 『한겨레』, 2017.07.03. 참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01196.html) [본문으로]
  5. 송경동 시인은 “친일 부역과 5·18 광주학살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그 군부정권에 부역했던” 미당 서정주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의 상을 수상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해방을 위해 싸우다 수없이 죽어 가고 끌려 가고 짓밟힌 무수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 그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상을 받을 수 없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송경동 시인, “미당문학상 거부한다”」, 『한겨레』, 2017.07.03. 참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01196.html) [본문으로]
  6. 김미정, 움직이는 별자리들: 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 움직이는 별자리들, 갈무리, 2019. 20-21. [본문으로]
  7. 권명아, 해시태그의 정동이 재구축한 페미니즘 문학,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갈무리, 2019. 74-83. [본문으로]
  8. 주디스 버틀러, 김응산·양효실 역,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창비, 2020, 41. [본문으로]
  9. 권명아, 해시태그의 정동이 재구축한 페미니즘 문학,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갈무리, 2019. 74-8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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