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약속과 예측: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산지니, 2020)] 끄덕이다, 그리고 묻다. (김예란)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약속과 예측 :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 산지니, 2020

 

열며: 정동의 책 읽기

 

 

 다양한 저자들이 함께 쓴 책은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다. 우선 각자의 관심 영역에 따라 폭넓은 소재들이 다뤄지기에, 자유로운 모험을 하는 듯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안겨준다. 외연의 확장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단일한 관심 영역에 집중한다 하더라도 각자의 이해와 탐구 양식의 차이 때문에, 원래 하나로 동일하다고 간주되던 주제를 내적으로 심화하고 세분화한다. 이는 내적 심층화의 효과에 해당한다. 가장 흥미로운 특성은 세 번째 단계에서 발견된다. 이는 서로의 차이가 명백하거나 암묵적으로 드러나면서, 하나의 책이라 할지라도 다수의, 그리고 종종 서로 충돌적이고 모순적인 목소리들을 표출하는 단계다. 이 과정에서 책은 통일된 합일체가 되는 일에 의도적으로 실패한다. 이로써 들뢰즈가 ‘문학과 삶’이라는 제목의 짧은 에세이에서 해석하듯이, 글은 그 자체가 되어감이 되어간다(Deleuze, 1997).

 

 『약속과 예측: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는 정동과 연결성의 주제를 다성적으로 잣는다. 정동적으로—저자들의 표현을 따르면 ‘정동하기’와 ‘정동되기’의—연결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 책은 방금 서술한 다양한 저자들의 협업이 지닌 미덕을 충실하게 펼치고(‘외연의 확장’), 깊게 하고(‘내적 심층화’), 다수의 조화뿐 아니라 충돌까지도 꾀한다(‘다층적 차이화’). 이들의 개척과 실험과 전투에 함께 하는 일이란 더할 수 없이 흥미진진하며 이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진지한 모험, 사유, 고민에 이르도록 한다.

 

 이것이 책을 읽는 유일한 이유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러한 모험으로부터 사유를 거쳐 고민에 이르는 생각의 경로를 되짚어 보자. 가능할 다양한 궤적들 중에서 나는 이 책을 정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따라서 다음에 이어지는 생각의 길들은 정동의 시각에서 비롯되었다.

 

 

정동의 삶과 죽음

 

 

 정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있는 걸까, 심지어 죽은 것들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고 그것을 넘어 혹은 가로질러 생겨나는 걸까.

 

 이 물음에 관련해 『약속과 예측』이 생명과 삶을 지향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동이란 생명을 유지하는 기운, 즉 생기이고 생동이니까.

 

 언뜻 보면 이처럼 단순하게 보이는 문제지만, 여기엔 실상 꽤 까다로운 사안이 함축되어 있다. 우선 삶과 죽음의 경계 자체가 불투명하거나 분명치 않은 수많은 ‘것’이 현존하여 우리는 그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며 애초에 그들과 불가분의 의존성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 하늘, 땅, 물, 공기와 우리는 필수적인 관계들 안에 이미 있다. 심지어 강렬하고 아픈 생애와 작품으로 유명한 동시대 예술가인 트레이시 아민(Tracey emin)은 어느 날 자신의 정원에 있는 하나의 돌과 결혼식을 올렸다. 하나의 ‘것’은 다른 ‘것’과 사랑한다.

 

 현실이 이러하다면 죽음에 앞서거나 우월한 것으로 삶을 설정할 수는 없으며, 아예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지움이 더 맞을 듯하다. 주체를 지우는 탈주체화의 단행이 다수의 이론가들에게 의해 실행된 점은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더욱 원천적으로는 ‘이것임’이라는 자체를 의미화하기 위해 들뢰즈는 매우 오래된 개념인 ‘힉시티(haecceity)’를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to ti esti(τὸ τί ἐστι)’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현대어로 풀면 "the what (it) is.”, 즉 이것임(thisness)로 해석된다. 이 본질의 유일함에 삶과 죽음의 경계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분별되지 않고 결정될 수 없는 접근성 안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며 삶의 영역에 집중한 정동의 논의의 장점과 한계를 세심히 검토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사유는 생사 경계의 삭제, 적어도 한없는 유예로도 나아갈 수 있다.

 

 무생물과 죽음에 ‘관한’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의’ 정동. 이는 아직까지 미발달된 문제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나마 코로나의 경험이 베푼 미덕이 있다면 인간이 한동안 잊고 지내왔던 삶과 죽음을 관통하고 포괄하며 형성되고 작동하는 생물체 사이의 연계성을 절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염병의 최대 위력은, 우리가 흔히 도덕적으로든 실용적으로든 늘 주장하는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신념뿐 아니라 죽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자명하되 곧잘 부인되는 진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 있다. 단지 부인과 기피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어느 생명에게도 반드시 언젠가는 오고야 말 죽음을 어떠한 정동의 윤리로 이해하고 다룰지는 생명권력의 통치성에 포획된 우리에게 핵심적인 주제다.

 

 『약속과 예측』에서 세심하게 다루는 전쟁, 장애, 노쇠, 예속의 갈등들 역시 종국엔 죽음의 주제에서 만나져야 할 것이다.

 

 

정동의 보편성과 특수성

 

 

 정동을 사유함에 있어, 특정한 집단을 획정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그런 식의 단위를 지우는 게 좋은가?

 

 이 질문은 원천적인 보편성과 경험적인 특수성 사이의 관계에 관련된다. 앞에서 우리는 모든 존재, 생명, 인간들의 세계를 ‘이것임’이라는 절대적으로 고유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한편 『약속과 예측』은 보편성의 시각에서는 간과되거나 새어 나가 포착할 수 없는 개체들의 특이성에 주목한다. 즉 정동의 보편성에 대해 소수성을 어떻게 의미화할지가 문제시된다.

 

 『약속과 예측』의 초점은 정치적으로 고립되거나 경제적으로 소외되거나 사회적으로 혐오를 받는 약자들에게 놓여 있다. 이 책의 정치적 잠재성은 여기에 있다. 저자들은 보편성이라는 편안한 위치에 안착하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보통’보다 더 어둡고 험난한 조건에 묶인 몸들에 정당한 시선을 나눈다. 이는 분석적 필요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마르틴 하이데거가 강조한‘존재론적 감수성’인 ‘살핌과 배려(care)’로서 수행되는 성격이 강하다(Kȁuffer, 2013). 그렇지만 마치 미리 약속한 듯, 혹은 그런 약속의 절차까지도 불필요하다고 애초부터 전제된 듯한 소수성에 대한 결연한 연대는 또 다른 까다로운 질문들을 파생시킨다.

 

 이미 전제된 소수성이란 무엇인가? 소수성(minoritarian)은 소수(minority)와 다르다. 단지 수가 적은 양의 개념이거나 약하다는 식의 크기의 개념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강조하듯이 소수성은 소수가 되어감으로서 발생되는 변화와 운동을 의미한다(Deleuze & Guattari, 1987). 본래 ‘되어감(becoming)’은 소수적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똑같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특이한 개체들이 각자, 서로, 상이한 속도와 방향으로 되어가는 것이기에 이 되어감은 반드시 ‘차이화’이기도 하다. 즉 소수성은 이미 ‘소수’라고 정해진 존재들에게 주어진 확정이 아니고, 적거나 약한 것들에 대한 전제도 아니며, 이들 간의 통일이나 단결은 더욱 아니다. 개체화라는 다양한 분자적인 움직임이기에 오로지 소수적이며 과정적이며 미결정적인 변화와 운동을 일컫는다. 또한 변화와 운동은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와 접속된 다른 하나도 그 변화와 운동에 연동되기에 또 다른 되어감이 진행된다. 소수성이란 항상 복수적이고 관계적이다. 이러한 소수적임, 되어감들이 서로 만나고 엮이면서 모호하고 미정의 근접지대가 형성된다. 그래서 되어감은 항상 ‘중간’이다.

 

 이 해석을 제안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성-되기, 소녀-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 등의 사태들을 부각시킨다. 이 사태의 핵심은 여성, 소녀, 동물, 식물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로의 ‘되어감’에 있다. 다시 말해 여성, 소녀, 동물, 식물은 되어감의 목적지가 아니다. 따라서 이전의 것이 나쁘기에 새로운 것이 되고, 새로운 것이 이전의 것보다 더 좋고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어른이 아니라 소녀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이 되어 각 짝패의 후자가 전자에 비해 정치적 우선성을 확보하는 식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이 되어갈 뿐 아니라, 여성도 여성이 되어간다. 여성은 하나의 확고한 정체성이거나 확보된 정치성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되어감의 변화와 운동의 표현적 특질이다. 아마도 이 운동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혹은 남성이면서 여성인 중간자로서 암수동체에 무한정 가까워간다.

 

 『약속과 예측』에는 여러 종류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여성이기에 고통을 겪는 여성이 나오고, 여성이기에 겪는 고통을 이겨나가는 여성도 나오고, 여성이 아니기에 여성으로, 혹은 여성이기에 여성이 아닌 것으로 전환되려는 (트랜스) 여성도 나온다. 그들의 세밀한 움직임과 운동의 상태나 속도에 따라 다지(多枝)의 ‘여성-되기’이기도 하고, 여성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여성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이론에 따르기보다는 여러 각도에서 ‘여성임’과 ‘여성-되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별하고, 각각이 지니는 이론적 의미와 함께 수행적 유용성을 판단할 수 있다. 우선 ‘여성임’은 현재의 위치성에 근거를 둔다. 특정화된 정체성을 강화하고 그로부터 발화된 목소리로 주장한다. 보수적인 질서에 대항하여 대안의 질서를 창출하기가 여성임의 진보성이다. 이에 비해 ‘여성-되기’는 주어진 위치도 주장의 구축도 없다. 이미 있는 것을 무효화하는 것이 여성-되기의 급진성이다. 여성-되기는 (보수적인 질서라기보다는) ‘질서 자체의 보수성’을 비판하고 (대안을 창출하기보다) ‘창출이라는 대안’을 수행한다. 여성임은 현재의 모순을 비판하고 진보적인 구조를 구축하는 정치적 전략으로서 유용하다. 이에 비해 여성-되기는 모순에 내재하는 변화와 운동의 잠재성에 집중하고, 완결되어서는 안 될–왜냐하면 완결 자체가 보수적 세계관의 텔로스이기 때문이다–계속될 변화와 운동에 참여한다. 비유기체적인 기계적 세계관을 수행한다.

 

 굳이 말한다면 『약속과 예측』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여성임에 가깝다고 생각되어 그 목소리가 강렬하고 당차다. 동시에 다른 몇 편의 글들은 여성-되기를 추구하여 싱싱하고 활기차다. 이로써 『약속과 예측』은 내가 앞에서 제시한 세 번째 단계의 협력의 미덕, 즉 서로 충돌하는 다성성의 텍스트가 된다.

 

 

생명의 연결성을 넘어

 

 

 이 흥미롭고도 진지한 글들을 탐독하고 책장을 덮으며 드는 마지막 물음. 과연 『약속과 예측』의 부제에서 강조되는 연결성만이 우리의 미래일까?

 

 연결되지 않음, 연결될 수 없음, 연결되기 싫음 이라는 존재론적, 기술적, 사회적, 정서적 현실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 단지 외로움으로 묘사되는 유행을 따르려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고독(solitude)은 존재론적 원천이며, 배려는 존재가 고독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에, 즉 연결로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독안에 있을 수밖에 없기에 지니게 되는, 세계를 향한 열려있는 감수성이다.

 

 이미 있는 것, 이미 아는 것, 이미 옳은 것에 박차를 가하는 일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자. 예를 들어 장애, 전쟁, 박탈의 고통을 옳은 정치적 실천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실행의 차원에서 갈등 중에 있긴 하지만, 원론적으로는 대체로 부정되기 어려운 ‘이미 있고 알고 옳음’을 획득했다. 이에 우리는 그에 대한 재확정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미 옳은 것을 소수화하고 차이로서 되어가는 내재적 비판을 추진해야 한다.

 

 반복하면, 되어감은 소수적이고, 이처럼 소수적으로 되어 가는 과정은 고독하고 고통스럽다. 연결되어 건강한 생명은 강력하지만, 죽음으로 종결될 되어감의 과정은 어둡고 조용하다. 아마도 정동에 대한 사유가 도전해야 할 궁극의 문제가 있다면 생명들의 연결 뿐 아니라 이처럼 죽음을 향해 가는 되어감의 고독에 관한 무엇일 터이다. 죽음은 모든 가능성들과의 단절이다. 이 경계에서 잠재적인 되어감으로써 정동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 이는 단순히 취약성을 극복하기가 아니라, 취약성 안에서, 그것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삶과 죽음을 겪어내는지에 관한 솔직한 성찰이다.

 

 

 

참고문헌

 

Deleuze, G. & Guattari, F. (1987)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Deleuze, G. (1997) Literature and life. In Critical and clinical.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p. 1-6.

Kȁuffer, S. (2013) Temporality as the ontological sense of care. The Cambridge companion to Heidegger's  Being and Tim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338-359.

 

 

 


김 예 란

 

광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로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진행되는 커뮤니케이션 문화와 사회 현상에 대해, 특히 주체의 윤리학과 감수성의 사회적 실천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친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와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칼리지에서 수학했다. 저서로는 『마음의 말』, 말의 표정들, Routledge Handbook of Cultural and Creative Industries in Asia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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