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약속과 예측: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산지니, 2020)] 젠더·어펙트 연구가 “약속”한 인문학의 미래들 (오혜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약속과 예측 :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 산지니, 2020

 

 

 올해 초,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약속과 예측』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드디어!’라고 외쳤다. 최근 국내외 퀴어/페미니즘 논문을 읽다 보면 정동 연구와 만나지 않는 경우가 드문 터라, 정동 연구의 구체적 성격과 이론적 가능성에 대한 확장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를 접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에도 이미 정동이론에 관한 번역서가 적지 않게 소개돼 있고, 그에 대한 연구도 꽤 축적된 편이다. 다만, 국내에서 전개된 초기 정동 연구에 대한 논의가 ‘정동’의 개념 규정과 번역 문제, 그리고 ‘정동이냐 이데올로기냐’ 등의 논쟁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정동 연구의 다양한 관심사와 스펙트럼이 알려지는 데에는 다소 지체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강렬하게 부상하고 있는 혐오·증오·분노와 같은 사회적·역사적·정치적 감정에 대한 연구에서 정동이론을 유력한 전거로 삼는 경우가 많아졌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정동 연구가 혐오·분노·적대·모멸감·억울함 같은 부정적 감정에 집중하는 반면, 영미권에서 제출된 최신의 정동 연구들은 ‘행복happiness’, ‘사랑love’, ‘쾌락eros’, ‘기쁨pleasure’과 같은 긍정적 감정의 동학과 역능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특히, 과거에 퀴어 연구를 지배하는 정동이 우울과 멜랑콜리, 소외와 고독 등으로 정의됐다면, 최근의 비서구 출신 비백인 퀴어연구자들이 주목하는 퀴어 정동은 그간 비가시화되거나 정형화되었던 소수자의 주변적이고 사소한 경험과 관련된다. 주로 ‘바텀’ 역할을 맡는 아시아 게이남성의 쾌락에 대한 연구나 아시아 출신으로 이주의 경험을 강렬하게 간직한 채 미국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퀴어 디아스포라의 혼종적이고 역동적인 경험에 대한 연구들이 그렇다. 이런 지형을 확인하고 나니, ‘한국사회에서 정동 연구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한국 정동 연구의 이론적·정치적·문화적 등장 배경과 그 성격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생겼다.

 

 이 책은 그런 의문을 얼마간 해소하거나 혹은 구체화하는 데에 충실한 도움을 준다. 이 책이 지역학·질병학·장애학·문학학·영화사·사회학·페미니즘 등 각 한국 인문학 전반에 걸쳐 축적돼온 학문적 의제와 방법론을 폭넓게 참조하면서도, 의존과 돌봄, 역능과 취약성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연결-신체’라는 새롭고도 설득력 있는 연구대상을 발명하는 장면을 볼 때, 인문학 연구의 “정동적 전회”라는 이 책의 전제가 과히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약속과 예측’이라는 제목은 무슨 뜻일까. 총론격인 권명아의 글 「젠더·어펙트 연구에서 연결성의 문제」에서 제시되는 ‘약속’과 ‘예측’의 흥미로운 대별은 미래에 대한 인문학의 태도와 접근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약속’이 ‘복잡성·불확정성·우연성’ 등을 중시함으로써, 결코 미래를 예단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모든 문제를 미래로 유예하지도 않는(‘나중에’ 정치), 오히려 현재의 체화된(embodied) 가능성에 주목하려는 정동이론의 태도를 함의한다면, ‘예측’은 판단·인식·전망 등 ‘신체’에 대한 고려가 없는 전통적인 서구의 인식론을 근거로 합리적·기술적인 결과를 도출하려는 데이터과학의 태도와 관련된다. 요컨대, 신원·국적·성별·세대·장애·계급 등 이미 규범화된 인식론적 범주를 단위로 세계를 사유하기보다는, 바로 그런 인식론적 범주를 가로지르거나 무화하거나 혹은 그에 포획되지 않는 임의적이고 우연적이고 휘발적인 “강도, 감정, 기운, 정동, 질감”[각주:1] 등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정동 연구는 ‘연구’라는 행위를 결박하고 있는 로고스의 재귀적인 성격을 문제 삼으며, 이에 대한 획기적이고 급진적인 “전환”을 촉구한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된다. 1부 ‘연결신체의 역사’는 그간 신체를 배치하고 그에 대한 앎을 질서화해온 역사적 방식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정동 연구를 기반으로 그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2부 ‘공간과 정동’은 신체가 배치되는 공간, 공간화된 신체 등 특정 공간과 신체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특히 ‘여성’, ‘여성성’, ‘여성적인 것’의 규범화 문제를 본격적으로 심문에 부친다. 3부 ‘미디어와 연결성’은 신체와 세계, 혹은 신체와 신체의 관계를 결/락하는 미디어와 네트워크의 일단을 묘파한다. 서로 다른 지적 배경을 가진 12편의 논문은 각각 따로 떼고 보면 그 자체로 이미 완결적이거나 혹은 시론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각 글들의 유기적인 상관성이 손쉽게 확인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바로 이런 이질적인 연구들이 서로 ‘연결’돼 모종의 ‘약속’으로서 함께 배치되는 풍경을 제시함으로써, 이것이 정동 연구 특유의 모호성과 불확정성으로 말미암은 매우 독특하고 비옥한 ‘가능성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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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돌봄·기술 등을 중심으로 한 ‘연결신체의 역사’를 다룬 1부는 인간의 ‘능력/역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챕터로도 읽힌다. 유효한 기능을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치매환자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비전형적·비정형적 능력을 살핀 박언주의 글, 생식에 무능하거나 부적절하다고 여겨져 불임수술이 강제돼온 장애인의 신체와 그에 대한 논쟁의 역사를 분석한 소현숙의 글, ‘보기/듣기’ 기능을 ‘결여’했다고 간주됨으로써 시청각매체인 ‘영화’의 관람성 연구대상에서 누락돼온 장애관객의 경험에 주목하는 이화진의 글, 이성과 신체의 이분법적 대별을 전제로 한 기술미래학과 거리를 둔 채, 다양한 경험과 질서가 경합하고 혼효하는 장소로서의 신체를 새로운 역능의 원천으로서 소환하는 권명아의 글은 모두 인간세계의 질서를 지배해온 ‘능력/유능함’에 대한 재의미화를 요청한다.[각주:2] 다만, 이 진지한 제언들에 동의하면서도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를테면, 치매에 대한 지배적인 서사에서 치매환자의 경험이 배제돼 있다고 적실하게 지적한 박언주의 글 「인간 존엄의 조건으로서의 상호의존과 연결성」은 치매인의 ‘인간됨’, 즉 치매인의 “개별성, 독립성,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개별성, 독립성, 존엄성’이 ‘인간성’의 핵심이라고 믿는 것은 여전히 이성적 능력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근대적 인간상에 붙들려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연구자도 이런 혐의를 인지하고 있기에 매우 신중하게 논의를 펼치지만, 치매인이 명시적 기억을 상실하더라도 “암묵적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하고, 유능감, 자율성, 자존감을 유지”한다는 서술이나, ‘비언어적 소통’을 통해 여전히 사회적 관계 맺기가 가능하다는 지적, ‘커플 관계’에서 서로를 통해 자기를 인식한다는 서술, 치매인이 과거에 수행하던 어머니나 아내의 역할을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음에 주목하는 진술들은 여전히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자기정체성’을 ‘존엄’이자 ‘인간됨’의 기본전제로 삼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치매환자는 치매‘인’이기도 하지만, ‘치매’라는 자연현상을 경험하는, 그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치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와 같은’ 자기-임을 증명함으로써 획득되는 ‘인간 존엄’을 강조하기보다는, 필자의 표현대로 “치매로 인해” 가능해지는 경험들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기억’의 상실을 통해 곧 ‘나’를 상실하더라도, 누군가와 소통하고 도움 받음으로써 치매 이후의 (타인이 보기에 ‘낯선’) 나’를 어떻게든 운용해가는 능력. 이때 ‘타인에게 의존하고 소통함으로써 자기를 운용하는 능력’인 ‘연립’[각주:3]의 개념은 ‘독립’과 ‘의존’을 배타적인 관계로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가능케 할 것이다.

 

 소현숙의 「우생학의 재림과 ‘정상/비정상’의 폭력」은 정동이론의 용어를 표 나게 활용하지는 않지만, 이 세계의 다양한 권력과 질서가 작동하는 장소로의 신체에 관한 가장 핍진한 보고로 읽혔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글을 읽고 나서야, 모자보건법의 우생학적 요소가 아직 철폐되지 않았다는 점, 2019년 설문조사에서 국민 3명 중 2명이 인권침해 논란에도 발달장애인의 불임수술을 용인해야 한다고 밝혔다는 점을 알았다. 낙태죄 폐지가 서구에서는 여성운동으로 인해 촉발됐으나 한국에서는 정부의 가족계획사업의 일환으로서 기획됐다는 점,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가 가장 먼저 기대는 ‘인권’이라는 개념 또한 애초에 정부가 선행과 자선 제도로서 촉발시켰다는 점에도 밑줄을 그었다. 즉 인권 담론의 발달과 낙태죄 폐지라는 쾌거에도 불구하고 ‘공익’을 기준으로 한 ‘사회적으로 유능한 몸’, ‘정상인 몸’, ‘사회적 비용이 들지 않는 몸’이라는 개념은 도전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규범적 신체’에 대한 언어와 성찰을 더욱 심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한편, ‘장애’ 개념의 실정화를 피하면서도 장애관객의 영화 경험에 대한 역사화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화진의 글 「‘보통이 아닌 몸’의 영화 보기에 대하여」는 기존 영화 수용사 연구가 ‘영화관 너머의 영화 관람’으로 관심사를 확장해야 한다고 명료하게 주장한다. 아쉽게도 이 글은 장애관객의 영화 경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글은 ‘보통이 아닌 몸’, 이질적인 신체들이 영화를 경험하는 방식을 다채롭게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히 고무적이다. 예컨대, 후천적인 청각장애가 있다고 밝힌 소설가 김초엽은 예전에 소리를 들을 때의 체화된 기억이 현재 음악을 들을 때에도 개입·작용한다고 말한 바 있고, 이 점이 자신의 음악적 취향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고 썼다.[각주:4] 즉 영화관까지의 이동 경로에 있는 난점들을 없애고, 자막이나 더빙 등을 통한 배리어프리 영화를 만드는 등 영화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도 긴요하지만, 다양한 장애들은 영화를 어떻게 경험하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시작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이 글이 촉발해준 문제의식 덕에 하게 됐다.

 

 권명아의 글 「젠더·어펙트 연구에서 연결성의 문제」는 기존 포스트휴머니즘과 제노페미니즘을 정동 연구로부터 촉발된 신체연결이론과 구분하면서 후자의 성격을 명료히 한다. 저자는 비판적 포스트휴먼론자인 캐서린 헤일스를 인용해 포스트휴머니즘이 “신체 없는 정보”를 꿈꾼다고 일갈하며, 제노페미니즘 역시 기술만능론에 치우치며 미래를 단절적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다만, 여기서 요약적으로 제시되는 포스트휴머니즘이 꽤 협소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주지하다시피, 캐서린 헤일스는 신체성을 간과하는 자유주의적 포스트휴머니즘, 혹은 트랜스휴머니즘을 비판한 대표적인 포스트휴먼론자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저자가 비판하는 대부분의 부정적 특징은 트랜스휴머니즘의 맹점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각주:5] 또한 제노페미니즘 역시 미래를 단절적으로 표상하고, 합리와 기술의 수사학을 차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는 ‘합리’의 의미값을 이전과는 다르게 설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탁월한 오염의 형식”[각주:6]이기를 바라는 제노페미니즘의 기획을 기술낙관론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더 입체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2부 ‘공간과 정동’에 수록된 글들은 ‘신체가 배치되는 공간’, ‘공간화된 신체’와 관련해 가장 문제적인 현안들을 적절하게 호출한다. 김보명의 「‘여성 공간’과 페미니즘」은 ‘안전’과 ‘안보’를 명분 삼아 비규범적인 신체를 배제하고, 특정 인구들만 영토화하는 공간화의 논리를 비판한다. 특히 성별분리 공간과 여성공동체가 지녀온 양가적 의미를 섬세하게 살피면서도, ‘생물학적/자연적 성’이라고 상상되는 섹스sex 역시 ‘신분증’이나 ‘출생증명서’와 같은 인위적인 근대장치들에 의해서만 ‘거기 있는 것’으로 재현되는 사회문화적 구성물임을 갈파하는 대목은 최근 트랜스젠더에 대한 ‘분리’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언설들의 허구성을 결정적으로 드러낸다.

 

 권영빈의 「한국전쟁과 젠더화된 생존의 기록」은 그 자체로 전통적인 문학연구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완결적인 글이기도 하지만, 이 책이 내건 ‘정동’의 양상과 성격을 설명하는 데에도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졌다. 이 글은 이질적인 신체들이 공간을 서로 어떻게 다르게 경험하는지에 주목하는 젠더지리학의 방법론을 통해 자칫 동질화되기 쉬운 ‘전쟁에서 살아남은 우리’라는 감각을 심문에 부친다. 박완서 소설을, 전선을 체화한 집, 그 집에서 오빠의 ‘죽음’이라는 ‘사건event’이 아니라 ‘사라짐’이라는 ‘시간narrative’을 겪어내고, 이를 신체의 후각과 미각, 내장감각을 통해 체화하는 장면으로 탁월하게 분석해내는 대목은 정동적 토대이자 대상으로서의 신체를 설명하는 매우 설득력 있는 사례로 여겨졌다.

 

 신민희의 「항구도시 부산과 여성 노동자들의 해양노동」은 젠더·어펙트 연구의 중요한 착목점 중 하나인 ‘지역’의 문제를 ‘부산의 여성 해양노동’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묘파한다. 특히 ‘노동’과 ‘먹고살기’에 대당된 위계화된 개념을 날카롭게 읽어내면서, “아지매노동”으로 상징되는 로컬화된 노동과 젠더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손’과 ‘맛’이라는 신체화된 자원이 어떤 방식으로 노동의 젠더화 논리에 복무하는지를 분석한 대목은 기존 ‘성장-쇠락’, ‘중심-주변’과 같은 서사를 활용한 페미니즘 연구로도 포착하지 못했던 독창적인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여성적인 것’을 자원화하거나 혹은 자원의 반열에서 탈락시키는 양상을 흥미롭게 분석한 이시다 게이코의 글 「야스쿠니신사의 위령과 ‘여성적인 것’의 관계에 대해」도 의미심장하게 읽혔다. 전시체제기에 천황에게 봉헌된 신체에게 보내는 사적이고 부정적인 감정들은 허용되지 않았고, 이 감정이 곧 ‘여성적인 것’으로 젠더화되며 강등됐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더 이상 표면적으로라도 ‘평화’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 일본은 이제 “추모의 여성화”를 통해 전사들을 ‘희생자’로 의미화하며 내셔널리즘의 신화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다른 ‘평화’와 ‘추모’의 기관들과 구분되는 ‘야스쿠니신사’에 국한해 논의했을 뿐이지만, 기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성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위령의 형태” 일반이 지닌 위험성에 대한 경계를 촉구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국가폭력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과 그 상흔을 재현하는 많은 대중서사에서 ‘진혼·위령·해원·화해’와 같은 형식은 매우 심미적인 요소로서 추앙받으며 선호되는 경향을 고려할 때, ‘내셔널리즘과 젠더’라는 테마는 여전히 긴요한 구명의 대상임을 실감하게 된다.

 

 3부 ‘미디어와 연결성’에 수록된 글들을 다소 난망하다. ‘미디어/네트워크’라는 키워드는 이 챕터에 실린 네 편의 글을 묶기에는 지나치게 광범위하며 불충분하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각각의 글들은 해당 의제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상대화하면서 새로운 연구의 지평과 방향을 시사한다.

 

 최이숙의 「모성에 대한 전유와 돌봄의 의제화」는 ‘당사자정치’에서 시작했으나, 이제는 국가기관과 사회 전반을 ‘집단모성’·‘사회적 모성’으로 호출하는 ‘엄마들의 정치’를 다룬다. ‘기혼유자녀여성’에 대한 양가적인 위상이 한국 정치사에서 진지하게 다뤄진 적은 별로 없지만, 그와 별개로 ‘정치하는 엄마들’로 상징되는 ‘돌봄’의 의제는 공공적 의제로 채택되기에 충분하다. 다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돌봄이 전적으로 여성에게만 전가돼온 역사를 상기할 때, ‘돌봄의 윤리’를 곧바로 ‘모성’으로 치환하는 것에는 유보가 필요하겠고, ‘모성’의 필수조건으로 “자녀를 양육해본 경험”을 전제하는 것 또한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돌봄’과 ‘모성’이 매우 핵심적인 의미소를 공유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모성’에 국한되지 않은, ‘인간성’이자 ‘시민성’의 일환으로서 자기와 타인을 돌보는 능력은 중요하다.[각주:7] 성별분업으로서의 돌봄, 육친적 관계를 경유하는 돌봄, 국가의 복지와 제도로 수렴되는 돌봄뿐 아니라, ‘취약성’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으로서의 돌봄으로 의미를 확장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신파성’을 돌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동체계의 일환으로써 이해하기를 권하는 권두현의 글 「‘신파성’ 재론을 위한 시론」은 이 책에서 가장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하다. 이 글은 ‘양식·담론·미감’으로 각각 다르게 정의돼온 신파에 관한 선행연구들을 섬세하게 분별하며, 신파의 성격을 탐문하는데, 이중 어느 것도 저자의 문제의식에 정확하게 부합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돌봄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 사회 재생산의 위기, 그리고 여기에 얽힌 정동적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한국 대중문화”가 오랜 기간에 걸쳐 나름의 대응을 해온 역사의 이름으로서 ‘신파’를 소환한다. ‘신파’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돌봄 관계’를 문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이 글에서 언급되는 ‘신파적 작품’은 대체로 이영미의 분류에 따르고 있고, 최근작으로는 영화 <신과 함께> 등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돌봄/관계’를 문제화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이를 설득하는 구체적인 분석이 부족해 보인다. 가족·부부·연인 관계에서 비롯한 여러 갈등을 모두 ‘돌봄’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왜 ‘상호정동성’으로서의 돌봄의 문제로 신파를 읽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다만, 확실하게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신파’가 ‘(불)평등’을 중심으로 한 감정과 강력하게 연루되는 특질이라는 점이다. 근대전환기에 예상치 못한 세계자본주의의 급습, 정치적으로 거세된 식민지라는 상황, 가부장제의 속박 등 여러 관계에서 비롯하는 감정들, 완전히 순응하지도 혹은 저항하지도 못하는 잠재적 상태와 그 역능을 포괄하는 심미적 특질이자 ‘시적 정의’로서 ‘신파’를 이해해보자는 제안이라면 더 궁구해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김나영의 글 「고전서사 연구에서 연결성에 대한 논의의 현 단계」는 기존 문학연구 방법론을 획기적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명제 앞에 있지만, 그럼에도 정동 연구 및 연결성에 대한 논의를 곧바로 연구방법론으로서 활용하기는 어려운 문학연구의 곤경에 대한 솔직한 토로로 읽힌다. 저자는 빅데이터를 이용한 디지털인문학에 대해 논하며, 이것이 ‘텍스트’와 ‘연구자’와 ‘기계’의 ‘연결’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안해주리라 기대하지만, 본문을 읽어보면 이 기대가 쉽게 충족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저자는 『소현성록』을 디지털자료로 전산화하고, 이것이 전통적인 문학연구를 어떻게 보충하거나, 혹은 전통적인 문학연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데 『소현성록』및 이본 20여 종 정도의 자료를 ‘빅데이터’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려니와, 이 데이터를 통해 감정에 관련된 어휘를 추산하고 이를 통해 작품의 담화성격을 해독해내는 방식이 얼마나 유효한지 의문이 든다. 저자가 이미 잘 언급한 대로, 여기에는 소설의 맥락 및 비언어적 담화 등이 누락돼 있으며, ‘감정’과 관련된 어휘의 선별도 매우 납작하고 단편적이다. 결국 이 글은 ‘기계’가 열어 준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여전히 ‘인간의 인문학적 통찰’이 할 일이 남아 있음에 다소 ‘안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소박하고 솔직한 결론은 기계/인간에 대한 전형적인 대별구도에서 그리 멀지 않고, 이것은 곧 정동 연구를 비롯한 연결이론이 당장 부딪치게 되는 곤경인 듯하다.

 

 입이암총의 「홍콩의 파열된 시간」은 홍콩 본토주의에 기반을 둔 “즉각적 행동주의”인 ‘용무’에 몰입한 10-20대 남성성의 일단을 묘사한다. 왜 이때, 이런 남성성이 호응을 얻게 됐는지를 이해하려면 홍콩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청년들은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 비전을 성공적으로 펼치지 못하고, 우익민족주의로 나아가는 등 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귀결 자체도 흥미롭지만,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 글의 저자가 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이 ‘용무’라는 정동에 몰입해본 경험이 있는 청년들의 생애와 정치적 경로라기보다는, ‘용무’라는 이들의 정동이 실제 자신들의 삶과 매우 큰 거리가 있다는 것, 그 불일치 및 그로부터 촉발되는 어떤 다른 ‘정동’이라는 점이다. “고통 받는 자와 전사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는 느낌, “집에 있다는 느낌의 부재”. 이는 비단 ‘용무’에 몰입한 홍콩의 젊은 남성들뿐 아니라,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직장에서는 상사의 갑질을 묵묵히 참아낼 때, 온라인에서 페미니스트 전사로 분하지만, 일상에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을 별 수 없이 견딜 때……. 이념으로부터 “파열된” 경험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서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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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의 연구대상이자 방법론으로서 ‘신체’와 ‘관계/연루’의 감각을 전면화한 것은 젠더·어펙트 연구의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된다. 이 책에 실린 열두 편의 글들이 성실하게 보여줬듯, 이 연구는 ‘정상성’·‘자연성’에 대한 교조적이고 규범적인 이해를 상대화하는 데 탁월하며, ‘주류/비주류’로 손쉽게 분류·환원되는 이 세계의 이질적인 구성원들 모두에게 골고루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정동 연구의 외래적 출처와 신원을 식별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을 멈추고, ‘인문/연구’라는 행위에 대한 메타연구로서 정동 연구의 제안에 귀 기울여 봐도 좋지 않을까. 이것이 정동 연구가 이미 ‘현재에 기입해둔’ 인문 연구의 ‘미래’라면 말이다.

 

 

 


오 혜 진

 

문학평론가.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근현대 문학·문화론을 전공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 저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에서 한국문학의 정상성(normality)을 심문하고, 새 세대가 선보이는 서사실험의 성격과 민주주의적 상상력을 분석했다. 원본 없는 판타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등의 책을 함께 썼고, 2015에서 2017년까지 한겨레신문씨네21에 칼럼을 연재했다.


 

  1. 재스비어 K. 푸아, 이진화 역, 「퀴어한 시간들, 퀴어한 배치들」, 『문학과사회 하이픈─페미니즘적-비평적 116, 2016년 겨울, 101쪽. [본문으로]
  2. 장혜영, 『어른이 되면, Woodstock Publisher, 2018. [본문으로]
  3.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본문으로]
  4.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본문으로]
  5. 김초엽·김원영, 위의 책, 73~80쪽. [본문으로]
  6. 라보리아 큐보닉스, 아그라파 소사이어티 역, 『제노페미니즘, 미디어버스, 2019. [본문으로]
  7. 김영옥·전희경·이지은·메이,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봄날의책, 202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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