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기’로 다시 보기 (2)] ‘로라’, 신체, 욕망 : 이해의 실패에 관하여 (김은주)

 

 「로라」를 쓴 김초엽은 작가 소개에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거의 항상 실패하는 것 같습니다.”[각주:1] 나 역시, 「로라」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실패한 느낌이 든다. 이 실패란 문제적인가?

 

 

 

 

 

 

 「로라」는 문장 비유의 사이트 해시태그(#)가 알려주듯, #환상지와 #디스포리아를 다룬 SF소설이다. 한국표준질병사인 분류는 환상지증후군(Phantom limb syndrome with pain)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질환은 사고나 수술 등으로 절단해 상실한 신체부위가 여전히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통증까지 동반된다. 실제로 신체를 상실한 환자의 약 78~85%가 환상통을 겪고, 대부분 48시간이 지나면 해소되지만, 1년 이상 환상통을 경험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하지만 소설 「로라」에 등장하는 환상통은 절단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함에도 있지 않은 신체, 환상지로 인한 통증이다.

 

 환상통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처럼, 환상지 현상 역시 그 이유가 불명확하다. 환상통 치료에 쓰이는 특수 치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거울 치료’다.[각주:2] 이 치료는 환자의 손이나 발을 거울 칸막이가 장착된 상자에 넣었다 빼도록 해서 환자가 잃어버린 신체부위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치료법이다. 절단 부위가 사라졌다는 것을 믿지 못해 고통을 겪는 환자에게 신체 일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주는 것이다. 환상지를 지닌 ‘로라’에게 고통을 사라지게 해 준 것 역시 거울 치료이다. 실재하지 않음에도 엄연히 느껴지는 신체 일부를 거울을 통해 있는 것으로 통합하면서 적어도 부재에서 비롯된 고통은 사라진다. 있어야 할 사지가 없다는 인지로 인한 자극의 활성화가 뇌에 일으키는 고통을 느끼는 ‘로라’는 거울을 통해서나마 시각적으로 그 부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치료를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가장 널리 알려진 이유는 뇌의 가소성이다.[각주:3] 가소성은 뇌가 계속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 가소성의 원리는 ‘사용하면 강화되고, 사용하지 않으면 약화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강화된 것은 살아남으나 약화되며 없어지기 쉽다. 뇌 가소성의 원리가 어떻게 환상지를 설명한다는 것인가? 우선, 신체는 감각정보를 계속해서 대뇌의 감각피질로 보낸다. 감각피질 위에 그 감각정보가 공급되는 신체부위를 표시하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신체의 지도가 그려진다. 이를 ‘감각피질의 신체지도’라고도 부른다. 감각피질의 신체지도는 유전과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성인기에도 계속 변화한다.

 

 그래서 오른손을 잃은 사람의 경우, 절단부위에서 감각정보가 더 이상 전달되지 않으면 그 부위의 감각피질은 신체지도의 주변부에 위치한 다른 부위, 얼굴이나 팔에서 오는 감각에 반응한다. 세수할 때나 바람이 불어올 때, 얼굴이나 팔이 자극되면 사라진 손에서도 그 자극이동시에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절단부위의 주변부에 어떻게 감각이 반응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과거에 만들어졌으나 사용되지 않았던 잉여 연결의 재활성화의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실제 어린 시절 훈련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경회로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으면 흔적으로 존재하다가 성인기에 동일한 훈련에 의해 재활성화된다는 과학적 증거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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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고유의 신체 지도를 가진다. 팔과 다리의 위치를 의식하지 않을 때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몸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고유수용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어긋난 고유수용감각을 가진다. 다시 말해, ‘잘못된 지도’를 가진다.”

 

 얼핏 읽기에, 「로라」는 감각피질의 신체지도가 어긋나, 환상지에 시달리는 사람의 이야기로 보인다. 그렇지만 사실 소설이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로라’를 이해하려는 ‘진’의 실패이다. ‘로라’는 자신의 몸에 실재하는 두 개의 팔 이외에 보이지 않는 세 번째 팔의 실재를 뚜렷하게 감각한다. ‘로라’는 ‘진’을 눈에 보이는 세 번째 팔로 안기를 언제나 원해왔다. 이 욕망은 그저 바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팔인 ‘기계 팔’의 이식 계획과 실행으로 이어진다.

 

 ‘로라’는 환상지 현상을 없애려는 소위 ‘정상화’의 의료 담론을 따르기보다, 오히려 느껴지는 감각에 걸맞는 신체의 일부를 만들려 한다. 이러한 ‘로라’를 ‘진’이 이해해보려 한다고 소설은 말한다. 그 과정을 여행이라 부르는 ‘진’은 다양한 연구들을 살피기도 하고, ‘로라’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진’이 만나는 사람들은 “몸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고유수용감각”에 ‘문제’가 있어 자신이 느끼는 감각과 실재하는 몸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진’은 그들을 만난 경험과 인터뷰로 『잘못된 지도』라는 책을 쓴다. 하지만 그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전히 불가해한 L에게”라고.

 

 사실, 진은 로라를 이해할 수가 없다. “로라를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여행은 진에게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진이 왜 로라를 이해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소설은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일상에서 사소한 이질감을 마주칠 때 진은 로라를 생각했다. 로라의 삶은 이질감으로 가득 차 있을까. 거듭 던진 질문에도 불구하고, 진은 로라의 삶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라고 쓴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그러나, 책을 쓴다는 것은 ‘로라’를 이해하기 위함만은 아닐 것이다. 『잘못된 지도』를 쓴 이후에도 진은 제3의 팔을 이식하겠다는 ‘로라’를 이해할 수 없었고, ‘로라’ 역시 이러한 ‘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 그 여행을 다녀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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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유수용감각의 문제로 인한 불일치의 감각이 사라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몸이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팔과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지도와 현실의 몸을 일치시키기를 원한다.”

 

 감각과 실재의 일치를 위해 신체를 변형하거나 절단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하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찾아간 의료제도가 언제나 ‘정상화’를 이야기할 뿐, 적절한 치료법은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의사들은 이들에게 “몸 정체성 통합장애”라고 진단하며, “엉뚱한 시도를 연달아서 해”댈 뿐이다. 결국에 고통받는 이들이 그 끔찍한 불일치감에서 멀어지기 위한 방법은 신체의 무력화를 시행해줄 의사를 찾아나서는 것밖에 없다.

 

 “잘못된 지도”를 가진 것과 같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수십 년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어요. 증상이 심해지면 병원에 감금당하거나, 언젠가 뇌를 치료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위로를 받는 게 다입니다.” 이들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조직하면서, 절단과 변형을 욕망하고 시도한다. 하지만 불일치 감각을 느끼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이들을 비난한다.

 

 ‘로라’는 결국 신체에 세 번째 팔을 연결한다. 그로 인해 균형을 잃고 염증을 겪고, “원래 가지고 있던 팔의 기능마저 저하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로라’는 “세 번째 팔을 그냥 가진 채로 살아가겠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만약에 ‘정상적 신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시도가 극단적으로는 절단의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장애의 낭만화로 비판받을 여지도 있지만, 다른 한편, 이들의 몸부림이 ‘정상화’를 강요하는 과학기술 및 의료 담론을 거부하는 신체들의 발화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확실히, ‘로라’를 비롯한 “잘못된 지도”를 가진 이들의 욕망은 ‘정상’을 향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설 「로라」의 인물들에게 정상화의 담론은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상화’의 담론은 그들의 신체에 비정상이자 열등한 신체라는 낙인을 찍을 뿐이다. 소위 ‘정상적 신체’를 지닌 사람들은 신체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의 자연스러움을 정상적 상태로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신체는 불편할 때 인식된다. ‘정상적 신체’는 신체에 대한 감각의 무감함과 정신과 조응하는 일치감과 동일시된다. 불편함이 없어 신체 감각의 유별남이 없고, 그로 인해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일 때, 신체는 ‘정상적’이다. 하지만 잘못된 신체지도를 지닌 이들은 그 누구보다 신체의 감각에 예민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체에 대해 바라며, 누군가는 병리적이라고 진단하는 신체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욕망을 긍정한다.

 

 신체가 ‘정상화’에 맞추어져 있을 때, 정상에서 어긋난 신체는 병리의 눈금을 통과하여 ‘손상’(impairment), ‘장애’(disability)에 맞추어지고 무능력으로 재현된다. 손상과 장애 모델은 정상적이지 않은 신체의 존재론을 비틀어진, 모자란, 결핍의 존재이자, 시혜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정상화’의 담론에서 벗어났을 때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각주:4]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를 때, 신체는 잠재태로서의 신체이다. 이러한 신체는 정상적이지 않아 그 자체로 고역스러운 물질인 신체가 결코 아니며, 탈신체화의 욕망과도 거리가 멀다. 이 신체는 욕망하는 신체이자, ‘정상화’의 욕망과 무관한 살아있는 생생한 힘으로 꿈틀거리는 욕망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이 신체는 격동하는 신체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바를 온전한 삶으로 긍정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나간다.

 

 그래서, 소설에서 어긋난 신체지도를 가진 사람들의 시도는 이상적 신체지도를 불완전 신체에 끼워 맞추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정신과 신체가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고 그 사이의 위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각한다. 근대의 정신/신체 이분법은 정신의 우위와 신체의 가치 저하를 당연시하고, ‘정상적’ 신체의 보편성을 규준하며, 손상된 신체를 ‘정상성’에 맞추려는 정신의 노력에 따른 극복의 가능성을 믿는다.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신체들은 결코 단일한 형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각 개체마다 고유한 위치, 힘, 감각, 흐름, 규범이 있음을 보이며, 신체를 섣부르게 규격화하지 않는다. 그 신체들은 각기 다른 신체이자 무수한 차이들로서 존재함을 당연시하며, 그들의 신체에 대한 욕망 역시 각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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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는 ‘병리적’이라고 재단하는 신체에서 ‘로라’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욕망을 펼쳐내면서 각각 차이 나는 신체로서 존재할 권리를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정상’을 강요하는 사회, 하나의 욕망만을 규준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정상성’의 호혜 섞인 시선의 이해를 통과하기를 거부한다. ‘정상적’ 신체는 ‘비정상적’ 신체를 이해의 대상으로 놓고 이해할 수 있는 지식으로 만들어내려 한다. 이러한 이해는 ‘비정상성’으로 타자화하고 주변화함으로써, 사실상 각기 다른 신체들의 욕망을 그저 비정상적인 것으로 묶어내어 배제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로라’가 ‘진’의 이해를 구하지 않았던 일, ‘진’이 그 모든 긴 여행을 끝내고, 차이 나는 신체들의 욕망을 인터뷰 후, 끝끝내 로라를 이해하기에 실패했다는 바를 드러낸 것은, 소설 「로라」의 윤리적 미덕이다. 이해의 환상은 어떤 존재를 이해의 대상으로 만든다. ‘진’은 ‘로라’에게 왜 그렇게 존재하고 싶냐고 결코 물은 적이 없다. ‘로라’는 그저 충실히 살고자 욕망하며, 이러한 ‘로라’의 존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왜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요. 나는 당신의 이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진’은 여행 끝에 그저 불가해한 로라의 욕망 곁에 머무른다. ‘진’의 이해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은 ‘로라’를 여전히 사랑하고, ‘로라’는 ‘진’을 세 번째 팔로 안는다. 나는 그래서 이해의 실패를 인정하는 이 소설의 미덕과 실패에 도달하는 이해의 미덕에 안도한다. 그리고 이해의 실패가 그려낸 경계의 꿈틀거림, 바깥의 역량을 감각한다.

 


김 은 주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포스트휴먼 윤리와 페미니즘 그리고 시민권에 관심을 두고 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2017),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2019)을 쓰고,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2020)를 우리말로 옮겼다.

 

페이스북 계정: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1403703060

 



 

이어가는 말 : 젠더·어펙트 코멘터리

 

 

권두현 : 비어‘있음’을 통해 존재하는 것들은 ‘보기’가 아니라 ‘되기’를 요청한다. 『사이보그가 되다』(사계절, 2021.)를 통해 장애인의 신체가 드러내듯이, ‘되기’란 사실상 매끄럽고 쉬운 과정이라 할 수 없다. ‘사이보그’로서 김초엽은 또 다른 지면, 소설 「로라」를 통해 이러한 ‘되기’를 향해 나아가는 신체의 역능, 그 역능이 불러일으키는 신체 안팎의 긴장, 그 긴장에 따른 갈등과 실패의 과정을 다시 한 번 예증해 보인다. 그 신체는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고, 물리적 몸의 경계 바깥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다소 기이하지만, 무엇보다도 타자의 이해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경이롭다. ‘규격’과 ‘표준’을 벗어난 신체에 대한 이해는 필연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며, 따라서 실패를 통해 그 시도를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시도의 역사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체(subject)와 신체(body)와 육체(flesh)가 ‘불일치’한다는 소설적 진실은 그저 픽션이 아니라, 이들을 일치를 의심하지 않았던 역사야말로 픽션에 가까운 것임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해의 시도를 감행한 「로라」는 애틋함을 넘어 충분히 비장하다.

 

김대성 :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한 친구에게 안부 편지를 대신해 이 글을 보내고 싶다. 이 비평을 읽으며 나는 김초엽의 「로라」를 퀴어 소설이라 상상했다. 두 팔의 기능이 저하되는 것까지 무릅쓰고 기어이 세 번째 팔을 신체에 연결하는, ‘잘못된 지도’를 가지고 있는 이. 그러나 “병리적이라고 진단하는 신체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욕망을 긍정”하는 이. 여전히 트랜지션 중인 그 친구는 열 시간이 넘도록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경기도를 넘고, 서울특별시를 자주 건너곤 했다는 얘길 해주었다. 오래 잠수하다가 물위로 올라와 가쁜 숨을 내쉬는 사람처럼 글을 읽고 급하게 옮겨 적은 메모와 함께 한 통의 편지를, 한 권의 책 사이에 끼워 건냈던 나의 ‘세 번째’ 친구. ‘로라’가 세 번째 팔로 ‘진’을 안았던 것처럼 그 친구가 내게 보냈던 편지에도 ‘세 번째 팔’로 하는 포옹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나는 끝내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그 팔을 잡아주지도 못했다. 다만, 김초엽의 「로라」가 끝내 이해받지 못한 누군가의 ‘죽음 이후’의 시간과 무관한 것이어서, ‘로라’와 ‘진’ 사이에 놓여 있던 견고한 이해불가능함 앞에서 겨우 안도했다.

 

신민희 : 뱀을 다 그리고 나서 있지도 않은 발을 덧붙여 그려 넣은 ‘사족’은 쓸데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신체를 뜻하기도 한다. 이 글을 읽으며 ‘사족을 달다’라는 말을 재정위 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사라진 것에 대한 보완도, 더 ‘나은’ 신체에 대한 욕망도 아닌 ‘증강’하는 신체에 대한 의미로써 말이다. 「로라」의 장면에도 드러나지만 ‘손이 부족하다’라는 비유적 표현은 비유적 표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가끔 팔이 모자란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평소에는 두 팔이 그렇게 부족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신체에 대한 감각. 로라의 세 번째 팔은 그런 의미에서 트랜스휴먼, 환상지와는 다른 ‘사족을 다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사족으로만 덧붙여온 감각을 의식하도록 만든다. 사라진 것에 대한 통증이 아니라, 존재한 적도 없는 것에 대한 통증은 ‘사족을 다는’ 서사들로 이름 붙여온 서사들을 다시 곁으로 불어온다.

 

권영빈 : 이 글은 김초엽의 소설 「로라」에 제시되는 ‘잘못된 신체 지도’의 의미를 중층적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다. 부분들 간의 무수한 형태적·기능적 결합, 우연한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그것들의 ‘통합’을 관장하는 자리를 끊임없이 마련해온 인간사의 지평에서, ‘로라’의 ‘세 번째 팔’ 문제는 개별 신체를 넘어 타자와의 관계, 지역과 공동체, 세계 경제와 생명-죽음정치의 역학 속에서도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통합 처리될 수 없는 잘못된 신체 부위라고 지목되어 온 대상은 누구이고 무엇이며 어디였는가에 대해 확장된 물음을 던지는 글이다. 나아가 ‘로라’의 ‘세 번째 팔’은 그 자신만을 위해서, 또는 ‘진’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와 욕망 자체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든 창조하는 힘의 원천을 보여준다. 불일치와 이해의 실패를 통해 비로소 발산되는 존재의 역량을 표출하는 이 글과 「로라」는, ‘되기’로 다시 본다는 행위의 의미 또한 다시 볼 수 있게 만든다.

 

  1. 김초엽, 「로라」, 웹진 『비유』 제23호, 서울문화재단, 2019. 11. (원문보기 : www.sfac.or.kr/literature/#/html/epi_view.asp?cover_type=VWCON00002&cover_idx=97&page=1&epi_idx=576 )「로라」에서 직접 인용한 글은 쪽수 밝히지 않고 인용부호로 표시. [본문으로]
  2. 「개선 현실을 이용한 통증 치료」, 『포항공대신문』, 2018. 4. 18. (원문보기 : http://times.postech.ac.kr/news/articleView.html?idxno=20157) [본문으로]
  3. 「뇌는 훈련하면 변화한다」, 『The Science Times』, 2015. 11. 4. (원문보기 :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B%87%8C%EB%8A%94-%ED%9B%88%EB%A0%A8%ED%95%98%EB%A9%B4-%EB%B3%80%ED%99%94%ED%95%9C%EB%8B%A4) [본문으로]
  4. Gilles Deleuze,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Minuit, 1981; 박기순 역,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1999, 168/18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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