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기’로 다시 보기 (4)]  ‘되기’의 실행 : 괴물의 역량과 여성의 글쓰기에 관하여 -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김은주)

‘되기’의 실행: 괴물의 역량과 여성의 글쓰기에 관하여

-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각주:1]

 

((좌)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이나경 역, 아르테, 2020; (우)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김선형 역, 문학동네, 2012)

 

 

I.

   메리 셸리(Mary Shelley)는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서문에서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는가에 대해 쓴다. 21세가 되던 1816년 여름, 셸리는 친구들과 제네바로 여행을 떠난다. 여름답지 않게 춥고 비가 많이 오던 그 시절, 그는 저녁마다 모닥불을 지피고 친구들과 독일 유령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셸리와 친구들은 “괴담을 나누다 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각주:2]해 이야기를 한 편씩 쓰기로 한다. 날씨가 개자 친구들은 멋진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이야기 짓기를 그만두었지만 셸리는 오히려 이 장엄한 경치 앞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한 글을 계속해서 쓴다. 그 결과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이 책의 초판은 1818년에 발표되고 1831년 개작하여 출간된다.

 

   소설은 영화화되면서 크게 인기를 끈다. 보리스 칼로프(Boris Karloff)의 괴물 역할 모습으로 유명한 1931년 제임스 웨일(James Whale)의 <프랑켄슈타인>이 대표적이다. 그 성공에 힘입어 후속작이자 연작 시리즈인 1935년의 <프랑켄슈타인의 신부(Bride)>, <프랑켄슈타인의 아들>, <프랑켄슈타인의 저택>, <프랑켄슈타인의 저주> 등이 차례로 제작된다.

 

 

II.

   우리가 흔히 프랑켄슈타인으로 떠올리는 그 존재에게는 사실 이름이 없다. 그를 창조한 자의 이름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오랫동안 신의 피조물로 자신을 여기던 인간은 과학의 발전으로 신의 영역에 해당하는 일인 생명 창조에 도전한다. 기계로 만들어진 인조인간에서부터 시작해 여성의 육체와 무관한 방식으로 생명을 지닌 인간을 탄생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는 인간을 남성 창조자로서 전제하고 삶과 죽음을 관장하면서 자연을 정복하며 관리하겠다는 야심 찬 욕구이자, 이성의 빛으로 우매하고 어두운 자연을 깨우고 밝히겠다는 시도이다.

 

   이러한 야심찬 욕구는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2부에서 인공적 생명물인 호문쿨루스(Homunculus)의 등장으로 나타난다.[각주:3] 플라스크 속 작은 인간이라는 뜻인 호문쿨루스는 중세의 연금술이 아니라 근대의 자연과학에 근거한 수백 가지 물질을 혼합하는 화학적 합성을 통해 만들어진다. 제우스에게서 태어난 아테네 신화와 인간의 본질과 정수가 정액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떠올린다면, 호문쿨루스의 존재는 여성 없는 남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욕망으로서는 전혀 새롭지 않다.

 

   『프랑켄슈타인 역시, 근대 자연과학의 힘을 확신하면서 인간과 같은 생명을 창조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파우스트의 호문쿨루스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호문쿨루스와는 달리, 직류 전기요법(galvanism), 다시 말해 전기 충격을 통해 죽은 인간의 신체들의 부분들을 붙여 놓은 물질 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액자 구조와 서간의 형식을 빌려 프랑켄슈타인의 서사는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체를 탄생시킨 이후로부터 시작된다.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생명 창조에 있지 않다. 오히려, 사건은 손수 창조한 피조물을 괴물이라 부르면서 그로부터 도망친 상황에서 비롯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생명을 불어넣었으나 자신이 만들어낸 생명체를 책임지지 않는다. 그저 그 존재를 괴물로 비하하고,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역겨움을 토하면서 “생명을 준 더러운 악마”[각주:4]로 부르며 유대감을 호소하는 피조물과 자신을 분리시키려 부단히 애쓸 뿐이다.

 

   이름 없이 탄생한 자, 그저 괴물, 악마로 천대된 자, 버려진 존재는 끝끝내 생을 이으며 점차 지식을 습득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비참한 괴물로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한탄한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기존의 어떤 존재와도 무관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나와 달랐다. 신의 손에서 나온 아담은 완벽한 피조물이었다. 조물주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 행복하고 번영을 누리는 존재였다. 더욱 탁월한 본성을 지닌 존재들과 대화를 나누고 지식을 전수받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나는 비참하고 무기력하고 외로웠다. 나는 사탄이 내 처지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각주:5]

 

  그는 축복과는 무관한, 저주받은 존재이자 비정상적 기형인 비참한 이로 자신을 이해하면서 흉측한 괴물이라는 낙인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사탄의 상황과 동일시하면서 이런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을 증오한다. 이후 괴물의 범죄와 프랑켄슈타인의 파멸은 무책임이 일으킨 분노와 증오의 궤도에서 발생한다.

 

 

III.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소설은 북극으로 떠나는 괴물의 목소리로 끝난다. 이렇게 탄생에서 시작해 파멸로 끝나는 프랑켄슈타인의 서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좀비나 뱀파이어가 그러하듯, 자연의 질서를 깨뜨린다는 점에서 공포의 감정을 일깨운 고딕 공포 소설로 소개되기도 한다.

 

   사실상, 프랑켄슈타인이 야기하는 공포는 창조자의 역할에 자부하던 인간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피조물이 괴물이라는 사실과 근대 과학기술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공포는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확신에 따른 환희의 감정과 대극점에 있고, 끝없는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득함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피조물 괴물이 창조자 인간을 공격하고 살해한 사건, 그리고 이 괴물을 만들어낸 재료가 실은 비록 죽은 자들의 것이나 인간의 육체와 동일하다는 사실은 인간 자신에 대한 깊은 불신과 도덕적 회의로 이어지면서 실존적 공포의 극단화를 야기한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일으키는 공포의 감정은 그 이야기 구조상, 피조물 괴물을 쫓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월턴의 표현이자, 또한 탐구로 포장된 무자비한 창조의 결과를 책임지지 않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품은 두려움과 맞닿아있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감정은 남성 창조주가 느끼는 공포이기도 하다. 공포의 감정은 일견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공포의 강조가 앞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이럴 일이 없다는 판타지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것으로만 전제될 때에는 문제가 된다. 이러한 공포는 숭엄한 감정을 전달하는 이야기로서 프랑켄슈타인에 매료되는 증후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세계문학에서 메리 셸리는 SF의 시초자로 평가되고 프랑켄슈타인은 최초의 SF소설로 소개된다. 당연히 프랑켄슈타인은 고딕 공포 소설의 계열에 속하기도 한다. 또한 공포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것은 때때로 매우 어렵다. 이에 관해 조애나 러스(Joanna Russ)는 공포 소설과 SF가 사람이 아닌 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큰 유사성을 지닌다고 설명한다.[각주:6]

 

   중요한 것은 프랑켄슈타인이 SF소설인 이유이다. 조안나 러스는 「사변: SF에서 가정이란 무엇인가」에서, SF에 대한 새뮤얼 딜레이니(Samuel Ray Delany)의 정의를 살핀다. SF가 다루는 주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라는 자연주의 소설의 주제와는 다르다. 또한 그저 미래를 예측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며, 현실을 위반하는 것, 다시 말해 일어날 리 없고 존재할 리 없는 것, 발생할 가능성 자체가 완전히 부정되는 그러한 주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러스는 힘주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SF 소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한 것을 주제로 삼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바로 “불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것”에 관한 것이다.[각주:7] 프랑켄슈타인에서 생명 창조는 메리 셸리가 글을 쓸 당시만 하더라도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지금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이 SF인 까닭은 기술을 이용한 생명 창조라는 소재 때문만은 아니다. 창조자 남성 인간 외에 존재를 괴물이라 부르는 인간의 오만에 관한 비판, “인공적인 삶을 창조함으로써 신을 연기하는 과학자들의 자만심 비판”[각주:8] 이 SF로서 프랑켄슈타인의 핵심을 이룬다.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자연, 인간-사물의 경계를 허무는 서사로서 이들 비인간 타자가 일으키는 힘, 괴물의 역량에 대한 사유를 이끈다. 괴물, 타자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기괴한 변형과 광폭한 힘으로 불안과 공포만을 일으키는 존재는 아니다. 결국 이야기 속 공포를 일으키는 존재에 그친다면 괴물은 응시에 종속된 전시의 대상, 보편적 인간의 시선에 재현된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그로테스크한 존재를 아우르면서 세계의 흠이자 얼룩으로 비하된 별종, 기형, 괴물을 드러내며 포획될 수 없는 소위 ‘비정상적’ 존재의 역량과 실행에 주목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둘러싼 공포를 향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근대성의 조건을 문제시함으로써 SF의 위상을 갖는다. 이러한 SF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에 의문을 던지며 이들 간의 연속체적 관계를 확인시켜 보인다.

 

 

Ⅳ.

“나는 무엇일까? 그 질문이 또다시 튀어나왔지만, 대답이라고는 신음뿐이었다”[각주:9]

 

   메리 셸리의 SF 프랑켄슈타인은 오랫동안 여성혐오적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산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잔 구바(Susan Gubar)는 프랑켄슈타인을 실낙원에 나오는 여성혐오의 판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집안의 천사의 모습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1823년에는, 메리 셸리의 동의 없이 그의 아버지 고드윈이 프랑켄슈타인을 수정하려 하기도 했다. 결국 1831년 서문과 함께 엘리자베스에 관한 설명 일부를 고쳐 프랑켄슈타인을 재출판했다. 메리 셸리는 작가로서 이 책을 쓰기까지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저명한 문인 두 사람의 딸”로서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의 열망을 품고 혼자서 글을 써 왔으나, 실제로 창작과 출간에 이르는 과정이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작가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자체의 어려움 역시 동반하기에, 괴물이라 불린 존재가 던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은 메리 셸리 그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자신이 낳은 “끔찍한 자식”(hideous progeny)[각주:10]으로 칭한 바 있다. 흉측하고도 끔직한 자식인 이 소설은 임신과 출산의 능력으로 인해 이성적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광폭한 힘을 지닌 타자이자 괴물로 불린 여성 역량의 산물이기도 하다. 여성이 타자이자 괴물로 불린 까닭은 이성의 통제 밖의 야만의 자연과 가까운 육체로부터 기인한다. 우리도 잘 알고 있듯, 집안의 천사가 집 밖을 벗어나면 유해한 여성, 잔혹한 악마, 끔찍한 괴물로 재현되어 버린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라는 부른 존재는 매끈한 신체 통일성을 갖추지 못한 부분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기괴한 모양새로 묘사되며 ‘괴물’이라 불린 그 존재자 스스로도 인간과 다른 자신의 외모에 크게 절망한다. 영화는 큰 체구, 꿰맨 자국들, 피부 아래 있는 근육과 혈관을 거의 덮지도 못하는 상태의 기괴한 외모를 예상치 못한 광폭한 힘과 연결하여 강조한다. 괴물의 광기 어린 폭발적 힘은 그의 타자성에서 비롯하며, 육체의 특징으로 드러난다.

 

   문제는 결코 감추어질 수 없는 괴물의 역량을 폭력의 극단화를 통해 공포의 전율로 소진하거나 숭배로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편적 재현 질서를 벗어나 괴물 그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한 점에서, 여성혐오가 일상 그 자체인 시대에 여성의 글쓰기를 감행한 메리 셸리는 러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실행한 것은 아닐까. “낡은 신화를 이용하는 한 여자는 쓸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신화라면 어떨까?”[각주:11] 기독 창조주 아버지 신화에서 벗어난, “산업화 시대의 가장 위대한 단일 신화의 창시자”[각주:12], 메리 셸리는 괴물적 여성의 역량으로 SF 프랑켄슈타인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자신의 목소리와 모습을 갖추려는 변용의 욕망으로서 되기를 실행했다.

 


김 은 주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포스트휴먼 윤리와 페미니즘 그리고 시민권에 관심을 두고 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2017),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2019) 등을 쓰고,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2020), 『제4물결 페미니즘』(2021)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페이스북 계정: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1403703060

 



이어가는 말 : 젠더·어펙트 코멘터리

 

 

* 권영빈 : 필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여러 겹의 ‘되기’의 서사로 읽을 수 있다. 창조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진 (남성)인간에게 ‘되기’는 스스로를 향한 것과 분리되지 않는 혐오와 증오의 다른 말이다. 그러나 그 피조물은 자기만의 이름도 없이 ‘공포’로 존재하면서도, 그 ‘존재함’ 자체를 언제나 ‘실행’하고 있다. 메리 셸리의 작가 ‘되기’는 이 무서운 존재를 ‘괴물적 여성’의 창조하고 생성하려는 욕망, 역량으로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가능했다. 본문에 소개되는 조애나 러스의 말을 빌려, 우리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의 글쓰기는 불가능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언제나 실행중인 ‘되기’로 존재한다.

 

* 권두현 : ‘프랑켄슈타인’의 기괴함은 그 형상으로부터 제일 먼저 발견되는 것이지만, 형상에 앞서 그 서사부터가 SF적 맥락으로부터 찢겨나가 그저 우스꽝스러운 형상이 마치 ‘밈’처럼 회자되는 현상에도 있다고 하겠다. 프랑켄슈타인은 누구인가. 프랑켄슈타인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반복되면서 변주되는 밈이 아니라 그 원천으로서의 소설을 접하면서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은 번번이 간과되었던 혐의가 짙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SF라는 ‘장르’의 원형으로서 반복적으로 소환될 때마다 작가의 역량과 되기의 실천이 비가시화되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이름은 위치와 맥락에서 힘을 발휘하며, 그 힘은 텍스트를 통해 전이된다. 프랑켄슈타인과 메리 셸리의 이름을 함께 기억하고 동시에 감각해야 할 이유다.

 

* 김대성 : SF라는 양식과 괴물’이라는 소재 및 표현 방식은 장르를 불문하고 널리 활용되어 왔다. 비정상적인 것의 존재적 역량을 재해석해온 방법론의 역사를 헤아리면서 이 글의 인용문인 “나는 비참하고 무기력하고 외로웠다.”는 문장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된다. ‘아니오’라는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이, (금수저가 아님에도) 유독 특출나고 뛰어난 이, 문제제기를 하고 사건을 공론화 하는 이,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지마 끝까지 싸우는 이 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비참하고 무기력하고 외로운’ 동시대의 ‘프랑켄슈타인들’의 역량을 주목하고 이를 증폭시킬 수 있는 해석의 방식 곁에 즉각적으로 접속하고 개입할 수 있는 전술과 전략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보이는 사건 곁에서 이를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로 살려내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번역하고, 기록하는 역량이 미래를 앞당겨 ‘오늘’을 만들고 있음을, 그런 동시대의 물결이 곳곳에 흘러넘치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 신민희 : 이 글은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의 서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그곳이었을까? 글을 읽고 나면, 다시금 글의 서두와 서문의 장면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제네바로 떠난 여행이었고, 여름이지만 춥고 비가 많이 왔다고 하니, 낯설지만 설레는 다른 어떤 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모닥불을 지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이야기는 괴담이다. 이상하고 괴이한, 그래서 넘쳐나는 이야기들은 아니었을까. 축축한 날씨와 둘러앉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흐르고, 넘쳐나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무엇을 쓰게 했다. 무엇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순간을 함께 한다.

 

  1. 초판 서문과 1831년 서문을 인용할 시에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이나경 역, 아르테, 2020 참고하고, 본문은 초판본을 번역한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김선형 역, 문학동네, 2012 인용했다. [본문으로]
  2. 리 셸리(2020), 의 책, 13. [본문으로]
  3. 여성의 육체와 무관한 생명 창조에 대해서 처음으로 논한 것은 16세기 스위스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이다. 그의 저작 De Natura Rerum (물의 본성에 대해)에 따르면 남성의 정액을 증류기 속에 넣고 40일간 밀봉해서 부패시키면 인간의 형태를 가진 투명한 생명체가 탄생한다고 한다. 여기에 인간의 혈액을 넣고 40일 동안 말의 체온과 똑같은 온도에서 보존하면 인간 아이가 된다고 한다. 다만 이 아이는 인간의 아이들보다 작았고 유리용기 안에서만 살 수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장면이 있다. 구사노 다쿠미, 환상동물사전, 송현아 역, 2001. 참고. [본문으로]
  4. 메리 셸리(2012), 앞의 책, 98. [본문으로]
  5. 메리 셸리(2012), 앞의 책, 173쪽. [본문으로]
  6. 조애나 러스,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는가, 나현영 역, 포도밭, 2020, 157-158. [본문으로]
  7. 조애나 러스(2020), 위의 책, 67. [본문으로]
  8. 로지 브라이도티, 변신, 김은주 역, 꿈꾼문고, 2020, 385. [본문으로]
  9. 메리 셸리(2012), 앞의 책, 161쪽. [본문으로]
  10. 메리 셸리(2020), 앞의 책, 22. [본문으로]
  11. 조애나 러스(2020), 앞의 책, 220. [본문으로]
  12. 로지 브라이도티(2020), 앞의 책, 28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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