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몸의 철학’이 유행했다. 니체와 하이데거, 베르그송, 메를로-퐁티, 푸코, 들뢰즈 같은 근대 철학의 전복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권위가 무너진 자리를 메웠다. 나는 그 시기에 ‘몸 철학’의 세례를 받았다. 자연, 신체, 물질을 넘어서려 했던 형이상학(metaphysics)의 선험론에 맞선 자연·신체(physis)의 반론과 도전, 서양철학사에서 지워졌던 몸의 권리 주장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사유의 기반이 어디인가? 감각과 감정의 장소로서 신체는 이성 판단의 장애물인가? 신체 없는 사유가 가능한가? 인간의 사유와 기계의 계산은 차이가 무엇인가? 그런 질문들이 쏟아졌고, 몸은 사유의 장소로 재탄생하는 듯이 보였다. 이 치열한 로고스와 파토스의 싸움이 이분법의 새로운 버전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채 십 년이 걸리지 않았다. 90년대 몸의 철학은 왜 해방의 길을 내지 못했을까?
사변적으로 수용된 몸의 긍정은 ‘욕망하는 주체’를 승인하며 자본주의적으로 재구성됐다. 이성의 지배와 계몽의 통치를 분쇄한 것은 ‘민중의 몸’이 아니었고 신체의 자본화는 가속화되었다. 몸에 대한 연구들은 철학적 사상적 싸움을 통해 근본적인 사유의 틀을 바꾸기보다는 문화적 해석론으로 귀결됐다. 몸이라는 분석틀은 현상의 각론들에 대해선 해석의 지침을 주었지만, 각각의 사례들을 연결하고 총합해내지는 못했다. 몸 철학을 주도한 것은 남성철학자들이었고, 여성주의 언어는 아주 드물게 나타났다. 세계 속에서 위치한 몸의 경험과 사유의 결과물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몸의 철학에서 몸은 어떤 몸이었는가? 그 때의 ‘몸’은 늘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몸(the body)’이었다. 주로 대학의 강단철학을 통해 유입된 당시의 한국적 수입 경로에서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소수자성의 신체 경험이 더욱 빈약했고, 많은 남성 철학자들이 자신에게 결여된 몸들을 사유하지 못하면서도 몸 없는 앎에 대한 모순을 자각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 철학에서 ‘돌봄(Sorge)’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지만, 기술시대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저술하는 동안 도시락 바구니와 빨랫감을 들고 오두막 집필실을 날마다 오갔던 것은 그의 아내였다. 『숲길(Holtzwege)』은 음식과 옷을 날랐던 여성의 ‘숲길’ 위에서 태어났다.
‘정신에 대한 신체’나 ‘이성에 대한 감성’이 아니라, ‘몸들의 관계와 연결’을 몸의 복수성, 관계성, 연결성을 중심에 놓고 젠더 연구와 정동 연구를 결합하려는 이 ‘젠더·어펙트 연구’의 문제의식은 그런 점에서 90년대 몸 담론의 굴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정동(affect) 역시 최근 몇 년간 90년대 지적 데탕트시기에 부상했던 여러 담론들이 재부상(reboot)하는 흐름 속에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다. ‘세계화’라는 문을 통해 들어온 신사조는 2000년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운동과 결합한 실천 담론으로 재부상했다.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한 페미니즘 이론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환경/생태주의 이론 역시 기후위기라는 현실의 위기에 대응하는 실천론적 돌파구로 모색되고 있다. 정동 연구는 어떤 운동적 요구와 결합하고 있는가? 90년대 몸의 철학이 내세웠던 몸은 이성주의에 대한 대항무기로서의 보편적이고 추상적 관념으로서의 ‘몸’이었다. 그 몸의 질문과 굴절을 경유하여 젠더·어펙트 연구는 어떤 구체적인 ‘몸들’과 그 ‘몸들의 관계’를 한국 사회의 현재적 사건과 맥락 위에서 드러낼 것인가. 젠더·어펙트 총서 1권으로 발간된 이 책은 앞으로의 연구 방향과 의미를 짚어내야 할 것이다.
책의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정동연구의 필요성’ 혹은 ‘젠더 연구와 정동 연구의 연결성이 갖는 의미’를 공유한다. 그런데 정동 개념의 설명과 강조가 한 책에서 계속 반복되니 과잉의 느낌을 준다. 책은 각각 수행된 독립 연구들을 묶었는데, 편집자는 관련된 주제들을 시간(역사), 공간(장소), 매체(미디어)로 구획하여 전체 3부로 구성함으로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서문도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길잡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길잡이에 의지하고도 전체를 관통하여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각각의 논문들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고 흥미로운 논점들을 제공하고 있지만, 하나의 실로 꿰어내기가 힘들었다. 12권의 책이 될 글들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할까. 각각의 논문에 대해 12번 논평을 하는 것이 쉬울 뻔 했다. 그걸 모은 한 권의 책에 대해 서평을 쓴다는 것은 종합의 일을 서평자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니 간단치가 않다. 논평은 필자를 위한 것이고 서평은 독자를 위한 것이다. 논평과 서평 중 어디에 무게를 둘지도 고민이다. 독자들은 관심 있는 분야의 글부터 골라서 읽어가도 좋겠다.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신민희의 ‘항구도시 부산과 여성노동자들의 해양노동’을 제일 먼저 읽었다. ‘부산-항구-여성-해양노동’이라는 연결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1차 산업과 2차 산업, 근해와 대양, 내부생산과 대외무역의 경계 지점에서 발생하는 ‘항구도시’의 이중성은 가사노동과 공장노동이라는 차원에서만 다뤄졌던 여성 노동의 이중성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다. 권명아의 ‘젠더·어펙트 연구에서 연결성의 문제’는 서문에 이어 책 전체의 방향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다시 한 번 해준다. 처음에 읽어도 도움이 되겠고, 몇 편의 글을 읽고 나서 읽으면 각각의 연구들이 어떤 물음을 공유하고 있고 어떻게 연결되는지 감을 잡는데 도움이 된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나 푸코의 생명권력론, 엘리아스의 문명화이론 등 권력이 신체에 어떻게 새겨지고 그것에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진척되어 왔다. 그런 연구 계보와 정동 연구가 갖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까지 주로 전자의 계보에 기대어 정치미학 혹은 미학적 정치라는 이름으로 ‘몸의 정치학’ 연구를 수행해왔다. 그 이론들은 자본주의적 지배 양식이 합리적 주체를 가정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감정과 욕망을 통제함으로서 신체를 ‘자발적 복종’에 굴복시킨다는 데 주목한다. 그런데 이 이론들은 문화자본에 의해, 훈육에 의해, 문화적 헤게모니에 의해, 어떻게 신체가 권력의 실행 장소가 되는지를 실행 메커니즘에 대해선 잘 설명하지만, 그렇게 구축된 신체가 어떻게 복종의 장소에서 저항의 장소로 이행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못했다. 우리가 어떻게 지배당하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 지배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무력감을 준다. ‘정동’이란 개념은 신체의 수용력을 감응력으로 전환시킴으로서 포획당한 신체에 돌파구를 준다. 나는 그것을 ‘신체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최근에 미얀마에서 쿠데타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이 치마와 속옷으로 깃발을 만들고 생리대를 시위대의 방패에 붙이며 저항하는 모습은 억압되고 금지된 몸들이 그 억압과 금지를 역이용해서 자신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억압자를 곤경에 빠뜨리는 정동적 전회라 할 만한 인상적 장면이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탈의시위도 마찬가지 사례다. 여성노동자들은 ‘입혀놓은 것’을 벗어버림으로서 ‘감금된 신체’를 해방시키고, 통제의 수단을 잃어버린 자들을 혼란과 당황에 빠트렸다.
입이암총이 ‘홍콩의 파열된 시간—청년, 행동주의, 영토적 충성심’에서 다룬 ‘용무(勇武)’ 라는 정동은 억압된 신체들의 분출을 미얀마의 사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필자는 용무를 행동파 홍콩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시간적 감각으로 설명한다. ‘용무’에 내재한 시간 감각은 미얀마 청년들의 시간 감각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의 반쿠데타 시위도 민족주의, 자유주의, 영토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나타난다. 힘들의 충돌과 경합이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길을 만들어낼 것이다. 촛불시위에 결집됐던 힘들이 분화되고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직접적 무력에 의한 공포 대신 몰락과 공멸의 공포를 사용하여 저항을 봉쇄한다는 점은 그간 많이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세계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는 저항하는 힘들은 그 봉쇄를 뚫는 힘이 자본이 만든 정동 안에서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자본화된 문화산업의 산물인 K-POP이 아시아 민중의 저항가요로 불리어지며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되고 있는 모습도 그런 한 사례다. 책에 실린 최이숙의 ‘모성에 대한 전유와 돌봄의 의제화’도 정치하는 엄마들을 통해 그런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기적이고 폐쇄적이며 배타적 가족주의에 기반한 모성’으로 규정되어왔던 여성화되고 개인화되었던 모성이 과연 ‘사회적 모성’이 될 수는 없는지에 대한 물음은 “모성을 버려!”를 “모성을 바꿔!”로 전환시킨다. 비정치적이며 사적인 호명으로 불렸던 ‘엄마’라는 상징을 오히려 전면에 내건 ‘정치하는 엄마들’은 ‘엄마들의 정치’라는 역설을 정치적으로 성립시킨다.
힘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은 홍콩 청년들과 정치하는 엄마들 뿐 아니라 파고다와 태극기로 대표되는 ‘노인들의 정동’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청년과 노인들이 소멸의 감각을 공유한다면, 그들의 시간성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그 소멸의 정동은 보수정치로의 회귀로도, 진보정치에 대한 열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김보명이 ‘여성공간과 페미니즘’에서 보여준 것처럼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 ‘안전한 보호처’에서 대안적 저항공동체로 재구성된 ‘여성 공간’이 해방의 장소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는 억압의 장소로 바뀌는 것도 ‘정동의 변이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 변이할 것인가는 결국 ‘연결’의 문제다. 젠더·어펙트 연구를 ‘연결신체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는 만큼, 이 책에서 1부에서 다루는 연결신체에 대한 논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치매인과 간병인의 연결신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연결신체, 영화관에서의 연결신체는 치매돌봄과 의료, 장애인과 우생학, 관객과 관람의 분리 등 각각의 분야에서 고민해야할 문제를 던지고 있는데, 중요한 질문이지만 신체 연결의 의미에 대한 사유를 사례를 통해 좀 더 끝까지 밀고 갔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핵심은 ‘연결이 어떻게 신체와 신체적 관계의 변용을 가져오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여기에서 ‘되기’의 방향이 결정된다. 치매인과 간병인의 관계는 양자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적 지위와 동원 자원, 계급관계 등 그 밖으로 다시 무수히 많은 관계들이 연결된다. 그에 따라 치매 간병은 ‘서로 존엄’을 회복하는 체험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를 훼손하는 고통의 경험이 되기도 한다. ‘되기’의 체험을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그런 면에서 또 다른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다. 소현숙의 글 ‘우생학의 재림과 정상/비정상의 폭력’이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란 소극적 결론으로 귀결된 것도 그런 점에서 아쉽다. 1960-90년대 국가주의적 우생학이 지배하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그런 강제적 조치가 용인되지 않지만 여전히 기후위기 시대의 인구조절론 같은 신멜서스주의나 불임클리닉이나 유전자 검사를 통한 태아 선별 같은 시장주의적 우생학이 성행하고,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이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옹호되면서 계급화된 생체시장의 문제가 은폐되는 상황도 있기 때문이다. 이화진의 ‘보통이 아닌 몸’의 영화보기에 대한 고민은 그동안 익숙했던 통념상의 ‘장애인 관객’과 대비되는 ‘장애 관객’이란 새로운 개념을 통해 각자의 장애성을 발견하고 모두의 장애성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단초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선 외국여행자를 ‘언어소통 장애인’으로 지원 대상에 포함시킨다.) 이런 개념은 장애와 비장애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게 한다. ‘우리 모두 엄마다’가 개인화된 모성을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듯이, 장애 관객은 특정한 신체적 결여로 규정된 장애를 다양한 세계 체험의 방식으로 바꾼다. 기침, 콧물, 돋보기 없는 상태 모두 ‘장애’다. 이동 장애도 관람 장애에 포함된다. 코로나 방역 지침에 따라 지난 1년간 ‘방구석 관객’으로 살아온 우리는 접근 장애, 접촉 장애 등으로 경험한 다양한 관람의 장애를 청각적 시각적 관람 장애와 같은 범주에 놓음으로서 장애를 공유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함께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의 지평을 확장함으로서 ‘보통이 아닌 몸’은 그렇게 ‘보통의 몸들’ 속으로 분화되고 확장되며, 공간이 표상하는 정상성은 보통의 몸들에 대한 불완전성으로 치환된다. 위의 글에서 각각 제시되는 치매인-되기, 장애인-되기, 장애관객-되기는 연결신체이론의 구체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되기를 통한 관계의 상호성과 존재의 확장성을 자신의 경험세계로부터 끌어오거나 다른 구체적 사례를 통해 추체험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문헌연구의 한계는 정동연구의 한계로 작용한다.
나로서는 방법론적으로 가장 생경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문학 연구였다. 권두현의 ‘신파성’, 권영빈의 ‘박완서 소설의 젠더지리학’, 김나영의 ‘고전서사의 디지털인문 융합’에 대한 글에서는 연구의 고충을 느꼈다. 고전문학 작품 분석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해야 하는 연구자는 혼동을 느낀다. 빅데이터 기술은 아주 빠르게 어휘의 빈도수를 계량화해서 작품간 연결성을 분석해내지만 그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과정에 많은 돈과 시간이 투입된다. 프로그램의 공학적 설계와 인문적 요구 사이의 충돌도 문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결과가 과연 그만큼 중요한 연구 성과가 될 것인지도 의문이다. 기계가 어떻게 감정을 수량화해서 해석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강제적으로 요구되는 시대적 변화를 어떻게 수용해야할지 고민한다. ‘정동이론’은 이 예측하는 기술의 포화에 대한 인문 연구의 대응이 될 수 있을까?
책의 제목인 『약속과 예측』도 그러한 예측의 시대에 ‘약속’을 말하려는 이들의 어려움과,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나에게 책의 이 표제어는 특히 의미심장했다. ‘약속’은 정치학에서도 중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4차산업혁명론을 필두로 해서 쇄도하는 미래담론은 우연성과 사건과 시간을 경로설정의 궤도 위에서 소거해버린다. 공동선(common good)을 상상하고 그렇게 되어갈 것이라는 정치의 약속은 설정 좌표에 빨리 도달하는 과학기술주의적 용어들로 대체된 지 오래다.
책을 덮고 나면, ‘그래서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라는 물음에 ‘정동 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제일 강하게 남는다. 그게 독서 후의 감응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어쩐지 당위적이어서 찜찜하다. “왜 정동인가?”라는 물음은 이 책에서는 아직은 충분히 해명되지는 않는다. 다만 정동이라는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이유는 조금 알겠다. 인간에 대한 해석, 사회 문화 현상에 대한 해석이 모두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직관과 통찰은 문학적 장르나 제한적 비평 영역에서만 허용되는 시대에 방법으로서의 정동은 인문주의 연구의 남은 돌파구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도를 좀 더 지켜보기로 한다.
채 효 정
정치학자, 경희대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 2011년부터 경희대에서 ‘대안 사회 구상하기’, ‘예술과 정치’ 등 인문 사회 과목을 강의해 오다 2016년 해고되었다. 이후 부당해고와 차별적 강사 제도의 시정을 요구하고 대학의 기업화와 비민주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수요 집회와 잔디밭 강의 등으로 학내 투쟁을 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서양 정치사상을 전공했다. 정치에서 생명과 감각과 감정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주요 저서로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 『능력주의와 불평등』,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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