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약속과 예측 :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산지니, 2020)] 서평 (박현선)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약속과 예측 :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 산지니, 2020

 

 

 책의 위치는 어디일까? 『약속과 예측』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의 흐름을 움켜쥔 시간에, 그리고 부산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지닌 공간에서 탄생했다. 특정한 시공간의 맥락이 이 책에게 부여한 의미는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동과 젠더 정치의 맞물림이 책의 주된 문제설정으로서 출발지라면 파열된 시간에서 등장하는 주변성들을 연결하는 작업이 이 책이 도달하려는 목적이다.

 

 먼저, 현재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이 서평을 시작하려 한다. 지난 1년간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더불어 개인적 분리와 고립감을 장기화시키면서 코로나 블루의 우울증을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사회 각층의 주변부와 타자들에게 쏟아붓는 정동적 집중을 만들어냈다. 우울과 불안 증세에 집중한 코로나 블루와 분노와 공포의 감각에 집중한 코로나 레드는 감염병 재난의 시대에 정동의 집단적 촉발과 집중이 사람들의 일상 가운데 얼마나 깊게 스며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코로나19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혐오발화와 사회적 낙인이 동시다발로 발생했던 것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에 사용된 우한폐렴이라는 명칭은 중국인, 중국 이주민, 외국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유발시켰고, 이어서 대구지역과 신천지 집단감염은 이 지역민과 신천지 신도들이 커다란 사회악 혹은 범죄자로 낙인찍히도록 보도되었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심각한 혐오와 강제적 아웃팅, 그리고 자극적인 기사들이 5월 초 이태원 지역에서 시작된 집단 감염과 함께 무분별하게 전파되기도 했다.[각주:1] 더욱이, 사회적 우울증과 신경증에 기반한 뉴노멀의 실상은 젠더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학교에 가지 않을 때 직장이 있든 없든 배우자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여성은 집안의 과중한 책임에 짓눌리게 된다. 민간서비스에 위탁했던 양육과 돌봄이 불가능해지면서 여성은 공적 돌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대부분의 남성보다 먼저 일을 그만 두게 된다. 남성에 비해 비정규, 비정형노동, 저임금으로 노동하는 여성들이 자발적 실업 혹은 휴직을 통해 가족 내 보육과 돌봄을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각주:2] 여성 연구자의 경우, -가정 양립이 상대적으로 나은 서구에서도 여성의 학술활동이 남성 학자에 비해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각주:3]증적 수치들 사이로 엿보이는 강도 높은 우울과 좌절, 무력감은 특히 여성에게 더 큰 하중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생태위기와 경제위기 등 다양한 위기들의 연결다발로 등장한 최근의 팬데믹 상황은 정동위기를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질병과 감염 등에 부과된 부패, 냄새, 분비물과 같은 역겨운 특성이 사회의 특정집단에 투사되는 정동의 부정적 집중[각주:4]은 무한경쟁과 개인중심의 인식론에 기초한 21세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정동의 위기가 전면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부정적 정동의 확산은 혐오를 투사하는 대상의 타자화라는 문제에 머물지 않고 개체의 석화(petrification)로 이어짐으로써, 상호적일 수 있는 촉발과 감응, 접속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결국 정동 자체의 파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최근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포스트 코로나의 전망이 앞으로 다가오면서, 우리가 느끼는 막연한 예감, 즉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은 이후의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책임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하다. 팬데믹 초기 상황에서 이미 주디스 버틀러가 강조했던 바, “전염병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의 글로벌 상호 의존성을 새롭게 인식[각주:5] 해야만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상호 의존성과 상호 연결성의 윤리와 방법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약속과 예측』은 분명 새로운 전망을 내놓는 책이다. 부제는 이 책이 연결성과 인문의 미래에 관한 책임을 말해준다. 이미 다들 경험했지만, 유한한 세계의 일부를 이루는 존재들에게 격리된 삶을 사는 일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연결성의 문제의식은 세계의 구획 속에 흩어져 있는 각 존재들이 어떻게 관계하고 있으며 관계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각주:6]

 

 그런 점에서 『약속과 예측』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로 시작했던 이 서평의 관점을 이제 다시 틀어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이 책의 서두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는 지역적 위치성과 위기의식[각주:7]은 단순히 본 총서가 기획된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 연구소의 지리적 위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는 기존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으로 변혁할 수 없었던 사회적, 담론적 모순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간 정체성의 정치학이나 소수자 담론이 머물렀던 자리를 벗어나 이제 새로운 연결고리와 접촉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요구가 어디에서 들렸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가, 그리고 누구에게 연결하도록 말하고 있는가하는 것에 주목할 때 이 책의 진면모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약속과 예측』에는 총 12편의 글이 실려 있다. 페미니즘, 장애학, 대중문화, 지역공간, 디지털 아카이브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각각의 글이 갖는 연결성은 다소 낯설다. 비록 각 논문이 갖는 의미와 성과가 별도로 있긴 하지만 말이다. 책에서 느낀 낯섦과 (약간의) 현기증은 전통적인 분과학문의 틀로서는 각 챕터를 이어주는 공통의 기반을 쉽게 재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것이 꼭 책의 약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하나의 큰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 미증유의 영역에서 각 챕터가 열어놓은 시각들을 연결하는 공통된 약속의 고리를 모색하고 예측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면 확실히 반가운 숙제라고 생각한다.

 

 『약속과 예측』의 나선 항해에서 나침판 역할을 해주는 글은 의심할 여지없이 권명아의 젠더·어펙트 연구에서 연결성의 문제이다. 권명아는 젠더·어펙트“‘젠더라는 개념, 표상, 상징에 의해 촉발되어 파급되는 어떤 강력한 정동의 폭발”(128)로 규명하면서, 2019년을 전후로 변화된 국가전략에서 젠더의 의해 촉발되는 정동과 정동 정치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현실 정치에서 매우 집중적으로 기술과 신체, 노동을 젠더 중립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펼쳐지는 한편으로,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젠더자체의 소멸을 위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서 권명아는 교차적 페미니즘을 통해 젠더 해소를 주장하는 제노페미니즘을 조명하는 등 기술과 정치, 신체의 페미니즘 선언들이 정동이론과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착목한다. 이는 정동 이론을 통해 급진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젠더 정치학을 제시하기 위함이자 인문학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함인데, 여기에 책 전반을 관통하는 기획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문제의식은 최근 정동 이론이 정동적 전회의 시간을 지나 새롭게 관계적 정동의 연구로 확대되는 맥락과 관계가 깊다. , “개인적 심적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관계적 과정들에서 펼쳐지는”(160) 정동적 관계, 혹은 관계적 정동의 문제설정이 중요하게 부상한 것이다. 이때, 이 관계들의 재발견은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개인 주체성에 관한 기존 담론으로는 그 의미를 확보할 수 없다. 관계적 정동 연구는 존재론적으로 취약한(vulnerable) 인간이라는 한계 의식에서 출발한다. 취약성은 인간이 지닌 신체와 물리적 조건에서의 취약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구성된 취약성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 공통의 조건이자 폭력 앞에 놓인 모든 생명의 취약성 앞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문제의식이 정동과 연결성의 패러다임인 것이다.[각주:8] 관계와 연결, 상호성, 사회적인 것,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와 권력을 사유하는 이론으로 정동에 관심을 기울여 온 학자들”(163) 중 국내에서 그 선두에 서 있는 연구자로서 권명아는 상호연결성의 정동 이론을 통해 젠더·어펙트의 중요한 방법론적, 실천적 정초를 마련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박언주의 인간 존엄의 조건으로서의 상호의존과 연결성과 김보명의 여성 공간과 페미니즘은 젠더·어펙트 연구의 범위와 방법론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두 글이다. 정동 이론의 언어로 써지진 않았지만 최근 페미니즘 논쟁의 뜨거움을 전하는 김보명의 글을 먼저 살펴보자. 바로 얼마 전, 김보명의 글을 열었던 변희수 하사가 자신의 방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제도의 경계를 넘어 각각 군대와 대학 내에 트랜스젠더의 자리를 요청했던 변하사와 숙명여대지원자 A씨 사건은 2019년 한국사회의 주류 계층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의 분리주의에 부딪혀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당시의 파장은 그후 얼마나 고요하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는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빠르게 식기 마련인 세간의 관심과 격동이 문제의 바탕은 아닐 것이다. 실상은, 김보명이 표현한 대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모순적이고 혼란스런”(176) 오늘날의 상황이 실은 매우 오래된 분리와 배제의 역사 위에 펼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젠더·어펙트의 문제 설정이 다시금 성과 젠더의 착종된 담론화 역사를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9세기 이래 서구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차별에 대한 김보명의 역사적 고찰은 이런 이유에서 당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혼탁한 형태로 진행되는 페미니즘 내 섹스/젠더 전쟁의 단면과 한계를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책의 첫 번째 챕터이기도 한 박언주의 글은 본격적으로 정동 이론의 방법론과 어휘를 전면화함으로써 젠더·어펙트 연구의 좋은 방향타가 되고 있다. 박언주의 글은 흔히 자신을 잃어가는 병으로 인식되는 치매에 대해 정동적, 관계적 접근을 함으로써 치매인의 경험과 관계를 기존의 접근과 다르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아와 신체의 관계, 그리고 돌봄의 의미 자체를 새롭게 구성하도록 도와준다. 박언주는 치매인의 “‘신경세포와 신경연결망의 손상너머 존재하는 를 인식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치매인의 자기감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치매인이 관계맺는 돌봄인과의 관계 사이에서 상호주관적으로 정동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박언주의 치매 연구는 정동 연구에 내포된 두 가지 요소, , 신체와 상호정동성의 문제를 전환적으로 사고하는 구체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신체와 연결성은 『약속과 예측』의 여러 글들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설정이기도 한데, 소현숙의 우생학의 재림과 정상/비정상의 폭력이 우생학의 고고학적 제도화와 법제화가 국민 국가를 위한 신체의 예속(분리와 배제, 불모화)을 만들어낸 폭력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다면, 최이숙의 글, 모성에 대한 전유와 돌봄의 의제화는 모성의 새로운 전유를 통해서 돌봄이라는 사회적 의제와 정치적 가능성이 제도와 법을 개선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 두 글은 각기 법과 제도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정동 정치의 두 힘을 예시하고 있는데, 직접적인 비교가 얼마나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두 글이 보여준 방향성이 재생산과 신체정치, 그리고 모성과 돌봄의 실천 사이에서 진동하는 젠더·어펙트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하다.

 

 신체와 장애에 대한 연구가 정동 연구와 만나는 지점에서 이화진의 보통이 아닌 몸의 영화보기에 대하여는 매체와 관람성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연결한다. ‘한국영화사 연구에서 관객의 역사화를 성찰하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글은 영화사 자체가 일종의 민족적 몸이자 실증적 몸체로서 구성되어 온 방식에 비판적 해체를 가하기 위해 장애 관객이라는 새로운 관람성을 제시한다. “장애인 관객이 손상을 지닌 관객이라면, 장애 관객은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그의 신체적 조건이 상영의 환경과 맥락에 의해 장애를 구성하게 되는 경우로 한정된다”(112). 이화진이 제시한 장애 관객의 관람성은 주로 시각성에 의존하는 매체인 영화의 경계를 더욱 확장해 사유하도록 이끈다. 장애가 결정적인 결함과 부족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감각을 촉발시킨다는 것은 시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들에서 향기나 촉각, 동적 운동성 등이 강조되는 방식 등으로 해서 주요한 모티프가 되어왔지만, 그보다 한발 더 나간 의미에서 영화 관람성 자체가, 그리고 영화사 쓰기 자체가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출발점에 서있다.

 

 젠더·어펙트의 관점에서 기존의 담론을 해체하고 다시 쓰는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일까? 이화진의 글이 새로운 감각의 접합을 통한 매체사 새로 쓰기를 제시한다면, 권두현의 신파성 재론을 위한 시론은 문학장 내에서 오래도록 탐구되고 논의되어온 신파에 대한 젠더·어펙트적 개입이다. 양식으로서, 담론으로서, 미감으로서 전개되어 온 신파 논의를 역사적으로 돌아보는 가운데 권두현의 글은 이를 단순히 역사화하는 게 아니라 매우 동시대적인 실천의 영역으로 만든다. 여기에는 신파가 돌봄의 위기에서 촉발된 젠더·어펙트의 한 단면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데, 정동 연구의 이론적, 방법론적 개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박완서의 문학에서 중요한 바탕이 되는 전쟁 체험을 젠더지리학의 관점에서 분석한 권영빈의 한국전쟁과 젠더화된 생존의 기록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통상의 인식을 뒤집어보는 데서 시작한다. 권영빈의 지적대로, 전쟁을 체험한 이들은 공히 남성과 여성 모두일 텐데, 여성의 전쟁 경험은 반공이데올로기와 젠더이데올로기 속에서 이중으로 침묵되고 망각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여성의 전쟁 경험이 쓰인다고 했을 때, 그 기억은 기존의 전쟁 서사에 보완적 관계만을 갖는 것일까? 권영빈은 박완서 문학에서 서사화가 아니라 공간화의 특징을 띄면서 다양한 위치에서 공명하는 에코혹은 사운드의 형식으로서 여성의 전쟁체험이 자리하게 되는 방식에 주목한다.

 

 텍스트 내부에서 정동적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것만큼, 김나영의 고전서사 연구에서 연결성에 대한 논의의 현단계는 텍스트 외부 학문적 토대에서 정동적 실천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고전문학 연구자로서의 감각과 성찰을 반영하는 김나영의 글쓰기는 어떤 흐름이나 현상에 맞닥뜨리면서 나타나는 문제 인식이나 행동 방향인 정동으로서 디지털 인문학과 고전문학 연구의 연결 지점을 고민한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새롭게 축적된 소현성록의 연구들을 비교검토하는 작업은 흥미로운 발견들을 낳고 있는데, 소현성록에 산포된 정동들의 목록과 변주에 대해 주목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아날로그 텍스트성과 디지털 기술성의 관계에 도사리고 있는 암초들을 투시해주고 있다.

 

 『약속과 예측』에 실린 두 편의 해외학자의 글은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각기 다른 두 지역에서 벌어진 여성성과 남성성의 정동 정치학에 관한 글들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연결을 보여준다. 이시다 게이코의 야스쿠니신사의 위령과 여성적인 것의 관계에 대하여는 위령과 내셔널리즘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비판적 시선을 던지는 동시에 위령의 방식 자체가 정동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더불어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본다. ‘여성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추모를 여성화하는 형식으로 변화한 야스쿠니신사의 경우처럼, 최근 일본사회의 우경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위령에 여성적인 것이 덧붙여지는 것은 남성중심의 내셔널리즘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시다 게이코는 내셔널리즘을 위협하는 여성적인 것이 내셔널리즘의 회로에 갇혀 그 신화를 강화하는 데 이용”(283)되고 있음을 파헤친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여성적인 것을 경유해 가부장적 일본 사회를 재건해간다면, 지난 몇 년간 홍콩에서 불고 있는 거센 운동은 남성적 표상에 달라붙어 있는 정동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양상이다. 입이암총의 홍콩의 파열된 시간이라는 글은 2014년 우산혁명에 참여한 30여명의 젊은 홍콩 남성활동가들 중에서 3명의 각기 다른 시간성을 가진 활동가들을 추적한다. 흔들리는 일국양제(一國兩制)에 직면해 대두된 용무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젊은 남성 활동가들의 젠더화된 정동이자, “진화적 흐름으로서 민주화가 시간적으로 붕괴하고 교착에 빠졌다는 감각으로 구성되는 다양한 정서들의 집합”(457)이다. ‘파열이라는 비판적 시간성에서 출현한, 강렬함을 갖고 있지만 어떤 내구적 조직이나 구체적인 계획을 갖추고 있지 않은 용무라는 젠더·어펙트는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에의 비저항과 외국인 혐오증, 애국적 본토주의에 기대고 있다. 입이암총이 홍콩의 미래에 대해 조심스럽고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이유이다.

 

 끝으로, 신민희의 항구도시 부산과 여성 노동자들의 해양 도시는 이 책의 물리적 기반으로 위치설정된 부산 지역의 여성노동에 관한 글이라는 점에서 한층 의미롭다. 신민희는 수산가공업의 여성적 계보를 재고함으로써 지역의 성장-몰락의 시간적 인관성을 비판하고 그 속에서 지워져왔던 공간과 노동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246). 주로 기술도입과 산업모델에 기초한 노동의 역사가 공장을 중심으로 써졌다면, 수산가공업, 특히 지역여성들이 해양 공간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직접 손으로 작업하는 아지매 노동은 자주 전근대적이거나 보조적인 노동으로 치부되어왔다. 신민희는 이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손과 몸, 물질과 만남(접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노동, 그리고 단순히 수량화와 개량화로는 평가될 수 없는 을 생산하는 노동의 의미 등을 새롭게 발견할 것이 제안한다.

 

 『약속과 예측』에 담긴 12편의 글을 목차의 순서와 다르게 이리저리 연결해보면서, 이 서평은 첨예한 논쟁의 화두를 붙잡는 것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써 젠더·어펙트 연구가 보여준, 혹은 보여줄 가능성을 조명하는데 더 힘을 쏟았다. 성불평등과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혐오와 패배감의 문화가 사회적 규범의 일부로 내면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취약한 존재들의 공통감각과 상호의존성을 되살리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자신만의 을 높이 쌓아가는 그 내적 역설을 허물기 위한 시도로서 『약속과 예측』은 지적 실천의 생생함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박 현 선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 『문화/과학』 공동편집인, 한국영화학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한국학 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게스트 프로그래머,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영화의 모더니즘과 정치적 미학에 관한 연구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얼바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시아 냉전의 문화 정치, 한국 영화의 정치적 미학, 기억과 정동 연구, 여성과 도시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출판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1. 코로나19 인권대응네트워크, 코로나19와 인권: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위한 사회적 가이드라인,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자료집, 2020, 108-110. [본문으로]
  2. , “코로나19, 왜 여성의 위기가 되었나,” 프레시안, 2020.5.16.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51518023270175 [본문으로]
  3. 예를 들어, 20203월과 4월 코로나19에 관한 많은 논문들이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제1저자로 올라온 경우는 2019년 같은 시기에 비해서 19%나 낮아졌다고 한다. 연두, “‘코로나 시대엄마들, 돌봄의 과중함에 짓눌리다,” 프레시안, 2020.8.27.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82615481274103?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230DKU)  [본문으로]
  4. 마사 누스바움은 이를 투사 혐오’(projective disgust)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5. Judith Butler, “Capitalism Has its Limits,” Verso Blog, 30 March, 2020. https://www.versobooks.com/blogs/4603-capitalism-has-its-limits? [본문으로]
  6. 메릴린 스트래선, 부분적인 연결들』, 차은정 옮김, 「옮긴이 해제: 21세기 인류학의 새지평을 열다」, 오월의봄, 2019, 17쪽. [본문으로]
  7. 지역의 인구변동과 경제 구조 변화의 가장 첫 번째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는 위치에서 지방대학이라는 물리적 조건을 끌어안고 시작된 물음들. [본문으로]
  8.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8, 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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