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기’로 다시 보기 (3)]  미래-되기,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김은주)

 

 

 

이 글은 BIBI(비비)의 Life is a BI...(인생은 나쁜X) MV와 함께 읽길 권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n7AYYJKwwE

 

 

 

마지 피어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1』, 변용란 옮김, 민음사, 2010.

   

 

 

   마지 피어시(Marge Piercy)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The Woman on the Edge of Time, 1976)는 여성 해방운동이 치열했던 1970년대에 출간된 페미니즘 유토피아 SF이다. 페미니즘 유토피아 SF 대표작으로는 샬롯 길먼(Charlotte Gilman)의 『허랜드(Herland)』(1915)[각주:1]를 꼽을 수 있다. 『허랜드』가 ‘여자들만의 세상’을 그린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라면,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페미니즘 유토피아 SF의 지위를 갖는다.

 

   주인공 코니는 그리스어로 부정을 뜻하는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의 합성어인 “outopia”(nowhere)와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기대하고 그려보는 희망으로서 좋은 장소(eutopia) 사이에서 희망과 가능성을 펼친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유토피아의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존재하기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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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어시의 소설의 주인공 코니는 텍사스에서 태어난 37세의 가난한 멕시코계 미국인이다. 코니는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면서도, “여자가 세상 구경해 봤자 불행밖에 더 있겠니”[각주:2] 라고 말하는 어머니와 달리, 더 많이 배워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었다. 소설의 배경인 1970년대 미국 사회에서 성별, 계급, 인종 등에 따른 주변적 위치는 코니의 바람이 실현되기에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보호대상자인 코니는 첫 남편이 죽은 후 일을 하면서도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전문대학을 다닌다. 그러나,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생긴 딸 안젤리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코니는 딸과 강제로 격리되고 양육권도 빼앗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동학대’라는 낙인이 찍힌 코니는 조카 돌리의 애인이자 포주인 헤랄도의 폭력으로부터 돌리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폭력 사건에 휘말리면서 뉴욕의 벨뷔 정신병원에 강제 이송 수감된다.

 

   정신병원에는 코니뿐만 아니라, 당대적 기준에 맞지 않는 소위 ‘비정상적’ 존재들이 교정대상으로 분류되어 수감되었다. 동성애자 스킵, 마녀라 불리는 사이빌, 폭력성향의 앨리스 등과 함께, 코니는 과격한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실험의 연구 대상이 되어 강제 투약을 경험한다. 투약은 점점 빈번해지고 양 또한 늘어나면서 코니는 환각인지 현실인지 구분키 힘든 상황에 놓인 채로 서기 2137년의 미래에서 온 루시엔테(Luciente)의 신호를 수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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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어로 ‘빛’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식물 유전학자 루시엔테는 세 달 동안의 연결 시도 끝에 마침내 코니의 정신에 접속한다. 이를 믿지 못하는 코니에게 루시엔테는 “신경 체제와 정신이 열려 있어 비범한 범주까지 받아들이는”[각주:3] 수신인이라고 설명하고, 코니를 2137년의 유토피아인 메타포이셋(Mattapoisett)의 세계로 초대한다.

 

   메타포이셋은 세이퍼(shapers)가 지식 컴퓨터 케너(kenner)에 유전자를 보관하고 제공하여 출산과 양육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킨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의 비전을 실현한 사회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여성 또는 남성으로 구성된 세 명의 공동 어머니가 아이들을 사춘기 즈음인 12살에서 13살까지 함께 양육한다. 이 사회에는 젠더 분업과 위계는 물론, 직업 위계 역시 존재하지 않으며, 사이버네틱 조정과 통제로 업무, 군사 그리고 보안이 작동된다. 위와 같은 일이 유토피아 메타포이셋에서 가능한 까닭은 이곳이 인구가 600명인 소규모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타포이셋은 생태학적 공동체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건물은 작고 소박하며 덩굴 식물이 무성한 나무 덤불 정원 사이에 있다. 뉴욕 대도시에 살고 있던 코니는 자신이 떠나온 텍사스의 가난한 농촌 이민자 거주지역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메타포이셋의 모습을 마주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시엔테는 메타포이셋이 “기술적으로는 원시적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발전되어있던”[각주:4] 과거 아메리카의 원시 공동체 문화에서 많은 것을 가져와 만든 공동체라 소개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인간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의 지위를 동등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자연 속에서 생명체로서 자신을 알아가며 어른이 되고, 죽음 역시도 삶의 일부이자 과정으로 이해한다. 메타포이셋은 백인이 선주민을 몰아내기 전, 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오래된 좋은 것을 “더 큰 좋은 것으로 통합”[각주:5]한 그러한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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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니가 본 미래, 코니가 접속한 메타포이셋, 그 미래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무엇보다도, 코니는 정말로 미래의 신호를 수신한 것일까? 그저 “폭력이 난무하는 병동”[각주:6]에 갇힌 자가 본 망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코니가 루시엔테와 조우하게 된 때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파고드는 때, 정신병원의 투약과 전기 충격의 교정이 더욱 심해질 때이다. 소설집의 말미에 등장하는 공식병력 기록은 코니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진단한다. “당국에 대한 적개심과 의구심을 보이는 듯함. 자제력 및 좌절에 대한 인내력 부족, 문제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하거나 적개심을 드러내는 경향”을 갖고 있고 “진단 미분화형 정신분열증. 유형 295.90”이며 어떤 진단에 따르면, “편집성 정신분열증, 유형 295.3”[각주:7]이다.

 

   코니가 미래를 조우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미래를 본 코니는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 코니는 자신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처럼 그 전문가들이 말하곤 한 편도핵 제거술을 막 앞두고 있었다. 코니는 소위 ‘정상성’에 벗어난 이들을 교정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자들, 일군의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인 의사 여섯 명의 커피에 추수감사절 외박 후 몰래 반입한 ‘파라티온’이라 불리는 농약을 타서 독살한다. 그리고 소설은 “뉴욕 주 정신위생국 산하 벨뷰 병원 기록”으로 시작되어, “병원 기록은 113쪽 더 이어진다. 모든 서류는 코니를 따라 록어버 주립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라고 끝맺는다.[각주:8] 정신병원에 갇힌 코니가 여섯 명의 의사를 살해한 이야기가 어떻게 유토피아 SF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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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보기에 과거인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되는 가진 자들과 싸우기보다는 자기보다 약간 더 가졌거나 덜 가진 사람들과 가장 힘겹게 싸우는 것 같아요 (…) 우리에게 이어진 과거의 삶을 나는 상당 부분 이해 못하겠어요. 하지만 불가피한 건 아니었어요. 이해해요? 변화를 위해 열심히 싸우던 당신 시대 사람들은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미신을 믿었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우리는 단지 가능한 하나의 미래일 뿐이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각주:9]

 

   메타포이셋과 같은 유토피아가 미래에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는 아니다. 메타포이셋이 미래에 존재할 많은 평행 세계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코니는 알게 된다. 코니는 잘못된 연결로, 메타포이셋과 평행으로 존재하는 디스토피아 미래에 접속하기도 한다. 이 미래에서 만난 여자는 마약에 취해 성매매를 하며 살아간다. 그의 삶은 자신을 착취하는 남자들에게 의존해 살고 있는 조카 돌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미래의 자연환경은 인간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어 있고, 깨끗한 공기는 하늘 위에 사는 부자들에게만 허락된다. 계급, 젠더, 인종 격차가 극대화된 세계, 이 세계 역시 미래의 다른 양상으로 ‘평행하게’ 존재한다.

 

   코니가 경험한 디스토피아의 미래 세계는 무기력한 삶들과 더불어 이미 ‘지금, 여기’에 잠재되어 있다. 유토피아 메타포이셋은 또한 어떠한가? 소설은 이 공동체 역시 언제나 위협받고 위험에 처해 있음을 말한다. 공동체는 방어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루시엔테의 연인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하기에, 루시엔테가 코니의 정신에 접속하여 그를 미래로 이끌어 온 이유는 그저 미래가 이렇게 아름답고 대단하며 약속된 유토피아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루시엔테는 코니에게 결정된 목적, 실현된 진보로서의 유토피아에 대한 확신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루시엔테와 같은 미래인들에게는 과거는 메타포이셋을 지키기 위한 방어전이 벌어지는 전장과 같은 곳이며, 어떤 역량이 요동치는 시간대이다. 결국 미래는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이든 혹은 그 외의 양상인 복수의 미래들로 잠재하며, 루시엔테와 같은 미래인에게 있어서는 과거에 해당하는 ‘지금, 여기’의 선택과 행위는 메타포이셋을 존재하게 하는 역량이다.

 

 

*

 

 

   코니는 이제 안다. 유토피아적인 미래의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미래가 아니라, 미래들의 한 양상이라는 것을. 코니는 자신을 죽은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정신병원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않기로 선택한다. 바로 그것이 미래의 유토피아 공동체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싸움이라 생각한다.

 

   물론 코니가 택한 싸움의 방식이 과연 옳은가라는 의문은 있다. 루시엔테는 코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심을 다하기만 하면 압제자를 물리칠 한 가지 방법은 언제나 존재해요. 바로 당신의 믿음이예요. 그러면 형편없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종종 맞서 싸울 돌파구를 찾거나 만들어 낼 수 있어요. 당신 시대에서도 힘없는 많은 이들이 싸울 방법을 찾았고요. 그 노력이 힘이 될 때까지.”[각주:10] 분명한 것은, 현재의 개개인들이 당면한 부정적인 힘에 굴복하지 않는 싸움과 미래의 현존이 연결되었다는 미래 세계가 보내는 메시지에, 코니가 적극적으로 반응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코니는 더 이상 “부자들을 미워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각주:11] 그는 자신의 상황을 수긍하고, 자신을 비천한 사회 부적응자로 스스로 인정하고, 그렇게 되어가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마침내, 환각과 같은 미래들을 체험하고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다’는 무기력으로부터, 마침내 코니는 탈주한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가능성을 열지는 확신할 수 없다. 실패로 기록될 가능성 역시 높다. 그러나 자신이 사는 지금 여기에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기 자신을 내버려둔다면, 코니를 교정하기 위해 수술하려는 그들이 말하는 것 외에는, 코니는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제 코니는 견딜 수 없는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벗어난다. 죄책감에 빠져 자신을 자해하거나 혐오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특히 자신이 잃어버린 딸 안젤리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해로운 것에 매달리는 일, 비탄에 빠지는 일, 세상이 자기를 혐오하고 조롱하는 것보다 더 심한 자책에 자신을 가두는 일으로부터 벗어난다. 코니는 엄마와 다르게 살지 못했고, 코니를 둘러싼 상황은 너무나 끔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니는 생의 희망과 믿음을 갖는다.

 

   코니의 싸움은 자신이 결코 본 적 없는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코니는 정말로 미래와 접속했고, 그 아직 도래한 적 없는 미래는 코니와 더불어 존재의 잠재성으로 실재한다. 코니를 불운으로 몰고 간, 주변부로 분류된 정체성들은 다른 미래를 상상하기 위한 역량이며, 그로 인한 고통의 생생함으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코니는 살아있다는 감각, 경이를 느낀다. 생을 지속한다.

 

   “스킵을 위해, 앨리스를 위해, 티나를 위해, 크림 선장과 오르빌을 위해, 클로드를 위해, 내 최고의 희망으로부터 태어날 당신들을 위해서, 나는 내가 벌인 전쟁을 당신들에게 바칠게요. 나는 최소한 한번은 싸웠고 승리를 거두었어요.”[각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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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여성 혐오 살인 사건 이후, 지금 2021년을 페미니즘 대중 운동이 가장 높은 고점을 지나 사그라든, 필연적 백래시의 상황으로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페미니즘 물결이 일어났을 때 필연적으로 반격이 뒤따른다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이 이러한 과정을 가속화하여 이 페미니즘 물결과 반격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 반격은 물결의 과정을 늦추거나 그 성취의 일부를 되돌리기보다는 오히려 논의를 계속하도록 부추 키고 있다.”[각주:13]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페미니즘의 경이와 무엇이 될 수도 있는 희망과 더불어 페미니즘 물결의 정동적 충전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이다.[각주:14] 그러하기에, 1976년 과거로부터 도래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읽기는 소설의 주인공 코니의 갈망이 일으킨 ‘미래-되기’로 충전된 정동을 2021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이한다.

 


은 주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포스트휴먼 윤리와 페미니즘 그리고 시민권에 관심을 두고 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2017),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2019) 등을 쓰고,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2020), 제4물결 페미니즘(2021)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페이스북 계정: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1403703060

 

 



이어가는 말 : 젠더·어펙트 코멘터리

 

 

* 권영빈 : 미래라는 거대한 힘이 현재로 침투하는 이야기는 영화 <테넷>(2020)에서도 그려졌다. 그러나 그 위협은 젠더와 인종과 계급이 엇갈리고 마주치면서 만들어내는 압력이 아닌, 위협에 깃든 ‘역량’을 나눠 갖는 (젠더화된) 주체들에 부여된 일종의 즐길거리였다. 필자의 독법에 따르면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없는 장소’와 ‘바라는 장소’의 경계에서 갈팡질팡하지 않고,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는 미래를 살아가는 여성의 역량을 ‘오래된 미래’의 형식으로 제시하는 소설이다. ‘백래시’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성혐오에 맞서는 이들은 이미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언제나 미래는 와 있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무기력하지 않다는 점에서, 필자의 바람대로 이들의 ‘미래-되기’는 계속될 것이다.

 

* 권두현 :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에서 SF가 수행한 것은 ‘토폴로지’에 다름 아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SF의 토폴로지는 ‘미래’라는 시간으로의 정향을 전제로 하지만, 그 정향이 시작되는 곳이 ‘지금, 여기’임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SF의 공상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토대 위에서 펼쳐지기 마련이며, 그 ‘공상’은 결코 공상에 그치지 않는다. 마지 피어시가 그리는 유토피아 역시 마찬가지다. 실상, ‘유토피아’라는 말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그 미래는 어느 날엔가 우연적으로 도래하기에 앞서, 미리(pro) 내어놓은(mittere) ‘지금, 여기’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것은 미래에 관한 예측이 아니라 약속(promise)이라 해야 옳다. 우리는 ‘지금, 여기’와 뒤얽히지 않고서는 미래와 조우할 수 없다. 시간의 경계에서 코니가 느끼는 ‘생생한’ 고통은 백래시의 파도 앞에서 출렁이는 페미니즘적 시간성을 감지하게 하는 훌륭한 유비다.

 

* 신민희 : BIBI(비비)의 <Life is a BI...> 뮤직비디오는 달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치 영화 <괴물>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데 괴물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에게 쫓기듯 뛰고 있다. 달리는 것인지 쫓기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그것은 이미 정향되어 있다. 정향된 미래는 ‘망상에 빠진 자’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망상은 그릇된 생각과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빛’을 보는, 빛과 마주치는 일이다. 그래서 문명의 빛도, 확실한 미래로서의 혁명도 아닌 망상의 빛이 있다. 이 망상의 빛은 ‘왜 나만’이라는 원한과 자책을 끊어내고, 시간의 경계 위에 있게 한다.

 

* 김대성 : 정신병동에 갇힌 ‘코니’가 접속한 미래. 나는 그 미래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인질로 삼아야 하는, 그럼에도 좀처럼 닿을 수 없는 ‘오지 않는 시공간’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도착해 있는 어떤 시공간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들의 커뮤니티, 중독자를 위한 모임과 같은 비일상적인 교류뿐만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지 않아도 성립하는 만남들, 누군가의 서명을 기다리는 청원에 이르기까지 긴급한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열리는 시공간에 대한 경험 때문이다. ‘접속’이라는 말엔 온기가 없어 비인칭적인 것이라 간주되곤 하지만 오직 접속의 방식을 통해서만 주고받을 수 있는 언어가 있고 또 그렇게 성립하는 관계성이 있다. 오늘의 ‘접속’은 ‘정동된다는 것’이다. ‘정동된다는 것’이 별 수 없이 휘말린다는 수동성의 표지만이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발신된 구조요청에 기꺼이 응답한다는 능동성의 에너지가 겹쳐 있는 것처럼, ‘코니’의 정동된 시간이 살아 있음의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깨우는 것처럼, 여기 이곳 어딘가에 갇혀 있는 ‘코니들’이 접속한 미래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살피게 되는 것이다.

 

 

  1. 샬롯 퍼킨스, 허랜드: 여자들만의 나라: 샬롯 퍼킨스 소설집, 황유진 옮김, 아고라, 2016. [본문으로]
  2. 마지 피어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1, 변용란 옮김, 민음사, 2010, 68. [본문으로]
  3. 마지 피어시, 위의 책, 60. [본문으로]
  4. 같은 책, 119. [본문으로]
  5. 같은 책, 62-63. [본문으로]
  6. 같은 책, 122. [본문으로]
  7. 마지 피어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2, 변용란 옮김, 민음사, 2010, 314-315. [본문으로]
  8. 마지 피어시, 위의 책, 312-318. [본문으로]
  9. 마지 피어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1, 281. [본문으로]
  10. 마지 피어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2, 232. [본문으로]
  11. 마지 피어시, 위의 책, 281. [본문으로]
  12. 같은 책, 311. [본문으로]
  13. 프루던스 체임벌린, 4물결 페미니즘:정동적 시간성, 김은주·강은교·김상애·허주영 옮김, 에디투스, 2021, 254. [본문으로]
  14. 정동과 더불어 경이와 희망에 대한 사유는 다음을 참조했다. Sara Ahmed,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burgh University Press, 20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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