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와 지역-의료시설] 왜 한국의 코로나19 첫 사망자는 정신병원에서 나왔을까? (주윤정)

죽음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최초의 사망자는 청도의 정신병원 대남병원에서 나왔다. 신천지 감염이 본격화되면서 코로나 19가 한국 사회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 직후 대남병원의 환자들이 연이어 돌아가셔서 총 일곱분이 사망했다. 2월 19일 첫 사망자가 나왔으며, 대남병원과 전국 코로나 19 첫 번째 사망자는 사망시 몸무게가 45kg이었고, 사후검사로 확진이 되었다. 청도의 대남병원은 보건소와 한 건물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환자들이 이렇게 늘어가는 동안, 사망자가 나올 때까지 제대로 된 검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남병원 환자는 104명이 확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대남병원 수용인원의 전원에 가깝다.

인도주의의사협의회의 우석균 의사는 대남병원이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다른 기관에서는 환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이 정신병원에서만 유독 환자가 발생하게 된 것은 이곳의 상황이 그만큼 열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월 19일, 21일, 23일, 24일, 25일까지 사망자들은 이어졌다. 중앙방역본부에서는 초기에 대남병원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해, 코호트 격리를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병원은 병실에 침상이 있어서, 환자들이 분리된 채로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 방역본부의 전문가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사망자가 연이어 발생하며, 서울의 장애인 관련 단체와 활동가들, 기자들의 취재 끝에 대남병원의 열악한 병동의 모습이 공개되었다. 이후 환자들에 대한 코호트 격리는 중지되고, 대남병원의 환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며, 사망자는 더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송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정신병 치료와 호흡기 전염병 치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자의 신체 건강 문제는 의료 영역내에서도 일종의 사각지대이기에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공간

대남병원 병실은 온돌 공간이었다. 병실 한 공간에 환자들 6명이 생활하고 있었으며, 바닥에는 제대로 된 침구 없이 등산용 매트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환자들은 거기서 좌식으로 다닥다닥 붙어 생활했다. 대남병원은 건물의 5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정신질환자들의 투신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은 봉쇄되어있었다. 쇠창살로 철저히 봉쇄된 병실에서는,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비말을 통해 감염되기에 환기가 무척 중요하다. 그런데 대남병원의 폐쇄병동에서는 환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환자들은 산책 등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말 그대로 폐쇄병동이었다. 이런 공간에서 환자들이 비말을 통해 전염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래서 전체 환자, 간호인력 등 폐쇄병동에 출입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염되었다.

이런 정신병원의 공간이 불법이 아니다. “입원실에서 환자 1명이 사용할 수 있는 입원실의 바닥면적은 6.3㎡ 이상이다. 환자 2명 이상이 사용하는 입원실 바닥면적은 환자 1명당 4.3㎡ 이상이다.”으로 규정되어 있을 뿐, 병실이 온돌인지 침상인지에 대해서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중앙방역본부 및 국립정신병원의 의사들이 대남병원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받고, 깜짝 놀라며 이 정도로 열악한 상황일지 몰랐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또한 대남병원의 공간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대남병원이 4개 정도의 시설과 하나의 복합시설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도대남병원, 청도노인요양병원, 청도군민건강관리센터, 청도군보건소, 청도군주간보호센터 들이 같은 건물에 입주해 의료복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민간의 사설 병원과 보건소 건물이 한 곳에 있는 것은 상당히 특이한 구조라고 한다. 보건소는 청도군의 유일한 선별진료소로 코로나 19 방역의 전초기지였지만, 바로 옆 건물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사망환자가 2월 19일 나올때까지 아무런 검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일부 언론들은 대남병원과 청도군의 유착관계 가능성도 의심했다. 선별진료소인 보건소 바로 옆의 병원에서, 병원 입원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 코로나 19에 감염이 되었고 사망자가 줄지어 나왔다.

 

 

배제

대남병원에서 두 번째 사망한 환자는 응급상황에서 다른 병원으로 이송이 되면서, 외출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만큼 환자들은 가족 혹은 외부와 관계를 맺고 활동을 하지 않았었다. 이런 상황은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던 환자들이, 대남병원으로 돌아가길 원했다는 기사 보도에서도 확인이 된다. 대남병원에 긴급 지원을 나갔던 관계자들은 환자들이 “청도에 있으면 아주 가끔씩 가족이 면회 오는데, 서울 가면 가족과 영원히 단절될 것을 우려해 이송을 거부했다. 밤새 설득했는데도 1명은 끝내 이송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가족들과 단절된 채, 병원에 장기입원하고 있는 경우가 상당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남병원을 떠나기를 두려워하고,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은 이후에도 병원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정신병원에 장기입원한 환자들은 약물치료로 인해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무척 어려우며, 가족, 친구 등의 일상적 관계망에서 배제되어 고립되어 있다. 취약집단은 두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에서 배제된다. 첫째로는 이들에 대한 낙인, 능력의 박탈 등을 통한 무능화, 그리고 정신질환의 준범죄화의 문제가 있다. 두 번째로는 이들이 일상을 영위하며 접촉하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 가족, 학교, 직장 동료, 공동체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철저히 고립되는 문제가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런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달려와서 구해줄, 돌봐줄 혹은 이들의 처지를 대변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 정신병원의 장기입원자들은 병원을 일종의 집으로 생각하고, 병원 안에서의 관계가 거의 유일한 관계망이며, 이들의 고통과 죽음은 비가시화되기 일쑤이다.

 

 

정신병원

한국사회에서 이런 식의 정신병원이 급증을 하는 것은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길거리의 노숙자들을 수용했는데, 1987년 형제복지원을 위시한 전국의 복지시설 문제가 등장하면서 상당수의 시설들이 폐쇄되었다. 이후 이들은 아무런 대책 없이 거리에 나오게 되었고, 행려병자로 명명되기 시작했다. 한 연구에 의하면 80년대,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정신병원과 요양시설은 급증하게 된다고 한다. 부산에서 이런 흐름을 선도한 곳은 청도 대남병원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부산 대남병원이었다. 부산 대남병원은 오성광이라는 인물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000년대 인권침해와 병원 운영상의 비리 문제들이 발생하면서, 부산 대남병원의 운영권은 다른 기관으로 이전되었다. 청도 대남병원의 현 소유자는 부산 대남병원의 원창립자인 오성광과 친인척 관계로 알려져 있다.

부산대남병원은 8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는데, 특히 형제복지원 해산 이후 거리로 나온 수많은 행려병자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곳 역시 시립정신병원과 민간의 병원이 한 군데 모여 운영되는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형제복지원에서 나와 다시 대남병원에서 수용되었던 한 피해 생존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형제복지원처럼 때리거나 노동하는 거는 없었지만은...환자복 입고 더 참혹한겨. 쉽게 말하면 방구만 뀌었다 하면은 꽉 묶어버리고, 갖다 묶어버리고 주사 한방 놔버리고. ‘보호사!’ 하면은 보호사 와갖고 갖다 묶어 버리고 주사 한방 노면 삼일 자고 나면 약 먹여가지고…”

 

환자들에 대해 강력한 약물치료 요법을 사용하고, 환자의 인권을 전혀 존중하지 않은채 운영되었다는 증언이다. 그래서 병원의 운영상태가 문제가 되어서, 부산시와 국가인권위원회의 문제제기로 인해 과거의 재단은 해소가 되었고, 소유권이 넘어간 이후 새로 법인이 설립이 되었다. 오성광 일가는 부산과 경상도 일대에 상당히 다양한 중소 정신병원, 복지시설을 운영했었다. 부산 대남병원, 구덕원, 경상병원 등을 오성광 일가가 직간접적으로 운영을 했는데, 모두 인권침해 및 운영상의 비리로 인해 문제가 되었던 기관들이다. 가족과 단절된 정신장애인들을 관리하고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정신병원, 요양원들은 확장되었다. 87년 이후 대규모 부랑인 수용시설은 사라졌지만,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서 이들은 수용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시설들은 환자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지역의 족벌 가족 경영체계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환자들의 생활 환경은 상당히 열악했으며 인권침해의 온상이었다. 더욱이 이런 정신병원에서 치료되어 퇴원 이후 지역사회에서 일상적 생활을 영위하는 가능성은 상당히 낮으며, 병원에서의 장기 수용은 당연시되고 있다.

 

 

회복

국가인권위의 발표에 의하면, “OECD 회원국의 조현병 환자 평균 재원기간은 2016년 기준으로 50일인데 반해, 우리나라 평균 재원기간은 303일에 달하며, 「정신건강복지법」시행으로 입원제도의 변화로 2017년 평균 재원기간이 215일로 감소하였지만, 입원환자 수는 2016년 6만 9,162명에서 2018년 4월 23일 기준으로 6만 6,523명으로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또한 선진국들은 입원병상을 줄이고 지역사회로 전환하는 일반적인 추세인데 반해, 한국은 오히려 병상이 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정신장애인에 대한 인권 문제가 본격화되는 것은 68혁명과 탈시설 사회운동으로 인해서이다. 이탈리아의 바자리아라는 정신과 의사는 정신장애인의 강제 격리와 수용시설에 대해 탈시설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이탈리아 68혁명의 대표적인 사례로, 68이후 10년간의 지속적인 투쟁의 결과 1978년 전세계에서 최초로 정신장애인 강제격리를 금지하는 입법을 통과시켰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낙태를 비범죄화하는 입법도 통과되었다고 한다. 바자리아는 “자유가 치료다”라는 기치를 바탕으로,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것이 오히려 병을 만드는 기제가 된다며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생활할 때 정신병이 치료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 정신장애인에 대한 연구에서는 특히 관계망, 지역사회에서의 역할과 관계의 회복을 통해 치료와 치유가 가능함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존재하기에, 관계의 박탈은 인간의 삶의 박탈이다. 그래서 관계의 회복을 통해서만 삶을 회복할 수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그 지역의 취약한 지반과 건물이 어디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제방과 담벼락, 지붕이 무너지고 생명이 무참히 파괴된다. 코로나 19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코로나 19의 회오리 바람 속에 우리는 안전하다고, 견고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여러 삶의 제도, 방식들이 붕괴되고 있으며, 그 취약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가장 약한, 가장 취약한 곳에서 심각하게 그리고 참혹하게 드러난다. 대남병원에서 국립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던 환자들은 대남병원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한다고 한다. 대남병원은 정신병원을 제외하고 다른 시설들은 운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전국에는 대남병원과 같은 열악한 환경의 정신병원들이 산재해 있고, 코로나 19의 제2차 파도, 혹은 다시 올 전염병 X의 상황에 이들은 앙상하게 노출되어 있다. 태풍의 여파로 도저히 고쳐 쓸 수 없는 지경이라면, 우리는 새로이 집을 지어야 한다. 현재의 정신병원이 고쳐 쓸 수 있는 집인지 우리는 철저히 안전진단을 시행해야 한다. 대남병원의 사망자들의 무참한 죽음을 애도하며,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는 비가시화된 삶과 공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주  윤  정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선임연구원.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질병 스티그마와 젠더의 교차성: 한센인들의 사회적 차별과 가족내 차별 경험」(2020, 공저), 「탈시설 운동과 사람중심 노동: 이탈리아의 바자리아법과 장애인 협동조합운동」(2019). 현재 장애/질병, 인간-동물 관계에 대한 생명사회학 연구진행중.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