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 젠더·어펙트 스쿨 제4회 온라인 콜로키움] 움직이는 경계들 위에서, 오늘도 (김보명)

 

매일 매일 참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지나가고 또 머문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익숙한 위험이 되었고, 그것이 바꾸어놓은 노동과 교육과 사회적 관계들은 새로운 정상이 되어가고 있다. 폭우와 폭염을 오가는, 더 이상 ‘날씨’라 부르기도 뭣한,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이 아닌 인간이 쌓아올린 재해의 산물이 세상 곳곳의 약한 자들을 치고 지나간다. 촛불광장과 ‘적폐청산’의 외침 속에 탄생한 정권은 결국 자녀교육과 부동산이라는 오래된 계층재생산 함수 앞에서, 그리고 젠더평등이라는 새로운 질문 앞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어쩌면 위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누군가의 위기가 누군가에게는 구경거리가 되는 시대에, 그리도 또 많은 이들이 각자의 분석과 진단과 비판으로 미디어와 지면을 채우는 시대에, 페미니스트 비판과 교육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새삼 고민이 된다. 매일 매일의 크고 작은 사건과 뉴스들은 그것을 미처 이해하거나 질문할 시간조차 없이 그렇게 우리를 흔들고 지나가며, 그것이 남기고 간 흔적들 속에서 말의 줄기들을 더듬어본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2018년 여름에 있었던 제주도 예멘 난민 ‘사건’ 속에서 만들어졌다.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의 소식에 촛불광장과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한국사회는 놀랍게도 ‘국민이 먼저’와 ‘여성안전’으로 응답하면서 난민반대를 외쳤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어쩌면 그렇게 페미니즘의 경계 자체가 이미 혼란과 경합의 대상이 된 상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질문이자 응답이었다. 나름 긴급하게 느껴졌던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는 페이스북 페이지 <경계 없는 페미니즘>을 개설하였고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분들의 참여와 도움을 구했다. 여성인권이 난민반대와 인종주의의 근거로 동원되고 배치되는 현실 앞에서, 페미니즘이 국경을 강화하고 누군가의 삶과 미래의 가능성을 문 밖으로 밀어내는 혐오와 배제의 언어로 오용되는 현실 앞에서,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새로운 경계를 쓰고자 하였으며, 다행히 그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지지하는 국내외의 많은 페미니스트, 퀴어, 인권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셨다. 그렇게 모인 목소리와 활동 속에서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두 달여간 이어지면서 난민혐오와 가짜뉴스의 물결을 가로질러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과 난민, 여성안전과 난민인권, 젠더 정치학과 인종 정치학 간의 경계들을 질문하고 다시 쓰고자 하였다. 넓다면 넓지만 또 좁다면 좁은 페이스북의 연결망 속에서 공유되었던 이 글들은 2019년 여름 <와온>출판사와 조하늘 편집자를 만나 책으로 출판되었고, 2020년 여름에는 젠더·어펙트 스쿨을 통해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쉽게 알아차렸겠지만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의 『경계 없는 페미니즘 (Feminism without Borders)』(여이연, 2005)에서 빌려온 제목이기도 하다. 후자는 ‘서구의 시선 아래(Under Western Eyes)’라는 모한티의 대표작부터 다소 대중에게 덜 알려진 ‘도대체 고향이 무슨 상관인가? (What’s Home Got to Do with It?)’이라는 비디 마틴(Biddy Martin)과 함께 쓴 글, 그리고 ‘사유화된 시민권, 기업화된 대학, 페미니즘 프로젝트(Privatized Citizenship, Corporate Academies, and Feminist Project)’ 등, 인도 출신의 탈식민 페미니스트 모한티가 미국에서 활동가, 연구자, 교수자로서 살아오면서 써 온 에세이들을 엮어 단행본으로 낸 책이다. 참고로 전자의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원래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페이스북 페이지 제목으로 빌려왔던지라 책으로 내게 되면서 다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번역본을 출판한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기꺼이 양해해 주신 덕분에 이름을 바꾸지 않고 출판될 수 있었기도 하다. 원저자인 모한티 또한 사정을 듣는다면 충분히 양해할 것이라 생각된다.

 

독립 이후의 인도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나이지리아를 거쳐 미국에 정착하게 된 모한티는 원래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또래 유색인종여성 페미니스트 동료들을 만나면서 여성학 강사가 되었다. 1980년대 미국 여성학은 기존의 주류 페미니즘에 내포된 중심들, 그러니까 서구, 백인, 중산층, 이성애, 자유주의 등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페미니즘의 지평을 새롭게 써 나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모한티는 동시대의 흑인 페미니스트, 치카나 페미니스트, 탈식민 페미니스트 연구자들과 더불어 이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모한티는 페미니즘을, 그리고 페미니스트 동료들을 만나면서 세계는 물론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정체성, 의식, 활동, 지향을 새롭게 읽어내고 구성하게 되었으며,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그가 백인중산층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주류였던 (어쩌면 여전히 그러한) 미국사회에서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로 자신의 위치와 정치학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여정은 단지 의식의 고양이나 정체성의 발견이 아니라 정치학의 구성이자 세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써 나가는 실천들이기도 하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 참여한 여러 필자들 중의 한명으로서 나는 이 책이 이 ‘난민’에 대한 책이자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들이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시대의 페미니즘에 내포된 인종주의, 국가주의,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그것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담론이자 실천적 지형으로서의 젠더 정치학에 대한 이야기들이라 이해하고 있다. 난민들을 왜 그리고 어떻게 환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은 다시 페미니즘이 무엇이어야 할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모한티의 『경계 없는 페미니즘』이 서구백인중산층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그늘 아래에서 인종주의, 자본주의, 이성애중심주의에 대한 날카롭지만 정교한 비판적 독해와 해체의 작업을 만들어갔던 것처럼 우리의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국민이 먼저’와 ‘여성인권’이 만나서 ‘난민반대’의 공식이 만들어졌던 2018년 여름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자민족중심주의는 물론 촛불광장과 더불어 새롭게 경험되고 주장되었던 ‘국민주권’과 어떻게 만나는지,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여성의 안전과 권리는 비국민이자 국가 없는 자들로서의 난민의 인권과 왜, 그리고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질문하면서 촛불광장 이후의 페미니즘을 고민하고자 하였다. 다양한 필자들은 개인적 경험과 연구를 통해 페미니즘과 인종주의, 자본주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이성애중심주의, 중산층중심주의, 서구 중심주의, 비장애중심주의 등의 다양한 주류질서들과 어떻게 겹치고 충돌하고 교차하는 관계들에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서구 백인 페미니즘이 일정부분 비서구 여성들의 역사, 문화, 정체성, 경험, 의식, 이해관계, 정치학을 자의적으로 오인하거나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가운데 국제 여성인권운동(international women’s human rights movements)의 지평과 영향력을 확장해온 것처럼 오늘날의 한국사회의 대중화된 페미니즘의 서사와 전략 또한 퀴어, 트랜스, 난민, 이주민, 장애인, 노인, 빈민 등 주변적이고 때로는 비주권적인(non-sovereign) 삶의 주체들을 은연중에, 때로는 노골적이고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혐오하는 가운데 페미니즘의 배타적인 경계들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이 경계짓기에 대한 저항과 개입은 경계를 지우는 작업이자 다른 관계들을 만들어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결국 경계는 하나의 선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들의 촘촘하고 때로는 난해한 연결들로 만들어진 담론적 지형이며, 이곳에는 막다른 골목이나 풀 수 없는 고르디안 매듭, 그리고 되돌아서 결국은 안과 밖을 뒤집고 연결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길들이 있다. 난민인권에 대한 페미니즘의 응답이 환대와 거부 사이의 이분법적 선택도, 그렇다고 이방인의 교화와 선주민의 관용이라는 허구적 타협도 아닌, 페미니즘과 한국사회의 경계를 새로 쓰는 작업이 되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네 명의 독자들이 보내준 리뷰들은 『경계 없는 페미니즘』이 책으로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만남과 교류의 자리들을 보여주었다. 박준훈은 난민인권과 여성안전의 충돌이라는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것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서 출발해보는” 접근을 제안하면서 “미디어나 통계의 바깥, 현실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배척하기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한다. 동감한다. 2018년 여름 언론보도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달군 그 ‘난민’은 가짜뉴스와 과잉된 보도 속에서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으로 구성되었으며, 난민반대 청원에 찬성한 ‘국민들’의 혐오는 그들의 상상 속에 재구성된 위험하고 폭력적인 무리들로서의 난민들에 대한 반응인 동시에 사실은 만성이 되어버린 사회적 위기와 삶의 불안에 대한 반발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유럽이나 미국 등에 비교할 때 소규모인 한국의 난민신청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흥미롭게도 난민정책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으로 이어지지도, 그렇다고 시리아 내전을 비롯한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록 ‘난민’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인도적 체류허가를 얻은 예멘 난민신청자들은 제주도에서 또 제주도를 벗어나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소녀들이 영원히 작고 약한 존재로 머물지 않듯이 국가 없는 자들 또한 영원히 주권 없는 자들로 남지는 않는다. 그럴 수 없다. 살아있는 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모두 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유사한 맥락에서 김보라의 서평에서 언급되는 “난민들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비참해” 보이는 이슬람 문화권 여성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인간’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권리 없는 자들은, 자유롭지 못한 자들은, 박탈당한 자들은, 혐오와 차별을 겪는 이들은, “비참”한가? 그 비참함이 불러내는 감각과 정동과 지향은 무엇일까? 그 비참함의 감각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자매애와 인류애의 발현일까 아니면 반대로 그저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해방되고 진보한 (혹은 그렇다 착각하는) 자들의 우월감이나 선의나 위선이나 정치적 올바름이나 혹은 타문화에 대한 무지의 표현일까? 후자라면 타자의 고통에 대해 나는 어떤 응답을 할 수 있을까? 서구 중산층의 자유주의 정치학에 뿌리를 둔 국제여성인권 담론이 비서구 여성들을 시혜나 구제의 대상으로 재현하고 이들의 행위성과 역사성을 삭제해왔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안타까움이 관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의 서구중심성과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성찰 또한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남들과 관계들과 실천들 속에서 우리는 모두 변화하고 이동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수빈의 “무슬림 여성들이 베일을 쓰는 것은 한국 여성들이 화장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여진다. 베일을 쓰는 것과 하장을 하는 것 모두 여성들의 자유의지는 아니지만, 화장을 할 자유, 베일을 쓸 자유는 있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은 이러한 변화와 이동과 성장의 실마리들을 보여준다. 물론 화장과 베일을 ‘비교’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아마도 방법론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실패하기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시도와 여정일 것이다. 나와 타자 사이를 오가는 그 차이와 반복과 연결의 회로들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관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자유의지’와 ‘자유’의 구별은 우리가 자주 말하는 자유(liberty)나 행위성(agency)이 단선적이거나 단계적인 성취가 아닌 입체적 회로이자 조합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근대적 이상으로서의 ‘자유’는 여성들에게, 소수자들에게, 그리고 어쩌면 자유주의 정치학의 지배에서 비껴난 비서구 사회의 소수자들에게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일 수 있지만, 또한 우리는 그 ‘자유’의 규범에 담긴 폭력과 배제의 역사에 무지할 수 없는 이중, 삼중의 어려움 또한 안고 있다. ‘자유’와 ‘해방’이 단지 현재의 혐오나 억압에 대한 미래적 이상이 아닌 오늘날 우리가 누려야만 하는, 그러나 불완전한 성취로서 고민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달리 말해, 모든 것에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오늘을 잘 살아가기 위해 힘을 내야 한다.

 

코로나 방역 정책과 사회적 거리두기가 만들어내는 차별과 위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경계 없는 페미니즘이란 내부의 울타리를 벗어나 방향감각을 읽고 타자와 혼동을 함께 겪는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하는 조혜윤의 서평은 『경계 없는 페미니즘』을 현재적 지평으로 불러온다.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동하고 새롭게 구조화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장마(라 쓰고 기후위기라 읽는)가 치고 지나가는 자리들에서 우리는 그간 보지 못했던 경계들을 보기도 하고 또 새로운 경계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기도 한다. 국경이 봉쇄되고 집과 바깥의 경계가 견고해졌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생존 격차가 확연해졌다. 경계는 고정된 선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실천들의 살아있는 효과들이다.

 

네 개의 리뷰는 모두 진지하고 성실한 독해와 논평을 담고 있다. 하나를 ‘선정’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이 여러 저자들의 공동작업임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네 개의 리뷰가 각자의 방식으로 깨달음과 고민을 던져주었지만 그 중 전수빈의 리뷰는 촘촘하면서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경계 없는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독해하고 또 그것에 응답하는 한편, 『경계 없는 페미니즘』이 닿지 못했던 지점들을 들추어낸다. 예멘 난민들과의 조우 이후의 페미니즘은, 그래서 어떤 시민권의 정치학과 연대의 정치학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도 (어쩌면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는 이 경계들 위에서, 우리는 어떻게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김  보  명

 

여성학 연구자이며 부산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다. 다양한 페미니즘 정치학이 갖는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효과들을 질문하는 작업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교차성 x 페미니즘』(여이연, 2018), 『경계 없는 페미니즘』(와온, 2019), 『공동체 없는 공동체』(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2020) 등에 함께 참여하였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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