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받 또는 자립음악의 근황 : 2015부터 현재까지 (한받)

 

먼저 밝혀 드리자면, 자립음악생산조합(이하 ‘자립’)은 현재로서는 활동이 중단되었어요.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이 지면에서 설명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해체 혹은 와해된 자립의 주요 분자(이하 ‘자립분자’)들의 행로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홍대 앞에서 조합을 결성하여 자본의 침공을 막도록.

 

자립분자인 필자는 2015년에 홍대 앞을 떠났지만(만리동으로 이주) 그 직전에 홍대 앞에서 우주[각주:1]를 끄집어냈습니다.

필자가 홍대 앞을 물리적으로 떠난 후에는 또 다른 자립분자 ‘d’가 홍우주로 들어갔고, 현재는 홍우주의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며, 최근 마포구와 홍대 앞 거리 상가 상인회 주축으로 재추진(2016년 홍대 앞 관광특구 추진을 막아냄)되고 있는 홍대 앞 관광특구 지정을 막아내려 합니다.

 

두 번째, 약자들의 투쟁 현장에 연대.

 

연대 활동의 주축이었던 또 다른 자립분자 ‘h’는 자립을 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의 투쟁에 연대하며 예술해방전선을 구축하였다고 합니다.
자립의 일부 조합원이 h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클럽과 레이블 그리고 동아시아 서브컬쳐 네트워크로.

 

자립에서 가장 힙(?)했던 ‘p’는 자립을 일찌감치 나왔고 을지로 쪽에 새로 생긴 공간 ‘S’의 공연 기획을 함께 하고 있고 또 자체적으로 레이블도 만들어서 활발히 운영 중입니다. 주로 동아시아의 힙한 음악(가)들을 디깅하며 공연을 기획하고, 또 그들 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합니다.
일례로 필자가 대만 타이페이에 자립음악 연구차 투어를 갔을 때 들른 어느 독립 음반점에서 제가 한국에서 왔다니깐 주인장이 제게 대뜸 p를 아느냐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네 번째, 음악 씬을 떠남.

 

필자와 맨 처음 두리반 투쟁에 연대했던 ‘j’는 웹 프로그래머가 되었고 더 이상 씬에서 음악을 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새로운 씬(황무지?) 개척?

필자는 두리반 투쟁 이후 한동안은 홍우주(홍대앞 상수동 거주)의 거리 위에서 구루부 구루마를 밀고 당기는 자립음악을 실천하다가 만리동으로 이사를 가고부터 좀 더 범위를 넓히며(협업과 지원 신청), 플레이어로 / 플래너로 / 프로듀서로 / 지금까지 여러 작업 분야를 전전하고 있습니다.
3년 전에는 만리동 옆 동네 아현동에 작은 책방 만유인력을 백여 명의 후원금을 바탕으로 열게 되었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지역 안에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동네는 말 그대로 홍대 앞과는 공기-질이 다른 황무지(?)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이제부터 다섯 번째 행로로 나아간 자립분자(필자)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자립음악을 실천하는 장치-구루부 구루마와 공간-만유인력의 이야기를!

 

“자립음악이란?
자립하는 소리, 음향, 사운드, 노래, 음악.
자신을 살리고 자신의 주변을 살리는 음악.
자본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주체를 깨우치고
삶을 억압하는 자본을 궤멸시키는 데 소용될 음악”

 

 

자립음악 아방가이드 구루부 구루마

 

구루부 구루마 시즌 1 2012-2014 @홍대 앞

 

두리반 투쟁이 추동시킨 것들이 많은데 자립음악생산조합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투쟁 현장으로 연대 공연을 하러 다니게도 되었고
홍대 앞에서는 구루부 구루마(2012-2014)를 발명하여 운용하게 되었죠.


구루부 구루마를 끌게 된 이유는 조금 단순한데요, 우선은 제 음악을 동네 주민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방식에 있어서는 거리-버스킹이 아니라 이동식 노점을 떠올렸습니다. 두리반 투쟁을 겪으며 고정된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이동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했죠. 거리의 구릉-곧, 삶의 구루부(groove)-을 느끼며 이동하는 리어카(옛날 아버지 말로 ‘구루마’)가 떠올랐죠.

 

사진1. 구루부 구루마 운용하는 모습. (2013년 5월 홍대 앞 상수동 삼거리)

자립음을 실천하는 장치가 되고자 했습니다. 기실, 뭔가 완성된 것으로 거리로 나오지 않았고, 거리에 나와서 완성되어 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음악가로서 자립을 시도-실험-실천하는 장치를 만들어 거리로 가지고 나온 셈인데요,

자립을 위해서 자신의 음악을 거리 위에서 계속 알렸습니다. 그리고 자조적(자신이 조립한) 음악상품(음반)을 구루마 위에다 놓고 행인들에게 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편, 구루부 구루마는 홍대 앞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여러 행진을 이끄는 장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동네를 벗어나면 현장에 곧바로 합류하여 사람들의 행진을 이끌었는데, 정말로 획기적이었습니다. 모든 행진이 하나의 ‘기적’-행위였습니다. 기적-소리!

음악 상품(음반)의 판매 행위를 상행위라 할 때, 역설적으로 ‘상행위’를 뛰어넘는 ‘하(訶)[각주:2]행위’를 행진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구루부 구루마 시즌 1 파이널 2015. 4. 1.

 

2015년 4월 1일 새벽 상수동에 정거해 있던 구루부 구루마는 시즌 1의 마지막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영등포구 양평동 인디아트홀 공까지 ‘장국영’ 대행진을 진행하였습니다. 장소와 국경을 초월한 영원한 젊음과 저항의 연대가 이렇게 비로소 시작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중간에 국회의사당 앞에서 ‘돈만 아는 저질’을 부르자 경찰 중대 병력이 필자를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구루부 구루마 시즌 2 2015-현재 @만리동

 

만리동으로 온 2015년 구루부 구루마는 한동안은 동네에서 돌기보다는 투쟁의 현장으로 나돌았습니다. 한남동에서 자립심 대행진과 테이크아웃드로잉 투쟁에 연대하여 싸이 사과를 촉구하는 대행진을 이태원 거리에서 펼쳤습니다. 사조를 구루마에 태워 불을 붙여 불싸조가 되었습니다.

구루부 구루마 시즌 1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당신의 구루마’라는 공연을 하기도 했고요,

만리동 근방 아현역에 있던 아현포차가 행정대집행으로 쫓겨난 후에 아현 뉴타운 아파트 단지-마래푸(마포래미안푸르지오)-를 돌며 행진하였습니다.

아현포차를 내쫓지 말고 함께 살자고 절규하였습니다.

이러한 구루부 구루마의 3행시-행진+행위+행동의 시위-는 이듬해인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있던 어느 겨울날, 노동당의 옵티머스 트럭(구루부 구루마가 변신한?)에 올라타고 “근혜 하야”를 외치며 춤을 추었던 것이 절정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3월 11일 박근혜 탄핵 인용으로 탄핵축하 탈핵기원 테크노 퍼레이드를 이끌기도 하며 절정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로 그다음이 제게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지점으로 들어서기 전에 제 역할에 있어 하나의 변화 지점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전까지 자립음악가로 홍대 앞에서 활동하던 저는 만리동예술인주택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만리동이라는 지역 속에, 예술가로 들어가 주민과 교류를 해야 할 의무(?)가 생겼습니다.

($ : 그즈음의 제게 들어온 자본의 흐름을 살펴보면 첫째, 2014년의 홍대앞에서의 당인리선의 퍼포먼스를 위해 천만 원의 창작준비금을 지원받았습니다. LIG 문화재단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준비지원금을 8개월간 받았는데 이는 만리동예술인주택의 입주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가 아닌 누군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저 자신을 자립음악가에서 예술가로 포지션에 변화를 주는 일이 계속 생기기 시작했고 만리동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그런 일이 한층 더 잦아졌습니다.)

그야말로 지원 신청과 함께 다른 예술가들과의 협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죠.

그전까지 필자가 자립음악의 주창자로, 자립음의 주요 플레이어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활동했다면, 2015년부터는 플레이어에서 나아가 플래너, 프로듀서로 혼종되어 활동하게 되었었죠.

밀양 송전탑 앞에서 공연했을 때, 사회자분이 저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죠. 행위예술가라고.

그런 식으로 두 방향-투쟁 현장의 연대-행진과 동네에서 주민과 예술가들과 협업의 방향-에서 자연스레 구루부 구루마의 시즌 2가 시작된 셈이죠. 하지만 협업의 방향도 그렇게 매끄럽거나 단순하지가 않아서 하필이면 필자가 들어간 만리동은 재개발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자연스레 사라진 만리동의 주민들을 만나 만리동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면서 협업이 시작되었고 현재까지의 저의 지역 속 작업의 원형이 이렇게 마련되었습니다.

 

 

<구루부 구루마 시즌2-사라진 만리동 주민을 찾아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책으로 남겼고 필자의 아내가 시를 썼고 제 동료 음악가들이 초대되어 노래를 만들어 만리동, 아현동 골목길에서 직접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실로 중요하다는 그다음 지점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만리동에서 본격적인 협업과 직접 지원 신청의 시작을 <만리동 미싱 유>로 하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서울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만든 첫 작품입니다.

주제 의식은 명확합니다. 도시의 재개발에 맞서 저항하라!

 

이미 2008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맹아적인 작품을 거리에서 하였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음악 활동 이야기에 밑바탕을 두었고요. 쫄딱, 완전히 망했고요.

어쩌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의 한국 버전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쿠르트 바일의 음악 스코어만큼 멋진 음악들로, 거리에서 없어진 만리동의 한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온 것을 봤을 때 기본적으로 조악한 저질의 퍼포먼스와 음악들, 음향들이 거리의 시민들의 이목을 끌어내기엔 한계가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예, 맞습니다. 어디까지나 홍대 앞에선 통했다는 착각을 하였을지도 모르지만 홍우주 밖에서 시민을 만나는 데 있어서 필자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새삼 다른 누군가와의 협업의 어려움도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즈음, 매주 토요일 오전부터 반나절 동안 원주의 청소년들에게 자립음을 전하는 수업도 동시에 진행하였는데요, 그 아이들을 저는 ‘원자청소년’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주에서 립을 따르는 청소년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원주는 협동조합의 발상지라 하여 자립음악생산조합을 창설할 때에 협동조합 강의를 들으러 저를 포함한 여러 음악가들이 방문하여 수업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이 아이들과의 수업에 공을 들였던 것 같습니다.

원주영상미디어센터에서 저에게 요청을 해 와서 이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저는 2010년부터 2016년까지 7년간을 미디액트에서 ‘아마츄어뮤직증폭’이라는 음악창작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자립음악은 기존의 상품으로서의 대중음악이 아닌, 자신을 살리고, 주변을 살리는 음악의 근원으로 들어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게 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교류를 산업적인 직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습니다.

직류는 음악-상품의 거래행위나 관람행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직류라는 행위는 자본을 통한 가짜-만족을 갖게 하지만, 진정한 힘과 은근한 깊이는 갖기 어렵지 않나요?

하지만 그 음악가의 철학이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수업이나 워크숍을 함께 듣는다면,

교류를 통해 서로의 힘을 나눔과 함께 그 깊이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깊이는 현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노들장애인야학에서의 노들테크노전사들과의 수업에서 현저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노들테크노전사들은 영어 약자로 NTS-Nodle Techno Singasongfighters입니다. 농담처럼 들리시겠지만, BTS를 능가할 음악전사들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충전되는 인력에 많이 의지하고 있으며 언젠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충전된 인력-힘으로 자본을 궤멸시키고, 마침내 전복할 것입니다.

이 해에는 다른 예술가, 안데스, 여다함 작가와의 협업으로 아르헨티나로 날아가 아르헨티나 인민 안방 해방 전선을 구축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를 다 함께 행진하기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인민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다음을 기약하였습니다.

다음 해에는 다행히 <만리동 미싱 유> 시절의 어려움을 조금은 극복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핵과 젠트리피케이션 반대 시위 다원예술 거리 실험극 퍼포먼스인 <22공 18욕 복섬 지구>를 만리동예술인주택 앞 배수지공원과 만리동 일대의 거리 위에서 펼쳐내었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한껏 취해 있을 때 아현동 재개발 구역에서 철거에 항거하던 청년이 자살하였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그간 저의 활동에 대해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인력-교류의 베이스 캠프 : 책방 만유인력

 

사진2. 책방 만유인력

 

홍대 앞을 포기(?)하고 만리동으로 유배(?)온 이후, 인력 장치, 구루부 구루마는 계속 거리 위를 행진하며 끌어당김의 힘을 과시하였고, 그 힘의 절정은 앞서 말씀 드린 바,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였습니다.

그때의 연대의 힘과 에너지가 깊이를 가지며 필자와 아내를 다시 출렁이게 하였습니다. 저희는 수년 전 대만을 방문했다가 24시간 책방을 그곳에서 보고 감명을 받아 홍대 앞에서 24시간 책방을 내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가 돈이 없어서 포기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네에서 괜찮은 공간이 저희 눈에 들어와 만리동 고개에 책방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 다시 사로잡히게 되었고 근혜 하야 당시의 뜨거운 열기를 바탕으로 페북에서 일주일간 후원금을 모집하여 보고 안 되면 다시 돌려드리겠다 하고 진행하였다가 십시일반 모금하여 책방 만유인력을 개설할 수 있는 자금, 천만 원을 드디어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가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내심 봐두었던 공간의 월세를 잘못 알았던 것입니다.

이후 8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가 봐두었던 공간과 조금 떨어진 다른 곳에서 좋은 공간을 발견하였고 계약하여 현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2017년 8월에 책방을 정식으로 오픈하였고 현재 2020년 8월까지 문을 닫지 않고(!) 건재해 있습니다. 2018년 예술인복지재단의 파견예술사업에 기관으로 참여하여 예술가들의 협력으로 힘을 얻었고, 올해 다시 파견예술사업에 기획으로 참여하여 다시 힘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책방을 운영하며 좌충우돌을 겪은 시간을 떠올리면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후원자들이 방문해 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기도 했습니다. 도저히 월세가 나올 수 없기에 언제나 공연으로 밖으로 나도는 시간에 책방은 무인으로 운영되기도 하였고  결국 작년에는 책방을 휴업하기도 하였습니다. 언제나 책방으로 불리기에는 뭔가 모지란 어느 예술가의 아지트로서 느껴지는 것에 필자 능력의 한계를 다시 깨닫기도 하였습니다. 책방을 개업한 해의 연말 축제 <만년 2017>에서 필자는 그간의 울분에 복받쳐서 울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개업 첫해의 의욕으로 동네의 초등 4학년 아이들과 ‘봉래전자음악단’이라는 어린이전자음악그룹을 만들어 교내 예술제에서 데뷔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공연 의상은 동네 미싱 공장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문화재단으로부터 월세 지원을 6개월간 받기도 했습니다. 월세는 주인이 두 분이라 반으로 나뉘어 전달되었습니다. 어쩌면 연로하신 그분들께 매달 용돈을 드린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작년에는 책방을 휴업하는 대신, 책방이 파견을 나가서 가까운 공덕역 근방에 있는 경의선 공유지에 들어가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잡기도 했습니다. 그곳을 ‘공자라이브’라 했는데, 유와 립의 라이브러리이자 아카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경의선 공유지는 지난해 날아든 국토부의 수십억짜리 최고장에 공유지 점거 운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나와야 했으며, 나오자마자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공유지에 함께 살던 청년난민 이희성, 아현포차, 청계천/가든파이브철거상인, 장애인자립지원센터, 도깨비 아저씨 등도 가슴 아프지만 같이 내쫓겼습니다.

저희들은 벌써 마음속으로 다음 공유지를 구상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립음악을 연구하는 첫 번째 책, <동아시아 자립음악 연구>

 

장위동 재개발에 저항하는 현장에 연대 공연을 갔다가 연구서를 지원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서울문화재단의 지원금 천만 원을 받아서 <동아시아 자립음악 연구>라는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그 책을 집필하면서 나 자신의 참상에 대해 깨달음과 동시에

책을 쓰면서 떠오른 이미지가 있습니다.

자립음악이라는 것이 아해가 막다른 골목으로(죽으러, 죽음으로) 달려가는 형국임을 깨달았죠.

그것은 필자 같은 이가 <동아시아 자립음악 연구>라는 책을 써나갈 때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던 이미지,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가(야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자립음악을 생각할 때에 자꾸 필자의 머릿속을 점령하며 떠오른 이미지였습니다.

막다른 골목이라 했을 때, 우린 벌써부터 안 될 것 같다는 패배와 절망을 먼저 쏘아 올리는 데 그럴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저의 지론은 막다른 골목의 끝까지 달려가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씬이 없다고 하면 한탄이 쉽게 떠오르겠지만, 그만 한탄하고 계속 달려가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필자인 작은 음악가가 쏘아 올린 자립음악이 아니었는지.

 

 

어지러운 에필로그

 

스펙타클의 사회와 300개의 노래[각주:3]

 

지난 2월부터 거의 매일 밤 기 드보르가 쓴 반자본주의 폭탄-사상서 <스펙타클의 사회>에 수록된 떼제별로 노래를 직조립해내고 있습니다. 현재 4장 주체와 표상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123번 떼제까지 노래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매일 밤, 이렇게라도 노래를 만들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이 작업이 저의 사상과 실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명약관화합니다.

 

동묘구제음악축제

 

동묘 앞에서 구제음악축제를 펼칠 예정입니다. 구제 옷(버려진 옷)을 입고 버려진 자를 구제하는 구제음악의 장이 어쩌면 그곳에 형성되리라 기대합니다. 동묘아가페관우여, 다시 살아나 우리의 동료가 되어 주소서!

 

어밴던스 - 7인의노숙자 vs 건물Zoo

 

그리고 올해 어밴던스-버려진 것들, 포기된 자들의 연합전선이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먼저, 아현맨이 코로나 블루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CB War!

 

플플프프퍼퍼

 

플레이어에서 플래너로, 또 프로젝트를 발명하여 프로듀서로, 그리고

퍼포먼서로 길 위에서 도로를 점령당했지만 비록 거리 위이지만 계속 퍼폼할 것입니다.

재개발과 재건축이 온통 세상을 뒤덮고 있으며 도처엔 토지의 노예-좀비들이 출몰합디다.

우린 가진 것이 거의 없어서 노예들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디다.

거리는 계급투쟁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거리는 선전의 공간만 되었을 뿐입니다.

 

코로나 이후의 폭풍성장

 

집안일을 함에 있어서 폭풍 성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자립에 있어서 더욱더 성장 중입니다.

 

자산가치의 증식이 아닌 자립가치의 증편, 그를 위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국가에도, 시장에도 의존하지 않는 연대의 장을 형성시켜 나가고 싶습니다.

 

 


 

1974년 대구 출생. 1990년대 말까지 대구에서 독립영화 운동. 2003년에 아마츄어증폭기로 홍대 앞 음악 씬에 등장. 2010년에 두리반 투쟁에 연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민중엔터테이너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활동 중. 2012년 자립음악생산조합 결성. 홍우주, 만리동예술인주택 조합원. 현재 아현동에서 만유인력 책방 운영.


 

  1. 필자는 홍대 앞에서 시작해서 우주로 뻗어나갈 문화예술 사회적 협동조합의 창립에 관여하였고, 협동조합의 단체명 제정 당시에 우주를 넣어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논란 끝에 이 이름은 채택되었습니다. [본문으로]
  2. (꾸짖을 ’) : 꾸짖다, 혼내다, 책망하다, 노하다, 노래하다, 꾸지람 등의 뜻을 가진 한자 [본문으로]
  3. http://soundcloud.com/vad-hahn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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