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와 지역-대학교육]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 대학 강의의 현단계와 딜레마 (1)

 

웹진 <젠더·어펙트> 기획 좌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 대학 강의의 현단계와 딜레마”

 

 

  • 일시 : 2020514일 늦은 5

  • 장소 : 동아대학교 승학캠퍼스

  • 참석 : 박지원(진주교육대학 강사), 이형진(동아대학교 강사), 권두현(동국대학교 강사), 김대성(한국해양대학교 강사),  신민희(경성대학교 강사), 박준훈(동아대학교 석사과정), 박지원(동아대학교 학부생), 김연우(동아대학교 학부생)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개강이 늦춰졌고 비대면/온라인 강좌로 전환되어 9주차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초유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모두가 이렇다 할 준비나 충분한 예행연습 없이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을 줄로 압니다.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불평등한 방식으로 가시화되었던 것처럼 ‘비대면 온라인 강좌’라는 오늘의 교육 현장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교육의 질 저하와 등록금 환불’ 문제 정도로 축소된 채 가시화되고 있지만 교육 현장의 다종한 주체들이 체감하는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할 거라 생각합니다. 이른바 ‘뉴노멀(new normal)’을 감각하고 대처하는 방식 또한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의 현상을 진단하는 새로운 이론과 담론을 모색하고 도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담론과 이론의 틀로 담을 수 없는 현장의 목소리를 모아보고자 이 좌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부당함과 힘겨움에 관한 호소, 원망과 분통을 터트리는 말들은 사소하고 사적인 감정 분출로 폄훼되곤 해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비용)으로 할당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 또한 ‘정서 및 감정 격차’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만큼 이 격차를 가시화하는 것 또한 중요한 사안이라 하겠습니다. 거리를 두고 사태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없는 형편에 놓인 사람들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한계는 자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목소리가 품고 있는 힘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지 않을까 합니다. 대학이라는 생태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또 발화를 요청하는 과정은 각자의 서식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단절되어 있던 관계를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입니다. 가시화되지 않은 격차가 만들어내는 정동이야말로 오늘의 관계성을 설명해주는 파장이라 할 수 있겠지요. 모쪼록 이 자리가 더불어 사는 것이 곧 부대끼며 사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경험의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좌담이라는 목소리들의 부딪침-실천이 어울림과 부대낌으로 분할되어왔던 관계의 조건을 환류할 수 있는 생태 경로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공통질문

 

 1. [사진 3장] 조금 편안하게 이야기를 열어보았으면 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이후의 일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 3장(문장도 좋습니다)을 짧은 설명과 함께 안내해주세요.

 

 2. [생소함의 곤혹과 감동] 온라인 강좌에 대한 소회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생소함’이라는 테마로 이야기해야겠지요.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장면(감동이든, 곤혹이든)이나 순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3. [어떤 라인?] 온라인 강의 덕에 기왕의 강의 앞에 ‘오프라인’이라는 조건이 붙게 되었는데요, 새삼 온(on)과 오프(off)라는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프라인 강의라고 하니 자신을 지탱(증명)해줄 수 있는 줄(line)을 제거한 상태로 강의실에 들어선 느낌이 들고, 온라인은 안전한 줄에 자신을 묶어둔채 강의를 시작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강의(실)에서 여러분들을 붙들어주는 줄(기반)은 무엇인지 이야기해주세요. 온라인과 오프라인 강의 양쪽 모두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4. [접촉면과 절단면] ‘온라인 강좌’라는 익숙하지 않은 강의 환경은 동시대 모두가 맞이한 새로운 공통 조건입니다. 공통 경험이 빠른 속도로 희박해져가던 대학 사회에 뜻하지 않게 찾아온 공통 감각이기도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온갖 문제와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명확한 응답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불만을 쏟아내는 말하기와 차마 말하지 못하는 불안의 감정 속에서 기왕의 방식과는 다른 연대 감각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연대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른 속도로 기울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여러분의 ‘불만’과 ‘불안’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누군가는 무언가를 이을 수 있는 접촉면을, 누군가는 마침내 끊어낸 절단면을 보지 않을까요.

 

 5. [몸의 변화] 비대면 강의는 무엇보다 몸의 변화를 요구하고 또 (새로운) 몸을 조건으로 성립된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사정과 입장을 뒤로 하고(혹은 짊어지고) 강의실에 모여 접촉할 때 어울림과 부대낌이라는 정동이 발생하는 대면 강의와 달리 비대면 강의는 몸(들)의 접촉 없이 성립합니다. 대신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그 일을 대신하죠. 이미 호명과 대답(목소리)을 대신해 일정 영역 안에서 발신하는 전자신호로 각자의 자리를 증명한 전자출결시스템에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1학기 통싸강 가자’라는 의견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지 않고,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을 쾌적한 면학 분위기로 감각하는 몸(들)의 여론을 대변하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강의라는 공통장에서 변화하고 있는 몸(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6. [아픈 몸_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feat. 조한진희] 장시간 온라인 강좌 ‘시청’으로 인해, 너무 많은 과제 작성으로 인해 탈이 나진 않았나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가 바로 앞에 있다고 상상하며 온라인 강의를 만드느라 어딘가에 탈이 나지 않았나요? 온라인 강의로 인해 나빠지고 ‘아픈 몸’에 대해서도 긴급하게 이야기해보았으면 합니다.

 

 7. [강의실의 우울과 기쁨] 접촉이 없으니 당연히 마찰도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말하지 않고 듣지 않는 강의실에서의 우울증은 비대면 온라인 강의라는 조건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요? 수업이라는 기왕의 협업 체계란 이러한 부대낌이 동력이면서 언제라도 장애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다. 비대면 온라인 강좌가 동시대 수업의 공통 조건이라는 부대낌의 형식도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접속해 있는 강의실의 우울과 기쁨, 혹은 동력과 장애물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1부>

 

김대성 : 이 좌담은 젠더·어펙트연구소의 웹진 창간과 함께 대학 강의 구성원들, 코로나 19 바이러스 이후의 변화되고 있는 대학 환경에서 어떤 것들을 체감하고 있고, 어떤 문제들이 있고, 어떤 이점이 있고, 이후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예감하고 있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최근에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 대공황보다 더 큰 변화에 직면해 있다’라며 거대한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는데요, 그런 층위에서 대학이라는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되고 있고, 변화할 것인가 진단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구체적인 목소리들을 듣고 각자가 속해 있는 위치에서 감지하고 있는 것, 감당하고 있는 것, 고민하고 있는 부분들을 표현하고, 기록하고, 그것을 묻고 듣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갖은 이론과 진단이 쏟아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잘 들리지 않는 개별자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기록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들어진 자리이니 대학이라는 공통장에서 수업을 듣고, 수업을 하고, 수업에 참여하면서 가지게 된 생각들을 이야기 나누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 혹은 명료한 생각까지 진행하진 못했지만 염두에 두고 있는 고민의 실마리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런 부분들을 이야기하면서 해결책을 찾은 것을 목표로 두지 않더라도 그런 것들을 표명하고 발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정인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마련해보았습니다. “자 이제 이야기해봅시다.”하면 혼란스러울 것 같아 간단한 공통질문들을 만들어서 며칠 전에 공유했었는데요.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덧붙이고 싶은 말들, ‘이런 이야기도 했으면 좋겠다’하는 부분들을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좌담 진행을 맡게 된 김대성이라고 합니다. 저는 동아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한 과목씩 강의를 하고 있고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보조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웹진 구축에 참가를 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 취지와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돌아가면서 짧게라도 소개를 하며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좌담의 섭외 연락을 받고 공통질문을 보면서 느낀 아주 느낌적인 느낌, 소회를 잠깐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이라는 부사는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이 있음을 전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간곡하게 부탁하는 자리에 놓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이 ‘문턱’처럼 작용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포스트-코로나’를 상상하고 준비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 같이 어떤 ‘문턱’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두현 : 자연스럽게 저부터 입을 열게 되었는데요,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전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구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권두현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리를 빌어서 여러 좋은 선생님들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사실 언변이 탁월하지 못해서 강의 때마다 여전히 버벅거리기 일쑤인 사람 중 한 명인데요, 김대성 선생님께서 사전에 공통질문을 준비하고 공유해주시는 수고로움을 감당해주셨습니다. 딱히 특별할 것은 없지만 적어온 게 있구요, 그 내용들을 바탕으로 해서 이야기를 전하고 또 다른 분들이 의견 주시면 이에 따라 진행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 좌담회가 열려서 제가 여기에 참석할 수 있어서 굉장히 감회가 새롭고,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부산에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도 지난 해 ‘백수’였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된다’라는 의지에서 이렇게 내려올 수 있었던 거구요. 저는 지난 학기에 강의를 못했습니다. 강사법 시행과 학위 수여가 맞물리면서 미리 강의 준비도 못하고 부랴부랴 열군데 넘게 지원을 했던 것 같아요. 학교들이 대개 3학점씩 두 과목 단위로 강사를 선발하니까, 스무 개 이상의 강의계획을 가지고 여기저기 지원했지만, 다 떨어졌습니다. 2차 전형까지 넘어간 데가 30% 정도 되었던 것 같고, 3차 전형으로 면접까지 본 데가 한 군데 있었습니다. 면접의 경험은 굉장히 당혹스러웠습니다. 박사 졸업자를 뽑는다고 해서 갔는데, 박사 수료생들도 앉아 있었고, ‘이게 과연 무슨 절차인가’ 난감했습니다. 졸업생과 수료생을 위계화하려고 드린 말씀은 결코 아니구요. 어쨌든 모집 공고와 다른 진행 과정을 실감하게 되니 당황스러웠습니다. 강사법이 시행되면서 물론 조금씩의 시차가 있긴 했습니다만, 강사 채용 공고가 일괄적으로 뜨고, 마감 시간에 쫓기면서 강의계획서를 작성할 때, 너무 초조하고 절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종 탈락을 확인했을 때는 참담했습니다. 그 때의 그 심정을 생각하면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불만과 불안을 토로해도 되는 것인지, 복잡한 심정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강의’라고 하는 학교의 제도 안에 들어왔을 때에만 이렇게 강의에 대한 비판의 발언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다분히 역설적인 것 같고, 그래서 마냥 편안하지는 않습니다. 또 제가 이런 불만과 불안을 해소시킬만한 대안과 해법을 갖고 있지 않아 논의를 열기가 어렵기도 하구요. 어쨌든 저뿐만이 아니라, 여기 모인 이제 그런 불안이나 불만들을 짚어 보면서 비로소 대안이나 해법들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봅니다. 그래서 조금은 거친 말들을 쏟아내면서 말과 생각을 다시 한 번 가다듬고, 선생님들의 더 좋은 말씀들을 경청해보고자 합니다. 거친 말들이 그 어떤 정동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연구소 스케줄에 따라 좌담회 일정을 조정하다보니까 ‘스승의 날’ 직전에 이렇게 뵙게 됐는데요, 스승의 날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좀 있어서, 여기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승의 날마다 제가 깨달았던 것은 제가 어디까지나 ‘강사’이지, ‘스승’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대략 십 년 정도 강의를 해왔는데, 묘하게도 한두 해 빼고는 늘 스승의 날에 강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스승의 날이 되면 수강생들이 카네이션을 사들고 강의실에 들어옵니다. 물론 저에게 주려고 가져온 건 아니고, 자신의 ‘교수님들’께 드리려고 챙겨온 것이죠. 모든 강의에서 시작과 끝에 수강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저의 인사에 대한 호응이 제일 우렁찰 때는 강의 오리엔테이션 시간입니다. 민망하게 박수까지 치고 그러는데요, 한 3주차 정도가 되면 저 혼자만 열심히 인사하고, 수강생들은 아무도 인사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모두들 ‘누군가 대답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도 잘 들지 않는, 출석을 불러도 끝내 눈 한 번 마주치지 않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는데, 스승의 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스승의 날쯤 되면 1학기 강의가 어느 정도 꽤 진행된 상황인데도 그렇습니다. 학기가 진행될수록 저와 학생들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지는 셈이죠. 그런 학생들이 제가 선생이고 스승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리 만무합니다. 눈을 마주쳐도 기본적인 인사조차 생략하고 제 앞에서 카네이션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런 모습을 매년 많이 봤습니다. 제가 카네이션을 받고 싶어서, 카네이션을 못 받은 게 서러워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결코 아니고, ‘강사’라고 하는 지위가 수강생들에게는 하나의 기능으로써 받아들여질 뿐이지, 부대낌과 상호작용, 그러니까 정동적인 관계를 맺을 관계라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 이러한 기능적 관계가 스승의 날에 유독 더 뚜렷하게 자각되는 것 같아서 말씀을 드려 본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계의 회복, 기능적 관계에서 정동적 관계로의 전환 가능성이야말로 여기 모여 있는 저희들이, 자리에 앉아 계시진 않지만 다른 많은 선생님들이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지점이 아닌가 싶어 말씀을 드립니다.

 

김대성 선생님께서 첫 번째 공통질문으로 “코로나 시대의 일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 몇 개를 준비해달라고 하셨는데, 저는 사진을 직접 찍어오지는 못했습니다. 무엇을 찍을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너무 뻔하지만 ‘마스크’와 ‘마이크’가 떠올랐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입’과 관련된 것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봤습니다. ‘입’은 통로입니다. 전염병의 통로이고, 다른 한편으로 사유와 감정의 통로입니다. 이 통로를 차단하는 것이 마스크, 이 통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 마이크입니다. 각각 ‘격리’와 ‘연결’을 상징하는 이 둘을 빼놓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사진은 아니고 단어인데요, ‘아무쪼록’이라는 부사입니다. 제가 요즘 ‘아무쪼록’이란 말을 굉장히 많이 쓰고 있는데요, 거의 모든 업무들이 메일과 메신저로 진행되면서 그럴 때마다 상대방에게 ‘아무쪼록’이라는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을, 김대성 선생님의 질문을 받고 비로소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무쪼록’이 입에 붙은 자연스러운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독 메일이나 메신저에서 자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아무쪼록’이라는 부사는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이 있음을 전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간곡하게 부탁하는 자리에 놓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이 ‘문턱’처럼 작용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포스트-코로나’를 상상하고 준비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 같이 어떤 ‘문턱’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쪼록’이 배치된 문장의 문턱이 우리 시대의 문턱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떤 주어나 술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부사가 떠올랐다는 것도 제게는 상징적인 것 같습니다. ‘행위자’나 ‘행위력’은 비가시화되고, 문턱을 넘어가려고 하는 ‘아무쪼록’ 같은 그런 힘들만이 느껴지는 이런 상황이 제게는 인상적입니다.

 

김대성 : 대화의 포문을 열어주시고 공통질문에 대한 답까지 해주셔서 시작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박지원(진주 교육대 강사, 이하 교수자) : 저는 진주교육대학에서 교직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육학과 소속이에요. 교육학과는 규모도 크고 국가와 연계도 많이 되는 소위 주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전공하는 교육철학은 세부전공 중 하나이고 주제 면에서는 마이너한 분야입니다. 학계가 좁고 전공자가 적어서 운 좋게 강의를 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속한 커뮤니티 내에서는 교육학의 성격 상 상대적으로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특히 교육공학에서는 온라인 수업에서 자주 쓰이는 플립러닝, 블렌디드러닝 같은 방법론을 교육학이 도약할 수 있는 발판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기도 하고요. 제가 출강하는 대학의 경우, 규모가 작은 교육대학의 특수성도 있겠지만 현재 같이 일하는 동료강사님들과는 얼굴도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교양대학이 아니라 학과 소속의 강사라서 다른 강사님들과 평소에도 교류할 기회가 없는데, 코로나 사태로 관계의 단절을 확인하게 되었어요. 사실 지금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제 전공 자체가 교육을 연구하는 것이다 보니 이 사태를 경험하면서 교육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고민을 정리하지 못할 만큼 과로를 하고 있고요.

 

 1번 질문에 관해 권두현 선생님과 같은 맥락에서 면역이란 말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다음으로 “건강 조심하세요”란 말도요. 교육이 미래 지향적인 활동이잖아요.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의 교육은 발전지향적이고 성장을 중시하는 반면에 죽음이나 정지를 상상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에 죽음의 가능성이 일상이 되었다고 할까요. 죽음이 눈앞에 도래한 상황이다 보니, 저도 그렇지만 함께 수업하는 학생들도 다 교사가 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라 교육에 대해 더욱 많은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박준훈 : 저는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에 입학해서 처음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대학원도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되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학부 때는 대학원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는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학원과 학부의 갭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직 대학원 수업이 뭔지 제대로 감각을 못 잡고 있습니다.

 

 웹진 좌담 질문지를 주셨는데, 답을 쓰다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에 주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 스스로 코로나 사태 이후 대변환점에 주목하기보다 변화하지 않은 부분들, 변화해야만 한다고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 주목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1번 질문들에 관해서는 혐오에 대한 이야기 정도를 덧붙여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형진 : 저는 동아대학교, 동명대학교, 경남정보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습니다. 강사법이 작년 2학기부터 시행되었는데, 시행된 지 1년이 안 되어 이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저 또한 권두현 선생님처럼 17~18군데에 달하는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운 좋게 대학에 출강을 하는 중인데, 제 전공 영역이 아닌 교과목을 맡게 되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전임교원들은 동일 교과목을 수년 간 수업하다보니 강의에 대한 숙련도가 높아지지만, 강사들은 학교에서 임의로 배정하는 교과목을 맡습니다. 그래서 강사들에게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교과목을 즉흥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학생들은 수업을 들으면서 교강사의 능력을 판단하는 경향이 강한데, 매학기 마다 다른 교과목을 맡아야 하는 강사들은 학생들로부터 저평가되기 일쑤입니다. 심지어 저는 사회적 의미에서의 직업 경력이 전무함에도 이번 학기부터 NCS 직업기초 교과목을 배정 받았습니다. 저는 국문학과 출신인데, 대학에서는 국문학과 출신이라고 하여 발표와 토론,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세부적으로 별개의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제 능력 밖의 과목도 즉흥적으로 쳐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번 학기에 수업하는 과목이 여섯 개 정도인데, 솔직히 너무 힘들더라고요. 영상을 찍어서 힘든 건 아닙니다. 저는 이번 사태로 인해 물리적으로 여유로웠고, 제가 맡고 있는 과목들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 영역이 아닌 교과목들을 수업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큽니다. 강사 입장에서 교수가 부러운 것은 자신의 연구 영역이나 전공 영역을 수업에서 다룰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강사가 그리 수업했다간 낮은 강의평가를 받게 되죠. 어쨌든 코로나 사태 이후 제일 불안했던 부분은 강의평가였습니다. 3월 둘째 주부터 비대면강의가 실시되었는데, 대부분의 강사들은 비대면 강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강사들은 대면강의에 특화된 인력임에도, 대학 당국의 지원 없이 비대면 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비대면 강의의 질이 낮다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 학기의 강의평가가 재임용 심사에 적용되면 강사에게 불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김대성 선생님께서 작성하신 이번 좌담의 공통질문을 읽어보니, ‘접촉’, ‘접속’이라는 단어가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이번 좌담 논의가 ‘접촉’, ‘접속’에 집중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낯설었던 게 제도적으로 ‘강사는 학생과 얼마나 ‘접촉’, ‘접속’을 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강사는 제도적으로 제자를 둘 수 없는 신분입니다. 강의에서 강사와 학생의 관계가 통상적인 사제관계가 아니므로, (질문지를 읽었을 때)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과 접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과연 강사와 학생의 접촉이 존재하는 것이긴 할까? 간혹 학생들로부터 ‘제자가 되고 싶다’는 이메일을 받곤 하는데, 제가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될 텐데’라는 걱정을 했고,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며 그 부름에 대한 답을 고민하곤 했었습니다. 아마 학생들 입장에선 수업하는 교‧강사를 통상 교수라고 인식한 결과일 겁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제 수업을 들은 학생이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교수님”이라고 불러서, 왜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지를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이 강사라고 부르진 않잖아요?

 

김대성 : 저는 학생들로부터 강사라는 호칭을 몇 번 들어봤습니다. 최근 들어 더 많이 듣는 것 같습니다. 수업 중에 ‘강사님, 이거는 왜 그런 건가요?’라고 묻는 학생들이 점점 더 생기고 있습니다. ‘저 학생들은 강사라는 호명 방식을 어디서 익혔을까?’라는 의문이 들지만, 이를 말하진 못했습니다. 강의실에서 역할이 아닌 직급을 부른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형진 : 저는 학생들로부터 강사님이라는 호칭은 못 들어봤지만, 한편으로는 ‘교수님’이란 호칭을 들었을 때 가끔 불편하더라고요.

 

박지원(교수자) : 그러면 뭐라고 불리고 싶으신가요?

 

이형진 : 선생님? 나중에는 학생들이 편하게 부르더라고요. 하여튼 이번 코로나 사태를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아니더라도, 대학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변해가고, 그것에 수반하는 대학 시스템의 전환도 이루어지고 있었고요. 코로나 사태는 대학 시스템 전환을 더 이르게 생각하게 만든 촉매제가 된 것 같습니다.

 

(공통질문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질문지는 저한테 낯설고 대답하기 곤혹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대답하고 싶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공통질문지의) 1번 질문에 대해서 다르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들 그렇겠지만 저도 마이크를 떠올렸고요. 저는 코로나 사태 이후 취향이 변화한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 연구주제 자료 외의 글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태 이후 제 평소 취향과는 달리 ‘글배우’라는 사람의 글을 접하였습니다. 저는 평소에 에세이를 읽지 않았는데 말이죠. 최근 집밖을 거의 안 나가다가 대형 서점에서 󰡔이미 어쩔 수 없는 힘듦이 내게 찾아왔다면󰡕이라는 책을 발견했고, 별다른 내용이 없음에도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저는 사실 대인관계가 넓지 못한데, 최근 들어 귀찮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연락을 자주 주고받던 동료들과 연락이 잘 안 돼서 “어떻게 하면 나를 위로하지?”하는 고민을 하다가, 좋은 글귀를 필기하며 에세이집을 읽고 있습니다.

 

김대성 : 유연해지신 겁니까?

 

이형진 : 대면 강의를 하면 또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기 위한 제 나름의 방편인 것 같습니다. 저도 에세이집을 읽게 될지 전혀 몰랐는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으면 뭐든 다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제가 이번 학기에서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코로나 사태 때문에~”와 “대면 수업에서 하겠습니다”입니다. 기약 없는 약속을 너무 많이 했는데, 비대면 수업이 계속 연장되면서 지금 당장 이행하지 않으면 수업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글쓰기라든지 발표 관련 과목들은 계속 온라인으로 진행하기 어렵고, 과제를 내자니 강의자 입장에선 많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에게 과제를 많이 낼수록 안 좋은 선생이란 평을 받을 게 뻔하거든요. 학교에서 1주, 2주 간격으로 등교 수업을 유예하다보니, 나중엔 이 수업 내용은 대면 수업에서 하겠다는 제 말이 거짓말이 되어버린 거죠. 이에 관해서 학생들의 문의 메일을 정말 많이 받습니다. 요즘 가장 힘든 건, 학생들의 문의 연락입니다. 이것을 일의 연장이라고 여기니까, 학생들의 문의에 답장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인 거예요. 특히 가상대학 시스템이 이상이 있다거나 과제 지각 제출 등등.

 

신민희 : 저도 지금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보조연구원으로 같이 일하고 있고, 경성대학교에서 교양과목 한 강좌를 맡고 있습니다. 이번 좌담회에 참여하면서, 저는 가장 먼저 제가 강사라는 위치에 대한 감각을 얼마만큼, 또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질문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 강의를 시작했고, 아직 강사라는 말도, 교수라는 말도 듣는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저는 지난 학기에 처음으로 경성대학교에 시간강사로 지원했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경성대학교에 다시 지원했습니다. 앞서 선생님들께서 강사법과 함께 여러 대학에 지원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얘기해주셨는데요. 저는 직무유기로 느껴질 정도로 강사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의무처럼 여겨져서 모교였던 경성대학교에만 지원한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미 지방 사립대 출신이 지원 할 수 있는 대학이 한정돼있다고 스스로 상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앞으로 대학이라는, 학교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의 시간강사로 진입해서 언제 짤릴지, 혹은 대학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에너지로 써야만 하는 구조가 너무 소모적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사실 박사과정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말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학이 없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너는 강사로 먹고 살기는 힘들 거다’ 이런 말들이었습니다. 강사가 되고 나서 지금 수업을 하고 있지만, 정말 앞으로 강사로 먹고 살기는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리고 대학의 위기 속에서 지방의 사립대는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강사를 시작했는데, 계약이 주는 안정감이 너무 좋았던 것도 있습니다. 고용되는 것, 직업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안정감에 앞서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계속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게 공부인데, 이 공부로 돈이 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첫 수업이 온라인 강의라서 힘들겠다’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사실 지금의 어려움이 첫 강의로 겪는 문제인 것인지, 온라인 강의로 인해 겪는 어려움인지 구분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온라인 강의라서 힘들다는 감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제 상황입니다.

 

박지원(동아대학교 학생, 이하 학습자): 저는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4학년에 재학하고 있는 박지원입니다. 저는 사실 이번 학기를 휴학할지 말지 고민했습니다. 바로 졸업하는 건 너무 부담스러웠지만, 유예기간을 가진다고 해서 환경이 변화하거나 제가 열심히 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온라인 수업을 맞이하면서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욕이 좀 떨어진 것 같습니다. 수업을 듣는데 수업이 들리지 않는, PPT만 보게 되는, 시험 전에 준비만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험이나 과제 난이도가 절대평가 수준으로 낮춰지면서 생각보다 편하게 공부를 하지 않고도 중간고사를 잘 보냈습니다.

 

사진을 3장 준비하면서 놀러 다니는 마스크 낀 사람들을 찍게 되었습니다. 다들 어디서나 마스크를 낀 모습을 보고 치장한 모습을 보며 코로나의 감상을 느꼈습니다. 카메라를 산 이후 석식 시간인데도 조용한 출신 고등학교를 보며 아무도 없는 장면을 보며 고등학생들 상황을 걱정해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재난 지원금을 받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거기 빼곤 사람들이 없는데도 동사무소 앞만 사람이 몰려 있는 상황이 간극도 느껴지고, 이질적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동네 많이 돌고, 안하던 게임도 하게 되고, 공부 빼고 다른 걸 더 많이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게을러졌나봅니다.

 

김연우 : 저는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3학년에 재학하고 있는 김연우라고 합니다. 저 역시 게을러진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2주 정도의 출석기간도 있어서인지 이게 항상 한 주씩 미뤄지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제가 점점 듣지는 않으면서 마음은 조급해지는 것 같습니다. 막상 듣다가 보면 조금씩 조금씩 끊어서 듣는 경우도 있고, 집중이 잘 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메일을 많이 보내는 편인데, 사실 뭔가 메일을 보낼 때 저는 수업시간이 끝나거나 아니면 끝날 때쯤 혹시 궁금한 것이나 과제 관련해서 물어볼게 있으면 얘기라고 할 때 보통 하는 편입니다. 저는 메일을 보내게 될 때 처음에 이제 뭐 안부 인사 같은 것을 쭉 적게 되고, 정작 제가 물어볼 내용은 한 줄 두 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메일은 반 페이지 정도로 길게 보내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약간 상호소통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좀 불편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로 편한 점보다는 불편함을 좀 많이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천지 (사태) 이후 마스크를 엄청 구매할 때, 마스크에 대한 인상이 많이 남아 마스크 사진을 준비해보았습니다. 이제는 편해져서 마스크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수업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교육 관련해서 질이 낮아진 게 아닐까 합니다. 제가 듣는 수업 같은 경우엔 작은 창도 없이, 글자와 목소리만 있는 수업만 듣다보니 집중이 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불편함을 많이 겪는 것 같습니다.

 

김대성 : (이형진 선생님의 말씀을 이어받아) 저는 인사가 있는 메일을 받아 본 게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자신의 이름도 안 밝히는 경우가 많고, ‘언제까지 보내면 되냐, 늦게 보내도 되냐’ 등 용건만 적은 메일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경우엔 이 학생이 어느 대학에서 어떤 수업을 듣는지 찾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메일을 보내는 형식에 대해 안내를 해주어도, 언짢아하는 것 같더라구요. 이번 학기에도 비슷한 메일이 오지만 아무 말 없이 답만 하고 있습니다. 이 광풍 속에서 가장 쉽게 휩쓸려나가는 게 시간강사일 수 있으니 불편한 말을 최소화한 상태로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이형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접촉의 가능성은 환상이나 고집이나 희망일 수도 있겠죠. 자신에 대한 소개도 없는 메일이 싫어서만은 아니고, 이를 쓰는 방식에 대해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인지 이번 학기는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형진 : 강의 계획서에 전화번호가 뜨는 시스템도 있나요?

 

김대성 : 시스템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전화번호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형진 : 저 같은 경우, 일부 학교에서는 제 의사와 상관없이 연락처가 공개돼 밤 11시에 문자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김대성 : 전화번호가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강의평가로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빨리 궁금증을 해소해야하는데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이형진 : 만약 대면수업이었다면 지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온라인 수업으로 변경된 후, 이런 (시간 제약 없이 상시적으로 연락이 오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지적할 수도 없고, 감정을 소모하기 싫어서 체념한 것 같습니다. 저는 학생에 대한 응답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 경제성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학생들의 문의 메일을 확인하면 기본적인 격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격식을 차리게 되었는데요. 강사법 시행 이후, 강사를 재임용하는 기준이 강의평가이고 하위 n%는 재계약이 안 되는 시스템으로 변한 것 때문이고요. 또한 대면수업 때는 신체언어나 음성언어를 사용해서 의사를 전달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나지만, 현재는 문자기호만 구성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니까 기호 하나의 차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비록 학생들이 기본적인 격식을 안 차리더라도, 저는 (대면수업 때보다) 더 신중하게 더 장문화해서 답장을 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케어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박지원(교수자) : 저 같은 경우는 평소와는 다른 경험을 했어요.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어렵게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번 학기에는 학생들이 수업을 제대로 안 들을 거고, 성취가 낮을 거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학교의 결정에 맞춰서 과제도 냈다가, 강의영상도 몇 주 만들어서 올리고, 줌(ZOOM)으로 화상강의도 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하다 보니 학생에게 메일로 장문의 질문과 편지를 받았습니다. 강의 경력이 길지는 않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보통 강의시간에 구두로 질문을 받더라도 시간이 끝나면 쉽게 포기해버리잖아요. 그런데 메일은 질문을 언어화해야하니까, 여러 번 곱씹어서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질문을 보내는 거예요. 평소에는 잘 하지 못하는 말인데, 수업 잘 듣고 있다 고맙다 이런 인사도 담겨 있고요. 수많은 메일들을 받고 제가 은연중에 학생들을 무시한 건 아닌가 싶어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한편으로 강사가 이중적인 입장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학교의 의사결정에서는 소외되어 있지만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권력자이고 유일한 소통의 창구라는 점에서요. 온라인 강의에서 제가 학생들의 보호자나 대리인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 입장도 학교에 잘 전달되지 않지만, 학생들에게는 그나마 의문을 전달할 수 있는 게 저뿐이잖아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1학년인데 입학도 하기 전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저에게 밖에 이야기할 데가 없었을 겁니다. 이런 걸 왜 나한테 물어보지 싶은 다소 무례하고 공격적인 질문도 있었어요. 한편으로, 수업영상을 찍고 화상강의에 임하면서 수업을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가끔은 ‘센 척’ 하면서 학생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불안해하지 마라’고 말하며 수업에 관한 여러 고민들을 다 해결해주려 하고 있습니다. 강사라는 입장은 학교와의 관계에서는 약자이기도 하지만 수업의 안에서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는 학생들의 무례함을 곧바로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 사태에서 학생들이 무례한 질문을 하는 것을 두고 단순히 학생들의 힘이 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싶어요. 그보다는 대학에서 학생들이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에 대학생들이 등록금 반환을 요구하는 것도, 주체적인 학생운동이 소비자운동으로 격하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대성 :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을 연결해서 이야기하면 좋을 거 같은데요, 온라인 강의로 전환되면서 대면하게 되는 생소함이 있을 거예요. 곤혹스러움이 첫 번째 감정이 아닐까 하는데, 하지만 조금 전에 말씀 하셨던 것처럼 온라인 강좌여서 더 안정적이거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작은 미덕이나 가능성 같은 것도 있을 거 같은, 그런 부분들을 들어보고 싶구요. 동시에 이형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접촉할 수 없다’. ‘접촉이 불가능한 조건’에 대해서는 실제로 접촉이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대학 강의가 무엇인가, 어떤 가능성이나 희망을 가지고, 또 기대를 가지고 이 자리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아주 희망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에게 대면강의가 필요했구나. 만나면 더 잘해야지’라는 생각부터 ‘온라인 강의가 참 좋았구나. 콤팩트하다’라는 생각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지 싶습니다. 수업에 대한 가치나 태도가 달라진 부분이 있을 건데, 이런 질문 두 가지를 묶어서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자유롭게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얼굴은 하나의 단독성이라면, 대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관계 맺음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학생을 코드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제 입장에서 학생들은 이름과 학번으로 코드화되고, 얼굴로 인식할 수 없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이형진 : 사실 곤혹은 다 같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요. 안 좋은 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없어서 힘듭니다. 저는 수업 내용을 설명하고 나서 학생들에게 “그렇죠?” “맞죠?”라는 말을 통해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며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온라인 수업 3주차까지는 평소에 했던 말버릇이 튀어나와 힘들었습니다. 얼굴을 못 보니 반응도 알 수 없고요. 얼굴은 하나의 단독성이라면, 대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관계 맺음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학생을 코드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제 입장에서 학생들은 이름과 학번으로 코드화되고, 얼굴로 인식할 수 없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소통하면서 ‘대면 수업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서글픈 점은 서로에게 이름으로만 남고, 학기 이후에도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으로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학교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못 알아보는 거죠.

 

 그리고 이번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몸짓, 눈짓, 표정을 통한 접촉면은 없는 거잖아요? 음성언어나 신체언어보다는 문자 기호가 더 중시되면서, 이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문자 기호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강의실에서 직접 공지를 하므로 의사소통에 별다른 지장이 없었는데, 기호 문자를 통해 공지를 하다 보니 토씨나 문장 하나에 따라 의미가 잘못 전달되더라고요. 예컨대, ‘최대 2점’과 ‘총 2점’ 같은 구분까지 질문의 대상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현재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문자 기호로) 의사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문자로 소통하다보니 글자 볼드라든지 형광펜 처리 등 섬세한 부분을 신경 쓰게 되었습니다.

 

 좋은 점은 학생들이 ‘수업을 잘 듣고 있다’처럼 수업에 관한 좋은 점을 이야기해줄 때. 학생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의사를 전달하고 싶어도 다음 시간에 대면해야 하니까, (교강사에게) 그런 표현을 쉽게 못했습니다. 지금은 대면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자신의 생각을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말 건넴이었습니다. 저희는 한 학기동안 강의를 해도 수업 듣는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잖아요. 하지만 문자에 의한 교감을 통해 강사 본인이 하는 수업 상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만약 얼굴을 봤다면, ‘힘들구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괴롭겠구나’와 같은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대면할 수 없으니 문자 언어를 통해서라도 각자의 마음을 표현하자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박준훈 : 저는 온라인 소통이라든가 접촉, 이런 것과 관련해서 방금 말씀과 관련된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2018년쯤에 어떤 학부 수업을 들었는데, 강의하시는 선생님께서 오픈 카카오톡 방을 하나 운영하셨습니다. 학생들에게 링크를 주고 익명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거기, 그 익명 카카오톡 방에서 학생들끼리도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시험 기간에는 새벽에 질문과 답변도 주고받고 나중에 교수님께서 체크해서 답의 정오를 확인해주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그 때 학생들도 그렇고 교수님도 그렇고 반응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오픈 카카오톡 방에서 이야기하시는 분들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그 나름의 새로운 접촉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카카오톡의 특징상 이모티콘이나 프로필 사진 같은 게 보이는 것도 형식 차원에서 소통에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한글이나 PDF 같은 포맷을 벗어날 수 있다면, 지금의 온라인 강의도 다른 국면을 맞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소함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셨는데 사실 온라인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많이 잡아야 대부분 20대 후반일 텐데, 그런 나이대라면 아마 생소함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EBS나 토익 같은 온라인 강의를 많이 접했을 거고, 온라인 화면을 보고 있을 때의 거부감도 적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 거부감이 적을수록 더 선생님과의 관계라던가, 가르치는 분과의 관계보다는 강의 자체를 학점 받는 도구, 지식 전달 서비스로 인식할 것 같습니다. 물론 대학이 취업기관이나 학점 따는 기관으로 이해될 것도 같습니다.

 

박지원(교수자) : 좋았던 점은 학생들에게 그 전에는 받지 못했던 진지한 형태의 피드백을 받을 때 감동을 느꼈습니다. 학생들이 절실하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곤혹스러운 점은 많습니다. 일단은 오프라인에서는 즉흥적으로 수업을 하고 나면 끝인데, 온라인 수업은 영상으로 기록이 남는다는 것이 당혹스러웠습니다. 또 다른 저의 자아를 만나는 기분이고, 제가 연예인이나 엔터테이너가 된 느낌입니다. 영상으로 재현된 저를 마주하는 곤혹스러움이 컸습니다.

 

두 번째로는 학생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강의를 만들어 올리면 저는 학생들을 볼 수 없잖아요. 학생들은 수강 퍼센트 같은 기호와 수치로만 남아요. 70%, 100% 이런 기호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당혹스럽습니다. 실시간 화상 강의에서도 역시 학생들이 화면을 켜는 걸 선호하지 않아 화면을 끈 상태로 있습니다. 수업 시간 내내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하면 ‘고생하셨습니다’ 하고 나가요. 그때 그 인사말들, 깜깜한 화면에서 나오는 그 말들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 지 의문이 남습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코로나 때문에 새롭게 나타난 타자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타자가 심연이다’는 말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일 뿐 실제로는 타자가 원래 이런 존재가 아니었는가 합니다.

 

또 하나로는 온라인 수업으로 인한 노동의 유연화를 꼽고 싶습니다. 원래도 강사의 노동은 출퇴근 개념이 불명확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이 정확히 환산이 안 되긴 했습니다. 온라인 수업에서는 이런 점이 더 강해져서 자꾸 저의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말로 할 때는 시간이 다하면 넘어갈 수 있는데, 메일로 일일이 답변하면 그게 힘들어요. ‘내가 하루 종일 이렇게 할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또 다른 의미의 노동 유연성이 저의 일상에 자리 잡아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민희 : 저도 (박지원) 선생님과 비슷한 처지인데요, 저도 ZOOM으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ZOOM의 방식이 모호한 느낌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과 실시간으로 접속해 있는 상황이지만, 학생들은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고, 마이크를 쓰면 잡음이 많아 목소리를 채팅으로 대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수업을 하면서도 온라인인지 오프라인인지 구분 되지 않는 모호한 경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합니다. 그래서 이걸 어느 정도로 감각하고 조율해서 수업을 해야 할 지 감을 잘 못 잡겠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한 편으로, 채팅을 통해 질문을 하니 대답이 우루루 쏟아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었습니다. 처음 수업 할 때 교양 수업은 ‘학생들의 반응이 별로 없다.’ ‘반응을 기대하면 피로감이 커질 것이다’와 같은 말을 들어왔습니다. 화상 강의를 하는데 오히려 대답이 우루루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어쩌면 ZOOM은 비공개로 답변을 보낼 수도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자신의 대답이 어떻게 들릴지 크게 의식하지 않아서, 편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혹은 대학이 이미 학생들이 대답하기 어려운 구조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감을 잡긴 어렵지만, 그동안 들어왔던 염려 ‘학생들은 반응이 더 없을 것이다’에 비하면 많은 대답을 접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중간 강의평가 때 ‘몇 십 명이 글을 우루루 쏟아내니까 나와 어떤 식으로 생각이 다른가 알 수 있었다’ 같은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 때는 한정된 방식으로밖에 못하는 이야기들을 채팅창을 통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게 대면수업 때는 불가능했던 것일까 하는 질문을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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