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몸의 철학’이 유행했다. 니체와 하이데거, 베르그송, 메를로-퐁티, 푸코, 들뢰즈 같은 근대 철학의 전복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권위가 무너진 자리를 메웠다. 나는 그 시기에 ‘몸 철학’의 세례를 받았다. 자연, 신체, 물질을 넘어서려 했던 형이상학(metaphysics)의 선험론에 맞선 자연·신체(physis)의 반론과 도전, 서양철학사에서 지워졌던 몸의 권리 주장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사유의 기반이 어디인가? 감각과 감정의 장소로서 신체는 이성 판단의 장애물인가? 신체 없는 사유가 가능한가? 인간의 사유와 기계의 계산은 차이가 무엇인가? 그런 질문들이 쏟아졌고, 몸은 사유의 장소로 재탄생하는 듯이 보였다. 이 치열한 로고스와 파토스의 싸움이 이분법의 새로운 버전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올해 초,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약속과 예측』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드디어!’라고 외쳤다. 최근 국내외 퀴어/페미니즘 논문을 읽다 보면 정동 연구와 만나지 않는 경우가 드문 터라, 정동 연구의 구체적 성격과 이론적 가능성에 대한 확장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를 접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에도 이미 정동이론에 관한 번역서가 적지 않게 소개돼 있고, 그에 대한 연구도 꽤 축적된 편이다. 다만, 국내에서 전개된 초기 정동 연구에 대한 논의가 ‘정동’의 개념 규정과 번역 문제, 그리고 ‘정동이냐 이데올로기냐’ 등의 논쟁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정동 연구의 다양한 관심사와 스펙트럼이 알려지는 데에는 다소 지체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강렬하게..
책의 위치는 어디일까? 『약속과 예측』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의 흐름을 움켜쥔 시간에, 그리고 부산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지닌 공간에서 탄생했다. 특정한 시공간의 맥락이 이 책에게 부여한 의미는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동과 젠더 정치의 맞물림이 책의 주된 문제설정으로서 출발지라면 파열된 시간에서 등장하는 주변성들을 연결하는 작업이 이 책이 도달하려는 목적이다. 먼저, 현재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이 서평을 시작하려 한다. 지난 1년간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더불어 개인적 분리와 고립감을 장기화시키면서 ‘코로나 블루’의 우울증을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사회 각층의 주변부와 타자들에게 쏟아붓는 정동적 집중을 만들어냈다...
열며: 정동의 책 읽기 다양한 저자들이 함께 쓴 책은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다. 우선 각자의 관심 영역에 따라 폭넓은 소재들이 다뤄지기에, 자유로운 모험을 하는 듯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안겨준다. 외연의 확장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단일한 관심 영역에 집중한다 하더라도 각자의 이해와 탐구 양식의 차이 때문에, 원래 하나로 동일하다고 간주되던 주제를 내적으로 심화하고 세분화한다. 이는 내적 심층화의 효과에 해당한다. 가장 흥미로운 특성은 세 번째 단계에서 발견된다. 이는 서로의 차이가 명백하거나 암묵적으로 드러나면서, 하나의 책이라 할지라도 다수의, 그리고 종종 서로 충돌적이고 모순적인 목소리들을 표출하는 단계다. 이 과정에서 책은 통일된 합일체가 되는 일에 의도적으로 실패한다. 이로써 들뢰즈가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