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개념 정의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불과 몇 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동을 배제하고는 사회 현상을 분석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은 일상에서 ‘느껴질’ 정도의 입체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정동은 이념과 정치적인 면을 건너 자기 자신도 넘어서게 한다. 이 구체적인 예시는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산지니, 2023)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정동의 자장 안에서 변화하는 미디어 및 사회 현상 나아가 정동의 유동적인 특성을 살필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3부 에는 미디어에 나타난 변화된 정동 양상과 아이돌, 예능 등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현상을 설명하면서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시대에 필요한, 시대가 요구한 몸과 시선을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에서 ..
‘팬덤’은 움직인다. 주장하고 개입하며 변화를 요구한다. 미디어-네트워크를 따라 어느 곳에서라도 나타나 연결되고 접속하며 흐름을 만들어 다른 것이 되어 간다. 어떻게 나타나 무엇을 요구하고 행동할 지 예측이 어렵고 모습을 달리해 출현하는 팬덤에 대해 이지행은 (연속콜로키엄 ‘젠더스피어’ 4회)에서 “문화적 유대로 형성된 팬덤 공동체를 인터넷 담론 공중이자 정치적 시민으로 간주하고, 문화정치를 포함해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폭넓은 형태의 팬덤 실천을 ‘팬 행동주의(fan activism)’로 정의”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케이팝 팬덤이 ‘행동주의’, ‘능동적 소비자’, ‘정치적 시민’, ‘시민성을 지닌 대중’이라는 자장을 형성해나가는 양상을 살피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변화 속에서 형성되었기에..
이화진과 소현숙은 장애를 중심으로, 김이진은 해외입양인의 표상을 중심으로 ‘정상적’인 신체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러한 담론들 안에서 어떤 균열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귀, 눈, 피는 모두 신체의 일부일 뿐이지만, 그것은 특정한 담론과 표상 안에서 신체의 전체, 혹은 한 인간의 정체성 전체를 규정하고 대표하게 된다. 이 세 편의 글이 그러한 담론과 표상의 작동에 대응하는 방식은 각각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귀는 어떻게 전체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부분으로 (뜻밖에) 돌아오는가? 전체를 대표하게 된 눈은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역이용하여 저항하는가? 당사자는 자신의 피에 관한 해석을 통해 어떻게 주류적인 표상에 도전하는가? 이 글은 세 글의 문제의식을 분석하고, 논의해 볼..
“그런데, ‘정동’이 무슨 말이야?” 얼마 전 귀한 발표 자리에서 정동에 대해 짧게 언급할 자리가 있었다. 이후 화장실에 들렸을 때 청중 두 분이 손을 씻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앞의 질문을 상대방에게 던졌다. 순간 시간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했지만, 정동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어렵다. 어펙트(affect)에 대한 번역어에서부터 다양한 해석(정동, 감응 등)이 있지 않던가. 그런 와중 가장 반가웠던 한국말은 바로 ‘부대낌’이었다(권명아 2012). 이 표현만큼 어펙트라는 개념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마주침’과 ‘되기’의 가치가 온전히 드러난 것은 없었다. ‘부대낌’이란 표현 속에는 인간이란 다른 존재와의 끊임없는 마주침 속에 살아가는 “연결신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지 않은가(동아대학..
2. 몸에도 번역이 필요하다 의 배우로 선 지 10년이 지나 그 무대를 기록된 영상으로 다시 보았을 때 재기억되고 재구성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당시에 아무리 말해도 내 안에서만 맴도는 말이란 것을 뱉고, 그럼에도 당신이 있기에 비명처럼 내지를 수 있는 말이란 것을 뱉었다. 대본에 쓰인 나의 말은 추후에 납득/변명/투쟁할 말, 나 이전에 독립된 말, 올바르게 틀려야 할 말, 당신/우리/세계의 말이었다. 무엇을 이해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투쟁하듯 대사를 뱉았을까. 극단 새벽의 연습실에서 어떤 몸을 표현하려고 밤새 연습했을까. 아기부터 노인의 몸, 몸의 시간성을 넘어 물고기의 몸을 상상하면서 내 몸에 입혔다. 땅을 딛고 서 있는 발부터 머리까지 몸을 새로이 감각하면서 발, 다리, 엉덩이, 가슴, 머리에 따로 감..
여전히 화면보다 종이 위에 쓰인 글이 읽기 편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날로그 세대다. 그런 나에게 웹소설은 너무 낯선 세계이지만, 댓글과 SNS, 커뮤니티에 남긴 짧은 글을 통해 독자들이 직접 개입하며 이야기의 전개를 바꿔놓고 있다는 쌍방향적인 웹소설의 세계는 무척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독자들의 시시콜콜한 비평이 즉각적으로 작가에게 전해지는 세계에서 웹소설은 단지 작가의 욕망만을 담지 않는다. 독자의 취향과 욕구, 수익을 창출하려는 플랫폼의 치밀한 계산과 인기 있는 서사의 구축을 통해 자기 세계를 펼치고자 하는 작가라는 세 주체가 만나는 장으로서 웹소설의 세계는 서로의 욕망이 만나 충돌하고 타협하는 정동적 공간이다. 이런 서로 다른 주체들의 마주침에 주목하면서 안상원 선생님은 웹소설의 ‘여성적 장르’로..
0. 몸:차림(此, 次) 이 글은 ‘대안’의 몸이 되어야 했던 자기 경험을 분석 대상으로 삼기에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이자 대학의 안팎에서 자생한 대안 연구모임 아프콤(aff-com)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몸:쓰기(bodily:writing)에 대한 비평이다. 이때의 몸은 지금, 여기 있음의 몸이자 몸과 몸이 계속해서 부대끼고 ‘접속’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몸이다. 대학에 입학한 2012년 무용학과가 폐지되고 졸업할 무렵인 2016년 국어국문학과와 문예창작학과가 통폐합되었다. 지역에서 예술과 문학을 한다는 것은 대학에 들어서자마자 ‘살려주세요.’, ‘짓밟힌 꿈’이 적힌 전단지를 받는 일이었다.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꿈의 자리가 위협 받고 안심할 수 없는 마음이 대학 내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스트리밍 산업에서는 스트리머들에게 ‘공정’해보이는 조건을 내걸어 다양한 보상을 제안하곤 합니다. 스트리밍 시간 기준은 물론이고 높은 수준의 영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조회수, 구독자수, 댓글수, 시청자수 같은 수치는 일견 공정해보입니다. 그러나 이를 달성해야 하는 개인이 처한 환경과 위치는 각기 다르며, 그에 따라 같은 수치를 확보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스트리밍도 달라집니다. 공정해보이는 수치 경쟁은 한편에서는 과잉 경쟁을 유도하면서도, 이면에서는 불공정한 평가의 기준과 출발점의 차이를 지워버립니다. 스트리밍 시장에서 역시 “개인의 자발성과 노력에 따른 성취”라는 수식은 능력주의의 수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개인의 성취에 따른 보상은 막대합니다. 예컨대 화질 선택, VOD보관 기..
『アフェクトゥス 아펙투스-생명의 바깥을 만나다』(西井 涼子 니시이 료코 외, >(교토대학학술출판협회, 2020)는 일본에서의 정동 연구 지형을 살필 수 있는 책이다. 책의 필진은 9명의 인류학자와 미술, 영장류학, 인지심리학, 철학, 생명이론 등 5명의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젠더・어펙트 세미나'의 한 축은 비서구 정동 연구 동향을 점검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이번 세미나에선 『アフェクトゥス』의 11장 과 종장 를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다. 들뢰즈와 스피노자 읽기로부터 출발한 정동연구는 여러 논자들을 통해, 각기 다른 분과에서 제안되었다. 다윈의 감정표현에 관한 연구에서부터 실번 톰킨스와 마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자들이 감정과 정동에 대해 고심해왔다. 톰킨스가 심리학..
1. 게임의 혐오와 게임에 대한 혐오의 뒤얽힘 1편이 혐오스러운 세상에서 사랑을 찾는 과정이었다면, 2편은 반대로 사랑을 잃음으로써 혐오를 탐색하는 과정 시리즈에 대해 김성윤은 이 시리즈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소 거친 대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1편’과 ‘2편’의 연속과 단절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진술입니다. 인터랙티브 무비(interactive movie)로도 볼 수 있는 어드벤처 액션 게임 는 그 자체로도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지만, 게임 그 자체에 대한 평가도 드라마틱했습니다. 2013년에 발표된 ‘1편’의 호평과 흥행에 이어, 2020년에 발표된 ‘2편’에는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 GOTY)’으로 상징되는 극찬과 동시에 ‘혐오’의 정동이 들러붙었습니다..
조 사장의 실종 소식은 사흘 후였다. 강대표와 사이가 소원해졌으니 오지 않는 것뿐이라 짐작했는데, 성애는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식당 주차장에 미끄러져 들어오는 경찰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따금 파출소 사람들이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르곤 했으니 밥 손님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함께 온 둘은 테이블에 앉고 장경사가 강대표를 찾았다. 그는 마을 주민들의 가정사까지 모두 꿰고 있는 토박이였다. 이틀째 조 사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낚시 가게에서 오후에만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는 용태가 연락이 닿질 않는다고 했다. 조 사장 동생 번호를 물었지만, 강대표는 퉁명스러운 입매로 고개만 비틀었다. “조 사장 동생 번호? 아마 가도 번호를 새로 바깠을 낀데… 그 병원 사건 땜시 그란다지 ..
‘되기’의 실행: 괴물의 역량과 여성의 글쓰기에 관하여 -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I. 메리 셸리(Mary Shelley)는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서문에서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는가에 대해 쓴다. 21세가 되던 1816년 여름, 셸리는 친구들과 제네바로 여행을 떠난다. 여름답지 않게 춥고 비가 많이 오던 그 시절, 그는 저녁마다 모닥불을 지피고 친구들과 독일 유령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셸리와 친구들은 “괴담을 나누다 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해 이야기를 한 편씩 쓰기로 한다. 날씨가 개자 친구들은 멋진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이야기 짓기를 그만두었지만 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