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를 쓴 김초엽은 작가 소개에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거의 항상 실패하는 것 같습니다.” 나 역시, 「로라」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실패한 느낌이 든다. 이 실패란 문제적인가? 「로라」는 문장 비유의 사이트 해시태그(#)가 알려주듯, #환상지와 #디스포리아를 다룬 SF소설이다. 한국표준질병사인 분류는 환상지증후군(Phantom limb syndrome with pain)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질환은 사고나 수술 등으로 절단해 상실한 신체부위가 여전히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통증까지 동반된다. 실제로 신체를 상실한 환자의 약 78~85%가 환상통을 겪고, 대부분 48시간이 지나면 해소되지만, 1년 이상 환상통을 경험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1990년대, ‘몸의 철학’이 유행했다. 니체와 하이데거, 베르그송, 메를로-퐁티, 푸코, 들뢰즈 같은 근대 철학의 전복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권위가 무너진 자리를 메웠다. 나는 그 시기에 ‘몸 철학’의 세례를 받았다. 자연, 신체, 물질을 넘어서려 했던 형이상학(metaphysics)의 선험론에 맞선 자연·신체(physis)의 반론과 도전, 서양철학사에서 지워졌던 몸의 권리 주장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사유의 기반이 어디인가? 감각과 감정의 장소로서 신체는 이성 판단의 장애물인가? 신체 없는 사유가 가능한가? 인간의 사유와 기계의 계산은 차이가 무엇인가? 그런 질문들이 쏟아졌고, 몸은 사유의 장소로 재탄생하는 듯이 보였다. 이 치열한 로고스와 파토스의 싸움이 이분법의 새로운 버전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올해 초,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약속과 예측』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드디어!’라고 외쳤다. 최근 국내외 퀴어/페미니즘 논문을 읽다 보면 정동 연구와 만나지 않는 경우가 드문 터라, 정동 연구의 구체적 성격과 이론적 가능성에 대한 확장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를 접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에도 이미 정동이론에 관한 번역서가 적지 않게 소개돼 있고, 그에 대한 연구도 꽤 축적된 편이다. 다만, 국내에서 전개된 초기 정동 연구에 대한 논의가 ‘정동’의 개념 규정과 번역 문제, 그리고 ‘정동이냐 이데올로기냐’ 등의 논쟁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정동 연구의 다양한 관심사와 스펙트럼이 알려지는 데에는 다소 지체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강렬하게..
책의 위치는 어디일까? 『약속과 예측』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의 흐름을 움켜쥔 시간에, 그리고 부산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지닌 공간에서 탄생했다. 특정한 시공간의 맥락이 이 책에게 부여한 의미는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동과 젠더 정치의 맞물림이 책의 주된 문제설정으로서 출발지라면 파열된 시간에서 등장하는 주변성들을 연결하는 작업이 이 책이 도달하려는 목적이다. 먼저, 현재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이 서평을 시작하려 한다. 지난 1년간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더불어 개인적 분리와 고립감을 장기화시키면서 ‘코로나 블루’의 우울증을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사회 각층의 주변부와 타자들에게 쏟아붓는 정동적 집중을 만들어냈다...
열며: 정동의 책 읽기 다양한 저자들이 함께 쓴 책은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다. 우선 각자의 관심 영역에 따라 폭넓은 소재들이 다뤄지기에, 자유로운 모험을 하는 듯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안겨준다. 외연의 확장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단일한 관심 영역에 집중한다 하더라도 각자의 이해와 탐구 양식의 차이 때문에, 원래 하나로 동일하다고 간주되던 주제를 내적으로 심화하고 세분화한다. 이는 내적 심층화의 효과에 해당한다. 가장 흥미로운 특성은 세 번째 단계에서 발견된다. 이는 서로의 차이가 명백하거나 암묵적으로 드러나면서, 하나의 책이라 할지라도 다수의, 그리고 종종 서로 충돌적이고 모순적인 목소리들을 표출하는 단계다. 이 과정에서 책은 통일된 합일체가 되는 일에 의도적으로 실패한다. 이로써 들뢰즈가 ‘문..
뱀파이어 서사는 드라마, 영화, 소설로 만들어지는 가장 인기 있는 소재이다. 앤 라이스(Anne Rice)가 1976년에 쓴 소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가 1994년 톰 크루즈(Tom Cruise)와 브래드 피트(Brad Pitt) 주연의 동명의 영화로 세계적 인기를 끈 바가 있고, 원작을 영화화한 로맨스 판타지물 시리즈 (Twilight, 2008), (New Moon, 2009)은 크리스틴 스튜어트(Kristen Stewart)와 로버트 패틴슨(Robert Pattinson)을 세계적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시대를 풍미한 뱀파이어물이다. 뱀파이어들은 낮에는 잠들고 밤에는 깨어나는 존재, 일상에서 빗겨난 존재이다. 그들은 당연히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지 않..
웹진 의 [리뷰]는 ‘젠더·어펙트’의 관점에서 본 현상 및 텍스트들에 대해 검토하고, 그 내용은 물론, 필자가 제안하는 사유의 방식 자체를 널리 공유하고자 기획된 코너로서, 총4회에 걸쳐, 라는 제목으로 김은주 선생님의 리뷰를 연재합니다. 김은주 선생님의 리뷰는 ‘되기’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SF 작품들을 함께 읽어나갑니다. ‘되기’란, 차이를 존재론적 역량으로 제안하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행동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체현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집합적 여성 주체의 가능성을 탐구한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논의를 통과한 개념입니다. SF를 통해 ‘되기’를 다시 보는 작업은 관계적 존재론을 다시 쓰는 실천이자 공생의 연결망으로서의 ‘실뜨기(String Figure)’..
어디,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은 있었는가? 세대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은 장소 불문, 성애화된 대상으로 박제된다.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으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수납을 하는 동안 남자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여성 노동자의 손바닥을 긁거나, 한참을 쳐다보며 바지를 내리기도 했단다. 도시 가스 점검원들 역시 일을 하면서 고충은 남성들의 성적 시선이라고 했다. 혼자 있는 집에 팬티 바람으로 문을 열어주거나, 밤에 오라고 하면서 남자 혼자 있는 집인데 괜찮냐고 희롱하는 일은 다반사이다. 여성의 안전은 어디에서든 위협받고, 몸의 경계는 침범받는다. 성희롱, 폭언, 폭력 등의 일상적인 위험은 직장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하는 일이고 애교를 섞어 부드러운 방식으로 무안하지 않게 대처..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삶에서 나오는 지식이라고 확언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때로 현학적인 용어들과 외부에서 얹어오는 표피적인 해석들 속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그 자명함을 잊어버리곤 한다. 열네 살에 성매매에 유입되어 7년의 기간 동안 성구매자들에게 착취를 당했던 레이챌 모랜(Rachel Moran)의 회고록 『페이드 포』를 읽기 전까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성매매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비판하기 위한 나의 언어 체계가 실은 얼마나 그릇된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이것은 강제가 있었느냐 아니냐로 구분지어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성노동자들의 생계와 안위를 위해 성매매의 합법화를 주장한다는 건 그야말로 기만이다. 모랜이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길어 올린 생각과 지식은..
매일 매일 참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지나가고 또 머문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익숙한 위험이 되었고, 그것이 바꾸어놓은 노동과 교육과 사회적 관계들은 새로운 정상이 되어가고 있다. 폭우와 폭염을 오가는, 더 이상 ‘날씨’라 부르기도 뭣한,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이 아닌 인간이 쌓아올린 재해의 산물이 세상 곳곳의 약한 자들을 치고 지나간다. 촛불광장과 ‘적폐청산’의 외침 속에 탄생한 정권은 결국 자녀교육과 부동산이라는 오래된 계층재생산 함수 앞에서, 그리고 젠더평등이라는 새로운 질문 앞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어쩌면 위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누군가의 위기가 누군가에게는 구경거리가 되는 시대에, 그리도 또 많은 이들이 각자의 분석과 진단과 비판으로 미디어와 지면을 채우는 시대에, 페미니..
여성 의제를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진취적인 경험이 없는 여성은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모든 여성은 독립적인 주체라는 점이다. 난민과 여성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싶을 수도 있다. 나도 그랬었다. 하지만 여성 의제는 다른 맥락 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난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난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우성 배우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정우성 배우님께서 난민혐오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주셔서 이 정도라도 남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난민에 대해서 무지했지만 그나마 아는 것이라고는 마치 주입식 교육처럼 ‘난민에 대한 혐오를 하면 안 된다’는 ..
성의 영속성과, 노예와 주인의 영속성은 같은 믿음에 기인한다. 주인이 없으면 노예가 없는 것처럼, 남성이 없으면 여성도 없다. (모니크 위티그, 「성의 범주」,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허윤 옮김, 행성비, 2020, 44쪽.) 남성과 여성이 없는 세계 ‘스트레이트(straight)’란 무엇일까?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마지막까지 스트레이트를 어떻게 옮길까를 고민했다. 이성애/정상성/똑바른 등의 의미를 포괄하는 스트레이트는 한국어로 옮겼을 때 의미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이트 마인드’를 ‘이성애 마음’이라고, ‘정상적 사유’라고 번역했을 때, 이성애중심성을 ‘정상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연결시키는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 책의 제목은 원어를 소리나는 대로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