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서사는 드라마, 영화, 소설로 만들어지는 가장 인기 있는 소재이다. 앤 라이스(Anne Rice)가 1976년에 쓴 소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가 1994년 톰 크루즈(Tom Cruise)와 브래드 피트(Brad Pitt) 주연의 동명의 영화로 세계적 인기를 끈 바가 있고, 원작을 영화화한 로맨스 판타지물 시리즈 (Twilight, 2008), (New Moon, 2009)은 크리스틴 스튜어트(Kristen Stewart)와 로버트 패틴슨(Robert Pattinson)을 세계적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시대를 풍미한 뱀파이어물이다. 뱀파이어들은 낮에는 잠들고 밤에는 깨어나는 존재, 일상에서 빗겨난 존재이다. 그들은 당연히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지 않..
웹진 의 [리뷰]는 ‘젠더·어펙트’의 관점에서 본 현상 및 텍스트들에 대해 검토하고, 그 내용은 물론, 필자가 제안하는 사유의 방식 자체를 널리 공유하고자 기획된 코너로서, 총4회에 걸쳐, 라는 제목으로 김은주 선생님의 리뷰를 연재합니다. 김은주 선생님의 리뷰는 ‘되기’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SF 작품들을 함께 읽어나갑니다. ‘되기’란, 차이를 존재론적 역량으로 제안하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행동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체현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집합적 여성 주체의 가능성을 탐구한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논의를 통과한 개념입니다. SF를 통해 ‘되기’를 다시 보는 작업은 관계적 존재론을 다시 쓰는 실천이자 공생의 연결망으로서의 ‘실뜨기(String Figure)’..
어디,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은 있었는가? 세대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은 장소 불문, 성애화된 대상으로 박제된다.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으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수납을 하는 동안 남자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여성 노동자의 손바닥을 긁거나, 한참을 쳐다보며 바지를 내리기도 했단다. 도시 가스 점검원들 역시 일을 하면서 고충은 남성들의 성적 시선이라고 했다. 혼자 있는 집에 팬티 바람으로 문을 열어주거나, 밤에 오라고 하면서 남자 혼자 있는 집인데 괜찮냐고 희롱하는 일은 다반사이다. 여성의 안전은 어디에서든 위협받고, 몸의 경계는 침범받는다. 성희롱, 폭언, 폭력 등의 일상적인 위험은 직장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하는 일이고 애교를 섞어 부드러운 방식으로 무안하지 않게 대처..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삶에서 나오는 지식이라고 확언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때로 현학적인 용어들과 외부에서 얹어오는 표피적인 해석들 속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그 자명함을 잊어버리곤 한다. 열네 살에 성매매에 유입되어 7년의 기간 동안 성구매자들에게 착취를 당했던 레이챌 모랜(Rachel Moran)의 회고록 『페이드 포』를 읽기 전까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성매매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비판하기 위한 나의 언어 체계가 실은 얼마나 그릇된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이것은 강제가 있었느냐 아니냐로 구분지어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성노동자들의 생계와 안위를 위해 성매매의 합법화를 주장한다는 건 그야말로 기만이다. 모랜이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길어 올린 생각과 지식은..
매일 매일 참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지나가고 또 머문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익숙한 위험이 되었고, 그것이 바꾸어놓은 노동과 교육과 사회적 관계들은 새로운 정상이 되어가고 있다. 폭우와 폭염을 오가는, 더 이상 ‘날씨’라 부르기도 뭣한,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이 아닌 인간이 쌓아올린 재해의 산물이 세상 곳곳의 약한 자들을 치고 지나간다. 촛불광장과 ‘적폐청산’의 외침 속에 탄생한 정권은 결국 자녀교육과 부동산이라는 오래된 계층재생산 함수 앞에서, 그리고 젠더평등이라는 새로운 질문 앞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어쩌면 위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누군가의 위기가 누군가에게는 구경거리가 되는 시대에, 그리도 또 많은 이들이 각자의 분석과 진단과 비판으로 미디어와 지면을 채우는 시대에, 페미니..
여성 의제를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진취적인 경험이 없는 여성은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모든 여성은 독립적인 주체라는 점이다. 난민과 여성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싶을 수도 있다. 나도 그랬었다. 하지만 여성 의제는 다른 맥락 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난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난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우성 배우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정우성 배우님께서 난민혐오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주셔서 이 정도라도 남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난민에 대해서 무지했지만 그나마 아는 것이라고는 마치 주입식 교육처럼 ‘난민에 대한 혐오를 하면 안 된다’는 ..
성의 영속성과, 노예와 주인의 영속성은 같은 믿음에 기인한다. 주인이 없으면 노예가 없는 것처럼, 남성이 없으면 여성도 없다. (모니크 위티그, 「성의 범주」,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허윤 옮김, 행성비, 2020, 44쪽.) 남성과 여성이 없는 세계 ‘스트레이트(straight)’란 무엇일까?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마지막까지 스트레이트를 어떻게 옮길까를 고민했다. 이성애/정상성/똑바른 등의 의미를 포괄하는 스트레이트는 한국어로 옮겼을 때 의미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이트 마인드’를 ‘이성애 마음’이라고, ‘정상적 사유’라고 번역했을 때, 이성애중심성을 ‘정상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연결시키는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 책의 제목은 원어를 소리나는 대로 표..
정체를 부수는 정체 사람들은 무언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과 마주할 때, 그것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구분하여 이해하려 한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대상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일까, 혹은 구분하고 재단하면 대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하였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오래된 정의는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을 구분해왔다. 선:악, 빛:어둠, 남성:여성, 정상:비정상과 같은 대립 항으로. 한편,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을 구분해온 관습은, 나아가 구분하는 것 자체를 인간의 본질로 만들어버렸다. 사회는 각 대립 항의 부분과 요소들로 구성되는 것이 본질이라 여기게 되었고, 각 부분과 요소들에는 본질적 역할이 있으며, 그 역할의 수행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여겼다. ..
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글 쓰는 사람’이라는 말 대신 ‘기록노동자’라는 명칭을 쓴다. 싸우거나, 버티거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을 ‘노동’이라 본다. 동시에 ‘연대’라 생각한다. 그러니 나의 물음은 이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연대란 무엇인가? 그래서 이대희 씨의 서평에서 발견한 이 문장이 반가웠다. “‘연대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언어로 설명하지 못했다.” 나 또한 그러하니. 연대에 대해 자주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정확히는 연대라는 행위를 끌어내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모르면서도 나에게 그 힘이 부족하다고 한탄하기도 애를 쓰기도 한다. 『여기, 우리, 함께』는 오랫동안 싸우는 이들과 그 옆에서 함께한 사람들의 기록..
나의 오늘은 평온했다. 늦잠을 잤고, 밥을 챙겨 먹었으며, 더울 땐 에어컨을 켰다. 늦은 오후에 자전거를 타고 카페에 나와 맛있는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었고, 지금은 이렇게 리뷰를 쓴다. 나의 오늘은 아직도 평온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덥고 습한 날씨를 견디며 쉽게 풀리지 않을 문제를 두고 싸우는, 평온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는 노조를 만들었단 이유로,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겠다는 사측에 동의하지 않았단 이유로, 정리해고에 맞섰다는 이유로 쫓겨났던 일터를 되찾기 위해 오늘 이 시간에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의 일상은 이리도 평온한데, 저 사람들의 일상은 왜 평온하지 않을까. 왜 그토록 고생하며 싸우고 있는 것일까. 앞이 보이지 않는, 너무 오래 싸워 와서 이제는 뒤를 돌아봐도 ..
진화하고 갱신하는 페미니즘 “나는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표지를 보고 제목의 빈칸에 어느 순간을 채울지 고민해볼 것이다.”(지홍님) 많은 분들이 빈칸을 채워보았다고 했다. 각자의 페미니스트 각성의 순간부터, 견뎌낼 수 있는 임계치가 넘쳐버려 모든 것을 때려치운 순간까지, 그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좋아한다. 이 책의 독자들이 자신이 각성하고 움직인 순간, 말하고 행동한 것을 기록한 걸 읽을 때만큼 즐거운 순간은 없다. 박혜리님은 자신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적어주었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며 그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다가,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니라고 항변하다가, 남성이 규정하는/규정할 수 있는 여성은 없다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설명은 탁월했다. 이것이 ..
‘여성 상위 시대’라는 말은 1970년대의 한국에도 존재했다. 마치 최근 들어서야 페미니즘이 관심을 얻고 이에 대한 반발도 여느 때보다 심해진 것처럼 보도되곤 한다. 하지만 여성 상위 시대가 닳고 닳은 표현이라는 사실은, 신 페미니스트 집단이 등장하고 반대파가 역차별을 운운하는 현상 또한 숱하게 반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김현영의 말대로 페미니즘은 유사 이래 몇 번이나 ‘대부흥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 긴 역사의 단면 위에서 한 페미니스트가 겪은 치열한 순간들이 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2003년부터 수집된 권김현영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특정한 개인의 궤적일 뿐 아니라 15년 넘는 시간 동안의 사회상이 담긴 소중한 자료다. 당시 발생한 사건부터 책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