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부수는 정체 사람들은 무언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과 마주할 때, 그것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구분하여 이해하려 한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대상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일까, 혹은 구분하고 재단하면 대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하였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오래된 정의는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을 구분해왔다. 선:악, 빛:어둠, 남성:여성, 정상:비정상과 같은 대립 항으로. 한편,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을 구분해온 관습은, 나아가 구분하는 것 자체를 인간의 본질로 만들어버렸다. 사회는 각 대립 항의 부분과 요소들로 구성되는 것이 본질이라 여기게 되었고, 각 부분과 요소들에는 본질적 역할이 있으며, 그 역할의 수행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여겼다. ..
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글 쓰는 사람’이라는 말 대신 ‘기록노동자’라는 명칭을 쓴다. 싸우거나, 버티거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을 ‘노동’이라 본다. 동시에 ‘연대’라 생각한다. 그러니 나의 물음은 이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연대란 무엇인가? 그래서 이대희 씨의 서평에서 발견한 이 문장이 반가웠다. “‘연대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언어로 설명하지 못했다.” 나 또한 그러하니. 연대에 대해 자주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정확히는 연대라는 행위를 끌어내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모르면서도 나에게 그 힘이 부족하다고 한탄하기도 애를 쓰기도 한다. 『여기, 우리, 함께』는 오랫동안 싸우는 이들과 그 옆에서 함께한 사람들의 기록..
나의 오늘은 평온했다. 늦잠을 잤고, 밥을 챙겨 먹었으며, 더울 땐 에어컨을 켰다. 늦은 오후에 자전거를 타고 카페에 나와 맛있는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었고, 지금은 이렇게 리뷰를 쓴다. 나의 오늘은 아직도 평온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덥고 습한 날씨를 견디며 쉽게 풀리지 않을 문제를 두고 싸우는, 평온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는 노조를 만들었단 이유로,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겠다는 사측에 동의하지 않았단 이유로, 정리해고에 맞섰다는 이유로 쫓겨났던 일터를 되찾기 위해 오늘 이 시간에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의 일상은 이리도 평온한데, 저 사람들의 일상은 왜 평온하지 않을까. 왜 그토록 고생하며 싸우고 있는 것일까. 앞이 보이지 않는, 너무 오래 싸워 와서 이제는 뒤를 돌아봐도 ..
진화하고 갱신하는 페미니즘 “나는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표지를 보고 제목의 빈칸에 어느 순간을 채울지 고민해볼 것이다.”(지홍님) 많은 분들이 빈칸을 채워보았다고 했다. 각자의 페미니스트 각성의 순간부터, 견뎌낼 수 있는 임계치가 넘쳐버려 모든 것을 때려치운 순간까지, 그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좋아한다. 이 책의 독자들이 자신이 각성하고 움직인 순간, 말하고 행동한 것을 기록한 걸 읽을 때만큼 즐거운 순간은 없다. 박혜리님은 자신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적어주었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며 그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다가,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니라고 항변하다가, 남성이 규정하는/규정할 수 있는 여성은 없다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설명은 탁월했다. 이것이 ..
‘여성 상위 시대’라는 말은 1970년대의 한국에도 존재했다. 마치 최근 들어서야 페미니즘이 관심을 얻고 이에 대한 반발도 여느 때보다 심해진 것처럼 보도되곤 한다. 하지만 여성 상위 시대가 닳고 닳은 표현이라는 사실은, 신 페미니스트 집단이 등장하고 반대파가 역차별을 운운하는 현상 또한 숱하게 반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김현영의 말대로 페미니즘은 유사 이래 몇 번이나 ‘대부흥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 긴 역사의 단면 위에서 한 페미니스트가 겪은 치열한 순간들이 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2003년부터 수집된 권김현영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특정한 개인의 궤적일 뿐 아니라 15년 넘는 시간 동안의 사회상이 담긴 소중한 자료다. 당시 발생한 사건부터 책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에 대..
2014년 ‘타임’은 미국사회에 “트랜스젠더 티핑 포인트가 도래했다”고 팡파레를 울렸다. 2013년 미국 대법원이 이성애 결혼만을 인정하는 ‘결혼보호법’에 위헌 판결을 내리고 동성결혼 합법화의 길이 열리자 “이제 트랜스젠더 이슈가 시민권 논의의 최첨단”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어서 2015년 7월 케이틀린 제너가 ‘배니티페어’ 표지를 장식했고, 버락 오바마 재선 캠프에선 트랜스젠더 인권을 캠페인의 주요 의제로 삼았다. 그래서 상황이 정말 나아졌을까. 2014년 미국에서는 성적지향이나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대한 혐오범죄가 1017건 보고되었고, 2015년에는 어느 해보다 더 많은 트랜스 여성이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었다. 수전 팔루디가 『다크룸』에서 미디어가 트랜스젠더를 다루는 방식을 비판하면서 “이런 팡파레가..
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는 단 하나,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딸이 어떻게 아버지를 인터뷰하고 끝까지 글을 썼을까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수전 팔루디’가 잘 알려진 페미니스트이자 집요함과 치밀함으로 찬사를 받았던 의 저자이며 인터뷰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트랜스젠더’라는 부분이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을 테지만,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주요한 이유는 아니었다. 이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즈음, 나는 정치적 갈등으로 아버지와 1년 반 정도 대화를 중단한 상태였고, 그 상태를 바꿔보기 위해 아버지에게 드리는 글을 묶어 책자로 출간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과 비교해 두께도 형편없이 얇고, 끈질긴 인터뷰(사실 아버지와 대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도 없었으며, 그저 아버지에게 드리는 ..
절실함 . 우선 이 책의 제목에 대해 ‘해명’하고 싶다. 오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강하고 튀는 이미지는 기본. 낚시성 제목 아니냐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나는 지난 15년간 한 출판사하고만 작업해왔다. 편집자 선생님이 엄격하셔서, 제목을 정하는데 대단히 신중하시다. 나로서는 책 출간 자체에 대한 자책감이 있는데다(“종이 낭비, 나무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까”), ‘책이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허위의식이 있어서, 노골적인 제목은 민망하다. 대부분 내 책의 제목은 내가 쓴 문장에서 그대로 가져온다. 책 내용 중에서 고른다. 이 제목은 앞뒤 문장을 빼고 제목 부분만 가져와서 그렇지, 뜻은 글자 그대로이다. 나는 정말, 단지, 오로지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
잘 사는 것은 어렵다. 잘사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세상을 괜찮은 방법으로 잘 살아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괜찮은 방법으로 살겠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내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곳곳에 숨은 수많은 나쁜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고, 싫든 좋든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왕 살 것이면 괜찮은 방법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왔다. 세상의 모든 것을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게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일단 나 자신부터 단단하고 바른 생각을 해야 한다. 정희진 선생님의 는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는 데에 도움을 많이 준 것 같다. 모든 물질은 역치가 다르다...
좋은 글과 좋은 사람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쓴 글’과 ‘글쓴이의 인간성’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배우들이 종종 하는 언급, “좋은 배우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 역시, 비슷한 논쟁거리다. 김혜수 배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적절한 ‘답’이 아닌가 싶다. “배우(俳優)라는 단어를 보세요. ‘배’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잖아요.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어야 하는 존재가 배우에요. 그래서 배우가 어려운 직업인 것 같아요” 내가 이해한 그녀의 말의 의미는 ‘한 인간의 본질이란 없고, 배우는 여러 사람으로 변신해야 한다’이다. 글쓴이도 마찬가지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배우가 했던 이전에 역할과 다음 작품의 ..
누구보다도 ‘나’를 알고 싶은 사람으로서 허겁지겁 책을 폈다. 64권의 책과 그 저자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읽었다’도 아니고 ‘썼다’도 아니다. ‘쓴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 ‘사람은 죽는다’처럼 늘, 언제나 그럴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계속 써야 하나요. 알게 되나요. 언젠가는…? 저자의 탐색과 시도가 나에게도 여러 방향을 보여 준다. 책은 사람마다, 같은 사람도 상황과 시기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읽기는 능동적인 쌍방 활동이다. 읽으면서 저마다 다르게 쓰는 것이다. 때로 힘들고 답답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알고 싶은가? 사실 얼마 되지 않는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에는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알기는커녕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에는 정신 차리지 않으면 더 ..